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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띵군세계속 뿌리위키의 조선왕가의 군주 문서들 8편 (장조편 1)

솔바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2.30 05: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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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고일웅(千古一雄: 천 년에 한번 나오는 영웅)


영웅제(英雄帝: 영웅 같은 태황)


조선의 제13대 국왕이자 대한 황실 2대조의 태황. 묘호는 장조(莊祖), 시호는 장조현문의무성예달효태황(莊祖顯文毅武聖睿達孝太皇)이며, 휘는 윤()이다. (원래의 시호는 장조소경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莊祖昭敬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었으나 선조(宣祖)의 칭제건원과 함께 황제로 새롭게 추존되면서 동시에 기존의 시호는 폐지되었다.) 사후 손자인 선조 건원제에 의해 대한 황실 2대조 즉, 황제로 다시 추존되면서 '장조(莊祖) 장황제(莊皇帝)'로 추존되었다.


수 많은 업적들 덕분에 사후 장조대제(莊祖大帝) 또는 천고일웅(千古一雄), 영웅제(英雄帝) 같은 별명으로도 자주 불리운다. (이는 천고일장(千古一雄將) 또는 호심왕(虎心王), 호심제(虎心帝)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리우는 태조 고황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태조의 재림'이라 평가받을 만큼 (우연의 일치인지 아들인 경조는 '태종의 재림'이라 평가받았었다.) 군사적으로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성조대제와 무종에 버금가는 대개혁들과 명군으로서의 통치를 보여준 희대의 영웅같은 명군으로 평가 받는 위대한 군주이다.


한편으로는 아들을 보지 못한 명조(明祖) 이환의 양자가 되어서 왕위를 승계하였기에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기도 하다. (정확한 혈통은 진성대군과 부인 신씨의 증손자로 은성대원왕(은성군)의 친아들로 태어나 후에 '경성군'에 봉해졌다.)


초기에는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에서 들어와 왕이되어서인지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숨죽이고 대간들을 그대로 따르며 사림들을 지지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며 물밑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다가 재위 15년차 이후로는 사림들을 밀어내고 강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어내는 흡사 '불비불명'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묘호도 초장(莊)왕이 사용했던 장(莊)를 따서 장(莊)조...


왕위 계승도를 보면 장조를 기준으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장조의 후손들이 된다. 아울러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를 마침내 제대로 고친 군주이자 (이를 '종계변무'라고 한다.) 무엇보다 난세의 조선을 북방(무자호란)과 남방(경인왜란)의 위협에서 모두 구해내고 패권국으로 굴기시킨 희대의 영웅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전기와 중기를 분류하는 경계가 바로 장조의 치세다. 물론 이것은 장조가 능력이 뛰어나서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는 탓도 컸지만 (대표적으로 대동법과 견서사 등이있다.) 근본적으로는 경인왜란과 명의 쇠퇴로 인한 극단적인 변화의 흐름 때문이기도 하다. 고작 5개월에 불과했지만 경인왜란은 건국 이후 외부 특히 북방(만주)과 남방(규슈)에 군사력을 투사하면 투사했지 단 한번도 외부의 대침공을 받아본적이 없던 평화롭던 조선 전반의 사상과 사회, 국가이념에 엄청난 격변을 가져온 대사건이었고, 명나라의 쇠퇴는 동북아의 국제질서를 근본부터 뒤흔든 대격변의 시발점이었다.


현대 대한에서 일반인들과 사학계 전문가들의 장조대제에 대한 평가는 간단히 요약하면 '경인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극복한 지도자이자 조선을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굴기시킨 명군' 이렇게 요약된다.


또한 재위 초기와 이후의 모습이 극명하게 갈리는 군주이기도 한데 사회, 경제면에서 보면 장조 대에 주목할만한 정책들이 매우 많았으며 무엇보다 인재 발탁 하나만큼은 역대급으로 매우 뛰어난 군주였으나 재위 초기 15년간은 의외로 사림과 대간들을 적극 밀어주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개혁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얌전(?)한 모습들만을 주로 보여주는 편이었다. (이는 대한황조 역사상 첫 방계출신 왕이라는 부족한 정통성 탓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재위 15년 차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불비불명'의 고사속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흔히아는 거침없는 대개혁들을 이뤄내며 온갖 난관들을 돌파하는 영웅제로서의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경인왜란 이후 '여민휴식'으로 대변되는 이후의 국가의 재건 과정에서 재분배와 민생 개혁안이 철저히 실행되어 많은 성과를 낸 점 또한 높게 평가받는 부분들이다.



