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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FDR과 미국을 바꾼 전당대회

대가리깨져도RF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1.15 18: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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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 글이 짤려서 통합본으로 올림


1932년의 민주당 전당대회는 민주당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당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전당대회에서 지명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의 주지사였고, 전략가 루이스 하우, 조언가 에드워드 플린, 그리고 대의원들을 마법같이 끌어들이는 제임스 A. 팔리와 같이 유능한 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손쉽게 지명되었다고 생각하며 곤란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1932년 전당대회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먼저 민주당의 재력가부터 살펴보자. 이 당시 민주당 소속 백만장자라면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버나드 바룩과 존 J. 라스콥이다. 버나드 바룩은 그 당시 민주당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였다. 전시산업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한 바룩은 정치적으로 숙달된 사람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으나, 지는 편에 서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정치적 생존은 성공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러나 존 J. 라스콥은 그렇지 않았다. 라스콥은 “적극적인 정부”를 무엇보다도 중대한 악으로 여겼다. 그는 보호무역을 원했고 연방거래위원회에게 반-트러스트법을 정지할 권한을 주길 원했다. 우드로 윌슨의 늙은 추종자들에게 있어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계를 없애는 것과도 같았다. 이후에도 라스콥 얘기가 나올 때가 꽤 있을 것이다.


1931년 당시 FDR의 전략은 최대한 적극적으로 대의원과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FDR을 선두주자로 간주했고(제시 스트라우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FDR은 44개 주 중에 39개 주에서 선두주자였다. 앨 스미스는 매사추세츠에서 앞섰고, 조 로빈슨은 아칸소, 앨 리치는 매릴랜드에서 앞섰다. 코네티컷과 델라웨어는 스미스와 FDR이 반반이었다.), 따라서 “Stop Roosevelt” 운동이 대두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전략은 각 주별로 후보를 출마시켜 FDR이 충분한 대의원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테니 FDR은 빠르게 행동해야 했다. 루즈벨트 캠페인에는 상당한 수의 기부자가 있었다. 헨리 모겐소와 프랭크 C. 월터, AFC 회장을 역임한 윌리엄 H. 우딘이 각각 5,000달러를 기부했다. 허버트 리먼 뉴욕 부지사와 로버트 W. 빙엄, 에드워드 M. 하우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기부자가 모였으니 루즈벨트 캠페인도 슬슬 대의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임스 A. 팔리는 19일 만에 1,100명의 지역별 민주당 지도자를 만났다. 코델 헐과 버튼 K. 휠러와 같은 의원들도 팔리와 만나곤 했다.


한편 상술한 라스콥은 FDR이 지지세를 모으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보수주의자였고 FDR과 같은 적극적인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존 J. 라스콥이 원하던 후보는 누구였을까? 바로 앨 스미스다. 앨 스미스는 한때 뉴욕 진보파의 수장과도 같았던 인물이다. 그는 노동권 보호를 지지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다. 그렇기에 항상 그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꼽혔고 1928년에는 윌리엄 G. 맥아두의 부재를 틈타 대선후보로까지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FDR 및 서부&남부의 윌슨주의자들과 비교해서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의 출마 선언에서 자주 언급된 주제는 엄격한 지출, 균형 잡힌 재정, 기업 감세, 그리고 판매세였다. 그는 여러모로 북동부 기업가와 “민족적” 유권자의 대표와도 같았다.


한편 앨 스미스와 FDR이 유이한 후보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각 주별로도 후보가 많이 나왔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버트 C. 리치 매릴랜드 주지사다. 그는 금주법에 반대했고 사적재재를 반대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그는 말 그대로의 제퍼슨주의자였다. 그는 허버트 후버가 “지나친 중앙화”를 추구했다고 공격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주의 권리”의 옹호자였을 것이다. 그는 버나드 바룩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서부에서 그를 아는 이는 없었다.


또다른 후보는 W. H. 머리 오클라호마 주지사였다. 그의 별명은 “알팔파 빌”이었고, 아마도 여러분들은 카이저리덕스를 통해 이 사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빼빼 마르고 키가 큰 머리는 오래된 미국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앤드루 잭슨 같은 사람 말하는 거다. 그는 주방위군을 47번 소환하고 계엄령을 30번 선포했다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등교육에 조소를 보내고 토양보전을 비웃었다. 그는 주지사 선거 때 "The Three C's – Corporations, Carpetbaggers, and Coons"(기업, 카펫배거, 깜둥이)에 반대해 출마했다. 이 포퓰리스트는 루즈벨트의 남부&서부 지지층을 빼앗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농민들에게는 더 나은 후보가 있었다. 바로 존 낸스 가너였다. 그는 분명 재정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우드로 윌슨이 진보적인 의제를 추진할 때 동참했던 사람이었고 대공황 시기에도 가너-와그너 법안 등 유연한 행보를 보여주었기에 동부의 국제주의자를 불신한 윌리엄 R. 허스트로부터 “두번째 챔프 클라크”라는 칭송을 들으며 “아메리카 퍼스트” 후보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진보파의 수장이었던 윌리엄 G. 맥아두도 가너를 지지했다. 맥아두는 FDR의 출신지인 뉴욕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고 FDR의 나쁜 건강도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다.


