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ㅆ…!”

바다 선배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차도도 님의 손짓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마법진들이 순식간에 방어 태세로 전환됩니다. 설마 와쳐와 직접 싸울 생각인 건가요?!

[유령, 물러나세요. 휘말립니다.]

아니, 애초에 싸울 생각 만만인 건 바다 선배도 마찬가지군요. 분명 AI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인데도 의문의 살기를 느낀 제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기가 무섭게 –

[… 핑거 오브 매드니스(Finger of MADness).]

“큭…?!”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을 못 했습니다. 바다 선배는 그냥 가만히 서서 치켜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고만 있을 뿐인데… 갑자기 차도도 님이 둘러친 마법 보호막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미친… 령아! 저 손가락 바라보지 마! 잘못하면 이성이 붕괴될 거야!”

“!!”

이전에 스스로 소개하셨다시피, 바다 선배의 정식 명칭은 전장아레나방어지원 – 즉 W의 자체 방어 시스템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전투력을 지닐 건 자명했지만, 설마 손짓만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반대로 저런 즉사기급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내며 버티고 있는 차도도 님의 강함도 만만치 않습니다. 단순히 레벨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에초에 만렙과는 거리가 먼 레벨이다), 차원이 다른 숙련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개 유저가 강하다 해도 시스템 자체에게서 오는 공격을 오래 버틸 순 없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금이 가는 차도도 님의 방어막들이… 이내 바다 선배의 큰 손짓 한번에 와장창 깨져나갔습니다.

“큭…!”

충격 때문에 뒤로 크게 밀려난 차도도 님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습니다. 아무래도 방어막이 깨진 반동으로…

하지만 크게 한 방 먹은 채 무력화된 상태에서도, 바다 선배를 노려보는 차도도 님의 얼굴에는… 절망이 아닌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하하하… 나 하나 입막음하면 다 해결될 거 같지? 이걸로 끝이 아냐… 여기선 분명 뭔가 꾸며지고 있어. 그리고 나 없이도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낼 거야…!”

[메인 시스템에 침투하는 행위는 부전패 사유입니다. 예외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

이번에 말한 건 바다 선배가 아닌… 그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붐 선배입니다. 그리고는 –

[현 시간부로 차도도 님을 룰 위반으로 인한 부전패 처리, 소멸 대상에 등록합니다.]

“뭣-?!”

“……!!”

마치 사형을 선고하는 듯한 냉혹한 말이 떨어지는 순간 – 차도도 님의 몸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직 – 지지직 –

“아…!”

갑자기 괴로운 표정으로 주저앉는 차도도 님의 전신에 마치 피멍처럼 번져가는 검보라색 노이즈. 마치… 마치 바이러스에 오염돼 손상된 파일처럼…

“그래… 역시 진짜 소멸하는 거구나. 아무도 안 믿었지만…”

시시각각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람 치고는 몹시도 초연한 표정으로, 노이즈로 뒤뎦히던 차도도 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건… 붐 선배도 바다 선배도 아닌, 저였습니다.

“… 이걸로, 일단 작별이네. 그래도 마지막에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차도도 님…”

왜일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반사적으로 차도도 님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

팟-!

공간이동을 할 때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사운드와 함께, 벌써 4분의 1쯤 노이즈에 잠식된 차도도 님의 모습이 그대로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

AI도 충격으로 몸이 굳어질 수 있나요? 저는 가능하다는 걸 지금 깨달았습니다.

[… 곧 예선이 시작됩니다. 지시받은 대로 전장으로 이동해 대전을 지켜보십시오.]

… 통상적인 AI라면 그 자리에서 명령받은 대로 이행했겠지만, 방금 그 모습을 본 저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차도도 님은 어떻게 된 거죠?”

[… 부전패 판정으로 인해 소멸 대상으로 지정, 패자룸으로 강제 전이되었습니다.]

