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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과 후 상왕 라이프 -35-

ㅇㅇ(14.48) 2021.06.01 17:29:57
조회 1024 추천 31 댓글 9
														
한바탕 일어났던 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골치가 아파진 이방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효옥이 함길도까지 따라오려고 일행에 섞여들었을 줄 감히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정확히는 미리 알고 있던 자가 한 놈 있긴 했지. 저기 신가라고 말이야.'


이방과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힐끗 째려보자 신숙주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방과에게 멱살을 잡혀 허공에 들어 올려진 것도 모자라 거칠게 흔들어 대기까지 하는 바람에 거의 기절하다시피 했던 신숙주는 시종이 가져다 준 물을 마시고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방과가 다시금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필사적으로 미소지으며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신숙주를 째려보던 이방과는 시선을 다시 성효옥에게로 돌렸다. 신숙주에게 할 말이야 많았지만 일단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최 집사."


"예, 전하."


최승이 급히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효옥이를 도성으로 돌려보내야 하니 실력좋은 무인 두어 명과 말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게."


"예, 전하."


"저, 전하. 부디 소녀도 데려가 주십시오!"


다짜고짜 자신을 돌려보내려는 이방과를 본 성효옥이 급히 이방과의 발치에 엎드려 애원했다.


"안될 말이다. 효옥이 너도 내가 어디로 향하려는지는 알고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것이렷다?"


"물론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함길도로 가시는 중이시지 않사옵니까?"


"그래. 하물며 지금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이다. 네가 이리 변장까지 한 걸 보니 집에도 알리지 않고 몰래 나온 듯 한데 네 부모가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겠느냐?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이만 돌아가거라."


하지만 성효옥은 생긋 미소지었다.


"소녀 또한 부모의 허락도 없이 원행길을 나서 근심을 끼치는 것이 큰 불효임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소녀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양친의 허락을 얻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뭣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이 험한 변방 땅에 간다는데 쉬이 보내주겠느냐?"


이방과가 믿지 않자 성효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즉시 품 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공손하게 바쳤다.


"소녀의 가친이 써준 편지이옵니다. 전하를 뵙게 되거든 이걸 보여드려 증표로 삼으라고 하였나이다."


성효옥이 건네준 종이를 펼친 이방과는 필체만 보고도 그것이 성삼문이 쓴 것이 맞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편지에는 기별도 없이 폐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딸을 잘 부탁드리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허어, 이거 참...!"


곤란해진 이방과는 입맛만 다셨다. 집에서 부모가 걱정하고 있을 테니 돌아가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명분으로 성효옥을 돌려보내려 했는데, 정식으로 성삼문의 허락까지 받고 결행한 일이었다니 이래서야 기본 전제부터 틀어진 셈이었다.


'그 강직한 인사도 딸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무른 모양이구나...'


잠시 헛기침을 한 이방과는 어떻게든 성효옥을 설득해보려고 시도했다.


"함길 땅의 겨울은 무척 춥단다."


"물론이옵니다. 소녀 또한 이에 대비하여 방한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왔나이다."


"언제 야인들이 출몰할 지 모르는 험지이니라."


"대상왕 전하의 위엄이 드높으시어 한양에 좌정해 계신 것만으로도 이를 두려워한 야인들이 복종을 맹세하였거늘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된다 하여도 소녀 또한 제 한 몸 지킬 재주 정도는 갖추고 있사옵니다."


"이따금씩 사냥도 나가고 야영도 심심찮게 할 것이다. 아녀자의 몸으로는 힘들지 않겠느냐?"


"저 역시 조부를 따라 사냥을 나가 야영을 한 적이 많사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말을 몰며 창과 활을 내지르는데는 감히 누구 못지 않다고 자부하는 바이니 곁에 두시고 써보시면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아니, 그게...!"


성효옥이 막힘없이 대답하자 오히려 할 말이 궁해진 건 이방과였다. 이방과가 쩔쩔매자 옆에서 웃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탄피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소승의 소견으로는 효옥 낭자를 동행시켜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대사님!"


"아, 아니, 대사...!"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성효옥과 달리 이방과는 너까지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탄피대사를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소승에게 북방의 풍습에 대해 들려주셨지 않습니까? 동북 땅이 외지고 험하긴 하나 그 덕에 상무의 기질이 드높아 여인들도 무예를 익히는 것이 드물지 않다고 말이지요. 효옥 낭자의 무예 또한 범상치 않으니 데려가 중히 쓰신다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이방과가 거의 넘어온 것처럼 보이자 눈치만 보고있던 신숙주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비록 탄피대사의 도움을 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아니지 않은가?


"전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관은 성삼문과 간담상조의 우정을 나눠왔기에 서로의 가족들을 친족처럼 여긴 지 오래이옵니다. 성삼문이 효옥의 북도행을 허락한 것도 어디까지나 소관이 동행함을 알고 난 뒤에야 내린 결정이었으니 소관이 책임지고 효옥을 잘 돌보겠사옵니다. 만에 하나 효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관은 전하께는 불충이요, 성삼문에게는 불의의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 어찌 소관이 이 일을 가벼이 다룰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소관을 믿고 맡겨주시지요."


