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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과 후 상왕 라이프 -36-

ㅇㅇ(14.48) 2021.06.03 18:41:52
조회 1076 추천 27 댓글 12
														
'장'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과연 금부도사와 관원들이 마당에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그들을 살피던 '장'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는 그대로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저, 저 병졸들은 다 뭐란 말인가...!?'


담장 밖에는 못해도 100여 명은 되어보이는 병졸들이 대오도 정렬하게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시무시했기에 '장'은 저절로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에 이르렀다.


"무, 무슨 일로 오셨소?"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용건을 물으려 했지만,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방금 말했지 않소? 주상 전하의 어명이 있으셨소이다. 죄인은 속히 무릎을 꿇고 전하의 처결을 받으시오!"


감정이라곤 일절 섞여있지 않은 금부도사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은 '장'은 이내 그들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금상이 정녕 날 죽이려나 보구나...'


금부도사가 병사들까지 끌고 유배지에 찾아올 이유라면 단 한 가지, 죄인의 사형 집행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이곳 거제도에 유배와서 보냈던 지난 석 달 내내 언제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들이닥칠 지 몰라 불안해했던 '장'의 악몽이 마침내 현실로 구현된 셈이었다.


"......"


죽음을 직감한 '장'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하필 오늘이 그 날이었을 뿐...'


고금을 통틀어 그 어떤 군주가 자신의 왕좌를 위협한 역적의 핏줄들을 살려둔단 말인가? '장'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홍위를 원망하는 마음은 애시당초 없었다. 그가 이홍위의 입장이었어도 이렇게 했을 테니까.


'다만...'


아직 한 가지 미련이 남아있긴 했으나 이젠 부질없는 것이었기에 '장'은 묵묵히 마당에 깔려있는 거적 위에 무릎을 꿇었다. '장'이 순순히 지시에 따르자 금부도사는 뒤에 도열해 있는 관원들 중 한 명을 돌아봤다.


"가져와라."


"예, 나리."


금부도사가 지목한 관원은 길이가 매우 긴 목함을 안고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장'의 앞에 그 목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장'이 살펴보니 그 목함은 표면이 반들반들한 것이 꽤 좋은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뭐하시오? 얼른 열어보지 않고."


'장'이 어찌 해야할 지 몰라 목함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금부도사가 재촉했다. 금부도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장'은 떨리는 손을 뻗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이, 이건...!'


'장'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목함 속에는 장검 한 자루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비록 '장'이 검에 등급을 매길 수 있을 만큼의 감식안을 지니진 못했지만, 그런 그가 봐도 솜씨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명검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걸로 자결하라는 뜻인가...? 난 죽는 그 순간까지 편히 가지 못할 팔자인가 보구나...'


내심 씁쓸하게 웃은 '장'은 문득 아내 한씨와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인과 감시병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무려 석 달을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살아남아서 그들과 재회하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살아서 두 번 다시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됐다는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 '장'은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부탁이...하나 있소이다. 들어주시겠소?"


"...말해보시오."


별 기대도 없이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금부도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통곡을 억누르느라 목이 메일 지경이었지만,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내다시피 말을 이어갔다. 그에게 있어 지금 하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상 전하께 전해주시오. 모든 죄는 이 못난 놈이 다 짊어지고 가겠으니 부디 내자와 동생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말이오. 전하께서 그리만 해주신다면 이 죄인은 여한이 없을 것이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금부도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고, 고맙소! 정말 고맙소!"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면서도 '장'은 밝게 웃었다. 비록 지아비 노릇, 형 노릇, 오라버니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해봤지만 그의 목숨을 대가로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됐으니 '장'은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장이 뒤따라가옵니다. 저승에서 다시 뵙거든 이승에서 못 다한 효도를 다 하겠나이다.'


'장'은 눈을 감은 채 검집에서 장검을 뽑았다. 칼자루를 역수로 쥐고 가슴을 찌르기 위해 높이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죄인은 이 무슨 참담한 짓이오!"