2. 생애


2.1. 잠저(경성군) 시절


1552년 11월 11일 조선 한성부 은성군의 사저에서 은성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은성군은 진성대군과 부인 신씨의 증손자로 혈통상 장조는 성종(成宗)의 현손(玄孫)이다. 장조의 원래 이름은 이균(李鈞)으로, 즉위 전 받은 군호는 '경성군'이었다.


그가 태어난 사직동 집은 은성군이 어릴 때 아버지인 창녕군으로부터 받은 저택으로, 터가 어떻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거의 다될 쯤 우물물이 안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바꿔달라 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창녕군은 '멀쩡히 우물이 나오는구만, 별 말을 다한다'며 계속 집을 짓게 했다. 터가 나쁜 줄 알았더니 떠억하니 명군(장조)이 태어난 셈이다.


은성군은 장조가 8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경성군은 명조의 명으로 명조의 세자 즉, 양자가 되었다.



3. 즉위와 치세


3.1. 재위 초기 (불비불명)


사실 장조는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장조의 부친인 은성대원군은 성종의 고손(高孫)이었고, 장조 본인은 성종의 현손(玄孫)으로서 엄연한 방계 혈통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없었다. 장조의 6대조 할아버지인 성종의 경우 전대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응당 되었어야 할 자리를 뒤늦게 돌려받은 것뿐이다.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후에는 본인의 부족한 정통성 탓인지 여러모로 보수적이고 대간들의 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등 개혁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모습들을 자주보여 주었다. 일단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관학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다잡는 한편 성리학에 최대한 입각한 정책들을 취하는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즉위 초기의 장조는 성리학 근본주의가 강한 골수 사림파들을 중용하여 가까이 하고, 서원 특혜와 같은 사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정치적으로는 이 사림 정치 세력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정계를 장악하는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빌드업 오지네 ㄷㄷ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종 이후 시작된 정책들을 손대지 않고 꾸준히 유지하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는데 아마도 불비불명의 자세로 후에 있을 대개혁을 위한 빌드업의 일환으로 일부러 무종 이후의 정책들에는 손을 크게 대지않고 때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3. 2. 권력 강화와 정철의 난


정치 분야에서는 장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장조도 임금으로써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해 먹었다.


이러한 장조의 특출난 정치적 수완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당시 금위사장으로 대동계라는 정보조직을 운영하던 정여립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철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여러 인사들을 줄줄이 엮어 수천 명 이상이나 전가사변을 당하면서도 이 일의 실질적 배후인 장조는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 드라이브를 더 더욱 강하게 거는 놀라운 면모를 볼 수 있다.


참고로 피의 대숙청이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유림이었고 전가사변 규모만 수천명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사실상 장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꽤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고를 뒤집어 쓴 경우가 많았고(실제로 주모자인 정여립이 역모와 무관한 권징을 사적인 원한으로 역적으로 몰았다는 것이 후에 밝혀져 부여주로 유배를 갔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이후에도 장조에게 '복종' 하는 사림들은 많았으나 진정으로 '충성' 하는 사림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무자호란 당시 장조에 대한 '사간원의 난'이라는 희대의 역모(?)가 일어난 점을 볼 때 장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장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초기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장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장조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최선의 방식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철의 난 문서를 참조.



3. 3. 즉위 전반기(경인왜란 이전)의 개혁 업적들


3. 3. 1. 비 군사 부문


3. 3. 1. 1. 대동법


세금제도를 단순화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마침 4년 연속 가뭄이 들어 세금을 감면해줘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무자호란 이전에 시행된 대동법은 무종 시절부터 시작된 상업 진흥을 위해 벌인 여러 정책들로 무종 이후 상업이 계속 발전한 덕분에 전국적으로 빠른 시행이 가능했다. 장조가 해서부 정벌에 나간 사이 사림파 관료들이 대리청정 중인 세자 이성(경조)에게 대동법 폐지를 주청하나 장조에게 교육을 잘 받아 현실주의자가 된 세자도 대동법 유지를 확고히 하여 이후 대동법이 계속 시행되게 된다. 서양과의 접촉 이후 서양종자 도입과 함께 백성들이 장조에게 지지와 충성을 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개혁으로 평가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동법 문서를 참조.