"크흠!"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신숙주의 발언에 이방과는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긴 했으나 사실 그로서도 성효옥을 돌려보낼 명분이 궁한 건 사실이었기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허락까지 받고 왔다는데 그가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대사의 말도 일리는 있다. 장차 이 나라 조선을 숭문숭무의 나라로 만들려면 여인네들도 어느 정도의 무는 익히는 게 낫지.'


장기적으로 여자들에게도 무예를 익히게끔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이방과는 성효옥을 모범 사례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다. 이는 유목 풍습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동북면에서 나고 자란 그의 성장배경 덕도 있었는데 동북면은 땅의 넓이에 비해 사람의 수가 적은 탓에 남자들이 집을 비우면 여자들이 집을 지켜야 했던 만큼, 여자들도 말을 몰아 창검을 다루는 솜씨가 여느 남자들 못지 않았던 곳이었다.


어차피 무예를 익힌다고 다 전장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다 이미 '제'의 성효옥 암살 미수 사건과 검계 사건 등으로 발칵 뒤집혔던 도성의 양반가에서는 성효옥의 사례를 본받아 암암리에 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사례도 드물게나마 나오고 있었던 만큼 가별초 재건과 더불어 이를 제도화한다면 치안과 국방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방과는 결정을 내리고 끄덕거렸다.


"좋소.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나 역시 반대하지 않겠소. 내 대사와 거구(巨口) 선생의 의견을 받아들여 효옥의 동행을 허락하겠소이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허허, 잘됐구려. 효옥 낭자."


"축하드립니다, 낭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성효옥은 급히 이방과의 앞에 엎드려 감사를 표했고, 전부터 그녀와 안면이 있었던 탄피대사와 최승도 웃는 얼굴로 축하인사를 건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던 신숙주는 곧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방금 이방과가 자신을 부른 호칭이 뭔가 이상했기에 신숙주는 조심스럽게 이방과에게 말을 걸었다.


"저...대상왕 전하?"


"음? 왜 그러시오, 거구 선생?"


역시나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기에 신숙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호칭을 정정하려고 했다.


"아하하, 전하.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소관의 호는 거구가 아니라 희현당이옵니다."


하지만 이방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아, 예. 하옵시면 소관의 호로 불러주셨으면..."


"오, 그건 아니될 말이지! 선생은 그 무섭다는 거구귀(巨口鬼)를 기백만으로 굴종시켰다는 보기 드문 유자가 아니오? 내 선생의 그 기상과 담력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거구(巨口)라는 별호를 내린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시오."


"......"


아직 자신을 속였던 것에 대한 앙금이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방과의 말에 신숙주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름 '깜짝 이벤트' 좀 준비하겠답시고 거구귀 드립을 날렸던 신숙주는 졸지에 거구(巨口)라는 새 호를 얻고 말았는데, 이는 장차 '북방의 큰주둥이'로 불리게 될 그의 미래를 나타내는 하나의 서막이나 다름없었다.


******


이방과 일행은 그 후로도 순탄하게 동북방으로 나아갔다. 대상왕이 함길도까지 가는 도중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는 이홍위의 어명이 내려진 지 오래였기에 가는 곳마다 관원들이 영접을 나왔고, 덕분에 일행들은 충분한 휴식들을 취해가며 이동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도성을 나선 지 채 반 달도 안되어 일행은 어느덧 황해도와 함길도의 접경 지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세인들이 말하기를 금의를 입고 환향하는 것을 큰 광영이라 한다는데, 이 사람은 큰 공도 없음에도 주상의 성은 덕에 환향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도 많은 놈인 모양이오. 하하하!"


30년이라는 세월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제법 몰라보게 달라지긴 했다지만 아직도 북방 땅 곳곳에는 전조 시절의 모습과 크게 바뀌지 않은 곳들이 드물지 않았고, 이방과는 어렵지 않게 눈에 익은 북방의 정경들을 발견하고 새삼 감회에 젖었던 것이다.


옆에서 말을 몰던 효령대군 이보도 웃으며 동의했다.


"저 역시 기껏해야 사찰에 불공드리기를 소일거리로 삼는 놈인데 이제 백부님을 모시고 열성조들의 터전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제'가 폐서인되어 아예 없던 사람이 되어버린 이후 태종의 적장자가 된 이보였지만, 형(이었던 것)과 달리 애초부터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방과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방과도 조카의 그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유독 이보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네가 수신에 힘써 왕가가 화목할 수 있었으니 열성조들께서도 너처럼 훌륭한 후손을 두셨음을 크게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과찬이시옵니다. 그저 종친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본분을 지키고자 하였을 뿐이옵고, 지금도 그러고자 노력을 다할 뿐이지요."


'비록 '제' 그놈의 교육은 말 그대로 실패였다만, 보나 도의 교육만은 제대로 시켰구나. 방원이가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었어.'