후보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전당대회에서 누구도 2/3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유력한 시나리오였다. 루즈벨트 캠페인은 라스콥이 오언 D. 영을 선호한다고 믿었지만 영은 일단 거절한 바가 있다. 그러면 보수파의 “컨센서스”는 과연 누구였을까?


뉴튼 D. 베이커가 들어온다. 그는 모든 파벌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를 끌어올 수 있었다. 진보파는 톰 존슨을 이은 클리블랜드의 진보주의 시장을 기억한다. 이상주의자들은 베이커가 국제연맹을 위해 싸웠던 것을 기억한다. 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유능한 전쟁장관직을 기억한다. 그리고 보수파는 베이커가 로펌을 운영하며 기업들을 변호한 것을 안다. 카터 글래스와 같은 사람은 베이커를 후보로 만들기 위해 전념했다. 이 시점에서 베이커는 클리블랜드 시장 시절의 진보주의를 버린 보수주의자였고, 글래스는 이를 아주 좋아했다. 월터 리프먼도 베이커의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베이커를 생각하며 그를 지지했다.


1932년이 되자 루즈벨트는 당내 파벌 중 확실히 한쪽의 편을 들 생각이 생겼다. 바로 브라이언과 맥아두를 지지했던 진보파다. 존 낸스 가너가 맥아두의 지지를 받으며 진보파 지지층을 빼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FDR은 공공사업을 임시방편이라고 지적하며 농촌의 구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피라미드 밑바닥에 깔린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루즈벨트는 유일하게 대기업을 공격하고 경제적 계획을 지지한 후보였다. 비록 뉴 리퍼블릭의 월터 리프먼같이 루즈벨트를 지나치게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라스콥과 중앙당은 루즈벨트의 “급진주의”를 심히 염려했다. 라스콥은 제퍼슨의 날 축하식에 앨 스미스, 존 W. 데이비스, 제임스 M. 콕스, 뉴튼 베이커, 존 낸스 가너, 조 로빈슨, 해리 버드와 같은 헤비웨이트는 다 부르면서도 FDR만 부르지 않았다. 행사를 지배한 앨 스미스는 FDR을 “선동적”이라고 규탄하기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도 경선은 시작되었다. 이 당시 경선은 인기도 테스트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FDR은 농민이 많은 노스다코타에서 윌리엄 머리를 쳐부쉈고, 다음 주에는 조지아, 아이오와, 메인, 위스콘신, 네브래스카, 미시건, 켄터키가 루즈벨트에게로 갔다. 그러나 FDR도 패배를 당한 순간이 있었다. 매사추세츠에선 조지프 B. 엘리 주지사와 데이비드 I. 월시 상원의원의 지지를 받은 스미스가 대승을 거두었고, 캘리포니아에서는 허스트와 로스앤젤레스의 텍사스계 주민의 지지를 받은 가너가 승리했다. 그러나 여전히 FDR은 대의원의 다수를 점했다. 애리조나, 와이오밍, 웨스트버지니아, 캔자스, 뉴멕시코, 몬태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버몬트, 테네시, 오리건, 네바다, 델라웨어, 콜로라도, 유타, 미시시피, 플로리다, 아이다호, 노스캐롤라이나는 루즈벨트 캠프에 있었다. 


공화당을 한편 살펴보자. 공화당에는 유력한 반-후버 주자가 없었다. 하이럼 존슨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기포드 핀코트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모두 불출마했다. 드와이트 모로에 대한 얘기도 나왔으나 죽어버렸다. 캘빈 쿨리지 추대 운동은 실패했고 조지프 프랑스가 출마해 대중 투표에서는 이겼으나 대의원은 거의 얻지 못했다.


1932년에는 양당이 똑같은 도시의 똑같은 회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공화당이 시간상으로 이르니 한편 살펴보도록 하자.