3. 3. 1. 2. 산양삼, 가양삼 재배 시작


장뇌삼, 재배삼.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인삼은 그동안 모두 산에서 캔 산삼이었다. 현대에 인삼이라 하면 재배한 삼을 보통 가리키나 장조 이전 당시에는 산삼을 인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장조는 당시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삼의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하여 장뇌삼과 재배삼을 키우도록 하며 각각 산양삼과 가양삼이라고 부르도록 한다. 이는 조선 경제에 큰 도움이되는 결정이었다.


3. 3. 1. 3. 서원 특혜 약화

초기에는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던 장조의 비호 아래에 세금도 면제받고 때로는 정부에서 서원을 세웠다 하면 땅과 노비를 주니 무작정 밑천도 없이 서원부터 세워 놓고 보는 등 서원의 폐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조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자 서원의 세금면제 혜택을 크게 축소하고 지원도 줄여 이를 제한한다.


3. 3. 1. 4. 종친사환금지법 폐지

족친위의 배경으로서 종친들은 원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되어있던 제한을 해제하여 종친들도 청운의 꿈을 품게 해...주진 않고 무과에만 응시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어 종친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한계점을 설정해 놓는다. 또한 진짜 목적은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종친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 종친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대가 끊긴 종친들의 재산을 회수해 국고를 채워놓는 것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 결과 임해군이 무관으로 나설 수 있게 되어 차차의 헛꿈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리고 종친들로 구성된 부대인 족친위는 무자호란에 출전하지만 실전경험이 부족한 데다 신립이 버리는 패로 써버린 고로 많은 종친들이 전사한다. 이순신이 족친위 부대를 인수한 후로는 전투능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송화강 함대의 노잡이로 부렸다(...). 대부분 전력으로는 최하급 부대 취급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활은 잘 쏜다고. 무자호란에서 큰 인명손실을 겪은 후 재편되어 왜란 시점에서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죄다 빠져나갔고 진짜로 백성들과 섞이면 곤란한 가까운 종친들만 입대하는 부대로 변했으며, 이렇게 되자 신립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해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3. 3. 1. 5. 조보 배포

조정에서 조보를 전국에 배포,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인조 때 시행하다 장조 초기에 중단시켰는데 세상 소식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한글 맞춤법 통일을 위해 장조가 다시 부활시킨다. 다시 부활한 직후에는 중앙에서 조보의 판본을 각 감영에 배송하면 다시 각 감영에서 이를 찍어서 각 군현에 배포하는 형태였었다. 원래 중앙에서 죄다 찍어서 보내려고 했으나 비용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변경된 것으로, 그 대신 지역별로 인쇄의 품질이 매우 조악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조보는 부여주 각 군현과 대마도에도 들어가지만 일기도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북방의 오지에는 한 달에 한 번 한 달 치를 몰아서 가져 오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조보를 전하는 파발은 전국의 주요 간선을 이용하는데 이를 통해서 간선을 점검하는 임무도 갖고 있었다. 간혹 조보를 전달하다 도로 정비가 소홀한 고을은 바로 보고해서 그 곳 수령이 경을 치는 구조였다고.. 어찌되었든 이 조보는 왜란이 터졌을 때 남쪽의 소식들이 조보를 통해 북쪽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일본군의 만행을 알게 된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에 맞서 응징에 나서야 한다고 외치는 긍정적 효과를 냈다.


다만 강릉에 상륙한 우에스기의 언급을 보면 조선의 정보가 외국에 유출되는 단점도 있으며 시대의 한계로 기승전임금찬양의 어용언론이었다(...). 지역별로 돈을 받고 광고를 싣기도 했었는데 장조 시절에 이미 시중에는 민간 자본으로 배포되는 '시보'도 나왔었다. 을미동정이 끝난 뒤 국경이 안정되며 재미있는 기사거리가 없어지자(...) 조보 판매량은 자연히 감소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홍희동전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허균은 연재료로 회당 저화 1섬을 받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보 문서를 참조.


