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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3-2

ㅇㅇ(14.6) 2021.06.20 00:46:59
조회 815 추천 24 댓글 10
														

내일은 레이드가 바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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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더러운 체크무늬 타일 바닥과 똑같이 더러운 침대까진 기억에 있었지만 나머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기억의 일부가 지워진 것처럼.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은 일들이 설명되니까.


오랫동안 아무도 여기에 살지 않았는 듯 공기가 축 처져 있었고 먼지와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조명도 거의 없어서 쓰이지 않은지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이 녹슨 의료용품 몇개의 윤곽만 보일뿐이었다.


죽은 물건들. 죽은 삶을 슬프게 상기시켜주는 물건들.


아야나미 레이. 첫번째 아이이자 그 이름의 세번째 주인은,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고통과 목소리, 맨살에 와닿는 끔찍한 손길들뿐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러다 멈춰서니 이곳이었다. 아야나미 레이는 방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벌거벗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죽은 느낌뿐.


난 죽었어. 근데 죽지 않았어.


뭔가를 잃어버렸단걸 깨닫는 레이. 하지만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슴속에 있어야 할 뭔가가 없었다. 마치 심장이 없어진 것처럼. 예전의 자신에게 중요했던게 없어졌다.


이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니야.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야. 이 영혼은 내 영혼이 아니야. 이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야. 이 심장은 내 심장이 아니야. 그렇게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면 대체 난 뭘까?


레이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여긴 왜 이렇게 익숙한걸까? 레이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것 하난 확실했다. 하지만 마치 언제나 여기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어둠 속에서, 언제나 벌거벗은채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일까?


기억일까?


침대를 향해 부드러운 발소리를 남기며 걸어간다. 몸이 무겁고 불편했다. 침대를 내려다보자 이불은 거무죽죽하고 노랗게 변색되어가는 옷감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있었다. 이게 레이의 침대일까? 레이의 과거일까? 그렇지 않다는걸 어째선지 레이는 알고 있었다. 레이의 것이 아니다. '아야나미 레이'의 것이다. 이미 죽은 자신. 이카리 신지가 자신을 볼때 보는 그녀. 신지가 소중히 여겼고 그리워하는 그녀.


"레이, 거기서 뭐하니?"


레이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카기 리츠코 박사가 방금전까지 레이가 서 있던 곳에 손전등을 든채로 서있었다. 강한 불빛 때문에 머리카락 윤곽과 실험복만 보일뿐이었다. 레이는 눈이 아파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떻게 온거야?"


"모르겠어요." 사실이었다. "자면서 걷기라도 한 것 같아요."


"쉬라고 했지 아무데나 돌아다니라고 허락해준건 아니야." 박사의 목소리가 엄혹했다. "여긴 넓은 곳이라 익숙하지 않으면 영영 길 잃어버리기 십상이야."


레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요."


아카기 박사는 몸을 휙 돌렸다.


"걱정따위 안했어."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따라와."


레이는 순종적으로 뒤따랐다. 곧 둘은 방에서 나와, 손전등과 반대쪽 문에서 비쳐오는 빛 말고는 아무 조명도 없이 캄캄한 복도에 들어섰다. 눅진한 공기가 모공을 통해 마치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느낌이었다. 가까운 벽에서 윤곽들이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문, 고장난 장비들, 파이프, 유리조각, 상자들, 의료용품들.


들리는 소리라곤 리츠코의 또각거리는 힐과, 실험복이 서그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레이의 맨발이 내는 작은 발자국뿐이었다.


"익숙하지?" 아카기 박사가 여전히 앞만 보며 말했다. 레이가 볼 수 있는 것은 박사의 머리 윤곽과 노란 머리가 빛나는 것뿐이었다.


"여긴 어디죠, 아카기 박사님?" 레이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물어봤다. "여기 한번도 와본적 없는데, 그래도....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너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곳이야." 아카기 박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여긴 그 아이가 자란 곳이니까. 아주 오랫동안 이곳이 그 아이의 세상 전부였어."


레이는 갑자기 슬퍼질 것 같았다. "이렇게 어두운 곳이요?"


"아직 사용되던 시절엔 조명도 달려 있었지. 어둠속에서 키웠을리는 없잖아. 아주 불안정한 인간을 만드는게 아니고서야.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니? 넌 여기서 자란 것도 아닌데. 넌 유리 튜브에서 나왔잖아."