1932년 6월 14일 공화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수많은 실업자가 시카고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택시와 리무진을 지켜보았다. 전당대회의 강령은 별 볼 것이 없었다. 늘 그렇듯 지출을 반대하고, 구제를 반대하고,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범죄를 반대하고, 인디언과 흑인의 민권을 지지하고, 후버의 정책을 지지했다. 캘리포니아의 “미스터 로스앤젤레스”라고 불리던 조지프 스콧이 후버를 지명했다. 오리건의 대의원이 프랑스를 지명하려고 하자 정말 편리하게도 마이크가 고장났다. 캘빈 쿨리지를 지명하려던 프랑스는 경찰에게 끌려나갔다.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는 이번 전당대회를 두고 “가장 멍청하고 부정직한 전당대회”라는 말을 썼다.


이제 훨씬 다이나믹한 민주당 전당대회의 시간이 왔다. 6월 20일 뉴욕 타임스의 여조에 따르면 FDR은 566명의 대의원을 가진 선두주자였으나 지명받기에는 200명이 모자랐다. 루즈벨트 캠페인에서 짐 팔리와 에드 플린이 시카고로 향했다. 6월 21일에는 가너가 도착했다. 가너는 정부 규모를 1/3 축소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격했다. 그와 같은 날 도착한 라스콥은 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금주법이라고 선언했다. 개빡친 코델 헐은 “대공황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모르는 대의원은 싸그리 미시간호에 집어던져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요일에는 앨 스미스가 도착했다.


전당대회가 시작할 때 가장 전투적인 반-루즈벨트 파벌은 앨 스미스 계파였다. 저지시티의 시장이자 앨 스미스의 지지자인 프랭크 헤이그가 루즈벨트를 보고 “미시시피 동쪽 주는 1개도 못 이길거고 서부에서나 몇개 이길 것”이라고 칭하자 코델 헐은 당을 파괴시킨 놈들이 또 저런다고 대꾸했으며 루즈벨트 지지자였던 A. 미첼 파머 전 법무장관은 헤이그의 말을 “울부짖음”이라고 무시했다. 헤이그의 발언은 루즈벨트 지지자들을 격분시켰다. 이 당시 민주당에는 대의원의 2/3을 얻어야 지명되는 “2/3 규칙”이 있었는데, 분노한 루즈벨트파의 지지를 얻고 과격파인 전 루이지애나 주지사 휴이 롱은 이 규칙의 철폐를 주장했고 이에 몬태나의 버튼 K. 휠러 상원의원, 켄터키의 코델 헐 상원의원, 조세퍼스 대니얼스 전 해군장관, 호머 커밍스 전 민주당 전국위원장도 이에 동참했다.


제임스 팔리는 이를 반대했으나 루즈벨트파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보수파는 빠르게 루즈벨트파의 규칙 폐지 운동을 비난했다. 제임스 콕스와 존 데이비스, 앨 스미스는 규칙의 신성성을 단언했고 카터 글래스와 뉴튼 베이커, 샘 레이번과 윌리엄 G. 맥아두 모두 이를 반대했다. 알팔파 빌과 앨버트 리치도 이에 합류했고 루이스 하우는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규칙 폐지 운동을 포기하라는 조언을 했다. 루즈벨트파의 후퇴를 틈타 뉴튼 베이커가 “타협 후보”로 등장할 것만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루즈벨트 캠페인이 용기를 잃진 않았다. 루이스 하우는 스위트룸에서 모든 전략을 짰고 지칠 줄 모르는 팔리는 대의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월요일에는 켄터키의 웅변가 앨번 바클리 상원의원이 기조연설을 했다. 명확한 대의원이 정해지지 않은 루이지애나 대의원은 결국 휴이 롱이 이끄는 루즈벨트파 대의원이 공식으로 인정받았고, 미네소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편 더 큰 문제는 전당대회 영구의장에 관한 일이었다. 루즈벨트파는 1924년 의장을 역임한 토머스 J. 월시 몬태나 상원의원을 다시 선출하려고 했으나 라스콥과 데이비스를 비롯한 보수파는 전 민주당 집행위원회 의장 조엣 슈스를 선출하려고 했다. 결국 월시가 626 대 528로 승리했다.


