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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료글] 현대전에 오기까지 [2]

어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2.29 18: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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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과거 전쟁의 시각에서 볼 때, 분산된 소수의 병력들은 축차 소모되고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머스킷 소총수가 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10명 혹은 20명이 적의 대열과 맞선다면 개별적으로 숫자가 더 많더라도 밀집된 대형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수만 갈래의 소부대가 개별적으로 집중된 화력에 소멸되기 때문이다. 특히 병력들이 서로 착검하고 돌격을 개시할 시점에서 분산된 병력을 코앞에서 다시 모으는 것은 힘들고 소부대가 대부대를 이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영국군 자체로서는 당시 연대와 사단은 통일된 교리나 훈련 규범이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느슨하게 존재했다. 당시 교리나 원칙을 명문화하고 체계화한 프랑스나 독일과 다르게 영국군은 연대나 사단은 자부대가 가진 전통이나 내부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외부인에게 침해받고, 변화를 강요 받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이런 부대들이 각자 훈련이나 전훈을 파악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런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제한된 예산 때문에 개별 대대, 연대가 담당하는 훈련은 기초적인 수준을 넘기 힘들었고, 전훈이 습득되어도 지엽적으로 적용되고 조직 전체를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전쟁 초기 영국군의 많은 부대들은 편의적인 이유에서든 혹은 그것 밖에 연습이라도 안한 근접 대형을 선호하였다.


당시 영국군은 자국 병사 잠재력에 대해 크게 불신하였다. 사람들은 손쉽게 소부대 전술이나 탈중앙화 같은 소리를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럴만한 사람이 충분할 때 통하는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초기, 이라크군의 장성들은 미해병대와 같은 서방 군대의 임무형 지휘, 소부대 전술을 기초로 한 현대적은 군 조직을 구상하였으나 저개발과 문화로 인해 최소한의 질적인 수준을 갖춘 병사와 간부를 육성하지 못했다. 영국의 사회 발전사를 공부하지 않은 입장에서 함부로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군과 같은 폐쇄적인 조직 입장에서 이제 막 기초교육이 확장되고 이제 갓 탄광에서 일하는 것은 면한 고아들이 창궐하던 시대에서 군에 들어올 인력에 대해 군이 어떻게 생각할지 대충 상상이 가지 않는가? 군 입장에서 이들은 규율로 다스리고 최소한의 것만 충족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나름 최선이었다.


이렇듯 일견 합리적인 이유에서 유지되던 전통적인 방식은 보어전쟁 첫 단계에서 참사로 이어졌다. 기관총이 없이도 보어인들은 참호 안에서 영국군 대열을 300~600m의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매복하였다. 일반적인 근접 대형에서 보병들은 1m 이하의 거리에서 틈을 두고 이동하는데 이런 군집들이 대대급으로 이동할 경우 기관총이 없더라도 사상자가 발생하기 매우 쉬웠다. 과거 머스킷과 비교하여 당시 소총은 적게는 10배 많게는 30배 이상의 화력이 투사 가능했고, 일반적인 사거리와 정확성은 더 높아진 상태였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런 전술은 영국군에게 일방적인 소모를 강요했다. 보병부대와 동행하는 포병은 폼폼건에게 대포병을 당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보병부대의 직접 통제는 영국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반경 50m 내에서도 병력들은 자주 지휘관의 음성을 듣기 힘들었다. 문제는 보병부대가 필요한 통제의 수준이 전달 수단에 비해 너무 방대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어전쟁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영국군 보병 부대는 장교의 명령하에 표적의 선택, 교전여부, 사거리를 통제받았다. 이 때문에 초기 보어인들이 회수한 영국군의 소총들의 사거리가 자주 엉뚱하게 조작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영국군 하급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전술이라는 당대로 보기에 지나치게 복잡하고 힘든 원칙을 교육받기보다 빽빽한 행정적인 절차와 잡기들을 암기하는데 집중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열에서 하나까지 일일이 지도해야하는 병사들이 떼거지로 남아프리카 한복판에서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장교의 지도하에(만약 재수좋게 총알 소리를 피해서 명령이 들린다면) 놓이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이에 대한 대응은 빨랐지만 지휘 문제를 악화시켰다. 영국군은 나름 전쟁 이전에 기술된 확장 대형이 일반화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대형은 근접 대형에서도 잘 들리지 않던 음성 통제를 더 힘들게 하여 (전통주의자들이 우려한) 통제의 문제가 악화된 것이었다. 한번은 나름 확장 대형을 선택한 장교가 돌격을 해야할 시점에서 대다수 병력들이 흝어져서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경우도 존재할 정도였다.