레이는 무슨 감정을 느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느껴야할지. 그저 가슴속 익숙한 한곳에서 또 이상하고 텅 빈 느낌이 전해져왔다.


"걔는 '자랐'다고요?"


아카기 리츠코는 그 자리에 멈춰섰지만, 레이에게 돌아서진 않았다. 레이도 멈춰서서 앞에 선 여자를 차분히 바라봤다. 박사는 생각을 적당한 말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레이는 딱히 박사를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의도로 한 질문이 아니었건만 어째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레이." 마침내 입을 연 아카기 박사. "똑똑한 아이면서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할까."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레이는 몸을 떨었다. "절 미워하세요, 아카기 박사님?"


박사는 한숨을 내쉬고, 레이쪽으로 반쯤 몸을 돌렸다. 이 각도에선 박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자신의 표정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미움은 강한 단어야, 레이. 해치고 싶다는게 전제된 말이니까. 다들 쉽게 쓰는 모양이지만. 정말 진심이 아니면 그런 말은 써선 안돼. 정말 진심일때도 그렇게 투박하게 직접 말하는것 말고 다른 방법들이 있어." 박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난 네가 미운게 아니야. 그렇게 구체적인 감정이 아니야. 내가 미운건 네가 상징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게 미움받는다는 느낌이구나, 레이는 생각했다. 정말로 익숙한 감각이었다. 마치 평생 안고 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레이는 시선을 떨궜다.


"내가 더미 시스템을 파괴한 것도 같은 이유야." 아카기 박사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목소리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영혼없는 것들에겐 사람의 가치를 매겨선 안돼. 너도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것들이랑 똑같았어. 그 다음 너는 지금 네가 된거지."


"제게 영혼이 없다고요?" 어둠속에서 레이의 속삭임이 길고길게 울려퍼졌다.


"아니, 집중 안하니? 태어나기 전까지 그랬다고 했잖아. 지금 네겐 영혼이 있어. 하지만 사도들도 영혼은 있지. 넌 그것들도 인간이라고 부를거니?"


레이는 답하지 않았다. 답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창조된 목적 이상의 뭔가인 척 하지 마, 레이. 넌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야. 지금은 그렇게 하는게 기분 좋을지 몰라도 나중엔 고통만 더할거니까." 아카기 박사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힐소리가 불길한 박자를 내면서. "질문은 그만해. 솔직히 말하자면 대답 들어도 너한텐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야. 아직 실험도 남았고."


레이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레이의 운명, 레이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는 목적을 수행하거나 버려질 운명이었고 본인이 그걸 좋아하거나 싫어하는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래도 레이는 싫다고 느꼈다.


레이는 미움받는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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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는 북적이는 교실에 들어서기 전 잠깐 망설였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3초도 지나기 전에 뒤따라오던 아스카가 신지에게 부딪혀 신지를 거의 밀쳐낼뻔했다. 


"뭐-뭐야!" 짜증을 내는 아스카. "좀 비켜, 바보야! 대체 뭔 생각을 하는건지."


"미-미-"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좀." 아스카는 신지의 사과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밀치고 지나간 다음 교실 앞자리에 서있는 히카리를 향해 갔다. 매번 그러듯 아스카의 주변에는 단순히 아스카와 함께 있는것만으로 서열 상승의 효과를 노리는 여자애들이 모여들고, 남자애 몇의 음흉한 시선과 속삭임도 모여들었다.


신지는 아스카가 모여든 여자애들 중 몇이나 이름이나 알지, 밖에서 봤을때 얼굴이나 알아볼지, 누구의 집에 놀러가보기나 했을지 의문이었다. 다들 아스카의 즐거움을 위한 하나의 연극 도구 정도 아닌가. 


다들 아스카와 친해지고 싶어하는데, 마치 꿀을 본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드는데, 근데도 아스카는 외로워보여. 웃고 있을때도... 눈에 뭔가 다른게 있어. 


신지는 한숨을 내쉬고, 아스카를 생각할때마다 느껴지는 그 익숙한 이상한 감정을 밀어내면서 자기 자리로 향했다.


옆자리의 켄스케는 키보드로 뭔가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이건 완전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는 켄스케. "파일럿은 뭘해도 관심 받고. 연예인이라니까."


