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로 하여금 여진족들에게 정음을 가르치도록 하자는 탄피대사의 주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당장 이방과 본인부터가 독실한 불교도였고, 이징옥을 비롯한 함길도의 장수진들도 본인들이 직접 불교를 신봉하는 건 아니었지만 부하들의 상당수가 불교 신자들이었던만큼 종교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한 편이었다. 피가 튀기고 살이 찢어지는 전장을 누비다보면 사람은 은연중에 마음 둘 곳을 찾기 마련이었고, 종교를 통해서라도 군사들의 사기를 가다듬을 수 있다면 굳이 배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변경의 여진족들 상당수가 믿는 종교가 바로 불교가 아니던가. 불교를 앞세워 여진족들을 회유할 수 있다면 해볼만한 시도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탄피대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숙주가 극력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라의 대업에 불씨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신숙주는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떠나버렸고, 결국 회의는 잠정 중단되고 말았다.
"대사,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시구려. 거구 선생도 유자이다 보니 불교를 활용하자는 것에 거북함을 느껴서 그런 것이지, 결코 대사에게 사감이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닐거요."
혹시라도 탄피대사가 무안해할까봐 이방과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다행히 탄피대사는 별로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하하, 소승은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소승이 승려들을 내세우자고 주장했을 때부터 이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으니까요."
탄피대사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자 이방과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거구 선생이 반발할 것을 알았다면 굳이 그 자리에서 얘기할 필요가 있었겠소? 나와 따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더라면 순전히 내 주장인 것처럼 거구 선생을 납득시킬 수도 있었을 터인데, 어찌 대사께서는 스스로 미움받는 역할을 자처한 것이오?"
이방과가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안 탄피대사는 따뜻한 눈길로 이방과와 시선을 마주했다.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하겠습니까? 거친 돌밭과도 같고, 가시밭길과도 같으며,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고산을 헤쳐나가는 것과도 같은 고난들이 수반될 것인데 오로지 인심을 지팡이 삼아 짚고 나아가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편중됨이 없이 굳건히 중심을 지키도록 하소서."
"대사..."
이방과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만약 그가 일방적으로 불교를 활용하자고 주장한다면 신숙주의 불만과 원망을 살 것이니, 이를 막기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고자 나섰다는 탄피대사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이방과의 표정을 보고 탄피대사는 싱긋 웃었다.
"너무 그렇게 미안한 얼굴을 하진 마시지요. 전하를 섬기는 신하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이니까요. 만약 입장이 달랐더라면 거구 선생도 마땅히 저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손에 쥔 염주를 굴리며 탄피대사는 쾌활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건 소승과 거구 선생 모두가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한 셈이지요. 전하의 대업을 도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넘어야 할 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이방과가 물었지만 탄피대사는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짓기만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소승에게 거구 선생을 설득시킬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괜찮으시겠소?"
이방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폈지만, 탄피대사는 여전히 밝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래 봬도 세 치 혀를 놀리는 것에는 제법 자신이 있습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겠나이다."
한참동안 말없이 탄피대사와 시선을 마주하던 이방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방과의 군막에서 물러나온 탄피대사는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는 성효옥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녀를 불렀다.
"낭자! 우리 잠시 얘기 좀 합시다!"
"아, 대사님..."
힘없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성효옥은 우울한 표정으로 탄피대사를 돌아보았다.
"아니, 낭자.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탄피대사가 걱정스럽게 묻자 성효옥은 평상시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대사님도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제가 그만 실수로 전하 앞에서 패관들을 즐겨읽는다고 당당하게도 발설했던 것을요. 이제껏 부모님께도 비밀로 하고 있었던 은밀한 취미였는데 하필 대상왕 전하의 안전에서, 그것도 제목까지 큰 목소리로 좔좔 읊어댔으니...이제 다 끝났어요! 전하께서는 분명 절 경박하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 게 틀림없다구요! 이제 시집가긴 다 글렀어..."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울먹거리는 성효옥의 한탄을 들은 탄피대사는 허허 웃으며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낭자의 얼굴에 그렇게 수심이 깊은 거였군요."
성효옥이 말없이 훌쩍거리자 탄피대사는 품 속에서 곱게 접힌 천조각을 꺼내 건네줬다.
"위로가 될 진 모르겠으나 이 일로 전하께서 낭자를 꺼려하시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시는데요...?"
탄피대사가 건넨 천조각으로 눈물을 닦던 성효옥은 뾰루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탄피대사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승이 전하를 곁에서 뫼신 지는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젠 나름 용안만 보고도 그 속내를 짚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때 전하께서는 오히려 낭자의 진솔한 면모를 아시고 분명 기뻐하는 기색이셨습니다."
"그랬...나요...?"
성효옥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아무리 회상해봐도 그녀가 패관의 제목들을 나열할 때 이방과가 지었던 표정은 황당함 그 자체였던 걸로밖에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탄피대사가 킬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시지 못한 분이시니까요. 평상시에는 쓸데없이 정직하시지만, 정작 솔직해야 될 때는 티를 못 내시는 거죠. 그분을 뫼시는 입장에서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 꽤 피곤한 성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말씀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성효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탄피대사는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뒤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하물며 이건 욕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진술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누가 소승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 앞에서 대상왕 전하를 모독하는 건 중죄 중의 중죄입니다!"
"어이쿠! 이 우매한 중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시지요."
탄피대사의 위로가 통했는지 내내 우울하던 성효옥의 표정은 약간 밝아졌고, 거짓으로 화내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칠 정도로 기분도 회복된 듯 했다. 탄피대사도 마찬가지로 잘못을 비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받아줬다.
