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약: 내가 싫어하는 오프닝을 피해가는 용도

대신 상대가 싫어할 만한 오프닝 몇 가지도 못 쓰게 됨

위가 주커토르트 오프닝, 아래가 잉글리시 오프닝

(tmi: 원래 1.Nf3은 주커토르트 오프닝이고, 레티 오프닝은 1.Nf3 d5 2.c4를 말함. 근데 1.Nf3 그 자체를 레티라고 부르기도 하게 됨.)

종종 색다른 오프닝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뉴비라던가

뉴비가 아니더라도 아무튼 관심을 가지게 된 체붕이들이 잉글리시나 주커토트 오프닝에 눈을 돌리곤 하는데

답변도 보면 "고수가 아니면 구림" 이라던가 "맞춰 간다" 같은 막연한 말만 함.

(일단 나는 그 말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음)

그래서 나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이번에 정리해 봄.

내가 놓쳤거나, 혹은 잘못 아는 내용이 있다면 지적은 환영함.

일단 말해 두고 싶은 건, 중앙 폰 움직임을 안 보여주는 건 말임

상대 수를 보면서 "맞춰 가는" 느낌보다는 "내가 원래 하고 싶은 게 있다" 에 가까움.

내가 하고 싶은 오프닝이 따로 있는데, 일반적인 수순을 뒀을 때 상대가 이상한 라인으로 꺾으니까 수순을 꼬는 거.

예를 들어서 내가 "X" 바리에이션은 싫고, "Y"는 괜찮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Nf3을 먼저 두면서 상대가 뭘 하려는 건지 살피는 거임.

그래서 상대가 X 바리에이션을 노리면, 아예 다른 독립된 라인으로 두고

상대가 Y 바리에이션으로 둔다면? 그대로 두는 거지.

예시를 통해 알아보자.

정통파 d4 플레이어 '체붕이 A' 가 있다고 치겠음

이 친구는 다른 건 모르겠는데 "더치 디펜스" 는 진절머리가 난다 이거지.

1. d4를 뒀는데 상대가 1...d5로 대응한다면 그건 괜찮아.

근데 상대가 1...f5로 대응하면 더치 디펜스가 되겠지?

그래서 A는 머리를 굴리는 거지

1.Nf3을 두고 흑이 뭘 하는지를 살피는 거임.

상대가 1...d5를 두면? 2.d4를 통해 일반적인 d4 오프닝으로 들어가.

흠...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는 플레이어로구만

근데 흑이 1...f5로 받는다면?

여기서 2.d4 같은 수를 두고 평범하게 둬도 되지만

중앙 폰 움직임을 안 보여줬기 때문에 A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함.

대표적으로 예를 들면... 2.e4!?

 리시친 갬빗 (Lisitsyn Gambit)

도저히 더치로는 전환될 수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라인으로 둘 수가 있는 거지.

잉글리시 오프닝도 마찬가지임.

퀸즈 갬빗을 좋아하는 정통파 d4유저인 "체붕이 B" 가 있다고 하자고.

B에게는 고민이 있는데, 킹즈 인디언 디펜스가 정말 싫다는 거임.

B는 1...Nf6만 봐도 벌써부터 짜증이 남. 님조나 안티님조 거친 QGD까지는 참아주는데 KID는 너무 싫어

킹즈 인디언의 이 포지션이 정말 너무너무 싫다 이거임.

이후에 Ne8 후 들어올 f5 폰브레이크도 짜증이 나고, 무엇보다도 e4칸이 계속 문제가 된다는 게 참을 수가 없다 이거지. 약점이잖아.

어... f3으로 e4칸을 지키는 새미시 바리에이션을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닥쳐

그래서 B는 머리를 굴려서 잉글리시 오프닝을 배우기로 함.

뭐? 리버스 시실리안?

닥치라니까

흑이 c6, e6 등으로 대응한다면 d4로 간단하게 환원시킬 수 있음.

순간적으로 낯설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c6은 슬라브 e6은 QGD로 환원되니까.

그럼 대망의 인디언 게임은 어떨까?

여기서 d4로 전진한다면 1.d4 Nf6 2.c4와 같은 모양으로, 인디언 게임으로 전환됨.

하지만 B는 1.c4를 뒀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데

2.Nc3으로 한번 더 흑의 셋업을 지켜보는 거임.

이게 바로 "중앙 폰 움직임을 숨긴다" 는 거임. 폰 구조를 숨기고 내가 원하는 구조로 만들어 가는 거지.