3. 3. 1. 6. 연좌제 범위 축소

장조의 의외의 업적들 중 하나. 시대의 한계로 완전히 폐지하는 못했지만 범위를 축소해 분가한 형제, 이혼한 부인 등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 덕분에 임해군이 역적이 되었음에도 차차, 광해군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3. 3. 1. 7. 규장각 재설치

원래 규장각은 세조가 사망한 후 곧 폐지되었는데 이 또한 장조시절에 복원되었다. 물론 장조가 처음 규장각을 재설치한 이유는 선대왕들의 업적을 모으는 것으로 왕권 강화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규장각이 재설치되어 견서사가 가져온 서양 서적 보관이 용이해지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발상하게 되었다.


3. 3. 1. 8. 견서사 파견

견서사 또한 조선을 방문한 스페인과 교황청 사절단의 방문에 답하기 위해 장조 시절 때 부터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주요 방문국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청. 프랑스는 당시 위그노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서 방문하지 않았고 정발은 잉글랜드도 방문하고 싶어했으나 잉글랜드는 스페인, 교황청 등 가톨릭권과 적대 관계라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는 정곤수였지만 실무는 당시 젊은 이덕형이 주로 맞았으며, 귀족이나 고위층과의 사교 소통은 왕실의 먼 일가인 이수광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유럽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고, 인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교황청은 이들을 통해 장조가 제시한 제사 허용 문제를 두고 논의에 들어가는 한편, 돌아가는 견서사 일행에게 몰타 기사단원들을 일부 군사 고문단 겸 호위로 파견하였다. 이들 견서사는 주로 유럽에서 기술과 철학, 군사 분야를 망라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수집했는데, 그 수가 무려 5,000권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 1,000권 정도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서라고 하는데, 이쪽 업무를 맡은 허균의 취향이 꽤 반영된 듯하다.


이외에도 조선에 데려갈 화가를 고용하고, 유리나 금은 장식 등 일부 유럽산 공예품들도 함께 수집했다. 라오콘 상은 달라고 해볼까 생각하다 무거운데다 임금이 돌덩이를 좋아할 리 없다 판단해 포기했다고.. 아까비... 아시아에서 미리 접촉한 스페인은 서반아라고 한문으로 표기하는 반면 잉글랜드처럼 유럽에 가서야 알게 된 국가들은 국문으로 발음 그대로 표기했다고 한다. 왜란발발 상황에서 엄청난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후임 마닐라 총독이 조선 지지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견서사 일행들은 음력 1590년 7월 5일 드디어 3년 3개월 만에 세계일주를 완주하여 조선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귀국하는 견서사와 함께 들어온 교황 특사 코르나로 추기경의 출국과 동시에 2차 견서사가 유럽으로 출발했다. 장조는 교류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소 5~10년 간격으로 견서사를 계속 보내기로 하였는데 2차까지는 조선의 양선으로는 유럽에 직접 가기 어려웠으나 경험이 쌓여 3차부터는 유럽 배를 빌려 타지 않고 직접 조선에서 건조한 갈레온으로 유럽을 방문하게 된다.


서양학계에서는 명나라 사회에 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고 세금만 축내면서 영락제의 개인 위신만 세워줬다고 평가받는 '정화의 대원정'과는 달리 장조 시절의 견서사와 대항해는 조선 사회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온 의식개혁, 세계관 확장의 시발점으로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실제로 견서사 파견은 이후 조선 사회와 조선이라는 나라에 어마어마한 큰 충격과 나비효과를 일으켰으니 이러한 평가는 합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조선이 견서사로 영향을 받는 만큼 유럽 또한 조선의 문화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조선과 유럽 상호간에 서로 큰 충격을 주고 받았다고 평가하는게 가장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유럽사 최고의 외부 충격은 조선과의 접촉이라고 평가하였을 정도였으니 조선 못지않게 유럽 또한 이 견서사로 인한 충격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관료제(의정부)와 공무원 시험(과거제) 그리고 근대적인 신문(조보)은 모두 조선과의 접촉 이후 조선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시스템들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견서사 문서를 참조.



