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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반도 최초의 철기 생산이 농업혁명을 일으키다.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0.07 11:02:14
조회 2560 추천 17 댓글 24
														



이전 연재글에서 한반도의 지리, 기후적 여건 때문에 철제 농기구가 도입되어야만 본격적인 농업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목제 농기구로 경작가능한 하천변의 충적지형은 장마철에 범람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안정적인 농업경영이 발전하기에 어려웠고, 잔돌과 암석이 많은 산자락의 구릉지형에 경작지를 개척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가 본격적인 농업사회로 나아가는데 매우 중요했고, 때문에 철제 농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한반도의 농업경영은 어떻게 변화했을지 살펴봅시다.



한반도에의 철기의 전래, 생산, 유통


한반도에 최초로 철기가 전래된 것은 중국으로부터입니다. 중국에서 철기의 최초 생산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전환기에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로,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까지 제작되기 시작됩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전국시대 국가인 연(燕)나라와의 교역과 접촉을 통해서 최초로 한반도로 철기가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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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 유적에서 출토된 명도전과 철제 농기구------


평안북도 용연동 유적에서는 10점의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2점은 철제 창이고 나머지는 모두 농기구였습니다. 농기구에는 철제 호미와 괭이가 있으며 수확용 낫과 주조로 제작된 철부(鐵斧)가 있습니다. 철부는 도끼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괭이나 따비같은 농기구, 또는 가공용 철재료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철기가 연나라와의 교역을 통해서 거래된 것임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연나라에서 주조된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으로 독특한 칼 모양의 청동제 화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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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철기 문화의 확산과정----


BC 4세기경에는 연나라 지역에 국한되던 철기는 BC 3세기경이 되면 만주의 요녕 지역 일대로 확산됩니다. 명도전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연나라와의 교역은 남부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것 같으나 유사한 철기는 기원전 3~2세기 초에는 전라도나 충청도 서남부까지 확산됩니다.


이후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동남부에 이르기까지 철기의 교역이 확대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다만 영남지역에서도 전국시대 연나라 계통의 철기가 출토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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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사천시 늑도 유적에서 출토된 진나라 반량전과 한나라의 오수전----


경상남도 사천시 늑도유적은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철기의 생산이 이루어진 유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늑도유적에서는 명도전이 아닌 진나라 시대의 반량전이나 한나라의 오수전이 출토되어 한나라 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철기가 유입되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철기의 가공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철기의 생산유적으로는 사천의 늑도, 부산 내성, 김해 구산동, 경주 황성동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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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도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한반도 남부의 초기 철기 제작은 제작이라기보다는 수리나 재활용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련 유구는 거주지 내에서 발견되어 아직 전업화된 수준이 아니고 저온으로 단조작업을 통해 파손된 철기를 재활용하거나 수리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의 철기생산유구가 발견된 늑도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을 조사한 결과 농업기반이 전혀 없음에도 C3식물, 벼, 보리, 밀, 콩, 팥등의 작물을 섭취한 것이 확인됩니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서 곡물을 획득해서 생계경제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늑도유적은 해상교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해안집단이 존재했고 이를 통해서 철기기술이 전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러한 생산공정이 보다 전문화되어 단조작업은 주거지와 분리된 독립 시설에서 이루어지고 과급을 통해 온도를 올리기 위한 송풍관과 철재가 발견됩니다. 이는 보다 전문화된 철기생산집단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철기의 재활용 수준에서는 벗어났지만 철기의 원재료인 철재(鐵材), 즉 철광석을 재련하여 가공한 원재료가 한반도 북부 또는 한나라 군현에서 생산되어 한반도 동남부까지 유통된 후에 가공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BC 2~1세기 동안 교역을 통해 요동에서 생산된 철기와 철재가 한반도 남부로 유입되면서 철기의 수리 및 재활용과 2차가공 수준으로 이루어지던 철기생산기술은 BC 1세기경 어느 시점에 변화를 맞이합니다.