“……”

데스매치 이후의 룰에 대해선 저도 별도로 통지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패배한다고 해서 즉시 소멸되는 건 아닌 듯합니다 – 말인즉 현재 차도도 님은 살아있다는 뜻이군요. 아직은.

“… 승낙. 분할사고를 개시, 데스매치 관전 모드로 이행합니다.”

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전이해 사라지는 바다, 붐 선배. 이제… 저도 제 할 일을 해야죠.

“… 분할사고, 14단 개시.”

조금 전에 시험삼아 혼령 분할로 둘로 나뉘어진 저였지만, 이제 본격적인 관전을 위해 스스로를 14분할로 쪼갭니다. 지켜보기 위해서… 소녀 V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왜일까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불의 무대로 떠나는 14명의 제 움직임은, 느릿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 POV: SEORITAE ***

[운영 서버에서 공지합니다. 15조 차도도 님이 룰 위반으로 인해 부전패 처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따라 15조는 순대내장 님의 부전승으로 처리되겠습니다. 나머지 14조는 지금 바로 ‘불의 무대’로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뭐… 라고?”

“잠깐만, 무슨 소리야! 차도도가 왜!”

“아니, 뭘 했길래 부전패야…?”

“……”

하필 데스매치 시작 직전, 아무 예고도 없이 들려온 날벼락 같은 소식에 모두가 경악했다. 게다가 막상 당사자인 차도도는 코빼기도 안 비쳤으니 더더욱.

… 기분이 엄청 이상하다. W에 온 그 순간부터 차도도와는 거의 앙숙처럼 투닥거렸는데, 막상 걔가 없으니까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다. 마치 10년지기 친구를 잃은 것처럼…

… 나참, 대전 직전이라 긴장해서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것 같다. 확실히 지금 상황은 어딘가 이상하지만, 그건 이번 시합을 이기고 나서 생각하면 된다.

[‘불의 무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조금 전에 떠오른 팝업창에 더는 주저하지 않고 [YES]를 누른다… 후딱 끝내버리자고.

낯익은 전이되는 감각에 몸을 맡기며 눈을 잠시 감았다 뜬 순간 –

쿠오오오오오…!

“… 진짜 불의 무대네요.”

화산 암벽으로 둘러싸인 배경 안, 용암이 펄펄 끓는 불구덩이 위에 솟아 있는 축구장 크기의 돌 플랫폼에 나타난 내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바위 몇 개 빼고는 지형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네… 나 같은 로그 클래스한테 너무 불리한 거 아냐?

“오~ 콩국수 왔다!”

“무너 씨…”

먼저 와있다가 태연히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무너 씨를 바라봤다. 저 인형 같은 드레스도 그렇고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가벼운 태도도 그렇고 여러모로 사생결단을 벌일 불구덩이와는 안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뭐 상관없겠지. 순식간에 끝낼 거니까.

조금 전, 김세레나 씨와 거래(?)를 통해 귀중한 정보를 얻었었다… 바로 무너 씨가 꼴랑 10레벨이라는 것. 처음엔 이 인간이 되도 않는 사기를 친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담 AI… 유령이랬나? 그가 띄운 프로필에서 직접 봤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와 차도도랑 만났을 때도 바로 우리의 상태창을 띄웠었지.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도 그 때 좀 옆에 붙어있을 걸 그랬나…

아무튼 뭐, 결과적으로 완전 땡잡았지. 딱히 내가 고른 것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남은 2명이 매치업된 건데 정말 천운이 따라서 최약체랑 붙게 된 거잖아? 괜히 여기서 힘뺄 필요 없이 후딱 끝내버리자고.

“오~ 저 위에서 보고 있네?”

“?”

무너 씨의 말에 위쪽을 올려다보니 –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유령이 공중에 뜬 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째선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두운 표정이지만… 뭐, 기계의 사정을 궁굼해해도 소용없지.

“후… 그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요?”