3. 3. 2. 군사 부문


3. 3. 2. 1. 승병 창설

즉위 초기에 사림들을 지지하던 장조가 승려들에게 성을 보수하는 일들을 맡겼는데, 이 때문에 승려들이 토목공사에 굉장히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승병들을 전문 공병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승병들이 의무병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여 여러모로 호란과 왜란 당시 큰 도움을 주었다.


3. 3. 2. 2. 속오군 창설

장조 시절에 만들어진 일종의 예비군 겸 향토예비군 제도로서 각 지역의 성인 남성들을 속오군으로 편제하고 지역의 명망 있는 사대부가 향군장을 맡아 이들을 이끌도록 하는 구조였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잘 모르는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보다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유지의 명령을 더 잘 따를 수 있고 일종의 향토예비군들로 활동할 이들에게 공식적인 직책을 주기 위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성인 남자는 전부 속오군 징집 대상이기에 총동원할 경우 200만을 동원 가능했다고 한다.


오도리 병력과 왜인여진 병력 또한 성인 남성들을 징병한 것이기에 원칙적으로 따지면 속오군이기는 하나 다른 속오군들과 달리 정예병들이므로 보통 따로 분류한다. 이들 속오군은 평시에는 관찰사의 휘하에 있지만, 전시에는 병마사의 휘하에 속한다. 왜란이 발발하자 몇 번의 정면대결에서 패배한 뒤에는 장조의 계획대로 왜군과의 유격전으로 왜군의 피로도를 크게 높이고 보급에 타격을 주는 전과를 크게 올렸다. 게다가 하남벌 전투에서 패배한 오위군 잔존병들이 합류한 곳에서는 전력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다만 일부 왜장들은 이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속오군이라는 군영에 속한 군인들이니 죽여도 된다며 조선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3. 3. 2. 3. 족친위 창설

오위군 중 종친들로 구성된 부대. 원래는 이름뿐인 군대였으나, 장조가 종친들이 한량으로 사는 꼴도 보기 싫고 종친 숫자가 너무 늘어서 권력을 가지는 것도 싫었던지 차라리 전쟁 나가서 죽어버리라는 의도로(...) 종친들도 진짜 군 복무를 하도록 하면서 탄생한 부대이다. 또 명문세족들이 군역을 기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오위 내에서 가장 정예도가 떨어지는 부대로, 팔자 좋았던 종친들답게 활 솜씨 하나는 수준급이나 다른 면은 별로 뛰어나지 못했었다고 전해진다. 신립은 무자호란에서 신분이고 뭐고 저질 군대인 족친위를 버림패로 써서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시키는데 이 때문에 개고생한 이들이 차라리 다른 데에서 복무하는 것이 낫겠다며 대부분 족친위를 나가서 진짜 일반인과 섞이면 곤란한 고위 종친들만 남았고, 이렇게 되자 신립도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이들을 함부로 굴리지 못했었다고 한다.


2차 견서사를 통해 윙드 후사르들이 넘어오자 남부 기병들과 함께 윙드 후사르로 개조되며 갑옷은 두정갑을 입은 남부 기병들과 달리 이곳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진짜배기 윙드 후사르로 일본원정(을미동정)에 투입된다. 이때부터는 나름대로 이름값을 하는 정예 기병부대로 자리잡는다. 특히 을미동정에서 활약하는데, 일본군이 쓰는 장창보다 긴 창으로 적 보병 부대를 손쉽게 궤멸시켰다고 한다.


3. 3. 2. 4. 도감군 창설

남만별기와 왜별기를 교관으로 삼고 펠리페 2세가 보내준 기술자들이 만든 서양식 장비를 주무장으로 하는 신식 군대. 번상병인 오위군과 달리 순수 직업군인들이며 구성원들 중 대다수가 출신 성분이 낮은 이들이지만 보수를 많이 주었다고 한다. 오위군과 라이벌 격의 관계에 있으며, 열기구와 귀차 등 새로 개발된 신식 장비 대부분은 이곳에 맨 먼저 배치되었다. 규모와 장비 및 훈련도 면에서 장조 시절 기준으로 세계 최강의 군대. 오위와 마찬가지로 한양과 경기도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왜란 개전 시점에서 약 37,000명이며, 신병을 대규모로 모집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훈련도감은 기존처럼 연구 및 교육 기관으로 되돌리고 도감군은 분리하는 군제 개편을 실시하여 이후 훈련도감은 순수한 교육기관 및 사관학교로 돌아갔고, 수만명의 도감군은 오위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군영으로 따로 편제되게 된다.


