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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팬픽] 소원을 담아적은 초콜렛

아니그냥없어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6.01 07:03:36
조회 549 추천 6 댓글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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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탓에 뼈가 시리는 야심한 밤이었다.


······쓱쓱쓱쓱.


문득 피벨가의 저택 어딘가에서 깃펜으로 종이에 끄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그 소리의 주인은 루미아였다.


"휴우······ 막상 쓰려고 하니 생각이 잘 나질 않네. 이런 건 처음이라······ 어떻게 써야 하지?"


어째선지 뺨을 살짝 붉게 물들인 루미아는 지금 책상 앞에서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해도 막상 그 편지를 받아줄 사람이 좋아해줄 만한 문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한동안 진전이 없던 것이다.


이렇게만 있어도 막막하기만 했기에 루미아는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오랜만에 별을 감상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뒤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투명한 유리창 너머엔 무수히 쏟아질 듯한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며 밤하늘의 장대한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었다.


"선생님도 이 하늘을 보시는 중일까······? 이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


루미아는 저마다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한 손을 올려 다 담아보려 했다.


그래도 결국 가까이 붙힌 손바닥 너머로 전부 가리지 못하는 몇몇의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이 있었지만ㅡ.


"······내일은 제 마음, 확실하게 전할게요······ 선생님. 부디 기다려주세요."


공교롭게도 그것들이 있었기에 사랑에 빠진 사춘기 무렵의 소녀가 살짝 더 용기를 낼 수 있던 것이리라.



······.



"······시스티, 있잖아."


개어나갈 듯 청명하게 뚫린 하늘 아래서 등교 중인 루미아가 옆에 나란히 걷고 있던 시스티나에게 나직히 말을 걸어왔다.


"응?"


그러자 시스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루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더니ㅡ.


"나······ 이 얘기를 하면······ 틀림없이 시스티에게 상처를 줄지도 몰라. 그러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시스티나에게 웬 영문 모를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 루미아?! 갑자기 왜 그래? 일단 진정하고 대화부터······."


뭔가 그녀의 모습이 평소랑 다르단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시스티나는 그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들어줄래? 나, 시스티랑 더 이상 절친이 아니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은 거야······?"


이윽고 힘없이 고개를 떨군 루미아는 이윽고 애원하는 눈길로 시스티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민을 털어놓는다 쳐도 그 고민이 둘도 없는 소중한 절친에게 본의 아니게도 생채기를 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 또한 더 이상 자신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러나ㅡ.


"······저기, 루미아. 우리 사이에 그런 걱정은 하는 게 아니랬잖니."


시스티나는 그저 말없이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루미아를 껴안아주었다.


"난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고 물론 계속 가족으로도 지낼 거야. 약속할게."


별안간 루미아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팔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고마워, 시스티. 그리고······ 미안해."


그 말을 들은 루미아도 그대로 껴안긴 채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시스티나의 어깨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하여간 넌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니? 하마터면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정말 미안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찌 됐건 또 폐를 끼치게 되었단 생각에 루미아의 표정이 한 층 어두워졌다.


"얘는, 사과하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힘들 때면 언제든지 날 의지해 줘. 가족이란 건 원래 그런 거잖니?"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스티나의 표정은 마치 어머니의 품 속처럼 한없이 따듯하고 자애로웠다.


"······응!"


마음 속 엉킨 응어리가 아주 살짝 풀린 듯한 루미아도 눈가를 슥 훔치고 늘 그랬던 듯 방긋 밝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아까보다 우정이 두터워진 두 명의 미소녀가 다시금 등굣길을 활보하고 있었다.


루미아의 표정을 살금살금 살피던 시스티나는 조심스럽게 방금 전의 본제를 꺼내기로 했다.


"으음, 그게······ 아직 얘기를 못 들어서······ 루미아, 나한테만 털어놓을 순 없을까? 아, 싫으면 억지로 안 해도 괜찮아!"


"············."


하지만 루미아는 또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은 시스티나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데도 정녕 이래도 되는 걸까.