BC 1세기로 추측되는 울산 달천유적에서는 최초로 철광석을 채광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철광석의 채광이 시작된다는 것은 드디어 철재를 생산하는 제련공정이 한반도 남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제련의 흔적 자체는 이시기에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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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광석을 채광하고 제련하여 본격적인 철기생산이 시작된 흔적은 3세기가 되면 급격히 확산됩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진한과 변한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제철과 철기생산이 본격화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3~4세기 철기생산유적에서는 철의 생산이 취락단위로 전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광석을 제련한 철재를 공급받아서 중간소재나 철제품, 무기나 농기구를 생산하는 분업화된 전문 취락도 나타납니다.


또한 이러한 제철 및 철기생산취락에 숯을 공급하기 위해 목탄을 제작하던 취락유구가 주변에 나타나죠. 각 취락간의 교역을 통해서 지역 전체의 철기 생산성이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취락단위의 생산공정의 분업화는 한반도 동남부의 철의 생산과 가공, 유통이 자급자족적이지 않고 교환을 통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광역으로 유통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줍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동남부는 요동지역에서 철을 수입하는 신세에서 한반도 전역으로 철을 수출하는 공급자로 변모하게 됩니다.


변한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 사람들도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鐵)로 이루어지는데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한나라의 두 군현(낙랑과 대방)에도 공급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이러한 철의 생산은 3세기의 정사 삼국지 문헌기록으로도 확인됩니다.


변한(弁辰), 즉 한반도의 동남해안의 늑도, 부산등에서는 야요이토기를 비롯한 왜인의 흔적이 나타나므로 한반도 동남부에서 생산된 철기가 변한 지역의 해운로를 통해서 한반도 서부와 북부, 일본과 한나라 군현에 이르기까지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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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판상철부(板狀鐵斧),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초기에는 철재는 도끼 모양으로 가공되어 농기구나 공구로 사용됩니다. 아마도 철기를 제작하는 소재용으로도 사용되었으리라 보이지며 이를 판상철부(板狀鐵斧)라고 합니다. 무덤에 상당량 부장되죠. 취락 단위의 분업화가 확산되는 4세기부터는 판상철부는 철재소재에 충실한 덩이쇠인 철정(鐵錠)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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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도항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정(鐵錠), 가야 권역이다.----


유통되거나 부장되는 철제 소재가 판상철부에서 철정(鐵錠)으로 바뀌는 것은 아마도 철재를 가공하는 전문취락의 분업화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철재가 유통되는 한반도와 일본 각지에 단야공정이 보급된 결과로 보입니다. 재료를 전달하면 가공하여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제작하게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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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남부에서 주로 생산된 이러한 철재는 동남부를 중심으로 한반도 서부와 일본에서도 출토됩니다. 한반도 동남부의 철재가 광역으로 유통되었다는거죠. 이는 한반도 남부의 철제 농기구 보급에 한반도 동남부의 철기생산의 전문화와 분업화, 교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하게 만듭니다.


초기 한반도 남부의 철기의 전래는 남부와의 직접적 교역을 차단하던 고조선이 멸망한 후 요녕지방과 한나라와의 교역을 통해서 촉진됩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철제 농기구가 한반도에 보급되기에는 충분치 않았을 겁니다. 농업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직접 철을 채광하고, 제련하여, 생산하는 전업적이고 전문화된 생산과 유통체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Man Makes Himself"에서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공업자들의 이동성이 얼마나 빠르게 기술을 확산시켰는지 설명합니다.


청동기시대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가 만들어지고 장거리 교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공업자들은 교역망을 통해 운송되는 상품과 마찬가지로 높은 수준의 이동성(Mobility)를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서아시아(orient) 일대에서 숙련노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이동성이 높으며 이는 오랜 전통이라고 설명합니다. 수공업자는 자신의 기술을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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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00년대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수공업자들----


기원전 수천년 전에 도시가 등장하고 교역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공업자들은 직접 식량을 생산해야 하는 의무와 토지에 묶여있던 제약에서 풀려나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고든 차일드는 그들이 지역국가에 확고하게 소속되지 않고 움직였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서아시아에서 매우 빠르게 기술이 확산되었던 이유는 수공업자들의 높은 수준의 이동성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죠.


