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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년전쟁.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1.22 18: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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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과 그대에게 어떤 영예를 주겠는가, 이 기념비를 파괴하고, 베드퍼드의 유해를 땅에서 끄집어내어 짐의 아버지와 그대의 선조들이 모든 힘, 권력, 그리고 친구들을 동원해도 살아생전에 한 발짝도 물러서게 하지 못했던 그를 모독하는 것이? 그는 힘, 지혜, 정책으로 프랑스 왕국의 주요 영토들과 이 고귀하고 이름난 노르망디 공국을 전부 지켜냈다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거두시길. 그리고 살아있을 때 우리 중 가장 거만한 자들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을 그의 육신이 이제 편히 쉬게 놔두세."

-에드워드 홀의 연대기



1. 라니 포위전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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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년 2월 3일, 프랑스군 원수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600여 명의 습격대가 루앙 성을 기습해 점령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신속한 반격으로 10일 만에 성채가 탈환되었고, 장 드 부삭과 일부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하고 105명이 포로로 잡힌다.


2월 19일, 렌 조약으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알랑송 공작의 오랜 분쟁이 끝났다. 알랑송 공작은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힌 뒤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브르타뉴 공작에게 토지를 저당 잡혔었는데, 풀려난 뒤 자기가 바가지를 썼다며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브르타뉴 공작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샤를 7세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권력은 쇠락하고 리슈몽의 동맹이자 샤를 7세의 장모인 앙주 공작부인 욜랑드와 그녀의 아들인 앙주의 샤를이 궁정에서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로버트 윌러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생세느리를 포위했다.


3월 23일, 프랑스군이 샤르트르를 습격해 점령했다. 이후 '오를레앙의 사생아' 장 드 뒤누아는 샤르트르를 군사 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출격하는 습격대의 활약으로 보스 지방에서 파리 시로의 곡물 공급이 거의 차단되었다.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파리 시민들은 베드퍼드 공작에게 라니를 탈환해 마른 강의 수운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5월 1일 새벽, 솔즈베리 백작의 사생아 존 몬테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생세느리를 구원하러 행군 중이던 프랑스군을 보몽 인근에서 기습해 전멸시켰다. 하지만 곧바로 강 반대편에서 행군 중이던 다른 프랑스군 부대가 강을 건너 잉글랜드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고 포로들을 모두 구출한다. 생세느리를 포위한 잉글랜드군도 이 소식을 듣고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5월 중순, 잉글랜드군이 라니를 포위하고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막대한 사상자만 남기고 격퇴당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도시를 굶겨 죽이기로 결정한다.


5월 24일,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라니 포위군 진영을 습격해 포병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뒤 도시 안으로 보급품을 전달했다.


얼마 뒤,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라글을 점령했다.


8월 10일,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라니 포위군과 대치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100여 명의 분견대가 반대편에서 소떼와 보급수레를 끌고 도시로 향했다. 성문 근처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보급품이 전달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최후의 수단으로 다시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곧 장 드 부삭이 다시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11월, 베드퍼드 공작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안이 병사했다.




2. 몽타르지 습격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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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2월, 칼레 주둔군이 임금채불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베드퍼드 공작은 밀린 임금을 지급하겠다며 반란군을 속여서 항복을 받아낸 뒤 반란 지도자 4명을 처형하고 전체 주둔군의 약 절반을 도시에서 추방한다.


4월, 베드퍼드 공작이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와 재혼했다. 이후 베드퍼드 공작은 전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났다. 그동안 프랑스에 남은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을 파기하고 샤를 7세와 화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의 영토를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6월 27일,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몽타르지를 기습해 점령했다. 곧 프랑스군이 도시를 탈환하지만, 성채를 공격하던 중 잉글랜드 지원군이 접근하자 도시 성벽을 파괴하고 퇴각한다.


