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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과 후 상왕 라이프 -22-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4.48) 2021.05.11 18:31:15
조회 1886 추천 31 댓글 12
														
동대문 근처에 사는 박첨지는 요즘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놀음인지...!"



며칠 전, 우연히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놓여있던 종이와 문방사우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던 것이 발단이었다. 방문이 꼭꼭 닫혀있었으니 바람에 뒤집힌 것도 아닌데다 누가 봐도 사람의 손에 의한 것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기에 처음에는 박첨지도 도둑이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사라진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더 고약해져서 요즘은 아예 장롱에 예리한 칼이나 톱 같은 걸로 도려낸 흠집 같은 것을 남기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방 안이 이렇게 난장판이 될 동안 밖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박첨지는 결국 서재를 다른 방으로 옮겼으나, 그 방에서도 똑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저, 정녕 아무도 내 방에 들어가지 않았더란 말이냐!?"



"예, 예! 나리. 쇤네가 문 앞을 줄곧 지키고 있었사온데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사옵니다요!"



하인들도 박 첨지의 방의 몰골을 보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서 변명했다. 그들 역시 방문 앞에 서서 망을 보고 있었는데도 접근하는 사람은커녕 방 안이 이렇게 될 동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나, 나리. 아무래도 관아에 알리심은 어떻겠습니까...?"



"으음..."



그동안은 사라진 물건도 없는데다 범인에 대한 단서도 없는지라 섣불리 관아에 알리지 않았었으나 확실히 일이 이 정도로 심각해졌다면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알리도록 하겠다. 수고스럽겠지만 너희들이 망을 잘 봐주거라."



"예, 나리. 쇤네들이 지키고 있을테니 편히 주무십시오."



하인의 말대로 관아에 알릴까 했지만 이미 꽤 어둑해진 시간이라 박첨지는 다음날 알리고자 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이부자리에 눕고도 긴장 탓에 한참을 뒤척이던 박첨지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을 때였다.



"으, 으읍!!"



굵은 손이 입을 틀어막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뜬 박첨지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검은 복면을 쓴 사내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불침번을 섰던 동료와 교대한 말똥이는 늘 일찍 기상하던 주인이 방에서 나오질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방문에 대고 말했다.



"나리, 기침하셨사옵니까?"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리...?"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 말똥이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가 기겁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오, 옴메나!"



"욘석아, 아침부터 기운도 좋다. 주인 나리께 혼나고 싶어서 그러는...헉!?"



마침 근처에서 마당을 쓸고있던 다른 하인 하나가 핀잔을 주다가 마찬가지로 방 안의 광경을 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방 안에는 이부자리에 누운 채 목에 단검이 꽂혀있는 박첨지의 싸늘한 시신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사서에 '검계'라는 이름으로 실리게 될 사건의 첫 희생자였다.



******



"뭐, 뭐라? 살인이라고 하였소?"



"예, 전하. 퇴직한 무반 박모를 시작으로 도성 인근에 거주하는 퇴직 관료들이 잇달아 살해되고 있다고 하옵니다."



영의정 황보인의 보고에 이홍위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건의 경위를 좀 더 소상히 말해보시구려."



"예, 전하."



예를 갖춘 황보인이 앞으로 나서자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희생자들은 문무반 가릴 것 없이 전원이 퇴직한 관료들이옵고, 이들 중에는 서로 친분이 없는 자들이 상당수라 단순한 원한관계로 인한 암살은 아닌 걸로 보이옵니다. 다만, 일관된 사항은 하나 있었사옵니다."



"무엇이오?"



이홍위의 질문에 황보인은 돌아서서 예를 갖추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희생자들 모두 죽기 며칠 전부터 방 안의 물건들이 어지러지거나 장롱 혹은 벽장문에 날카로운 도구로 깎아낸 듯한 흠집이 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 지경이 됐는데도 관에 이를 알린 자들이 한 명도 없었단 말이오?"