이런 현상은 한반도 동남부의 고대 설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삼국유사, 석탈해의 설화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4대 임금 석탈해(昔脫解)는 배를 타고 가락국(가야)에 도착했다가 경주의 동쪽 아진포(阿珎浦)에 도착했다고 설명됩니다. 그는 자신의 집안이 본래 대장장이였다고 소개하죠.

이러한 설화는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유사합니다. 수로왕 역시 변한 지역의 재지세력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며, 석탈해와 충돌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의 성은 쇠를 의미하는 김(金)씨로 이어지며, 그 나라 이름인 금관국(金官)이란 명칭 역시 쇠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1~3세기경의 한반도 동남부의 제철 및 철기생산기술의 발전은 해운교역망을 통해 외부에서 유입된 이동성이 높은 전문기술자가 외부인으로서 유입되고 심지어 재지사회의 지도자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결과일런지도 모릅니다.


이미 기원전에 한반도 동남부로 철기와 철재가 교역을 통해 유입되고 있었고, 이러한 교역로를 통해 철의 생산 및 가공기술을 가진 수공업자가 한나라나 한반도 북부에서 이동해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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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의 철광석 산지----


원래 철이 풍부했던 영남지방에서 철의 채광과 제련이 시작되고,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전문적 수공업 취락이 등장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철재와 철기를 공급하는 원천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역과 철기를 생산하는 동남해안의 소국들은 한반도 서부와 북부, 일본을 포함해 광역 교역을 통해서 곡물을 획득하고 그들이 생산하거나 교역을 통해 획득한 철재를 광범위하게 내다 팔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위치한 지역의 농업 잉여가 적더라도 교역의 범위를 넓힘으로서 이를 해소할 수 있다는거죠.


규모는 훨씬 작지만 고대 지중해에서 볼 수 있는 일이 고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남부에 최초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수공업체제가 등장하고 철기를 대량으로 생산함으로서 한반도 남부의 농업생산력 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만들었죠.


3~4세기에 완전히 꽃피기 시작한 한반도에서의 철기생산과 광역유통은 한반도 농업사회에 이전과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농업의 중심지가 하천변 충적지에서 산자락의 구릉지로 이동하게 되는거죠.



하천변 충적지에서 산자락의 구릉지로의 경작중심지 이동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가 즉위하다.(기원전 57년 4월 15일)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초기 6마을은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았다(分居山谷之間)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거주지가 하천변 충적지가 아니라 산의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거죠. 알천의 양산촌을 제외하고는 다 여러 산을 거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료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경주와 같이 분지의 중심지에 신라의 초기 촌락들이 입지한게 아니라 주변의 구릉지에 분산되어있다가 점차 분지 중심부의 평지로 진출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해석이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된건 아닙니다. 경주 황성동유적처럼 1~4세기경 유적이지만 경주 하천변에 위치한 유적들이 다수 존재하거든요. 하지만 가야 지역에서는 보다 뚜렷하게 취락이 구릉지를 중심으로 발달한게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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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기 가야권역 취락의 입지유형---


가야권역의 취락 입지는 구릉 정산부나 사면부에서 주로 시작해서 3세기 이후에 구릉 말단부나 평지에 가깝게 확대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취락의 입지는 하천 유역의 범람원보다는 산지와 구릉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취락이 주로 인접한 농경지의 입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때 하천유역의 충적지에 주로 농경지를 경작한 청동기 시대에 비해서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두드러지게 된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3~6세기 취락에서 구릉지를 중심으로 입지가 형성된다는 것은 경작의 중심지가 하천변 충적지에서 구릉지, 즉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점차 옮겨갔음을 알려줍니다.