추악하고 이중적인 자신에게 마음 속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짙은 모멸감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솔직히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응. 루미아, 네가 싫다면 안 들을래."


그 말을 들은 루미아는 살짝 벙찐 표정을 지었다.


"······시스티, 저기······."


그리고 조금씩 막혀있던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 오늘 선생님께 고백하려고 해. 그치만······ 시스티도, 나도 선생님을 좋아하는걸. 그러니까······."


눈을 질끈 감고 공기 중에 금방이라도 녹아없어질 듯한 목소리로 마침내 말하고야 말았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싸메며 전전긍긍하던 문제였다.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마음이 커져만 갔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애매한 관계는 분명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 루미아?! 누, 누누누, 누가 그런 하찮은 인간을 좋아한다고 그래?! 그런 말은 한 적도 없거든! 오히려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절대 아닌걸."


누가 봐도 알기 쉽게 옆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고 있는 시스티나는 말과는 정반대로 뺨이 새빨갛게 상기된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 아무튼 고백은 맘대로 해도 상관없어! 나, 나, 나는 저, 전혀 신경 안 쓰는걸?! 아하하하, 하하······."


하물며 적잖게 동요했는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말수를 굉장히 더듬기까지 했다.


"······아냐. 내가 미안해. 역시 그만둘게. 이러면 결국 새치기나 다름없잖아. 시스티도 시스티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텐데."


"지, 진짜 괜찮대도······!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하고 싶어! 그, 그리고 내가 왜 그런 게으르고 변변찮은 인간이랑 엮여야 되는지 전혀 모르겠고 말야!"


"······으음······."


포기해야겠다 싶던 루미아가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고뇌에 빠지자ㅡ.


"루미아."


시스티나는 루미아의 두 손을 꼬옥 맞잡았다.


"이렇게 부탁할게. 선생님에게 고백해줘."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스티나 본인도 마음 속 어딘가에서 내키지 않아하는 자신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일생일대의 각오를 한 루미아가 주먹을 드물게 꽉 쥐고 용기를 내기 위해 발걸음을 한 발짝 움직이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그녀의 사랑을 빌어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고백이 실패했으면 아주 조금 안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힘들어하는 절친이자 가족의 얼굴을 보고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시스티?"


한편 루미아는 그런 시스티나에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말야. ······실은 네 말대로 은연 중에 널 질투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시스티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를 악물고 목구멍에서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짜내었다.


"여기서 끝내자. 그러니 지금부터 난 전력을 다해 루미아, 널 응원할게."


너무나도 단호하고 결의에 찬 표정.


그 표정이 눈이 부실 정도로 은백색의 광채를 반짝이고 있는 시스티나와 맞물려 보는 사람이 그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명의 꽃다운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그, 그러지 말라니까, 시스티!


하지만 루미아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나름대로 마음을 굳게 먹은 뒤 내린 결단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이 상황 자체가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나,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난 선생님을 좋아해. 하지만 역시 루미아를 더 좋아하는걸. 이건 틀림없이확실하다구."


그 모습을 본 시스티나가 이윽고 애써 밝고 시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루미아 앞에서 웃어보였다.


"시스티······ 넌······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하는 걸 결코 두고 볼 리 없는 루미아가 공허한 표정과 힘빠진 목소리로 시스티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사랑과 우정, 두 가지를 저울질하기엔 어린 소녀가 혼자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걸 잃어야 했기에.


"난 지금까지 루미아한테 많은 걸 받기만 했어. 게다가 루미아는 선생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좋아해왔댔지?


그러니 이번엔 내가 루미아에게 양보할 차례인 게 당연하잖아? ······후후, 힘내라구."


그러나 모든 걸 털어낸 것처럼 보이는 시스티나가 환하게 웃으며 루미아의 등을 있는 힘껏 떠밀어줄 뿐이었다.


어쩌면 여기선 모든 걸 떠맡은 자신이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게 가장 큰 모욕이 아닐까.


"······."


그렇게 생각하며 루미아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안 하더니ㅡ.


"······응. 고마워······ 시스티.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 ······정말 미안해. ······정말로······."