금부도사가 벽력같이 호통을 쳤고, 놀란 '장'은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느라 앞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금부도사와 관원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무, 무슨 짓이냐니...? 그대들은 나를 자결시키라는 어명을 받잡고 온 것이 아니오?"


'장'이 어리둥절한 채 말하자 금부도사가 펄쩍 뛰었다.


"자결이라니 그 무슨 헛소리요? 죄인은 그 칼이 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던 게요?"


금부도사의 말에 '장'은 멍하니 손에 들린 칼을 내려다 봤다. 틀림없이 이 칼로 자결하라는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아예 눈을 감고 있느라 미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던 '장'은 그제야 그 칼의 정체를 알고 눈을 크게 떴다.


한쪽 면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상징하는 28수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으며, 다른 한쪽 면에는 천신과 지신의 신령을 받아들이는 주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검신.


칼의 이름이 전서체로 적혀있는 칼자루.


"이, 이건...사인검(四寅劍)!"


'장'이 경악해서 자신도 모르게 외치자 금부도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사인검이오. 죄인도 한때는 이 나라의 왕족이었으니 그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정녕 주상 전하께서 그대를 자결시키고자 하셨다면 이런 귀한 것을 내리셨겠소?"


사인검, 혹은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이라 불리는 칼은 순양의 기운을 담아 삿된 것들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만든 벽사검의 일종이었는데 인년-인월-인일-인시에만 만든다는 특수성 덕에 오직 왕이 극히 총애하는 신하에게만 하사한다는 최상의 보검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고관대작들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인검을 받게 된 '장'이 충격과 경악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보니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본데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그 사인검을 그대에게 전달하라는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오."


"저, 정녕 주상 전하께서 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단 말이오...?"


'장'이 멍하니 되묻자 금부도사가 꾸짖듯 말했다.


"대역죄인인 그대의 아비와는 달리 주상 전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으로 죄없는 자들의 피를 보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오. 그대가 평소 전하를 어찌 여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하의 성심을 곡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죄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그제야 혼자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워진 '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하, 하지만 전하께서는 어찌 일개 죄인에게 사인검을 내리셨단 말이오...?"


"난들 알겠소?"


금부도사가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장'도 할 말이 없었기에 사인검을 도로 검집에 꽂고 목함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긴 '장'은 금부도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 밖에 있는 군사들은 다 뭐요? 사인검을 가져다주는데 저 많은 병력들을 대동했을 리는 없지 않소?"


"아, 저 군사들 말이오?"


금부도사는 잠시 싸늘하게 웃더니 명령을 내렸다.


"추포해라!"


"아,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이, 이게 무슨...커헉!"


놀랍게도 비명소리의 주인들은 모두 이제껏 '장'에게 온갖 모욕을 줬던 하인과 감시병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말 그대로 방심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포승줄에 꽁꽁 묶인 하인과 감시병들은 무릎 꿇려졌다.


"나, 나리! 왜 이러십니까요? 쇤네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요!"


"금부도사 나리! 소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


하인과 감시병들이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지만 금부도사는 그들을 싸늘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닥쳐라! 네놈들이 사사로이 죄인을 핍박하고 모욕하였음을 전하께서 모르셨을 줄 아느냐? 너희의 본분은 죄인을 보살피고 감시하는 것이거늘 이를 어기고 멋대로 죄인을 겁박하였으니 어찌 그 죄가 가볍다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제 내륙으로 압송되어 중벌을 받게 될 것이니 그리 알라!"


"나, 나리! 용서해 주십시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요!"


"나리! 잘못했사옵니다, 나리! 부디 선처를...!"


안색이 창백해진 하인과 감시병들이 애원했지만 금부도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손짓을 했고, 병사들이 다가와 그들을 거칠게 끌고 나갔다.


"......"


'장'은 이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그에게 온갖 수모를 주던 자들이 벌을 받는다니 통쾌한 마음이 들 법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상황이 워낙 급속도로 돌아갔기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있었던 상황들은 다음 순간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방님!"


"부인...!"


병사들 사이에서 아내 한씨가 달려나오자 '장'은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오랜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크흠!"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금부도사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과 한씨는 서로 떨어졌다.


"이, 이건 대체...?"