물론 실제 경작유구는 이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야권역에서 발견된 고대의 경작유구는 대부분 하천 주변이나 골짜기 일원의 충적지에서 발견됩니다. 사실 삼국시대의 경작유구, 즉 당시의 경작지 유적의 경우 충적지가 여전히 많이 발견됩니다.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목재 농기구는 다량 사용되고 있었고, 범람으로 인해 시비법의 필요 없이 비옥한 충적지에서 경작지를 만드는 것은 노동력 부하가 적기 때문에 여전히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경작지가 안정적이지 않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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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삼국시대 경작유구는 하천 범람으로 매몰된 상태로 확인됩니다. 청동기시대와 마찬가지로 하천변의 충적지는 한반도 남부의 기후환경을 고려할 때 굉장히 불안정한 경작지였습니다. 단순히 한해 농사를 실패하는데 끝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거나, 인근의 정착지조차도 파괴될 우려가 있는거죠.


발견된 고대 경작유구의 입지가 구릉지나 산자락이 아니라고 해서 실제 당시 경작지가 여전히 충적지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고학자 김도헌은 "가야인의 생업기술"에서 실제로는 주로 구릉지에 더 많은 경작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삼국시대 취락의 입지가 주로 구릉지에 위치해있으며,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가야의 마을 유적 역시 주로 구릉지에서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경작지는 구릉지에 주로 개간되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김도헌에 따르면 구릉지의 고대 경작유구가 발굴되지 않는 것은 경사면에 만들어진 밭의 경우, 강우에 의한 침식과 수목의 생장 등으로 교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홍수로 매몰되어 충적토가 퇴적된 경우에는 경작유구가 잘 남아있지만 구릉지에 더 이상 경작되지 않은 고대 경작지는 그 흔적을 남기기 어려웠을 거란 이야기죠.


4세기 이후부터 한반도에서 소나 말을 사용한 축력농경의 흔적이 경작유구에서 확인됩니다. 청동기 시대와 달리 이랑과 고랑이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인력으로 괭이나 따비 등으로 경작한 경우에는 이랑과 고랑이 불규칙해서 구분이 가능합니다.


철제 농기구의 도입으로 인해서 자갈이나 잔돌이 많은 구릉지에서도 쟁기(犂)를 사용하여 축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보다 깊게 고랑을 파고 밭의 두둑을 높이 쌓을 수 있게 되면서 여름장마에 의한 침수의 우려도 감소합니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고려 전기까지 이러한 양상은 계속됩니다.


고려의 영토[封地]는 동해에 닿아 있으며,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산길이 험하고 산이 높고 험하며 평지가 적다. 그 때문에 농사를 산간에서 많이 짓는데,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개간하는데 힘을 많이 들인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풍속[雜俗] 농업[種蓺]


송나라 사신인 서긍(徐兢, 1091∼1153)은 평지가 적어서 산간에 농사를 많이 지으며 멀리서 보면 사다리(梯)나 비탈길(磴)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저는 이 묘사가 평지가 적어서보다는 계곡물을 따라서 주로 형성되는 농지를 사다리로 이해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반도 농업에서 이 계곡물이야말로 대형하천보다 훨씬 중요한 농업용수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 농업경영의 중심지가 하천변 충적지에서 산자락 구릉지로 이동해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계곡물을 이용하는 수리시설에 있었습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의 핵심 수리시설 제언(堤堰)


삼국시대에 들어서 이전의 농업과 가장 큰 차이는 수리시설의 개발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수리시설이 단순히 흐르는 물을 넘치게 해서 공급하는데 그쳤다면, 삼국시대에 들어가면 가뭄에 대비해서 물을 저장하고, 갈수기가 되면 공급할 수 있게 되는 수준으로 발전합니다.


자연환경을 받아들이는 농업에서, 이를 노동과 자본의 투자를 통해 극복하는 농업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셈이죠.


문제는 이러한 물의 저장이 하천변 충적지나 충적평야지대에서는 매우 까다롭다는겁니다.


하천변의 평지 지형에서 저수지를 만든다고 가정해봅시다. 저장하는 물의 양을 늘이려면 물의 깊이를 깊게 하거나, 저수지의 면적을 늘려야 합니다.