얼마 전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복직한 좌의정 김종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불행히도 희생자들 모두 당초에는 이를 단순 도둑의 소행으로 여겼거나, 관아에 알릴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고 여겼다고 하오. 처음에는 그저 방 안이 어질러지거나 찢어진 종이들이 흩뿌려진 것뿐이었으니 이렇게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였소. 희생자들의 친족이나 하인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이들이 심각성을 느낀 건 가구에 칼자국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지만 모두 그날 밤 죽어버렸으니 때는 이미 늦은 셈이지요."



"으음..."



대전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퇴직한 관료들만 무작위로 골라 죽이는 괴상한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마치 사소한 장난질인 것처럼 가지고 놀다가 결행 당일날 되서야 칼자국을 남겨 암살을 예고하는 악질적인 수법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엽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내가 즉위하고부터 왜 이런 변고들만 자꾸 일어나는지...'



이홍위는 속으로 씁쓸하게 자조했다. 불과 두 달 전에는 숙부가 모반을 도모하질 않나, 이젠 하다하다 웬 정체도 모르는 불한당 놈들이 퇴직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연쇄살인이 벌이고 있으니 심사가 편할 리 만무했다.



"우선 순라군의 수를 배로 늘려 야간에 기찰을 더 강화하도록 하시오. 또한 퇴직한 관료들 중 이와 같은 범행 예고를 당한 자들이 있는지 파악해서 불행한 일을 미연에 방지토록 해야할 것이오. 이판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예, 전하!"



이조판서 민신이 예를 갖추고 서둘러 나가자 이홍위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흉수들이 언제 그들의 목표를 바꿀 지 모르니 현직 관료들에게도 주의를 주도록 하시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였다 싶으면 즉각 관에 알리도록 말이오."



"예, 전하!"



******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허어, 그랬더냐? 그렇잖아도 어제 사냥 다녀오던 길에 도성에서 웬 곡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설마 살인사건이었다니..."



최승의 보고를 들은 이방과는 혀를 찼다. 일전에 모반 시도도 무사히 진압되었고, 주상이 무예를 익히는 것도 어째선지 대신들이 벌벌 떨며 만장일치로 찬성한 덕에 일이 잘 풀리나 싶더니 또 이런 흉사가 터지는 걸 보니 세상사란 게 참 모를 일이다 싶었던 것이다.



"주상 전하께서도 모든 종친들에게 공문을 하달하시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퇴직 관료들만 노린 범행인데다 희생된 자들의 수로 미루어 볼 때 예삿일이 아닌 듯 했습니다."



이유가 말하자 이방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문? 난 그런 거 받은 적이 없는데...?"



"아미타불. 대상왕께서는 어제 외유를 나가신 탓에 인덕궁에 안 계셨지 않았습니까? 마침 이따 오후에 입궐하실테니 그때 알려주시려나 보지요."



"아, 하긴 그렇겠구려."



탄피대사의 말에 끄덕인 이방과가 이유와 성효옥에게 주의를 줬다.



"너희들도 조심하도록 해라. 특히 효옥이는 아녀자니 더더욱. 인덕궁에 오고 갈 때도 반드시 호위들을 대동하도록 해라."



"소녀를 걱정해주시는 것이옵니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는 성효옥에게 이방과는 하하 웃었다.



"음?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 넌 내 제자가 아니더냐."



"...네에."



성효옥이 토라진 듯 입을 삐죽거리자 이유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효옥이 힐끗 째려봤지만 이유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능글능글 웃을 뿐이었다. 이방과는 때마침 최승과 뭔가 얘기를 하느라 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옆에서 이 모든 걸 다 보고있던 탄피대사는 성효옥의 하는 짓이 귀엽게 여겨졌는지 껄껄 웃었다.



"대상왕 전하, 궁에서 사람이 왔사온데 속히 입궐하시라는 명이옵니다."