3. 3. 2. 5. 왜별기 창설

도감군 휘하의 도왜들로 구성된 왜인 부대. 차차의 호위병 명목으로 사나다 부자와 200여 명의 가신들을 받아들인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일본을 탈출한 시마즈 토시히사와 시마즈 가신들을 받아들여 규모가 더 커진다. 처음에는 남만별기와 함께 훈련교관 역을 맡았으나, 아무래도 스페인군보다는 밀리는 것이 현실이기에 교관 역은 온전히 남만별기로 넘어가고 대신 아소씨 계열 도왜들 중 정예한 이들로 인원을 보충해 전투부대로 재편성된다. 왜란 개전 당시 약 3,000명이었으며 단병접전에 특히 능한 최정예 근접전투부대였었다. 일본식 장비를 사용하고 일본어를 쓰기에 왜군 진영에 잠입하여 사보타주를 벌이는 특수부대 역할 또한 함께 수행하였는데 을미동정이 끝난 후 대부분이 조선령 규슈에 땅을 받아 둔전병이 되었다.


3. 3. 2. 6. 남만별기 창설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군사고문단. 테르시오 전술, 로델레로 전술 등 장조시절 세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군의 전술을 도감군에게 가르치기 위해 창설되었다. 처음 초청된 로드리고 대위 휘하 용병 14명에 올리비에라 백작이 놔두고 간 인원들 중 합류를 자청한 6명이 추가된 정도로 초창기의 인원수는 매우 작았으며 왜별기와 달리 순수하게 교관과 고문 역할만 맡았다고 한다. 무자호란에 동행하고 4명이 사망해 왜란 개전 시점에서 단 16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 귀순한 왜별기와 달리 급료를 받으며 고용된 입장이기에 이들에게는 군사기밀 제공을 제한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이들이 강선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다고 하며 열기구 등 조선의 문물들을 목격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에 파견될 때부터 조선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었다.


3. 3. 2. 7. 참모 제도 신설

조선 최초의 참모제도 아니 세계사 최초의 참모제도 또한 장조가 이룩한 대표적인 업적들 중 하나이다. 강무관을 설립한 후 연구하기 시작하여 완성된 이 세계최초의 참모제도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부로 구성되어 이관은 인사와 대민 관리, 호관은 치중 관리, 예관은 정찰 및 적과의 교섭, 병관은 군사작전, 형관은 감찰 및 기강 관리, 공관은 진지구축과 도로 및 교량 건설을 맡고 참모장이 이들을 총지휘하는 구조로 완성되게 된다.


3. 3. 2. 8. 남도수군통제사, 서도수군통제사

남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전.라도의 전 수군을 총지휘한다. 경상우수사가 겸직하며, 초대 남도수군통제사는 충무대왕 이순신이었다. 경인왜란 종결 이후 이순신이 수군 제조로 승진하면서 후임은 정걸이 맡았다. 서도수군통제사는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모두 통제하며 경기수사가 겸직한다. 초대 서도수군통제사는 최호.


3. 3. 2. 9. 강무관

세계 최초의 사관학교 강무관 또한 장조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무관 버전 성균관으로 개인의 기량과 경험에 의존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조선 전체에서 모인 최고의 장수들이 교관을 맡아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무과 합격자는 의무적으로 3년간 다녀야 하며 졸업 성적에 맞춰 배속처가 달라지는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도입 과정에서 당연히 문관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장조가 적당히 반박하면서 밀어붙였다. 이와 더불어 군사 박물관으로서의 역할도 하는데, 오다 노부나가를 포함하여 경인왜란에서 죽은 왜장들의 수급, 미라화 된 히데요시, 원균의 해골 등도 전시하였다. 현재 이 유물들은 '대한 육군 사관 학교'에서 전시 중이다. 육사를 강무관이라고 비칭하는 어원이 바로 이 강무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강무관 문서를 참조.