영국군 역시 보어인을 참고하여 참호전을 수행하려고 하였으나 초창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당시 일반적인 군대에게 있어 어디에서든 멈춰서면 자기가 기어들어갈 구멍을 판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보병부대에게 삽을 주는 것이 자칫 이미 피로한 병력들의 기동성만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상층부의 저항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통일된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장교의 일방적인 (아마 본인 역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명령에 따라 땡볕에서 구멍을 파라고 해도 똑바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먼저 당시 영국군이 지급받은 공구리는 남아프리카 지형에 적합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국군 병사들은 보어인과 교전하고 나서 가장 먼저 노획하는 물품이 그들의 삽과 곡괭이일 지경이었다. 두 번째로 영국군 공병대가 보병보다 훨씬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존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참호는 별 효과가 없었고 병력들이 참호를 파는 행동을 자신을 괴롭히는 쓸모없는 잡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교리가 통일되어 감에 따라 개선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우선적으로 적의 화력에서 아군을 보호하려는 조치가 이에 따라 시도되었다. 후에 여러 가지 의미가 붙는 Fieldcraft가 대표적인데, 요즘에는 생존 기술로 번역되는 이 기술은 원래 개별 병사가 야지에서 엄폐물이나 굴곡에 몸을 숨기는 기술을 뜻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은 fire basemovement by fire 라고 불리는 화력을 통한 제압 및 기동으로 발전하였다. 초창기 Fieldcraft가 시작되던 시기에도 여전히 장교의 의명 하에 병력들이 다음 엄폐물이나 목표로 이동하였다. 보어인들은 이를 위해 영국군의 사격이 멈추는 시기를 포착해서 노출된 영국군을 요격하였다. 이에 따라 후에 배포된 책자들은 장교와 병력들이 불규칙적인 기동기동 간 지속적으로 적을 제압할 화력조를 운용할 것을 지침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은 앞서 말한 지휘 문제의 개선에 따라 시도가 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장교와 부사관, 대대와 중대에 더 많은 판단과 책임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통합교리라고 보기 힘들지만 책자 형식의 실라버스나 권고가 부대에 걸쳐 배포되고 기존의 불필요한 규정들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보통 이러한 노력들은 화력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잘못된 습관을 기르게 하거나 군 전체에 확장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경험은 1차대전 이전까지 영국군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1차대전 영국군이 현대전에 1도 준비가 안된 머저리로 취급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보어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군 초급장교와 부사관 사이에서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준의 자율성 확대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다. 이는 아직 만연하던 부대 전통과 맞물려서 더 확대되던 상황이었다. 영국군 상부도 이러한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부사관들이 보어전쟁 기간동안 병력들을 통솔하고 자율적으로 전투하던 양상은 상층부에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 따라 1904년 솔즈베리에서 영국군의 첫 번째 부사관 학교가 설립된다. 당시 부사관 학교는 영국군 내부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2년 뒤 폐지 되는데, 이는 상당 부분 예산 문제로 실제 부사관의 교육은 연대 책임하에서 학교에서 사용된 교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변경한 것이다. (물론 참고한 책에서는 이는 일정 부분 장교의 권위에 대한 침해 우려도 작용하였다는 저자의 의견이 있다.)


또다른 개혁은 병력들의 질적 수준과 자율성을 확대한 것이다. 머스킷 학교 (1차대전 까지도 이 명칭이 유지되었다.)의 지원하에 사격술을 위한 교안이 등장하고 특정 기준을 통과한 병사에게 상여금과 작은 기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가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의욕적으로 적용한 이동 표적은 도입된 직후에는 대대 인원이 갑자기 나타난 표적에 당황하여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 적도 있었다. 반대로 부대 전통과 경쟁심이 맞물리면서 재미있는 현상도 일으켰다. 병사들과 부사관 사이에서 사격술에 대한 자부심이 부대 내외의 경쟁심으로 확장되었는데, 사격술에 대한 흥미를 위해 실시된 경기와 연습이 사령부가 우려를 표할 정도로 부대 간에 경쟁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부작용이 어쨌든 간에 영국군은 제대 화력에 의존하여 등하시 하던 사격술을 개선하기 시작하는 데 성공하였다. 실제 1900년 초 영국군 보병은 600m 내에서 상당한 정확도를 가진 화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격술의 개선은 개별 병력이 표적, 사거리 그리고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교전권까지 받아왔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이는 필드 크래프트와 더불어서 병력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당시 병력과 초급 간부들에 대한 개선은 장군들 사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일으켰다. 이안 해밀턴은 군대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의 소속원을 건강하고 애국적이며 지적인 병사로 전환하는 사회적인 재생 기관으로서 보기 시작하였다. 1904년 기동 훈련에 대해 매튠 경은 이제는 명령이 장교와 병사들의 손에 지적으로 난황없이 알아서 이뤄지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들은 흥미를 가지고 개인의 지성을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고 표현을 남겼다. 평가에서 보면 알다시피 보어전쟁의 가장 큰 여파는 군에게 자신의 가장 풀뿌리 단위의 역량에 대해 큰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정예화된 영국군은 19141년도 되지 않아 수많은 정예병력들을 소모했던 것일까?


당시 정립되지 않은 문제중 하나의 통일된 명문화된 교리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공세 교리에 있었다. 당시 영국군 상층부는 현대전을 맞이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지만 분산 교리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병력의 분산은 화력의 노출로부터 보호받게 해주지만 결국 적의 방어부대를 돌파할 충분한 질량을 만들기 불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해답이 존재하였다. -일전쟁 보고서가 작성된 직후 전훈을 이어받아 적의 방어진지 앞까지 병력을 최대한 밀집시키고 일제 참검 돌격을 시행하는 것이 전통적인 의견이었다. 다른 해결은 최대한 적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회하여 접근하여 과거 공성전과 유사하게 참호를 점 진지까지 구축하거나 심지어 터널을 파는 것과 같은 의견도 존재하였다. 포병과의 조율이 제시되었지만 이 세가지 의견중 그 어느것도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작성된 제병 훈련 교범(Combined Training)은 공세작전에 있어 굉장히 모호하고 해석 여지가 다분한 물건으로 남아버리게 되었다.


- 다음은 러-일 전쟁과 당시 일본군의 현대전 교리 그리고 제병협동의 문제와 1차대전의 영국군 교리를 이야기해보겠다.-


참고 자료


Spencer Jones, From Boer War to World War: Tactical Reform of the British Army, 1902–1914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13)

Martin Samuels, Command or Control? Command, Training and Tactics in the British and German Armies 1888–1918 (Frank Cass 2003)


-PS. 파딱한테-

글자수 제한으로 짧은 글 둘로 나눕니다. 피치 못할 분할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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