근데 평야지대에서는 경작지에 흘려넣기 위해서는 땅을 파서 물을 깊숙히 보관할 수 없습니다. 위치가 높아야 농지로 흘려보낼 수 있잖습니까? 그렇다고 저수지 벽을 높이 쌓아서 막대한 물을 보관할수도 없죠. 무너지기 쉬우니까요.


그럼 낮은 제방을 길게 둘러쳐서 물막이를 해야겠죠? 그러면 경작지 상당부분을 침수시키고 저수지가 차지하게 될겁니다. 긴 제방을 높고 두텁게 쌓기 어려우니까 한번 무너지면 저수지에 보관한 물도 날아갈겁니다.


벽골제 같은 경우가 이런 용도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벽골제가 저수지냐 방조제냐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죠.


하천변의 충적지나 저습지는 한반도 기후를 고려할 때 아주 까다로운 경작지입니다. 장마때는 물이 너무 많아서 범람이 위험하고, 가물때는 물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반도 같은 지형에서는 주로 계곡의 개천물이 흐르는 지역을 막아서 물을 저장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런 수리시설을 제언(堤堰)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댐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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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신라시대 저수지 청제(菁堤)----


삼국시대에는 수리시설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536년(법흥왕 23년)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러한 상당한 규모의 제언을 축조한바 있습니다. 한반도의 지형을 활용해서 상당한 규모의 수리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죠.


이런 수리시설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가장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농업용수였습니다. 간단한 보(湺)를 쌓는 것만으로도 계곡변에 논(水田)을 만들고 물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생산성이 높은 벼의 수전농업은 초기에는 수리시설 없이 하천변의 충적지나 범람원의 습지대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가뭄이 들거나 물이 부족할 때는 오히려 이런 지역에서는 물의 공급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물을 저장하기 어려우니까요.


결과적으로 수전농업의 발달은 산자락에 위치한 계곡의 계곡물을 중심으로 발달합니다. 이러한 지역의 개간에는 철제 농기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또한 수리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토목공사에서도 철제 도구는 필수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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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칭해지는 한반도에서 선호되는 전통적 입지조건은 한반도의 기후와 지리조건이라는 환경과 철제 농기구라는 물적자본에 의해 한반도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산자락의 경작지 개척뿐만 아니라 이후의 수리시설의 설치와 관리, 우경의 실시를 비롯한 전반적인 농업생산 과정에서 조선 후기까지 철제 농기구의 생산과 유통을 통한 공급은 농업생산력 발전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요소였습니다.



철제 농기구와 농업생산성, 그리고 권력


고대부터 구한말까지 한반도의 철제 농기구를 현재의 철제 농기구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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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따비로 밭을 가는 사진과 철제날---

고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한반도에서 사용된 농기구의 상당수는 주물로 제작되며, 현대적인 열처리를 거치거나 불순물의 제거가 잘 된 철제품이 아닙니다. 단조된 농기구 역시 불순물 함량이 높고 강철제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경작과정에서 아주 손쉽게 파손되며, 고대부터 지금까지 취락유구에서 잘 발견되지 않고 주로 매장지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사용과정에서 파손된 철제 농기구는 버려지는게 아니라 알뜰살뜰하게 재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근대 농기구의 높은 소모율 때문에 고대부터 구한말까지 한반도에서 철제 농기구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문헌기록과 고고학적인 증거는 적어도 조선후기 이전에는 농기구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태가 일반적이었음을 추측하게 해줍니다.


부족하다는 표현이 반복되는데다가 한반도에서는 조선 후기까지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전문화된 농기구 특산지와 대량 유통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3~6세기 한반도 동남부처럼 철재를 광범위하게 대량유통하는 사례는 더이상 확인되지 않습니다.


1936년, 역사학자 이청원(李淸源)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농촌에서 철제 농기구의 품질이 매우 조잡할 뿐 아니라 동리의 대장간에서 계절노동자가 겸업하는 가운데 생산되었으며, 가호당 농구의 수량도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러한 양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농민이 필요로 하는 철제 농기구를 충분한 수량만큼, 충분히 저렴하게 공급하기 어려웠다는거죠.