시스티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간신히 나오는 눈물을 참고


간혹 들려오는 발소리를 공기 중에 묻으며 마술학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시스티나는 따듯한 눈으로 배웅해주었다.


"······역시 나로는 안 되는 걸까······? 선생님."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부드러운 뺨을 흘러내리는 애잔한 눈물 두 줄기를 기어코 삼키면서······.



······.



그리하여 지금은 알자노 제국 마술학원의 쉬는 시간ㅡ.


수업을 방금 막 마치고 나온 글렌이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하며 교직실의 문을 열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암~ 도대체가 휴일이 끝나고 나면 왜 이렇게 피곤한 건지, 원."


피로한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켜던 글렌은 자신의 교탁에 힘없는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 곳엔ㅡ.


"······응?"


어떤 손편지 한 통이 놓여져있었다.


쓴 사람을 알 수 없는 조금 이상한 편지였다.


그 편지 안엔 정성스레 몇 번이나 고쳐쓴 흔적과 함께 필기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ㅡ방과 후, 학원 부지 뒤에 있는 뒷뜰로 나와주세요.



"······잠깐. 이거 설마······ 혹시 러브레터······? 드, 드디어······ 나한테도 이런 꿈 같은 일이 생기다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감출 수 없는 환희에 글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환호성을 내지르자 교직실 안에 있던 교직원들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에잇, 좀 닥치란 말이다! 글렌 레이더스! 대체 네놈은 왜 이렇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거냐?!"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빌어 글렌의 맞은 편에 있던 할리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아아······ 죄송합니다요, 하게 선배. ······아니······ 하베스트 선배였나······?"


그러자 능청스럽게만 돌아오는 대답에 할리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네, 네 이놈······ 이젠 내 화를 돋구게 만드려고 일부러 틀리는 거지? 크으윽, 역시 너란 녀석은······!"


"룰루랄라~♪ 이거 완전 내 인생도 장미빛이 피는 거 아냐? 아아아~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무, 무시하기냐?! 아니, 그보다 선배인 내 말 좀 들으라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하지만 역시 그런 할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글렌이 그대로 교직실의 문을 열고 유유히 떠나자 할리는 원망스러운 소리로 절규했고ㅡ.


"······아. 으흠······! 이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교사들이 자기를 아까보다 더한 눈으로 째려보자 헛기침을 한번 한 후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해가 지평선 가까이까지 갔을 무렵ㅡ.


수업을 모두 마친 글렌은 인생을 통틀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뒷뜰을 향하고 있었다.


"신이 드디어 암울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도 희망을 걸어주신 거야! 그래, 틀림없어!"


그리고 복도를 지나면서 학생, 교직원 할 거 없이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들뜬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렇게나 기분 좋으신 거예요?"


그리고 그의 뒤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 리에 쫒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ㅡ.


당연하겠지만 시스티나였다.


그의 등 뒤를 바라보며 근처 장애물들로 몸을 숨긴 시스티나는 작은 목소리로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응? 왠지 시선이 느껴지는데."


뭔가 기척을 본능적으로 느낀 글렌이 간혹 가다 뒤를 돌아보긴 했으나ㅡ.


"······하아, 하아. ······아니 정말! 이럴 때만 민감하시면 뭐하냐구요! ······평소에도 그렇게······ 눈치채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원체 감이 좋은 시스티나였기에 재빠르게 인파와 부조물로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근데······ 최근에 나한테 그렇게까지 호의를 보내오던 녀석이 있었던가? 본 기억은 없는데······."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을 점점 더 알아가며 감정을 눈치채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편지엔 그것의 어떠한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사람이려나? 그럼 이왕이면 절세의 미인이었으면 좋겠구만~♪"


평소엔 하지도 않는, 한 발로 천천히 발레를 추듯 뛰어가는 글렌의 모습은 그야말로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가 부푼 마음을 한껏 티내는 채로 마술학원 건물의 모퉁이를 지나 뒷뜰로 들어선 순간ㅡ.


"······."