"그것도 아스카 얘기지. 레이는 별 관심 못받잖아." 나도 그렇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덧붙이는 신지. 만약 자신에게 관심이 돌아와도 그저 피하고 싶을뿐인게 신지였다.


켄스케는 한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토우지가 에바에게 -아니, 신지에게- 짓뭉개진 다음에도. 아마 신지는 다시는 토우지에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리라.


신지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다 곧 레이의 푸른 머리칼을 발견했다. 창가에 앉아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턱을 손에 괸채로 밖을 바라보며 소음과 군중으로부터 멀리멀리 벗어나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는 언제나 그랬다. 누가 말걸지 않으면 먼저 말하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고 숙제가 뭐냐고 확인하지도 않고 시험도 알아보지 않고 모든 것에 그랬다.


레이를 보자 미사토가 어제 한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후로 쭉 마음에 걸려서 잠도 설치다시피 했지만 다행히 바쁜 아침과 아스카를 상대하는 일 때문에 간신히 잊을 수 있었던 말이.


신지는 레이에게 다가가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레이에겐 신지의 응원따위 필요 없고 이것도 신지 자신이 기분 좋으려고 하는 일인걸 알면서도. 둘의 관계는 이렇듯 일방적인 것이다.


신지는 원래 레이가 영호기를 기동하는 것이 자신의 초호기 기동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까진 알고 있었다. 아스카의 2호기는 이미 복구됐다. 제대로 기동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니 남은 것은 영호기와 초호기였다. 영호기의 기동 실험에 신지도 따라갈거라는 말은 예전에도 들었지만, 아마 신지가 걱정하는걸 미사토도 아니까 해준 말이었을테고. 하지만 둘이 동시에 기동 실험을 할거란 말은 어제 처음 들은 것이었다.


자원 절약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미사토는 그랬던가. 2호기가 먼저 시험 기동을 하고, 그 다음 초호기가, 마지막으로 영호기가 기동할 것이라고 했다. 전부 끝나는데 몇시간은 걸릴 것이다.


신지가 자기 책상까지 다가온 후에도 레이는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신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불편할때면 하곤 하는 버릇이었다. 신지는 레이가 겉보기엔 무심하고 딴 곳을 보는 것 같아도 이쪽도 인지는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레이?"


"왜?" 레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아주 무례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거의 예상된 일이었고 신지도 어느정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신지가 뭐라고 하든, 그 말에 레이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무슨 일이 있어도 신지가 완전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지는 않을게 레이였다. 신지가 레이를 단죄하지 않듯 레이역시 신지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수동성이 레이에게 다가서기 쉽게 만들어주는 무언가였다.


그래서, 신지는 레이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스카는 신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만약 들으면 화낸다. 미사토는 들은 다음 신지를 이 방향 혹은 저 방향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레이는 그냥 듣고, 듣기만 했다.


"그게," 신지는 잠깐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생각해봤다. 그냥 정직한게 나을 것이었다. 그게 레이가 원하는 바일 것이고, 레이도 신지에게 정직할거니까. "미사토씨가 말하길 오늘이 그 날이래. 내 말은, 영호기가 준비 완료됐다고. 나도 오늘 초호기 탈거야."


잠시동안 아무 반응이 없어서, 신지는 혹시 방금 자신이 그 말을 생각만하고 실제론 말하지 않은거 아닌가 고민했다. 이 생각이 머리속에 워낙 오래 있었던터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레이에 대해 걱정하는건 꼭 날씨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아서, 자주, 무의식적으로 그냥 떠오르곤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마침내 대답하는 레이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들렸다. "오늘 아침에 확인 전화 했어. 일일 계획이 달린 이메일도 받았고. 오늘 세기 모두 기동하는걸로 됐길래, 본부측에서 실수한건가 싶어서 전화해봤어."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스카 실험도. 오늘은 셋 다 에바에 타는거야. 이런 것도 ... 엄청 오랜만이네."


"아마도." 레이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같은 날에 초기 기동 실험을 셋이나 계획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운용 요원들에게 무리가 갈거야."


이와중에도 직원들 걱정을 하는게 정말 레이다웠다. 자신에게 무심하다는 말도 모자랐다.