'장'이 말을 끝맺지를 못하자 금부도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전하께서 친히 하교하시기를 무릇 부부는 인륜지대사로 맺어진 인연이니 서로 찢어 놓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하셨소이다. 또한 죄인들을 따로따로 떨어뜨려 놓는 것보단 두 사람을 한 곳에 모아놓고 감시토록 하는 것이 낫다고도 하셨고 말이오."


"그럼 저 많은 군사들을 대동했던 이유가..."


"그렇소. 감시의 본분을 망각하고 월권을 범한 자들을 추포해갈 목적도 있었지만 그대의 내자를 호송하는데도 그만큼의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오."


"오오, 주상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감격한 '장'이 도성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장'이 몸을 일으키는데 금부도사가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건네줬다.


"주상 전하께서 쓰신 친필 서신이오."


'장'이 급히 받아들고 서신을 열어보려 했지만 금부도사가 제지했다.


"지금은 안되오. 나중에 사람이 없을 때 뜯어보시구려."


"알겠소..."


'장'이 서신을 갈무리해 품 속에 넣자 금부도사는 돌아서며 말했다.


"그대들의 시중을 들어 줄 시종과 감시병들이 새로 배치되었으니 전과 같은 고초는 없을 것이오."


"정말...고맙소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전하의 어명을 받잡았을 뿐. 일개 죄인에게 이런 은사를 베풀어주도록 하신 건 주상 전하이시니 평생 전하께 감사드리며 사시오. 전하께서 이토록 후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주제넘는 짓을 벌여 목숨을 재촉하지 말라는 말이외다."


잠시 멈춰서서 돌아보는 금부도사의 눈초리가 워낙 살벌했기에 '장'은 차마 대답조차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킨 채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금부도사와 병사들이 모두 떠난 뒤 '장'과 한씨는 방에 들어가 다시금 서로를 껴안았다.


"부인, 그간 별고 없으셨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방님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소첩은 괜찮사옵니다. 서방님이야말로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마다. 이렇게 부인을 다시 만나니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오!"


꿈에서도 그리던 아내와 재회한 '장'은 그간 겪어왔던 고통들이 말끔히 씻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시 대상이 두 사람으로 늘어나면서 '장'의 집 밖은 전보다 배로 많은 병력들이 물샐 틈 없이 배치되었지만 애초에 눈밖에 날 짓을 할 생각이 없었던 '장'은 그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회포를 푸느라 바쁠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만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또 없었다. 혼자 있었을 때는 하루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갔는데 아내와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먼 길을 이동해오느라 지쳤는지 아내 한씨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피식 웃은 '장'은 이부자리를 펴고 아내를 뉘였다.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아내를 바라보던 '장'은 조용히 옆방으로 가서 촛불을 켜고 낮에 금부도사가 건네줬던 금상의 친필서한을 펼쳐 들었다.


[사촌은 보시오. 이제는 더 이상 그대를 내 사촌이자 왕가의 일원이라 부르는 것이 불가하게 되었으나, 골육지정(骨肉之情)이 어찌 그리 간단히 끊어지겠소. 하여 오늘만은 내 그대를 사촌이라 부르고자 하오.]


아버지 문종을 빼닮은 수려한 필체로 쓰여진 이홍위의 친필을 읽던 '장'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금상께서는...아직도 이 역적의 자식을 가족으로 여겨주시는구나...'


[얼마 전 도성에 큰 변고가 있었소이다. 구구절절한 내막을 굳이 적진 않겠으나 무고한 그대를 연루시키려는 사특한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려드리리다. 다행히 놈들을 즉시 추포하여 역모가 미수에 그친 바. 그대를 비롯한 사촌들과 사촌형수(한씨)에게 화가 미치는 걸 막을 수 있었으니 가히 열성조들이 도우심이라 아니 할 수 없더이다. 하나 이를 두고 조야에서 온갖 뒷공론들이 무성했기에 혹여 이를 빌미로 그대들을 핍박하는 무리들이 나오지 않을까 근심하여 몰래 탐문토록 하였소. 과연 부정한 마음을 먹은 것들이 역적을 단죄하겠답시고 그대를 감시하라는 본분을 악용해 사사로이 만행을 벌임을 알 수 있었으니 스스로 의로운 척 하는 그 위선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하기 이를 데 없더이다.]