“어? 이제부터 콩국수 해먹을 상대한테 뭐하러?”

그 와중에 무너 씨 허세가 참 존경스럽다. 그래도 눈치가 있으면 우리가 자기와 비교도 안될 수준의 고랩이란 건 알텐데 저렇게 당당하게 도발을 하네.

좋아, 결정했다. 이 자리에선 전력을 최대한 숨기고 빨리 끝내버리자. 어차피 100레벨이 넘게 차이날 정도면 평타 한 방으로 때려잡을 수 있고, 나중에 이 싸움을 기록으로 보게 될 다른 소녀들에게서 내 패를 감추는 게 중요하지.

[GET READY!]

그렇게 마음을 정한 때마침 시합 시작을 알리는 아나운스가 들려온다. 나와 무너 씨가 동시에 자세를 취하고 –

[3 – 2 – 1 - ]

[FIGHT!]

“에잇…!”

퍼엉-!

미리 허리춤에 쟁여놓은 연막탄을 몇 개 흩뿌리자, 이내 폭음과 함께 넓은 아레나가 순식간에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재빨리 무너 씨의 뒤쪽으로 이동,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콰앙-----!!

“악?!”

예상치 못한 충격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물론 사람 때리면 손도 아픈 건 당연한 거지만, 이건 단순히 반동으로 인한 통증이 아니다 –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혀서 오는 아픔이다.

그리고 연기가 걷힘과 동시에 내 눈에 들어온 건 -

“… 하.”

“너…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

내 주먹을 맞펀치로 정면에서 받아낸 무너 씨가 씨익 웃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문어는 어느새 크기가 몇 배로 커진 채로 그녀의 등 뒤로 내려가 있고…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커진 문어 다리들이 그녀를 지탱해 공중에 살짝 띄우고 있다.

… 무슨 영화에 나오는 악당 과학자 같은 비주얼이네.

“흡…!”

콰직-!

주먹을 빼고 크게 뒤로 도약함과 동시에, 0.5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문어 다리 하나가 거세게 꽂혔다. 조금만 늦었으면 바로 피떡이 됐겠지.

“하… 그럼 그렇지. 평범한 쪼렙이 이런 데까지 왔을 리가 없네요.”

“아니, 나 10렙 맞는데? ‘평범한’ 쪼렙은 아니지만.”

문어다리의 힘으로 몸을 지탱한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무너 씨. 웃기지 마, 저게 어딜 봐서 쪼렙이야. 방금 그 짧은 1합으로 보여준 전투 센스도 센스지만, 저건 절대로 저레벨이 보유할 수 있는 능력치가 아니다.

이래뵈도 나도 115레벨 - 120레벨 만렙인 이 게임에서 고일대로 고인 석유 유저다. 그런데 아무리 평타라지만 내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냈을 때 느낀 힘은… 최소한 나와 동급, 아마도 그 이상이다. 이게 말이 돼?

… 엄청 억울하네. 꿀빨려고 들어왔는데 사실 죽음의 조였던 거잖아?

“후우… 그럼 진심으로 갑니다.”

“덤벼라 콩국수~”

태연히 도발하는 무너 씨에게 맞서 허리춤에 찬 나이프와 등에 매고 있던 SMG, 그리고 쟁여놨던 콩알탄을 모조리 빼들었다.

오랜만에 개빡겜 한번 해보자고.

겜순이 서리태... ㅋㅋㅋ

차도도가 부전패 처리된 걸 스토리 내적으로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공포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초반에 진실에 근접했다가 잘못 걸려서 광탈하는 애' 포지션을 맡김. 바다쌤 상대면 킹쩔 수 없지... 그 빙글빙글 손가락을 보는 순간 누구라도 암쏘맫... ㅋㅋㅋㅋㅋ

다음화부터는 드디어 데스매치네... 압축하고 압축했는데도 7화 분량 뽑혔다 ㅅㅂ...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