신지는 사실 레이가 자기 자신을 걱정할거란 예상도 하지 않은터였다. 그건 아무래도 레이답지 않은 일이고 만약 레이가 정말 그런다면 그 자체로 테스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걱정이 많은건 레이보단 신지쪽이었으니까. 그래도 신지는 레이가 어떤 반응 정도는, 최소한 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는 하고 있는 것 정도는 보여줬으면 했다. 그랬으면 최소한 신지의 걱정이라도 덜할건데.


레이는 이렇게 과하게 용감할 때가 있었다.


"레이... 두렵지 않아?" 신지는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지 않았길 기원하며 물어봤다. 제대로 성공하진 못한 것 같았지만 레이는 신지가 걱정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별 반응도 없었다.


"두렵지 않아." 레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왜 두려워해야하는데?"


"그게, 레이한테는 처음이니까." 신지는 말하면서도 조금 유치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다들 지금껏 어떤 일을 겪었는데. "두려운게 정상일거야."


"넌 두렵니?" 무심한 어조로 물어보는 레이.


신지의 목이 굳었다. "레이가 어떻게 될까봐 두렵냐는거야?" 신지가 말했다. "응, 당연히 걱정되지. 초호기는 문제 없을거야. 작동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어. 레이쪽은 한번도 에바에 탄 적이 없고 예전엔 ..." 신지는 그 생각은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하지마. 무슨 일 있어도 내가 있으니까."


"무슨 일?"


네가 죽는 것 같은 일, 신지는 정말로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레이의 자폭이 너무나 기억에 생생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레이가 무덤덤하긴 해도 굳이 그런 말까지 해가며 겁을 줄 이유는 없었다. "그냥, 무슨 일."


"'무슨' 일을 두려워하는건 성립되지 않아. 더 구체적이어야해."


신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 모르겠어. 레이에게 아무 일 없었으면 하는것 뿐이야."


"알아. 날 보호하고 싶은거지."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누가 보호해줄건데?" 레이가 아주 살짝 고개를 돌렸다.


신지는 레이의 시선을 따라가보고, 아스카를 발견했다. 적금발 소녀는 레이와 신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리곤 건방진 자세로 고개를 까딱하고 몸을 휙 돌려 주변에 모여든 소녀들과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앉아 한 손으로는 책상 모서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꼬며 장난치고 있는게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에 달린 신경 연결기가 붉게 빛나 눈에 띄었다.


아스카는 다시 학급 아이돌의 위치로 돌아온 모양이었지만, 신지는 그런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신지는 아스카의 바닥을 봤으니까.


"아스카는 남 보호 같은건 받고 싶지 않으니까." 신지는 부루퉁하게 말하며 다시 레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노력해도 화만 내. 내가 걱정하는건 레이야."


딱히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스카를 어떻게 걱정해주겠는가? 걱정해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데. 신지가 매번 아스카에게 걱정하고 신경쓰는걸 표현할때마다 아스카는 독하고 아픈 말로 반응해왔다. 신지가 진심이라고 믿어줄 의무 같은게 아스카에게 있는건 아니었지만, 조금 돕는 것 정도는 허락해도 될 일 아닌가. 그게 값싼 동정 같은게 아니라 정말로 신지에게 아스카가 중요해서 그렇다는걸 인정해 줄 수 없는건지.


그렇게 적대적으로 굴긴 해도 아스카가 상처받아 마땅하거나 그런건 절대로 아니었다. 신지는 정말로 아스카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신지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아스카에 대해선 아무것도 확신이 서는게 없어서 말 한마디 제대로 거는 것도 망설여질 정도였다. 레이쪽이 상대하기 더 쉬운 것이다. 최소한 한 단계 한 단계마다 지독하게 싸워오지는 않으니까.


이건 아스카도 아스카지만 신지 자신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점이었다. 신지는 이미 자신이 아스카를 상대하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난 걱정하지 않아." 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설령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벌어져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거야. 혹시 다른 사람들에겐 심각할 수 있어도 내겐 그렇지 않아."


신지는 그저 자신이 레이에게 신경쓰는 것만큼이라도 레이가 레이 자신에게 신경 썼으면 할 뿐이었다. 그렇게되면 혹시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쉽게 목숨을 바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내가 자신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야나미 레이는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가 명령하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신지는 그게 정말로, 정말로 싫었다.


앞자리에서는 아스카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듣는이의 관심을 잡아끌도록 세심하게 계산된 높은 소리의 웃음. 히카리도 방금 무슨 농담을 들은 듯 미소짓고 있었다. 다른 여자애들은 그저 동경하는 눈빛으로 아스카를 바라볼뿐이었다. 아스카의 무리에 낀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투의 눈빛으로.