3. 3. 2. 10. 판옥선 개량

무종시절 개발된 판옥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주력선이 되었으며 왜란 발발까지 총 285척이 건조되었다. 왜란 발발 후에도 왜군의 공격으로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었으며 1천척의 선박과 7만 명의 왜 수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무시무시한 전과를 올렸다. 이탓에 왜군들은 판옥선을 '바다 위의 성채'라고 두려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휘하의 수군과 구키 요시타카의 수군,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거의 궤멸시켰으며, 도도 다카도라와 한산도 대첩을 치를 때에도 수백척의 왜선을 격침시켰다. 왜란 초반에 경상좌수군은 대부분의 수군 장졸이 이탈하여 경상좌수사 이운룡은 판옥선에 실려 있던 화포를 경주 및 울산 방어에 쓰라고 경상좌병사 배설에게 빌려주는데, 이 때 감포 쪽으로 오던 도도 다카도라의 수군은 빈 판옥선인 줄도 모르고 해안에 판옥선이 정박해 있자 퇴각하고, 이후 경상좌도에서 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뭐병 제갈량 일화도 아니고... 일본인들에게 판옥선이 얼마나 공포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는 지 알 수 있는 부분. 을미동정 때에는 본래 방패판도 없어서 취약한 후방에도 방패판을 세워 방어력을 높였다. 을미동정 종결 이후 왜 수군이 사실상 전멸해서 300척이나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120척을 민간에 어선, 상선용으로 불하했다고 한다.


3. 3. 2. 11. 거북선 개발

이순신이 부친상을 당한 사이 나대용이 개발한 철갑 돌격선이다. 대형으로 판옥선보다 한 층 높으며 철로 된 지붕을 덮고 가시를 박았다. 대포를 많이 탑재했는데 서양제 대포도 탑재할 수 있을 거라 하며 3층에 4명의 후장조총을 든 지정사수가 탑승한다. 정면에는 24근포가 탑재되어 있고, 일반 판옥선에서는 방패판도 없는 후면에도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나대용은 불화살 대책으로 프로토타입 배 전체에 옻칠을 하는 돈지랄을 벌여서 장조가 뒷목을 잡고, 양산형에는 옻칠 대신 얇은 철판을 대도록 하였다고 한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 총 11척이 건조되어 경인왜란 당시에 대활약하는데, 경기수영에 배속되어 있던 거북선은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함대와 전투하여 압승하며, 이후 이순신 휘하로 보내져 일본군 선단으로 돌입하여 적진을 휘저어 놓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3층의 선방포수들이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들을 죽이고, 거북선은 화포를 쏘며 왜선과 좌충우돌하는 방식. 왜 소선 따위는 짓뭉개고, 왜 중선과 대선도 24근포 한 방이면 박살났었다고 한다. ㅎㄷㄷ


일본군의 텟코센과 니혼마루도 가볍게 씹어먹는 말그대로 바다의 지배자. 일본군의 화살과 불화살, 조총탄 모두를 무력화시키며 갈고리를 걸고 배 위에 올라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시뿐이라, 일본군은 거북선을 '메구라부네'라고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을미동정 때 다가오던 화공선을 보지 못하여 한 척이 부서진다. ㅠㅠ 철갑이 벗겨지는 등 매우 큰 피해를 입지만, 곧 다가온 다른 판옥선들에 의해 구출되고, 판옥선과 줄을 연결하여 겨우 떠 있는 정도가 한계이기에 이순신이 결국 파선을 명령했었다고 전해진다. 을미동정 종결 시점에는 15척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거북선 문서를 참조.


3. 3. 2. 12. 대전선 개발

일종의 대형 판옥선으로 거북선과 동일한 크기에 뚜껑이 없고 철판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만이 다르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 총 4척이며 경기수영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함대와의 전투에 투입되어 승리한다. 이 이후에 이순신 휘하로 보내진다. 이순신은 이 대전선을 좌선으로 쓰며 함대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반 판옥선보다 더 크기에 전황을 살피기 좋았던 듯하다. 을미동정 종결 시점에는 기록상 15척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경인왜란 이후의 2부는 내일 올리겠음 최대한 완성도를 높여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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