인덕궁에서 일하는 궁인 하나가 다가와 어명을 전하자 이방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말이냐? 수업은 오늘 오후로 잡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안이 긴급하다 보니 주상께서도 종조부님께 빨리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유의 말이 그럴 듯 하구나. 그럼 난 입궐하러 가봐야겠구나. 너희들은 여기서 쉬고 있거라. 내가 돌아오면 그때 수업을 이어가자꾸나."



"예, 대상왕 전하."



이방과가 대상왕의 칭호와 함께 받은 청룡포로 갈아입고 궁에서 온 내관과 함께 떠나자 성효옥은 이유를 째려보곤 투덜거렸다.



"대감께서는 어찌 소녀를 놀리시는 것이옵니까? 소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란 말입니다."



이유는 피식 웃었다.



"이보게, 사매. 이래봬도 나 역시 아내와 가정이 있는 몸이라 무릇 남녀 간의 연정이란 것에 대해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한다네. 사매가 어떻게든 내 종조부님께 수작을 걸어보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게 막상 영 서툴러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수, 수작이라뇨?"



뜨끔한 성효옥이 얼버무렸지만, 이유는 진작부터 성효옥이 이방과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이유는 주로 관전자 입장을 취하되 은근히 성효옥을 놀려먹는데 재미들린 참이었다.



"허허, 젊다는 건 좋은 것이지요. 불가능할 것 같아도 한 번 부딪혀보는 패기는 오직 젊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오."



"오, 대사님. 그건 패기가 아니라 무모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까?"



"흠...하긴, 패기와 무모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요."



"하하하하!"



"허허허허!"



이유와 탄피대사가 쿵짝이 맞아가며 웃어대자 성효옥은 뾰로통한 얼굴로 쳐다봤다.



"금성대군 대감이야 그렇다쳐도 대사님께서도 소녀가 무모하다고 여기십니까?"



성효옥의 볼멘소리에 탄피대사는 장난기를 거두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오, 아닙니다. 소승이 잠깐 농을 해봤을 뿐입니다. 만일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란 게 두 분에게 있다면 결코 불가능이라고만 할 순 없겠지요."



"그럼...!"



성효옥의 안색이 밝아져서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탄피대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미안한 말이오만 소승은 한평생 불도만 닦느라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오. 시주께 도움이 되어드리긴 힘들 것 같소."



"네..."



성효옥이 한숨을 내쉬자 이유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호오? 하면 대사님께선 우리 사매에게 기회가 있다고 보십니까?"



탄피대사는 허허 웃더니 말했다.



"빈도가 비록 앞날을 예견하는 재주는 없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랬으니 시주가 하기 나름 아니겠소?"



"그거 재밌겠습니다. 이참에 저랑 내기 하시겠습니까? 전 안된다에 걸지요. 하하하!"



"아, 대감!"



성효옥이 너무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유는 짓궃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흠, 그럼 빈도는 된다에 걸지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아니, 두 분 정말...!"



당사자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내기를 거는 탄피대사와 이유에게 약이 오른 성효옥이 펄펄 뛰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더 크게 웃을 뿐이었다.



******



"주상께서 이 사람을 찾으셨다고 들었소."



"어서오세요, 종증조부님."



이방과가 대전에 들어서자 내내 어두운 안색이던 이홍위가 표정이 밝아져 맞이했다.



"혹 예의 살인사건 때문에 부른 것이오?"



"종증조부님께서도 이미 들으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이홍위는 사건 현황에 대해 자세히 늘어놓았고 이방과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이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구려."



"그렇습니다. 선대왕 시절 퇴직했다는 걸 제외하면 서로 연관도 없는데다 흉수들의 목적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우리 스스로 조심하는 것밖에는 없으니까요. 부디 종증조부님께서도 조심하시지요."



"알겠소, 주상."



이방과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이홍위의 표정도 풀어졌다.



"그럼 용건은 끝났으니 오늘 점심은 여기서 들고 가시지요. 제가 미리 종증조부님께서 드실 것도 장만해놓으라고 일러놓았습니다."



