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담 #4. 예니콜 ***

“*흐극*… *히끅*…”

“저… 예니콜 님?”

예니콜 님의 클래스는 파이터(드렁큰) – 즉 취권 사용자입니다. 그걸 반영해서인지 첫 만남 때도 벌써 취해있는 모습이지만… 지금 상태도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군요.

“야아, 좀 봐줘어… 지금 상황이 이런데 *딸꾹* 안 마시고 배겨어~?”

“… 크앙 님과의 싸움이 긴장되는 건가요?”

“하… 그게 다였으면 지금 훈련하고 있지 이러고 있겠어?”

그런 것 치고는 크앙 님에게 지목당했을 때 되게 알기 쉽게 화내고 계셨습니다만… 하지만 아직 예니콜 님의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 내 캐릭터 컨셉, 알고 있지?”

“긍정. 사랑별 출신에 3번 실연한 캐릭터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제 말에 씁쓸한 표정이 된 예니콜 님이 갑자기 자리를 옮겨 제 바로 옆에 털썩 걸터앉습니다.

“맞아, 진짜 한심하지? 나 벌써 3번 차였다? 내 원본이 날 설계할 때 무슨 생각을 한 건진 몰라도… 분명 비슷한 좌절을 여러 번 겪었던 거야.”

“그리고… 4번째로 좌절하고 싶진 않아…”

“……”

아무리 둔한 저라도 저게 이별 얘기뿐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축 들어트리는 예니콜 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연산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아~ 아쉽다 아쉬워. 그놈의 유체화만 아니었으면 너한테 좀 기대서 쉬다 가고 싶었는데.”

문득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예니콜 님이지만, 어깨끼리 서로 통과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십니다.

이 유체화 기능은 제가 혹시나 이벤트에 물리적으로 간섭해 형평성을 해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상시 발동되는 능력입니다만… 지금은 왠지 그 기능이 있는 게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 죄송합니다.”

“아하하, 뭘 또 죄송하고 그래! 그럼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애써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예니콜 님이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절 돌아보며 말합니다:

“만약 이번 예선전 통과하면… 다시 한번 얘기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 때쯤이면 너도 유체화를 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장담은 못 드리겠군요.”

“치, 이럴 땐 한번쯤 받아주면 덧나냐.”

꿍얼거리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포탈을 통해 사라지는 예니콜 님.

그 빈 자리로부터 한 동안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 POV: RASCAL ***

“예니콜 다음은 너니, 와치야…”

“우와, 깜짝이야?! 너 다 보고 있었니…?”

예니콜 다음 차례로 포탈 안에 들어갔다 나온 시계는와치가 날 보고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나…?

“큼, 크흠! 경쟁자를 모니터링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래서… 잘 상담받았어?”

애써 화제를 돌리는 내 물음에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치.

“사실 상담이랄 것도 없구… 그냥 듣고 싶었나봐. 만약 이번에 이기면… 나도 좀 더 적극적이 될 수 있다고.”

“……”

와치의 소심한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W에 온 건 엄청 빨리 와놓고선 낯가리느라고 한참 동안 숨어있었다나? 우리 눈엔 마냥 귀엽게만 보였는데, 본인 입장에선 고치고 싶어했을 만도 하다.

“그랬구나… 그러니까 걔가 뭐래?”

어느새 내게서 2차 상담을 받고 있는 와치가 해맑게 대답했다:

“그 얘길 하니까 나한테 그러더라고; 지금 자기한테 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거 자체가 이미 강해졌단 증거라고.”

“…… 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상담해줬어도 비슷한 말을 했을 거 같아. 이 자식 좀 치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겨우 결단이 섰다. 와치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에게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기왕 염탐하는 거, 제대로 한 번 해보려구!”

*** 상담 #6. 라스칼 ***

“어… 음…”

“요즘엔 NPC도 벙찌냐?”

“아뇨, 전혀 예측을 못 해서…”

정자 맞은편에 앉아 이쪽을 지 – 하고 바라보는 라스칼 님. 제일 안 올 거라고 예상한 분이 나타난 바람에 사고 회로 몇 개가 나간 것 같습니다.

“하아… 착각하지 마, 어디까지나 조사야, 조사. 상담사로서 얼마나 잘하는지 동종업계로서 신경쓰는 건 당연하잖아?”

“… 입력 완료. 상담 선배님께 한 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너가 날 상담해야 – 후우, 깡통한테 태클 걸고 나 뭐하는 거래…”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잠시 하늘을 우러르던 라스칼 님이 뭔가 결심한 느낌으로 입을 엽니다:

“… 너도 알겠지만 난 걱정 인형이잖아. 이래뵈도 지금까지 상담 꽤 많이 해줬다? 너 오기 전에도 다른 친구들 얘기 많이 들어주고.”

그렇게 말하며 자랑스레 자신의 토끼귀를 쓰다듬는 라스칼 님.

“내 원본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이렇게 큰 귀를 만들어준 것도 분명 남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라고 만든 걸거야. 말하자면 이건 내 사명 같은 거라구.”

“……”

리엔 님도 1등을 하는 게 본인의 존재이유라는 식으로 얘기했었죠. 비록 소녀 X와의 접속은 단절되었지만, 소녀 V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소녀 X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라스칼 님의 미소가 갑자기 힘이 없어지더니 – 

“그런데… 이제 그런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해야 하네.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애들을 떨어트리지 않으면 안돼.”

“라스칼 님…?”

