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SF. 작품을 밑도끝도없이 과몰입하면서 읽는 편인데, 멸망 후 문명의 심지어 생명체도 없는 무기물 도시에 떨어져버린, 이야기가 성립되는 의미라고는 오직 말동무밖에 없는 아이들의 2인극이라는 사실부터가 처절하고 압도적이고 섬뜩했고, 이 배경설정부터가 지나치게 가혹해 결코 행복한 방향으로 결말맺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지배해서, 방어기제인지 오히려 전개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었던 것 같음. 그래서 읽으면서 잡생각을 많이 했는데 작가가 지나치게 똑똑한 놈과 지나치게 멍청한 놈 둘을 가지고 글깨나 읽은 것 같은 오묘한 씬을 많이 집어넣어서 양적으로 깊다고는 할 수 없어도 충분한 깊이의 철학적인 맛을 보았음. 난 일본 감성 셋하나둘은셋하나라고 생각했음. 애니메이션은 만화 완결까지 담지 않다보니 각 컷에 분량이 질질 끌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노리고 일부러 그런 것 같음. 덕분에 만화로 독자층을 유도하고 애니메이션도 잡생각하는 맛을 살린 좋은 선택이었다.

감상을 떠나서 조금 이기적인 평을 하자면, 그들에게는 일상이니 당연하겠지만 진작에 자살했어야 함에도 꿋꿋이 살아있는 철인같은 정신이 대단하면서도 책을 태울 정도로 얼빵한 녀석에게 모닥불앞에서 책을 넘기는 등 계속해서 드러나는 원시적인 둔함이 인상적이었음. 지금까지 성장해온 수년간의 긴 생존과 극중 짧은 세월에 다뤄지는 수많은 죽음의 위기와 사건들의 불균형을 고려하지 않고 SF로써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한 것에도 감탄했음. 문학적인 정체성을 지키고 구차한 것을 배제함으로써 진화한 만화, 이 배제를 일본 만화의 관습적인 문법에 따르지 않았기에 새로운 만화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전개의 박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만, 제대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간만에 봐서 만족스럽고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