"주상께서 이 사람을 이토록 보살펴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오."



"하하, 별말씀을요. 종증손으로써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겸사겸사 종증조부님의 무용담도 듣고 싶구요."



요즘 이홍위는 이방과로부터 무예 뿐만 아니라 태조에서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이방과가 전생 시절 겪었던 이야기들을 듣는데 잔뜩 심취해 있었다. 원래 청자의 리액션이 좋으면 화자도 흥이 나서 더 썰을 풀어놓기 마련이라 이방과도 신나서 조선 최초로 라떼를 보급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방과를 안내해 대전을 나서던 이홍위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 듯 이방과를 돌아봤다.



"참! 그러고 보니 종증조부님께서는 안평 숙부의 행방을 아십니까?"



"용 말이오? 글쎄올시다. 일전에 어딘가로 외유를 나갔었다는 소식은 들었소만."



"그렇습니까..."



이홍위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걱정이 된 이방과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주상?"



"실은 어제 모든 종친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고 주의를 주긴 했는데 종증조부님과 안평 숙부 두 분이 도성을 비우셨던 터라 두 분만 전해듣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종증조부님께는 알려드릴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안평 숙부는 여전히 모르고 있을 것이니 걱정이 되옵니다."



"음..."



이방과도 내심 걱정이 되긴 했으나 별 일이야 있으랴 싶었다. 안평대군 이용은 천성이 호방하여 시서화를 즐기기 위해 자주 팔도 곳곳을 유람하는 터라 도성에 머무르는 기간이 오히려 짧았으니 이 사건에 휘말릴 일이 없을거라 여긴 것이다.



"자, 주상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아마 용 그녀석은 지금쯤 어디 명산에라도 가서 한창 시짓고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오. 내 생각에 그놈이 도성에 돌아올 때쯤이면 모든 일이 다 끝나고도 남을 것이외다. 하하하!"



"...듣고보니 그렇군요."



이방과가 밝게 웃으며 말하자 이홍위도 그제서야 안도하여 표정이 풀어졌다.



******



어디 멀리 여행이나 갔을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안평대군 이용은 그의 문객들과 친한 풍류가들을 대동하고 한강 강변에서 시조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던 이용은 문득 전부터 봐두었던 명당 자리에 가보고 싶어져 바로 도성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를 따라 금강산에 가지 않고 도성에 남아있던 벗들을 모두 불러내 겨울철 한강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보게나, 현동자! 강이 굽이쳐 흐르고 배후에 넓은 벌이 늘어서 있으니 가히 명당일세!"



"하하! 과연 그렇사옵니다, 대감."



이용의 말에 안견이 웃으며 답했다. 원역사에서는 계유정난의 조짐을 눈치채고 고의로 먹을 훔쳐 추방됨으로써 이용과 결별을 택했었지만, 여기서는 수양대군이 실패할 걸 알기라도 했는지 안견은 여전히 이용의 충실한 벗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지금은 겨울이라 산천이 얼어 공사를 진행하긴 어려우나 날이 풀리는 대로 여기에 정자를 하나 지을까 하네."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대감!"



"이제 여기에 정자가 생겨 산천과 벗하며 시를 짓는다면 그 풍취가 제법일 것입니다!"



벗들의 맞장구에 흥이 돋은 이용은 껄껄 웃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정자를 지을 터로 잡은 이곳은 원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압구정을 세웠던 바로 그 자리로, 역사의 개변 덕에 이곳은 압구정이란 이름 대신 이용의 자를 딴 청지정이란 이름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효당이 오지 않아 섭섭하던 차였는데 어찌된 일인가?"



이용의 말에 몇몇 벗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는데 모두 도성에 남아있던 자들이었다.



"정효당은 얼마 전 부친상을 당해서 오지 못했나이다."



"뭣이? 그게 정말인가?"



이용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느라 내내 도성을 비웠던 그는 뒤늦게 비보를 접한 것에 안타까워 했다.