같은 시기, 샤토랑동에 집결한 3000명 이상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센강 상류로 진격했다. 아룬델 백작과 헌팅던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2주 만에 노장, 브리, 트루아 등 수많은 도시를 탈환했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상스 인근까지 행군하며 거의 모든 거점을 탈환했다. 부르고뉴군 또한 뮤시, 아발롱, 샤블리, 피에르페르튀, 마이, 크라방 등 수십 곳의 도시와 요새들을 탈환한 뒤 원정을 마쳤다.




3. 생세느리 포위전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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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아룬델 백작은 알랑송과 메인 지방에서 곧바로 새로운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은 9월에 봉물랭을, 11월에는 생세느리를 점령하고 성벽을 철저히 파괴한 뒤 시예르기욤을 포위했다.


9월 말, 파리 시에서 또다시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 6명이 처형되었다.


12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라 이르가 센 강과 마른 강 이북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파리로 향하는 식량 수송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잉글랜드의 문장을 소지했거나 영어를 말하는 포로는 전부 처형하기 시작했다. 부르고뉴와 메인에서의 연합군의 성공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의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4. 앙 포위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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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1월, 건설노동자 출신 지휘관 샤를 데즈마레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솜강 하구의 요충지인 생발레리를 점령했다.


3월 12일, 시예르기욤이 결국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5월 말,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크레이를 포위했다.


7월 말,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이에 탈보트는 크레이 포위를 풀고 보베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파리로 퇴각한다. 리슈몽은 곧장 북쪽으로 진격해 솜강의 요충지인 앙을 손쉽게 점령한다. 앙의 방어시설은 강력했지만 그동안의 무리한 군사작전으로 한계까지 감축된 주둔군은 결국 성벽을 방어하지 못했다.


8월 1일, 부르고뉴 공작의 사촌 느베르의 장이 지휘하는 부르고뉴군이 생발레리를 탈환했다. 그러나 앙이 하루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부르고뉴 공작은 앙을 돌려받는 대가로 5만 살뤼를 배상금으로 제안하며, 샤를 7세에게 종전 협상을 전제로 한 휴전을 제안한다.




5. 코탕탱 반란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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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8월 초, 잉글랜드 병사들이 캉 남쪽의 작은 마을인 생피에르를 약탈하다가 주민들의 반격에 쫓겨났다. 곧 리처드 베너블스라는 잉글랜드인 향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보복으로 주민 10명을 죽였다. 이에 놀란 주변 마을 주민들이 빅이라는 이름의 마을로 모여들자, 베너블스와 병사들은 이들을 기습하고 도망치는 사람들까지 추격해 1000여 명을 죽였다.


10월경, 피에르 샹트피라는 이름의 향사와 그밖의 지역 귀족들이 이끄는 수만 명의 농민 반란군이 코탕탱 반도 전역에서 봉기했다. 반란군은 알랑송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들의 지휘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고, 공작은 이에 300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11월, 베너블스와 부하들은 곧바로 캉의 바이이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베너블스는 베드퍼드 공작의 지시에 따라 특별히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졌다.


1435년 1월, 코탕탱 반란군이 캉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르망에 머무르고 있었던 존 파스톨프가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을 기습해 400명 이상을 죽였다.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은 다음날 대부분 탈영하고 5000여 명만 남았다. 이에 반란군은 캉 포위공격을 포기하고 아브랑슈로 향한다.


1월 말, 반란군은 결국 아브랑슈 인근에서 알랑송 공작과 합류했지만 그때까지 탈영으로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다. 결국 반란군은 아브랑슈 포위공격도 포기하고 푸제르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해산된다.




6. 졔르베루아 전투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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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말, 샤를 데즈마레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300여명이 블랑슈타크 여울목을 건너 솜강 하구의 요충지 르 시를 점령했다. 이는 르 크로투아의 안전과 솜 강의 수운에 큰 위협이 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아룬델 백작에게 즉시 도시를 탈환하라고 지시한다.