이건 상대의 수에 '맞춰서 간다'는 대응의 개념이 아님.

내가 원하는 모양이 있고 싫어하는 모양이 있으니까 싫어하는 모양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이해해야 맞다.

흑에게는 물론 c5 시메트리컬, e6으로 님조인디언 보기 등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 나쁜 놈은 2...g6으로 그 흉악무도한 본색을 드러냈음.

여기서 문제. "킹즈 인디언 셋업은 어차피 흑이 갖추는 걸 막을 수가 없는데, 뭘 회피한다는 걸까?"

답은 "d4를 두지 않는다" 임.

3.d3!!

d4가 d3으로 바뀐 게 뭐가 그렇게 큰 차이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KID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임.

한 번 d4로 올라간 폰을 d3으로 되돌릴 수는 없잖음?

그니까 e4칸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졌고 KID는 거기에 착안하는 거란 말이지.

이제 코악물고 d4는 안 하면서 전개를 마무리하면 됨.

바로 이렇게. 이걸 "보트비닉 시스템"이라고도 부름.

이처럼 상대 응수에 따라서 d4를 안 한다는 게 잉글리시의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음.

이게 같은 맥락에서 그룬펠드를 피해간다는 의미도 됨.

d5로 느닷없이 과격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사실 백의 순조로운 e4를 막기 위함이고.

당연히 d4를 아직 안 한 잉글리시 상대로는 그룬펠드도 불가능하고.

그럼 d4보다 c4나 Nf3가 좋은 거 아니냐?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음.

예를 들면 1.d4 d5 2.c4 퀸즈 갬빗에서부터 뻗어나오는 QGD 익스체인지, Nge2 라인인데

최상위권에서 이걸 피하려고 흑이 1...d5를 두지 않는다는 건 꽤 유명하지 않음?

흑이 인디언 디펜스로 시작, 중앙폰 움직임을 미룬다는 이야기 말임.

Nc3 나오면 d4를 안 두고 님조를 들어가는 것도, 님조를 두고 싶어서도 있지만 위에 나온 QGD 모양을 피하기 위한 거임.

Nf3가 나오고 나면 순순히 QGD로 들어가 주는 것도, 이제 f4가 없으니까 그런 거거든?

근데 첫 수부터 Nf3를 두는 주커토르트(레티)는 어떨까? 애초에 저런 라인으로 들어갈 선택지 자체를 없앤 셈이 되는 거임.

잉글리시도 마찬가지임. 앞서서는 이해를 위한 예시를 드는데 약간 초점이 벗어나니까 넘어갔지만

d4랑 달리 c5에 대해서 d5로 응수하는, 베노니라는 선택지 자체가 백에게 사라졌음.

그리고 c4를 뒀으니 런던도 못 둬.

흑이 e5로 시작하는 리버스 시실리안, 가끔은 좀 과격한 친구들이 사용하는

리버스 그랑프리 같은 셋업도 생각해야 함.

1.c4를 뒀기 때문에 흑의 e5 전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가 없는 거고, 거기서 나오는 변화를 따로 배워야 하는 거임.

종합하자면, 1.Nf3이나 1.c4는,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이면서 동시에 장기적으로도 포지션에 도움이 될 만한 수를 둠으로써

(예를 들면, Nc3은 c폰의 전진을 막는다는 단점이 있음)

상대방의 선택을 간접적으로 제한해서 내가 싫어하는 오프닝을 피하거나, 원하는 포지션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Nc3나 1.c4가 정말 백의 선택을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는 건 아님.

가능했던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그로 인해 날카로운 수법 몇 가지가 불가능해지는 등의 문제 역시 생김.

그래서 사실 1.Nf3나 1.c4는 뭔가 특별한 무기가 된다기보다는

그냥 d4유저 중에 몇 가지 변화구에 대한 공부가 귀찮은 사람들이 고른다거나

아니면 항상 자기랑 같이 두는 친구가 있는데, 그 놈이 주력으로 쓰는 오프닝이 ㅈ같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채용하게 되는 거임

그러니까 뉴비들 보고 두지 말라는 거임...

어려운 오프닝이라도 재미를 붙이고 배우면 되는 거니까 그건 문제가 없는데 (시실리안 나이도프건, 루이 로페즈건 뭐건 솔직히 ㄱㅊ)

얘들은 어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뉴비가 쓸 이유가 없음

(리시틴 갬빗 메인라인)

마지막으로 리시틴 갬빗의 뒷내용이 궁금했을 호기심천국 친구들을 위해 짤막하게 사진 하나 첨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