겸양을 표하는 조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방과는 문득 말을 멈춰 세웠다. 앞서서 말을 몰며 길을 안내하던 이거을가개가 맞은편에서 달려온 정탐병과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정지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이방과는 동행한 여진 무관들의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그들에게 정탐병의 역할을 맡겼는데, 여진 무관들 역시 이것이 시험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방과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정탐 임무를 수행하는데 앞장섰다. 정탐병들은 일행들보다 앞서나가 인근 백 리를 빠짐없이 훑고 돌아온 뒤 그들의 수장격인 이거을가개에게 알렸고, 이거을가개는 보고를 취합한 뒤 그대로 나아갈지 아니면 방향을 틀지를 판단해 대상왕의 행렬을 인솔해왔는데 정지 신호까지 보내온 걸 보면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냐?"


이방과가 묻자 이거을가개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올렸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근방을 정찰하고 온 정탐병들의 보고로는 인근의 마을들이 화적패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옵니다."


"뭣이!?"


뜻밖의 보고에 이방과와 이보는 눈을 크게 떴다.


******


이방과 일행이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을 무렵, 남쪽에서도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해 연안에 자리한 거제도에는 한 죄인이 유배를 와 있었다. 아직 채 약관조차 지나지 않은 10대 중반의 소년이건만 무슨 중죄를 지은 것인지 이 어린 죄인이 거하는 집을 병졸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감시의 눈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인 한 명만이 죄인의 수발을 들 뿐이었다.


'나를 욕보이고 홀대하는 것도 수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도원군이란 군호를 가졌던 이 나라의 왕족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그러나 아버지 수양대군이 반역을 도모했다가 실패하면서 그와 가족들의 운명은 순식간에 뒤집히고 말았다.


아버지 수양대군은 뒤주에 갇혀 처형되었고, 어머니 윤씨는 남편의 역심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수양대군은 군호와 성씨까지 박탈당해 일개 서인으로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왕실 족보를 비롯한 온갖 기록들에서 지워지는 등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말살되면서 '장'과 어린 동생들 또한 성씨조차 없는 사생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사촌동생이자 금상인 이홍위가 '장'을 비롯한 남매들을 죽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 남해 곳곳의 섬들에 흩어놓는 선에서 그쳤으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지만 부모와 성씨까지 잃고 근본없는 사생아가 되어 추방된 시점에서 이미 '장'과 남매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제도로 유배온 뒤에도 수난은 끊이지 않아서 그를 시중들라고 배치된 하인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언사들을 남발하며 '장'을 욕보일 뿐이었다.


배고프다고 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면,


"햐, 거 먹성도 좋네. 죄인 주제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긴 하냐?"


라며 빈정거렸고, '장'이 밥술을 뜰 때마다 일부러 방문 앞에 앉아서 들으라는 듯이 욕설들을 늘어놓곤 했다. 심지어는 '장'이 책을 읽고 있으면 서슴없이 방에 들어와 책을 찢고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야, 유배 와서 공부하냐? 도덕군자인 척 하지 마."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장'이 멈추라고 외쳐봤지만 하인의 모욕의 강도는 더 거세질 뿐이었다.


"멈춰? 하! 웃기고 앉았네. 야,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넌 아직도 네가 왕족인 줄 아냐? 넌 이젠 성씨조차 없는 일개 비천한 놈일 뿐이야. 주상 전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모가지만은 붙여주신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디서 큰소리야? 네 애비가 뒤주에 갇혀서 죽었다던데 수틀리면 나도 네놈을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어. 알아? 처신 잘 하라고."


이죽거리던 하인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간 뒤 '장'은 분함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으나 차마 소리내어 통곡조차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릴 뿐이었다.


그 날 이후 '장'은 방 안에 들어앉아 죽은 듯이 지냈다. 물론 그렇다고 하인과 감시병들이 모욕을 주는 것을 그치지는 않았으나, '장'은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며 이 모든 것들을 묵묵히 감수하며 지냈다. 처음에는 이런 수모를 겪느니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어린 남매들과 아내 한씨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기에 '장'은 차마 자결을 할 수도 없었다.


거제도로 떠나기 전 병졸들의 손에 거칠게 끌려나가던 그를 바라보며 통곡하던 아내의 얼굴을 떠올린 '장'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살아있기만 한다면...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동생들을 보살피고 부인과 재회하기 위해서라면 난 결코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숱한 모욕과 고초를 겪고 있음에도 '장'은 오직 살아서 아내와 동생들과 재회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옛다, 밥이다. 죄인 주제에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진수성찬."


빈정거리며 하인이 가져다 준 밥상에는 반 공기도 채 안되는 밥에 대충 물을 만 것과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젠 이런 대우에도 익숙해진 '장'은 아무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수저를 들어 한 숟갈을 퍼서 입에 넣으려 했다.


"어명이오! 죄인 '장'은 나와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라!"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장'은 화들짝 놀라 그만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아하니 네놈도 오늘로 끝인 모양인데?"


옆에서 하인이 킬킬거리며 비웃었지만 이미 머릿속이 새하얘진 '장'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금상은...기어이 나까지 죽여 후환을 끊고자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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