수요 없이는 공급도 없다고 주장하기에는 전근대 사회에서 한반도의 철제 농기구는 공급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과잉공급될 만큼 생산되지 못했으니까요.


철제 농기구를 생산하는 집단의 생산성,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구조는 농업생산력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철제 농기구의 공급부족은 더 많은 노동시간과 비효율을 야기하여 농업생산성을 악화시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고대사회에서 철제 농기구의 확보는 농업생산력을 강화시켜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만듭니다. 철제 농기구의 공급과 유통을 통제하는것은 고대사회에서 "권력의 장악"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철제품의 생산을 취락 단위로 분업화하고 교환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동남부 철기 생산과 광역유통의 원동력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철과 철기의 생산과정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기 어렵게 만들죠.


여기서 변한과 진한, 가야와 신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변한과 그 후계자 가야는 다원적인 생산 및 정치체제가 유지되고 교역을 주도하게 됩니다.

반면 진한, 그리고 신라는 독점적이고 국가주도적 생산과 서라벌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해나갑니다.


변한 사회에서는 경남 해안일대에 형성된 소국들이 하나의 교역체계로 통제하는 중심세력으 존재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209년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라(加羅, 아라가야 또는 금관가야)를 침공한 사건은 이 지역의 명확한 지배적 중심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교역이 매우 발달한 동남해안에 면한 변한 사회는 매우 다원적이고 결집되지 않은 느슨한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한과 그리고 후속된 가야의 철기생산체제는 하나의 세력이 생산체제를 독점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국과 소국, 취락과 취락 사이에서의 분업화된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러한 교역 중심의 경제체제는 하나의 단일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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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동 제철유적의 가마터---


이는 제철 및 철기생산 유적에서도 나타납니다. 대가야나 금관가야 등의 중심권역에서는 신라나 백제에서 나타나는 대규모 제철유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변한과 가야가 철재를 해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한 것은 확실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동남부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 제철유적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 황성동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생산체제의 차이는 교환에 기반해서 철과 철기를 생산하고 대외교역으로 이어지는 경제적인 이점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분열된 소국들을 단일한 지배체제 내에서 묶기 위해서 철기의 생산체제를 지배하에 넣고 주변에 재분배하여 국가의 성립으로 이어지는가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야가 신라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철기를 영토확장이나 농업에 투자하고 주변의 소국을 지배하는데 활용하지 않고 교역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고대국가로 전환하지 못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변한과 가야가 교역권을 독점하지 않고 해안의 다양한 소국들에 의해 교역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던 반면에, 사로국에서 시작한 신라는 주변 소국을 장악하고 중국과의 내륙 육로교역을 독점하는 등 보다 일원화된 지배체제를 발전시킵니다.


신라의 철기생산체제에서 경주 황성동 유적이나 밀양 금곡 제철유적과 같이 대규모로 집중화되고 여러 조업체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유적들은 고대국가 성립단계에서 국가에 의한 제철산업의 통제력을 강화시킨 결과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대규모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제철, 제련, 철기의 가공과 제작등 여러 공정이 하나의 제철유적에서 나타난다는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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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일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대 이전의 이러한 제철유적들은 도성지역이나 도성에 가까운 지역의 평지 지형에 집중적으로 조성됩니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소요되는 대량의 숯을 조달하는데 부적절하고 생산한 철기를 각지로 유통하는데 운송비가 증가합니다.


전문화되고 집중된 생산체제 자체는 분명 초기 철기생산체제에 비해 강점이 있지만 과도하게 집중할 경우 생산효율성이 감소합니다.


반면 통일국가가 성립된지 오래된 고려~조선의 제철유적은 산간 구릉부나 계곡에 집중적으로 분포합니다. 원료와 연료의 확보가 용이한 지역에 배치된거로 보입니다.


이는 관리와 통제의 용이성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제철시설을 강력한 통제하에 두는 것이 생산성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단거죠. 적어도 삼국시대까지는 말입니다.