"아무튼 소승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낭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낭자를 신경쓰고 계시는 듯 합니다. 다만 어째선지 이를 겉으로 드러내질 않으셔서 낭자에게 무심한 듯 보이시는 거지. 그 이유야 뭐 나름 짐작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이건 소승이 관여할 바가 아니니 제 입으로 말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소승이 낭자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앞으로도 전하께 솔직한 모습들을 많이 보이라는 겁니다."
"네?"
성효옥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탄피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억지로 만들어낸 기품있는 요조숙녀의 탈을 벗고 낭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하께는 더 효과가 있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럼 언젠가는 전하께서도 낭자의 진심을 알아주실 겁니다."
하지만 성효옥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상하다? 방금 그 말,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순간 탄피대사가 움찔 했지만 이미 생각의 바다에 잠긴 성효옥은 이를 눈치채지 못 했고, 기어이 떠올리고자 했던 기억을 찾아내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아, 맞아! 그거였어! <내 안사람이 이렇게 양수척일 리가 없어>의 주역으로 나오는 여인에게 지나가던 승려가 해준 조언이었는데?! 대사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아니, 저, 그게, 낭자. 이건 순전히 우연..."
탄피대사가 황급히 변명을 하려 했지만 이미 한 번 촉이 선 성효옥은 먹이를 포착하고 급강하하는 매와도 같은 눈길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뇨! 대사님께서 정녕 그 패관의 내용을 모르신다면 그게 뭐냐고 물어보셨어야 맞지, 이렇게 우연이라고 잡아떼시진 않았을 거예요! 빨리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어서욧!"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어서 성효옥이 마치 다연발로 발사되는 신기전처럼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으며 탄피대사를 추궁하고 있었고, 이미 시작부터 헛점을 보이고 말았던 탄피대사는 끝끝내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하아...좋습니다. 사실대로 털어놓지요. 사실...낭자께서 보시는 패관들은...다 소승이 썼던 겁니다."
"역시! ...네?"
처음엔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하던 성효옥이었지만, 이내 설마 진짜로 들어맞은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근엄하고 진중한(물론 가끔씩 눈 돌아가서 본색을 드러내면 이만한 왈패도 또 없지만) 탄피대사가 이런 경박한 내용의 패관들을 썼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탄피대사가 잔뜩 움츠러든 채 성효옥의 시선을 피하며 나직하게 자백(?)하기 시작했다.
"소승의 소싯적, 그러니까 출가하기 전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패관이라도 써서 팔고자 하여 이것저것 썼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 당시 소승은 그때까지의 패관 작품들의 틀을 벗어나 오직 나만의 색채가 녹아든 걸작을 내놓겠다는 나름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경도 막연하게 삼한 땅이나 중원 모처를 무대로 삼는 걸 거부하고 이천하(異天下), 용궁 등 별천지에서 벌어지는 활극과 모험, 사랑을 그리고자 했던 거죠."
일순 젊은 시절의 활기를 떠올렸는지 초롱초롱 빛나던 탄피대사의 눈동자는 다시금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순 없는 법이었는지 소승의 패관들은 인기가 저조하기만 했고, 결국 소승은 절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썼던 작품들은 책장수 아무개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겨버리고 아예 잊고 살았었는데, 설마 그것들이 돌고 돌아 낭자에게까지 흘러갔을 줄은..."
젊은 날의 치태를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탄피대사는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성효옥의 반응은 달랐다.
"네? 인기가 없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대사님께서 모르시나 본데, 대사님이 쓰셨던 작품들은 지금 한양의 양반가 처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인기가 엄청 많아요! 애초에 제가 대사님의 패관 작품들을 정음으로 번역했던 것도 한문을 읽을 줄 모르는 친구들에게 부탁받고 한 일이었는걸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깐요! 요즘 같았으면 대사님은 으리으리한 기와집 한 채 장만하시고도 남으셨을 걸요?"
"하하...그, 그렇...군요..."
'그래! 역시 난 틀리지 않았던 거야...!'
당시 자신의 작품이 망작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선구적인 문학 세계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안목을 갖춘 자들이 없었던 것뿐이었음을 깨달은 탄피대사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사님,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까 저와 하실 얘기가 있다고 하셨었지 않나요?"
흐뭇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미소를 짓고 있던 탄피대사는 성효옥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를 불러세웠던 당초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네. 맞습니다. 원래는 낭자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건데 이야기가 많이 겉돌게 되었군요. 이거 부끄럽게 됐습니다, 하하하!"
탄피대사가 멋쩍게 웃자 성효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구요?"
"예. 실은 거구 선생, 그러니까 신숙주 공을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 말이지요."
탄피대사의 말을 들은 성효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바느질보다는 무예를, 부녀자의 덕목을 다룬 경서보다는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과 모험을 다루는 패관 문학을 선호하는 성효옥이었지만, 그녀 역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불교를 전조 고려가 망하는데 일조한 거악으로 단정짓고 증오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신숙주가 아버지 성삼문과 더불어 강경 억불파의 선두에 서 있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성효옥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전..."
소위 '존경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부탁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성효옥은 탄피대사의 부탁을 에둘러 거절하려 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만약 낭자가 소승을 도와주신다면 중도에 끊겼던 미완작들을 모두 완결까지 써주는 걸로..."
"자, 가요! 희현당, 아니, 거구 아저씨의 처소로 가면 되는 거죠?"
말을 마치자마자 어느새 저만치로 달려나간 성효옥의 뒷모습을 보며 탄피대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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