수요일에는 미첼 파머와 코델 헐이 작성한 강령이 제출되었다. 강령은 연방 지출의 감소와 균형 잡힌 예산안을 지지했으나 그와 동시에 공공사업과 고용보험, 농민에 대한 지원을 옹호했다. 이 조항은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다. 루즈벨트파 중에서도 보수파가 작성한 강령이었기 때문이다. 코델 헐은 수정헌법 18조의 폐지가 아닌 국민투표를 주장했지만 전당대회에서는 폐지 조항이 935¾표 대 213¾표로 통과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루즈벨트 캠페인은 뉴튼 베이커를 막기 위해 미시시피와 오하이오, 인디애나 대의원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지명의 시간이었다. 루즈벨트의 친구 존 E. 맥이 루즈벨트를 지명했다. 그 이후에는 “닻을 올려라”가 연주되었으나 루이스 하우는 다른 음악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연주된 음악이 FDR을 상징하는 곡 중 하나인 “Happy Days are Here Again!”이다. 곡 얘기는 접어두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그 이후에도 톰 코널리가 가너를 지명하는 등의 일이 있었으나 가장 효과적인 연설은 조지프 B. 엘리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앨 스미스를 지명하면서 한 연설이었다.


이때 루즈벨트의 전략은 가너의 대의원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가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1924년이 반복될테고 뉴튼 베이커가 지명될 것이 뻔했다. 레오너드 P. 아이레스는 이미 베이커 선거운동 본부를 창설했다. 조지프 P. 케네디와 짐 팔리, 제임스 컬리 보스턴 시장은 끊임없이 허스트에게 루즈벨트가 아니라면 베이커가 지명될 것이라 경고했으며 대니얼 C. 로퍼 전 국세청장은 맥아두와 연락했고 짐 팔리는 샘 레이번 텍사스 하원의원과 만나 가너를 부통령으로 삼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팔리는 앨버트 리치와 해리 버드에게도 부통령 제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오전 4시 28분 첫번째 투표가 시작되었다. FDR은 661¼표가 있었다. 100표 모자랐다. 스미스는 201¾표, 가너는 90¼가 있었다. 로퍼는 캘리포니아가 코커스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전했고 팔리는 앤턴 서맥 시장에게 달려가 일리노이 대의원의 요청을 구했으나 실패했다. 네브래스카의 아서 뮬런은 톰 코널리와 논의했다. 휴이 롱은 FDR에게 군인 보너스의 즉각 지급을 지지해달라고 간청했으며, FDR이 거절하자 롱은 “그렇다면 주지사님은 가망이 없으시군요.”라고 대답했다. 2번째 투표에서도 루즈벨트가 10여 표를 더 받았으나 여전히 모자랐다. 아서 뮬런은 발빠르게 휴회를 요청했다. 1표 차이로 베이커가 아닌 루즈벨트를 지지하던 미시시피 대의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시시피가 떠난다면 아칸소도 떠나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도 흔들렸고 웬델 윌키는 남부 대의원들이 베이커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휴이 롱이 온갖 짓거리를 해가며 미시시피를 유지한 결과 세번째 투표에서 FDR은 대의원 이탈을 막을 수 있었다. 


아서 뮬런은 코널리를 찾아 가너를 부통령으로 만드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고 했고, 대니얼 로퍼와 코델 헐은 맥아두에게 윌슨주의를 지지해달라는 말을 했다. 맥아두는 가너의 부통령직에 캘리포니아 및 국무부/재무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다면 FDR을 지지하겠다고 했다. 윌리엄 R. 허스트에게 있어 앨 스미스 또는 뉴튼 베이커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차마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결국 허스트도 FDR을 지지했다. 그렇게 가너가 FDR을 지지하게 되었다.


가너는 밥을 먹으며 스미스파가 거는 전화를 씹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너가 샘 레이번을 호출했다. 가너는 루즈벨트가 “전당대회의 선택”이라고 했다. 샘 레이번은 텍사스 대의원에게 이를 전했고, 근소한 격차로 텍사스 대의원은 FDR을 지지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FDR 연합은 붕괴의 직전에 몰린 듯 했다. 미시시피는 이탈하는 듯 보였다.


윌리엄 G. 맥아두가 캘리포니아 대의원을 대표해 말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대통령을 지명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영원히 전당대회를 교착시키거나 1924년과 같은 재앙적인 대회를 만드려 온 것이 아닙니다.” 소란이 일었다. “우리는 오늘 밤 캘리포니아가 이 경선을 신속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 입장은 어떤 사람이든 거의 700표에 달하는 민의를 등에 업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들어올 때 나온다는 우리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대의원들 사이에서는 가능한 모든 감정이 터져나왔다. “여러분이 저에게 보낸 찬사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말을 멈췄다. "저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1924년의 상처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민주당이 같은 민주당과 싸우는 게 아니라 공화당과 싸우는 걸 보고 싶습니다. 캘리포니아는 44표를 FDR에게 전달합니다.” 1924년 스미스가 맥아두를 파멸시켰듯이 1932년에는 맥아두가 스미스를 파멸시켰다. 


그렇게 FDR은 대선후보로 지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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