신라가 진한의 소국 중 하나로서 진한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경주 황성동의 대규모 제철유적은 변한이나 가야와 달리 철기생산을 독점하고 이를 재분배하는 권한을 통해 신라의 고대국가로서의 형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을 겁니다.


반면 변한이나 가야의 다원적이고 교환을 통해 취락별로 분업화된 생산체제는 원료의 조달이나 생산성에 더 이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신라의 재분배체계에 비해서 국가통합의 원동력이 아닌 국가통합을 저해하는 장치로 작동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교역을 중심으로한 교환(Exchange)이 활성화된 다원적이고 상업이 발달한 변한과 가야는 국가주도적 재분배(Redistribution)를 통해 고대국가로 발전한 신라에게 최종적으로 체제경쟁에서 패배합니다. 오직 경제체제의 차이 때문에 패배했다곤 할 수 없지만 이후 한반도의 지배체제의 방향성이 결정되었죠.


마한, 진한, 변한의 원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까지 신라의 초기 국가주도형 재분배경제는 520년 법흥왕에 의해 율령(律令)이 반포되고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점점 강화되어갔으리라 보여집니다.


중국의 조용조체제는 아마도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신라에 점차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조용조체제의 흡수 이전에도 신라는 고유한 재분배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재차 발전시켜나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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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반포 이후인 6세기 중후반으로 추측되는 함안산성 출토 목간은 신라가 호적을 통해 각 지방의 주민들을 파악하고 인신지배체제를 구축하여 이들에게서 공납과 요역으로 노동력과 현물을 수취하는 체제를 정립해나갔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전에는 각 재지유력자를 매개로 위임되었던 인신지배가 호적의 문서화를 거치며 국가의 손아귀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피지배층에게서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수취하는 요역(徭役), 그리고 현물을 수취하는 공납(貢納)이 한반도에 정착하고, 국가가 철의 생산체제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철을 생산하고 철기를 가공하는 수공업자인 대장장이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1~3세기의 석탈해 설화에서 외부인으로서 재지사회에 환영받고 지배층으로 합류하던 전문기술자로서의 대장장이는 6세기 쯤에 가면 상당히 신분이 하락한 상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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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산성비와 남산신성비---


명활산성의 축성(551년)과 남산신성의 축성(591년)의 금석문 기록에서 대장장이로 추측되는 상층 장인인 장인(匠人)이나 장척(匠尺)은 축성을 위해 파견된 지방관이나 지역 유력자인 촌주(村主)보다는 낮지만 신라의 관등체계 중 지방민에게 수여한 외위(外位) 11관등 중 6, 7등급이나 10등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중앙 귀족의 경위(京位) 17관등에서 12, 16등급에 해당합니다.


7세기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강수(强首)는 골품이 6두품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수는 대장장이(冶家) 딸과 사귀다가 부모의 반대를 받게 되는데, 이때 대장장이의 딸을 미천한 사람(微者, 賤)이라고 묘사합니다. 6두품보단 낮지만 결혼하는 경우는 발생할 정도의 신분이란 말이죠.


대장장이는 이전보다는 신분이 하락했지만 재지유력자 수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전문기술이 가진 힘이었겠지요.


통일신라 시기의 관영수공업 체제가 구축되어 가면서 제철 및 철기생산자로서의 대장장이들은 초기 사회지배층에서 재지유력자 수준으로, 재지유력자에서 점점 낮은 신분으로 하락합니다. 고려시대까지 이르면 아예 유력자가 아니라 공상천례(工商賤隷)라고 묶여서 천시되는 존재가 되죠.


사실 철제 농기구의 생산성만 유지된다면 이러한 신분하락 자체는 농업생산력에 영향을 주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전근대 한반도에서 대장장이의 신분하락은 단순히 신분의 하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국가주도의 재분배체계 내에서 노동력을 수취하는 요역(徭役), 현물을 수취하는 공납(貢納)에 의해 철광석의 채광, 제련을 통한 철 소재의 생산, 철제 농기구의 가공과 국가주도의 유통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수행해야할 전문기술자의 지위가 하락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초기 철기의 생산이 시작되고 보급이 확산된 1~4세기와 달리 그들의 전문기술에 의한 노동력 투입의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고 요역징발의 대상자가 되어간다는겁니다.