5월 8일, 구르네 성에 도착한 아룬델 백작은 작전을 변경해 제르베루아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제르베루아로 향하는 도중에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역으로 기습당했다. 아룬델 백작은 언덕 위로 후퇴해 방어 진영을 구축했으나, 프랑스군은 우선 도보로 공격해 언덕을 점령한 뒤 기병이 돌격해 마무리했다. 아룬델 백작은 포탄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혔고,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한 달 뒤인 6월 12일 보베에서 사망한다.


5월 말, 잉글랜드군의 관심이 북쪽에서 활개를 치는 습격대에 집중된 사이, 장 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샤르트르에서 출격해 베르뇌유와 우덩을 점령했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정당화하고 잉글랜드의 협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사절을 보냈다. 그는 트루아 조약이 오랜 내분과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샤를 7세를 국왕으로 여기고 있다며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인들이 평화 협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트루아 조약에서 맹세한 자신의 의무가 이행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6월 1일 새벽, 4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생드니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틀 뒤 라 이르와 포통 드 생트레유 등 쟁쟁한 지휘관들이 이끄는 부대들이 합류하면서 생드니 주둔군은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매일 파리 시의 교외까지 습격을 나가며 도시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7. 아라스 조약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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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7월 31일,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의 대표들이 모두 아라스에 모였다. 처음으로 논의된 쟁점은 헨리 6세의 왕위 주장이었다. 프랑스 측은 왕위 주장 포기와 전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며, 잉글랜드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장기 휴전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다.


8월 24일, 파리 시에 집결한 잉글랜드군 5000여 명이 생드니를 포위했다. 이에 장 드 뒤누아가 샤르트르에서 4000여 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결국 센 강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8월 말, 잉글랜드측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양보를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잉글랜드 대표단이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트루아 조약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9월 6일 잉글랜드 대표단이 아라스를 떠났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7세와 화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9월 14일,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했다.


9월 20일,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아버지인 용맹공 장을 암살한 것을 영토로 배상하고, 아버지의 원수에게 신서를 하는 일을 면할 수 있도록 필리프의 평생 동안 부르고뉴 공국을 프랑스 국왕의 관할권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행해진 모든 행위에 대한 사면과 잉글랜드의 보복으로부터의 보호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샤를 7세 자신, 그리고 그의 궁정을 지배하고 있는 브르타뉴인들과 앙주 파벌은 부르고뉴 공작을 실제로 용서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을 처벌하고 몽트뢰유에 용맹공 장의 추모비를 세우겠다는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약속된 자치권에도 빈번히 간섭해 공작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아라스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고뉴 공작의 고문들 중 선견지명이 있는 이들은 샤를 7세가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프랑스 영토를 모두 되찾은 뒤에는 부르고뉴가 다음 타겟이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9월 25일 새벽, 뒤누아가 지휘하는 생드니 구원군이 망트를 기습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묄랑을 기습해 점령한다. 생드니를 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지만 프랑스군이 묄랑을 점령함으로써 파리 시의 봉쇄가 완성되었다.


10월 4일, 결국 잉글랜드군이 생드니를 탈환했다. 잉글랜드로서는 기념할 만한 승리였지만, 그 대가로 묄랑이 함락된 데다가 때마침 아라스 조약의 소식이 전해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10월 24일, 잉글랜드군이 묄랑을 포위했다.


11월 16일, 샤를 데즈마레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다에프를 점령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의 통신과 상업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꼬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12월 27일, 프랑스군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아르플뢰르를 점령했다. 아르플뢰르는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였기에 잉글랜드에 큰 타격이 되었다. 한편 노르망디 전역에 반란이 확산되어 잉글랜드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8. 파리 포위전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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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년 1월 초, 꼬 반란군이 센강 하구의 요충지 탕카르빌을 점령했다. 하지만 꼬드벡에서 대패하고 반란군이 와해된다.


