청나라 현 황제, 그리고 최후의 황제가 될 애신각라 홍력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야밤에 태자하를 따라 도망치는 건륭제의 수레를 따라잡은 조선왕의 기세는 마치 팽성에서 유방을 추격하던 항우와 같았다. 같이 수레에 탔던 화신(아들인 도광제는 산해관에 놔두고 왔다)을 내던지며 속도를 올려보려던 건륭제였으나, 출신이 오랑캐였던지라 사로잡히고 말았다.

눈에 혈기를 줄줄 흘리며 편곤을 부여잡은 조선왕과 그 옆에서 교룡기를 치켜든 맹분과도 같은 거한, 낄낄거리며 웃는 조선군들은 당장이라도 그를 끌고 가 참수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건륭제가 인류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절명시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건륭제가 아는 가장 배덕적인 인간이었다.

'김운행!'

------------------

이리저리 쥐어뜯겨져 도저히 황제라고 보이지조차 않는 건륭제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한심한 놈 같으니. 어떻게 도망이나 친단 말인가. 나오랄 때 나와서 허리 아홉번만 굽혀줬으면 어련히 알아서 선처해줬을까. 조선 사람들이 또 인정이 많아 애걸복걸하는 사람한테는 모질게 못 대한다.

그 뒤로는 여진족의 항복을 받고 종전 조건을 처결하는 일이 남을 뿐. 군주가 그런 세세한 절목을 다룰 순 없고 양국의 조정 대신들이 논의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내가 영의정을 받고 조정 대표로 나서서(그래서 문신을 안데려왔다) 협상을 마치면 종전과 동시에 퀘스트가 완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건륭제가 잡혀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고래로 거짓항복하고 도망치다 잡힌 놈은 무조건 참형이다. 고대군법의 애호가인 우리 왕은 즉각 건륭제의 목을 날릴 태세였다.

여기서는 (내가 영의정이 될 때까지) 전쟁을 좀 더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고래로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였으니, 인의가 없는 군주는 한같 필부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차가운 만주벌판을 뚫고 김운행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하께 여쭈겠습니다. 여기 이 자는 천하만민의 어버이를 칭하면서도 무수한 신민을 괴롭히고 약탈하였습니다. 인민의 굶주림을 아랑곳않고 사방을 약탈한 보화를 전장까지 끌고 와 제 초막을 메울 정도로 쌓아두었으니, 이 자가 측은지심이 있다 할 수 있습니까?"

의아해하던 이훤은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하였다.

"어찌 그러한 자가 측은지심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자는 인(仁)하지 않은 자입니다. 또한 이 자는 충심으로 저를 지키는 신하들을 성에서 죽도록 내버리고, 저를 호종하는 신하들마저 수레에서 내던지며 도망쳤습니다. 한낱 짐승도 제 식솔은 챙기는 바인데, 임금이라는 자가 충신조차 내버리니 이 자가 수오지심이 있다 할 수 있습니까?"

이훤은 슬슬 김운행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건륭제의 목을 날리고 끝내는 것보다 훨씬 취향에 맞았다. 이훤 본인도 모르는 취향을 저격하다니, 실로 천하의 명궁, 지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수오지심도 없는 자로다."

김운행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의(義)도 없으니, 맹자가 말했던 바 한낱 필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수한 인민을 도살하고 천하를 짚검불처럼 불사르며 막대한 재물을 끌어모으고 부월을 하사하는 것 모두 천자가 한 일인데, 어찌 왕께서는 무관한 필부에게 죄를 물으십니까?"

옆에서 미친듯이 붓을 휘갈기는 홍대용(사관을 자처했다)을 지나친 이훤은 꿇어앉은 건륭제를 내려보았다.

"춘식의 말이 맞다. 이 자가 청의 황제라면 대명을 무너트리고 천하만민을 겁략한 책임을 물었을 것이요. 여진의 한이라면 정축년의 일을 설욕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낱 필부라야, 대체 무엇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이훤은 씨익 웃었다..

"애신각라 윤진의 아들 홍력, 너를 풀어주도록 하마."

건륭제는 자신을 감싸던 모든 신성과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

밑에 건륭제 풀어주는 거 어떠냐는 글 보고 써봄

생각보다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