신지는 가슴이 답답한게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 둘은 거의 대화하지 않았지만-신지는 대체 뭐라고 해야할지도 이젠 알 수 없었다- 아스카는 최소한 학교에서나마 가끔씩 흥겨운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집으로도 조금 옮겨왔으면 하고 희망하는 신지였다. 같이 집에 있을때, TV를 볼 때, 저녁을 같이 먹을때 그렇게 웃고 미소지었으면 좋겠다.


그런 웃음과 미소는 히카리와 '친구'들에게만 허락된 모양이었다. 질투심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지는 진심으로 기쁘기도 했다. 아스카가 행복해보이는건, 그게 누구와 그렇게 하는 것이든, 신지를 기쁘게했다.


신지는 레이가 조금만 아스카처럼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조금씩 웃고, 평범한 소녀처럼 행동했으면.


"왜 웃어?"


신지의 의식이 현실로 잡혀왔다. 신지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이 아스카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얼굴에 떠 있던 표정도 지우고 다시 레이에게 주의를 돌렸다. "뭐라고 했어?"


"웃고 있었어." 레이가 말했다. "왜 그런거야?"


그랬던가? 신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 좋은 생각 하고 있었어."


"알았어."


방금 레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레이가 신지의 제스쳐를 착각한걸지도 모른다. 레이는 인간간의 상호작용이나 감정 같은것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혹시 어쩌면 자신이 아스카를 보며 웃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 어색해서 신지는 얼른 주제를 바꿨다. "그러니까... 레이, 최소한 조심하겠다고 약속은 해줘."


"내 운명은 다른 사람들 손에 있어. 난 그걸 받아들였어. 너도 그렇게 해야해. 그러지 않는건 고통스러울뿐이야."


입에 쓴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신지는 레이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한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레이에 대해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 신지에 대해 관심이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신지는 레이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믿을만큼 순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방금 목소리에 살짝 묻어난 자포자기한 느낌이 그 증거였다.


레이는 자신이 이용당한다는걸 아는 것이다.


신지가 아버지에 대해 얘기할 기회는 없었다. 종이 울리고 자리로 돌아가라는 히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스카 주변의 아이들도 모두 끝까지 한마디씩 재잘거리며 흩어졌다. 적금발 소녀는 어깨 너머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레이를 보는건지 신지를 보는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말없이 다시 돌아 의자에 앉았다. 신지는 잠깐 아스카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오른 것 같다고 느꼈다.


아마 또 화난거겠지, 신지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이 뭘 했길래 화를 유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아스카는 별 이유 없이도 화내곤 했으니까. 레이쪽으로 말하자면, 종 소리를 듣기는 한건지도 알 수 없었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신지는 새삼 두 사람의 극단적인 성격차에 감명 받을뿐이었다.


재빨리 켄스케 옆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고 컴퓨터 화면을 켰다. 곧 담임이 들어와 히카리의 구호대로 일어나 인사하고 다시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너무나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교실의 평범한 학생들, 매 주 평범한 학교 일정을 평범하게 따라간다. 이 교실 안의 세 사람에게 그것이 모두 연극이나 다름 없다는 것은 최소한 교실의 겉모습만 봐서는 티도 나지 않았다.


선생이 수업을 시작하고 다들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필기를 작성하는척하며 컴퓨터로 딴 짓을 했다.


신지가 모니터를 들여보자, 메세지가 하나 와 있는게 보였다. 발신인은 다름아닌 S. 아스카 랑그레이. 커서를 확인 아이콘으로 옮기며 얼굴을 찡그리는 신지.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신지는 아스카가 뭔가를 타이핑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아스카가 이전에 한번도 신지에게 메세지를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문 앞에 멍하니 서있지 않으면 소리 안지를거니까. 알았지?"


신지는 당황해서 눈을 껌벅였다. 눈을 들어 아스카를 보니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머리카락만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을뿐이었다.


신지는 메세지를 다시 읽어봤다. 날카롭고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웬지 사과하는 것 같았다. 절대 사과일리 없다는건 사실 알고 있었지만, 신지는 아스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메세지를 보내진 않았을거란 생각에 매달리며, 답장을 보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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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전 사설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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