1436년 2월, 프랑스군이 뱅센과 퐁투아즈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의 봉쇄망이 더 강하게 조였다. 파리가 쉽게 함락될 것이라고 생각한 샤를 7세와 그의 고문들은 파리 시민들에 대한 사면령을 미리 준비하고 리슈몽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결국 묄랑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3월 초, 부르고뉴 공작은 칼레를 공격하기 위해 플랑드르의 주요 도시들을 설득했다. 공작의 주장은 칼레 주둔군이 지역 안보를 위협하고 잉글랜드가 양모 시장을 독점하여 플랑드르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플랑드르 도시들은 처음에는 양모 수입에 미칠 영향 때문에 주저했지만 결국 설득되었다. 헨트 시는 15000명의 민병대를 파견하리라 약속했고, 브뤼허와 이퍼르에서 추가로 15000명을 약속했다.


4월 13일,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시민들은 샤를 7세에게 신속하게 충성을 맹세했다. 잉글랜드 주둔군은 바스티유 요새로 후퇴한 후 항복 협상을 시작해, 안전을 보장받고 파리에서 추방된다.


샤를 7세는 가장 먼저 잉글랜드 정부와 부르고뉴 공작에 의해 임명된 고위 관료들을 전부 교체했다. 하급 관료들도 1418년 이후 임명된 이들은 상당수가 해임되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는 부르고뉴군의 칼레 포위를 저지하기 위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습격대가 칼레에서 출격해 수많은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마리의 소를 약탈했으며 집결 장소로 향하는 민병대를 기습해 학살했다. 작전의 결과에 만족한 추밀원은 에드먼드 보퍼트를 가터 기사로 임명한다.


5월 15일, 샤를 7세는 부르주와 푸아티에의 정부를 파리로 이전할 준비를 하면서, 파리의 주요 행정 기관들의 운영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9. 칼레 포위전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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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부르고뉴군이 칼레를 포위했다. 부르고뉴군은 처음에 뉴넘브리지에 진을 쳤지만 잉글랜드군이 포격을 가하자 물러났다. 잉글랜드군은 포격과 수공으로 포위군의 기동과 포병대 배치를 방해했다.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으며 첫날에 단 한 번의 공격만 있었다.


7월 25일, 부르고뉴 함대가 칼레에 도착했다. 이들은 우선 벽돌과 돌로 가득 채운 배 6척을 항구의 입구에서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칼레 주둔군이 대포로 반격을 가하자 허둥지둥하다가 썰물 때 물이 빠지는 위치에 배를 격침시켰고, 잉글랜드인들은 항구 입구를 막은 잔해들을 손쉽게 철거할 수 있었다. 마침 풍랑이 일기 시작했고, 글로스터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샌드위치에서 곧 출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르고뉴 함대는 플랑드르로 철수한다.


7월 29일, 계속되는 작전 실패로 사기가 추락한 부르고뉴군은 결국 칼레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8월 중순, 원래는 칼레의 포위를 풀기 위해 소집된 1만명 이상의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집결했다. 반역죄를 저지른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한다는 포고문이 헨리 6세의 이름으로 선포된 뒤, 잉글랜드군이 무방비 상태인 플랑드르로 진격해 수많은 소도시와 농촌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저지대에 대한 부르고뉴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홀란트와 브라반트는 잉글랜드산 직물 수입으로 이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고뉴 공작의 정책으로 손해만 입었다. 반면 직물 산업이 더 발달한 플랑드르 도시들은 잉글랜드산 양모 수입이 끊겨서 고통받았지만 직물 수입 금지는 지지했다. 하지만 칼레에서의 패배와 그 여파 때문에 이제 플랑드르의 주요 도시들마저 부르고뉴 공작에게 잉글랜드와 화해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9월, 헨트 시민들이 칼레에서 시행되었던 포위 전략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부르고뉴 공작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브뤼허에서는 시장 점령, 총파업, 그리고 조합장들로 구성된 시민 정부 설립으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었다.


12월, 화려한 의식과 함께 부르주와 푸아티에의 프랑스 정부가 파리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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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259-1340)

2. 사우샘프턴 습격 (1338)

3. 라 카벨 대치 (1339)

4. 투르네 포위전 (1340)

5.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0-1348)

6.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60)

7. 장기 휴전 (1389-1415)

8. 헨리 5세의 정복과 죽음 (1415-1422)

10.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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