"허, 안타까운 일이로다. 정효당의 선친은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리 빨리 세상을 떠날 줄이야..."



"저, 대감. 사실...정효당의 부친은 살해당했습니다."



"뭐, 뭐라!?"



뜻밖의 소식에 이용은 경악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도성 한복판에서 살해라니? 또다시 역모라도 일어났었단 말인가?"



"실은 정효당의 선친 말고도 여러 퇴직한 관료들이 목숨을 잃는 바람에 지금 도성 내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대감께서는 그간 도성을 비우고 계셨으니 안전하셨지만, 이제 돌아오셨으니 대감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알려줘서 고맙군. 허허, 설마 내가 유람을 떠나 있는 동안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이야..."



원래는 금강산 구경하고 온 기념으로 한바탕 풍류를 즐기려고 만든 모임이었지만 흉흉한 소식을 듣고 그럴 마음이 싹 가신 이용은 금방 자리를 파하고 귀가를 서둘렀다.



이용과 문객들이 집 앞에 이르자 문지기가 나와 예를 올렸다.



"대감, 제때 돌아오셨군요. 안 그래도 좀 전에 궁에서 온 사람이 이걸 대감께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궁에서 말이냐?"



혹시 아까 벗들이 말해준 그 사건 때문일까 싶었던 이용은 급히 종이를 펼쳐봤고, 과연 거기엔 주상의 친필로 도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들에 대해 기술하고 각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즉시 왕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큰 절을 올린 후 이용은 장정들을 동원해 저택을 엄중히 지키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대감 덕에 소인들이 한시름 덜겠습니다."



이용의 곁에 선 문객들이 안도하며 말했다. 이용은 평소 널리 문사들과 사귀기를 즐겨하여 그의 저택은 항상 이름난 선비들이나 화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아예 이용의 집에 눌러사는 문객들도 상당수였다. 이렇게 도성 분위기가 흉흉할 때는 왕궁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 바로 대군의 집이었으니 그들이 안심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하, 물론이네! 무릇 이 나라의 대군인 내가 소중한 벗들의 안전 하나 책임져주지 못하겠나. 자, 모처럼 장거리 유람을 다녀왔으니 모두들 각자 방에 돌아가 여독을 풀도록 하게나."



"예, 대감. 그럼 저희들은 물러가보겠습니다."



문객들이 흩어지자 이용 역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혼자 남아있던 안견이 그를 불렀다.



"대감."



"음? 현동자, 아직 안 가고 있었나? 자네도 어서 들어가 쉬게."



"아니옵니다. 아까 대감께서 한강변에 정자를 세우신다길래 소인에게 문득 한 가지 영감이 떠올라 감히 그림을 하나 그려보았습니다."



"오오, 이건!"



안견이 건네준 그림을 본 안평대군이 탄성을 질렀다. 그림 속에서는 한강의 풍광을 배경으로 정자 하나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이용이 정자를 짓는다면 이렇게 지어야겠다고 막연히 상상하던 것이 정확히 구현된 것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난 그저 정자를 짓겠다고만 했을 뿐인데 자네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하니 그대는 정녕 나의 종자기일세!"



"과찬이시옵니다."



"혹 내 방에 와서 보다 자세한 얘기를 나눠보겠나? 장차 정자를 지을 때 자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될 듯 하이."



"물론이옵니다, 대감."



웃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선 이용과 안견이었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굳고 말았다.



"헉!!"



"대, 대감! 이, 이건...!?"



이용의 방에는 언제든지 서예와 그림을 즐길 수 있도록 지필묵과 탁상이 항상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에 들어온 방의 광경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종이는 갈기갈기 찢겨 나뒹굴고 있으며, 탁자는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어낸 듯 여기저기 파여 있었다.



'이, 이건...이건 마치...'



마치 최근 도성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흉수들이 즐겨 쓴다는 살해예고 수법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만 같았다.



이용과 안견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인한 당혹감과 목숨이 노려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엉망진창이 된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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