제 말 속에 담긴 의문을 눈치챘는지 쓴웃음을 짓는 라스칼 님:

“RPG 게임 하면서 하기엔 좀 웃긴 얘기지? 그치만 진심이야… 실제로 난 지금까지 한번의 PVP도 없이 90랩까지 찍었어. 이 귀는… 해치기 위한 귀가 아니라 들어주기 위한 귀니까.”

“……”

거기까지 듣고 나니까 라스칼 님이 처한 모순이 보였습니다. <소녀 리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투쟁은 필수불가결… 이는 결국 라스칼 님 자신의 ‘존재의의’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원래라면 저 같은 AI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로직 에러… 지만, 차도도 님이 말씀한 대로, 인간의 감정을 모방이나마 할 수 있는 저라면… 그래도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지요?”

“어…?”

동그래진 라스칼 님의 초록색 눈을 최대한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습니다:

“정말로 그 모순을 견딜 수 없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포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도망치면 아무런 모순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라스칼 님은 여기 있죠.”

“그건… 이미 결정을 내리셨단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 하하.”

제 말에 잠시 헛웃음을 지은 라스칼 님이 고개를 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맞지. 그래, 맞아… 이 모순을 끌어안고서라도 나가고 싶으니까. 나가서, 더 큰 세상에서… 이 토끼귀 뿐만 아니라 내 진짜 귀도 쓰는 걱정 인형이 되고 싶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 못 하는… 꿈이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저를 바라보는 라스칼 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걸 감지했습니다.

“하아… 그래, 인정할 건 해야지. 너 상담 잘해주네. 솔직히 NPC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긍정적 피드백 수신. 감사합니다… 예상 못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라스칼 님의 떠나기 전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쓸쓸함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래, 뭐… 적어도 나 떨어지면 상담역 없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고생해~”

*** 상담 #7. 하이루 & 캐서린 ***

“하이루 방가방가~”

“오우, 뭐야? 우린 폐허 속에 팽개쳐놓고 얘만 좋은 데 들어가있네? 막 킹받고 그러네?”

“… 두 분이 같이 오셨네요?”

“왜, 뭐? 그럼 안된다는 법 있으삼?”

“… 검색 결과 없음. 한 번에 한 명씩이란 규칙은 없습니다.”

“그럼 됐지~ 꼬우면 너가 나가고 우리 둘이 여기 접수할까?”

“……”

제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예에~! 하고 외치고 있는 하이루 님과 캐서린 님을 보며 또 언어 기능에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두 분은 그새 어느 틈에 이렇게 친해졌대요?

“룰 위반사항은 없습니다만… 두 분은 괜찮으신가요? 상담할 때 서로가 몰랐으면 하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던가…”

“아~ 그건 아냐! 애초에 우린 상담받으러 온 게 아니거든.”

“??”

또 사고 프로세스가 꼬인 제게 조심스레 특유의 정체불명의 말투로 묻는 하이루 님:

“님, 님은 그 뭐냐, 와쳐? 그니까 지켜보는 역할이잖슴? 그니까 님이 보고 듣는 내용들 전부 다 기록으로 남겨지는 거지, 맞음?”

“긍정. 모든 상담 내역은 추후 상담을 위한 빅데이터를 위해 기록 및 저장되고 있습니다.”

“좋아, 좋아!”

기록 기능이 뭐라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던 캐서린 님이 갑자기 절 가리키며 말합니다:

“그럼 너 앞으로 몇 분만 우리 전속 카메라가 되는 거야!”

“…… 해석 불능. 무슨 의미입니까?”

제 물음에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변한 하이루 님이 마치 비밀 얘기하는 것처럼 제게 속삭입니다:

“령아… NPC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의미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 이벤트, 아니, 이 상황 자체가 뭔가 이상해. 안 그럼?”

“…… 하이루 님이 처음 그리 말씀하신 건 아니죠.”

“차도도 형님이겠지? 안 그래도 그 형님하고도 얘기해봤어.”

… 어째서 캐서린 님이 차도도 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소녀 V들이 이 시스템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물론 NPC인 제가 판단할 몫은 아니지만요.

“암튼… 캐서린하고 얘기해보면서 이거 좀 알아볼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삼. 물론 여기서 이겨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거보다 더, 진짜 오나전 중요할 수도 있지 않음?”

“내 말이! 이거 어쩌면 인류의 명운이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니까!”

거기까지 가는 건 지나친 로직의 비약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미 잔뜩 흥분한 두 분은 이미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마침 너가 녹화 기능이 있으니까 우리 증인이 돼줬으면 해서 찾아온 거야. 우리 약속을 너한테 기록으로 남기는 거지.”

“약속이요…?”

제 물음에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하이루:

“이제 우리 둘은 팀인 거임. 일단 데스매스… 아니 데스매치에서는 서로 안 붙었으니까, 둘이 같이 통과해서 앞으로도 계속 협력해서 W의 비밀을 캐내는 거임!”

“아, 물론 니도 포함이다? 너도 참 수수께끼의 존재란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번에도 제 말은 무시당한 채로 문득 하이루 님을 바라보는 캐서린.

“아, 그리고 우리 친해진 김에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너가 루비한테 지면 내가 복수해 줄게!”

“아하하, 나도 너가 키키한테 지면 갚아줄거임!”

“뭐래, 그럴 일은 없거든!”

어느새 제가 여기 있다는 것도 까먹은마냥 서로에게 장난을 쳐대는 두 분이지만… 어째선지 굳이 여기서 제 존재를 상기시킬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이 광경… 이것 그대로 ‘좋다’라고 판단한 거겠죠.

하이루 개서린 친목 고증 챙겨서 편--안 ㅋ

다음화에선 유령이 본의 아니게 어떤 소녀 V에 상대로 사고칠 예정...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