글렌의 얼굴엔 황당함 반, 어리둥절 반이 섞인 미묘한 표정이 퍼져나갔다.


"······저, 저기······ 으음, 루미아 씨······? 호, 혹시 편지의 주인은······."


뒷뜰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볼을 붉게 물들인 루미아에게 글렌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확인차 물어보았다.


"······예, 선생님. 편지의 주인은 저예요."


"이럴 수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루미아가 잠시 머뭇거리며 땅을 쳐다보고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글렌은 무료한 하늘에 통탄함을 가득 담아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 치곤 연상의 고상함과 여유가 물씬 묻어나오는 글씨체였기에 그는 무심코 편지의 주인을 동료 교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 자신의 제자, 그것도 담당 반의 학생이었다니······.


그대로 희망이 산산조각난 글렌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하하, 그게······ 죄송해요. 놀라셨을 거라곤 이미 알고 있었지만요. 그렇지만······."


초목으로 우거진 뒷뜰의 상쾌한 공기를 루미아는 심호흡을 하며 가볍게 들이마신 뒤ㅡ.


"언제까지고 선생님에 대한 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편지를 썼던 거랍니다."


실은 루미아도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히 글렌이라면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이유로 자신을 일부러 얼버무리며 거절할 거라는 것을······.


"하아······ 이거, 진짜인 거냐······ 도대체가 너희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현재 이 자리엔 없는 은백색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글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선생님은 분명 제가 이렇게 마음을 전해도 거절하시겠죠. 그러니 지금은 마음만이라도 좋아요. 부디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만 전하게 해주세요."


"······루미아."


그렇다. 루미아는 이제 더 이상 글렌의 보살핌이 필요할 만큼 3년 전의 나약한 그녀가 아니었다.


이젠 또래들 중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지성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ㅡ.


"3년 전부터 당신을 쭉 연모해왔어요. 절 구해주신 선생님의 입장에선 그저 거쳐간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었기에 전 그 때보다도 당신을 더 잘 알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3년 전이든 지금이든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도요."


"······."


가슴에 손을 갖다대고 진심으로 호소하는 루미아의 고백을 글렌은 내심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침묵한 채 듣고 있었다.


"그러니, 선생님."


애처로운 눈을 한 루미아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ㅡ.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고 사회적으로 아무리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전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끄는 게


구차한 변명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졸업하고 나면, 다시 그 때······ 이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글렌을 간절하고 애원하는 듯한 눈길로 올려다보며 마음 속 깊이 호소했다.


마침내 전할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난 것이리라.


이제 남은 건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뿐······.


"······그, 루미아. 나도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물어볼 게 있다."


갑자기 글렌은 평소 그답지 않게 사뭇 진중한 눈길로 루미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예."


루미아도 그런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그래도 상관없는 거냐? 고작 보잘것 없는 날 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그럴 이유는 어디에도······."


이내 글렌이 루미아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지만ㅡ.


"좋아하니까요."


루미아는 보기 드물게도 그의 말을 툭 끊고 그렇게 선언했다.


"하하······ 하······. 여, 역시 그렇겠지······? 이야~ 이거 영광인걸? 나 같이 하찮은 인간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설마하니 있을 줄이야."


글렌은 농담조로 얼버무리려 했지만ㅡ.


"······."


루미아의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넌 지금 어떻게서든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루미아."


"예. 이미 제가 할 말은 선생님께 다 전했는걸요."


"······그렇겠지."


글렌은 이윽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그럼 상관없어······."


그리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홱 돌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덤덤히 말했다.


"······예······ 예······? 그, 그게 정말이예요, 선생님······?"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글렌의 대답을 기다리던 루미아는 머리를 바로 세우더니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어디 남자가 한 번 내뱉은 말은 두 번 다시 번복할까 보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뭐, 그렇게만 알아두라고. 제발 어디 소문내진 말고."


"아······ 예!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는 루미아의 모습에 글렌도 무심코 그 순간만큼은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


"······."


늦겨울이라 조금은 쌀쌀한 햇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그들은 이윽고 어색한 침묵 속에 잠겼다.