초기 그들의 지위가 높았던 시절에는 국가의 재분배체계가 그들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겠지만 지위가 하락하게 되면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일방적인 수취관계로 전환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철제 농기구의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생산활동의 인센티브가 작아지고 민간영역에서의 투자는 감소해 영세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민간영역에서 제철 및 철기가공의 자본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유통이 활성화되는 것은 적어도 18세기 이후에 가서야 확인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민간에서의 철제 농기구 공급량이 부족했으며 원활하게 유통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1~4세기에 한반도 남부에서 교환을 통해서 쌀과 잡곡, 다양한 현물들과 교환되던 철광석, 철소재, 철제 농기구는 이를 전업적으로 수행하던 취락들에서 생산되는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적(匠籍)에 등록된 수공업자를 장기간 노역시키고 호적(戶籍)에 등록된 농민의 단순노동력을 수취하여 생산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갑니다.


이러한 방식은 삼국시대의 치열한 체제경쟁의 과정에서 소국들을 흡수하고 백제나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의 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하고 집중적으로 투입하는데는 분명히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성립된 이후에 농업생산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철제 농기구를 충분한 양만큼, 그리고 저렴하게 공급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용조 체제에 기반한 국가주도의 재분배체제는 신라가 진한의 소국들과 인근의 가야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중앙집권화를 발전시켜나간 것처럼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지방세력의 성장을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의 청해진이나 개성 왕씨 집안과 같은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전근대 한반도에서 중앙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지방세력의 경제적 성장은 불가능했으니까요.


게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전기까지 이 시스템을 통해서 무료로 국가가 필요로하는 철제품을 조달할 수 있습니다. 전문기술자도 공짜고, 단순노동력도 공짜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재정규모가 매우 제한적인걸 생각할 때 이건 재정측면에서도 매우 합리적입니다. 피지배층을 호적에 등록시켜 거주지에 묶어두고 인신지배할 수만 있다면요.


자 이제 정리해봅시다.


한반도 농업생산력의 발전에는 기후와 지리같은 자연조건 이외에 철제 농기구와 같은 물적자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상공업의 중요성 역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러한 물적 요소 이외에도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토지의 소유자의 경영방식, 실제 경작자간의 상관관계와 노동력의 투입방식과 같은 인적요소(Human factor)들이 매우 크게 영향을 줍니다.


이를 이해한다면 조용조체제와 전근대 한반도의 농업생산력 발전이 얼마나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편에서 이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김상민, "요령지역 철기문화의 전개와 한반도 초기철기문화"

김상민, "고대 철기생산기술의 발전과 남해안 도서지역 철기생산유적"

윤여주, "고대 낙동강 유역에서의 철 생산과 무역에 관한 연구"

이동희, "가야의 왕성과 취락", 가야사 총론,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권

윤호필, "경작유구를 통해 본 중,근세 농업의 경지이용방식 연구"

김도헌, "가야인의 생업기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오미일 편, "식민지시대 사회성격과 농업문제"

이현혜, "4세기 가야사회의 교역체계의 변천"

김권일, "대구 봉무동집단의 고대 생산활동"

김권일, "제철유적 조사연구법 시론"

김희만, "신라 장인층의 형성과 그 신분"

강호선, "고려전기 “사장(寺匠)”의 존재 양태 -백사(伯士)의 사용과 소멸-"

이수훈, "6세기 신라 촌락의 장인집단 - 축성, 축제 금석문을 중심으로"

이준정, "作物 섭취량 변화를 통해 본 農耕의 전개 과정"

장혜금, "변한 소국의 해양성과 이주: 사물국의 무역 네트워크와 중심지 이동"

V. Gordon Childe "Man Makes Himself"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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