'그런 일도 있었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천길 갈 뻔 했구나!'


홍달손이 음모를 꾸몄었던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장'은 안색이 새파래졌으나,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와 가족들이 연루될 뻔한 모종의 사건을 이홍위가 막았다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금상께서 왜 금부도사에게 병사들까지 대동하게 시키셨는지 이제 알겠구나.'


홍달손의 모반 시도를 겪은 직후 '장'과 그 가족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신하들의 요구는 손수 홍달손을 참수한 이홍위가 엄포를 놓았던 덕에 사그라들긴 했지만, 뒤에서는 아직도 '유'의 후손들을 멸족시킬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이홍위는 '유'의 자식들이 유배된 장소에 몰래 사람들을 보내 혹여나 해꼬지하려는 자들이 있는지 틈틈이 조사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하인들과 감시병들의 '장'을 괴롭히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음을 파악했던 것이다.


[사촌형수는 그간 개성에 유배되어 있었으나 이제 사촌의 곁에 보내도록 하겠으니 부디 백년해로토록 하시구려. 그대의 아우 황은 다행히 시종의 보살핌 덕에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혼자서 옷도 잘 갈아입는다고 하오. 누이 역시 잔병치레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사촌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누이동생과 이제 3살이 된 동생 '황'의 소식까지 알게 된 '장'은 동생들이 무사함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외딴 섬에 유배되어 바깥 소식조차 모른 채 동생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건만 이홍위가 알게 모르게 그들을 보살펴 주고 있었음을 알게 된 '장'은 감격과 서글픔이 뒤섞였다.


'아버지는 금상을 상대로 찬탈을 도모한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으려 했거늘 금상께서는 이토록 정을 베풀어주시니 참으로 망극하옵고, 참으로 부끄럽구나...'


손으로 눈물을 훔친 '장'은 마저 편지를 읽어내려 갔다.


[사촌. 우리가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으나 나와 그대 모두 세종대왕의 손자올시다. 나중에 죽어 열성조들의 앞에 나아가 이 일을 고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질 따름이오. 비록 그대와 동생들을 복권시켜주진 못하겠으나 최소한 그대들이 조정의 일로 화를 입지 않고 천수를 누릴 수 있게끔 지켜주는 걸로 나름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오. 그러니 그대도 마음을 졸일 것 없이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하시오. 하고픈 말은 많으나 고작 글줄 몇 자로 어찌 이 가슴아픈 마음을 다 전할 수 있겠소? 그저 그대가 내 뜻을 알아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목이 멘 '장'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처연하게 웃었다. 편지를 접으려던 '장'은 문득 작게 접혀 겹쳐진 또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하고 펼쳐들었다.


[이 말을 잊을 뻔 했구려. 내 금부도사를 통해 사인검 한 자루를 내리도록 하겠소이다. 사인검은 본디 삿된 것을 물리치는 순양의 검이니 이는 그대에게 닥칠 위협들로부터 그대를 지켜 줄 좋은 수단이 될 것이오. 내 특별히 칼자루 뒷면에 영험한 주문을 하나 새기게 했는데 경상도와 거제의 모든 관원들에게 그에 대해 따로 언질을 해놓았으니 만일 누군가가 그대를 핍박하려 들거든 그 사인검을 보이도록 하시오. 십중팔구 그대에게 감히 해를 끼치지 못하고 물러갈 것이외다.]


"아...!"


편지를 내려놓고, 옆에 뒀던 사인검을 집어든 '장'은 칼자루 뒷면을 보자마자 짧은 탄성을 흘렸다.


칼자루 뒷면에는 단 두 글자가 쓰여있었을 뿐이었다.


원명(原明).


이제는 누구도 불러줄 이가 없게 된 '장'의 자였다.


'장', 아니, 오늘 하루만은 이홍위의 윤허를 받아 잠시나마 이장으로 돌아온 그는 책상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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