그렇고 그런 일이 있다 보니 막상 서로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런 정적을 깬 건 다름아닌 글렌이었다.


"그, 그럼 이제 진짜 고백은 끝난 거지? 하아······ 그리고, 이걸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그 땐 날 말리지 말아주라······ 바다에 가서라도 빠져죽을 테니까."


"······아하하. 그건 저도 상당히 부끄러울지도요."


그리고 그런 낯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들을ㅡ.


"······루미아, 결국 정말로 해버렸구나······ 고백."


작정한 듯 근처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긴 시스티나가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뒤 입을 꾹 다문 시스티나는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자기 자신을 타이르곤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선생님, 루미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 하얀 고양이······?!"


마치 귀신보다 더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글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너······ 설마, 방금 거······ 다 본 거 아니지, 응······?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치만 이미 다 봤어요. 루미아가 선생님께 고백한 것, 처음부터 끝까지요."


"······."


결코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던 걸 전해들은 글렌은 무표정으로 표정을 싹 바꾸더니ㅡ.


"······루미아. 2반 애들에게 안부 전해줄래? 난 이만 저승으로 떠날 거라고."


"그, 그거 진심이셨어요? 어, 어쨌든 진정하세요! 선생님!"


그렇게 물을 찾아 떠나가려는 글렌을 루미아가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선생님."


"아아, 이거 놔!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엉?"


수치심에 그만 홍당무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익힌 글렌이 죽겠다고 아둥바둥하고 있자 시스티나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 실은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라면······ 루미아,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 온 게 나였으니까."


"너, 넌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이것 좀 놓아주련······ 루미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는 루미아를 향해 글렌은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건 이제 시간 문제라구요. 그건 사실 선생님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더더욱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진짜 두 사람이 사귈 거라면······ 아무튼 루미아는 무조건 행복하게 해주세요. 슬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루미아는 정말 착하고 성실한 애인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거든요. 저랑 같이 있어왔을 때부터 줄곧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양보해왔어요."


"뭐어?! 아니······ 야! 하얀 고양이! 대답은 안 했는데,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정하는 건데!"


느닷없이 튀어나오고는 자기 할 말만 하는 시스티나의 모습에 글렌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 지금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루미아는 이미 이루어낸 게 있어요. 선생님은 그걸 부디 찾아서 잘 해결해주실 거라 믿어요.


······후후, 좀 변변찮긴 해도 이럴 때만큼은 쓸만한 인간이 선생님이니까요. ······그럼 이만 갈게요. 아무쪼록 제 말 마음 속에 새겨주세요."


"그러니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 고지식한 건 여전하다니까 하여튼······ 야, 갑자기 넌 어디 가는데? 하얀 고양이!"


글렌이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발을 옮기는 시스티나를 불러세우려고 했지만ㅡ.


"······선생님. 지금은 시스티를 혼자 있게 해주실래요? ······모든 건 제 탓이니까요."


"하아? 그건 또 뭔 소리래?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내도 말이다. ······여전히 너희들 생각은 당최 모르겠다니까."


루미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그도 결국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ㅡ.


시스티나는 어딘가 공허한 표정으로 피벨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실연이란 건 이렇게 거대한 거였구나. ······포기하는 게 너무 늦어버렸네."


얼굴로는 쓰게 웃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미안해······ 루미아. 선생님. ······난 여전히 늘 방해만 되어버렸어, 아하하······ 본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친우의 행복을 빌어주고 깨끗하게 털어내려고 했지만 이제 16살의 꽃다운 소녀에겐 분명 이른 것이리라.


"훌쩍······ 흐윽······ 흑······. 난 앞으로······ 흐윽······ 어쩌면 좋은 거야, 선생님······? 흑흐윽······."


시스티나는 조용히 눈가에서 서글프게 흘러내리는 눈물로 발 밑의 땅바닥을 적셨다.


실연이란 시련의 아픔을 목구멍 뒤로 애써 삼키면서······.


그리고 그런 시스티나를 벗동무 삼아 붉게 물들인 하늘의 저녁놀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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