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V: GHOST ***

정말… 최악입니다.

내 전용 공간에 돌아온 이후로도, 한동안 저는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양손에 묻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리엔 님이 그렇게 몰아붙였기로서니, 명색이 상담 AI인데… 방금 그렇게 울컥해버린 건 AI답지도 상담사답지도 못한, 최악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첫 상담 때 제가 소녀들에게 뭘 해줬는지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의문밖에 남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승패로 명예와 

소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그들에게 제 얄팍한 상담은 대체 뭘 남겼을까요.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있던 제게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은… 소녀 V들이 아닌, 아이키 선배였습니다.

“… 선배님.”

[조금 전의 일은 보고받았습니다. 아무래도 감정 에뮬레이터가 폭주한 것 같군요.]

“… 죄송합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제게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충고하는 아이키 선배:

[사과는 무용. 다만 기억하십시오: 감정 에뮬레이터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걸 가졌다고 해서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혼동하면… 방금과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제 대답에 고개를 짧게 끄덕인 아이키 선배님이 돌아가기 직전에 저를 힐끗 보더니 덧붙이듯 말합니다:

[… 데스매치 이후 멘탈 수치가 불안정해진 소녀들이 다수 포착되었습니다. 곧 노동 강도가 증대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

솔직히 아무리 선배의 발언이라도 신뢰도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모두의 앞에서 그 추태를 부리고도 제게 상담 AI로서의 신뢰도가 남아있을까요…?

***

하지만 아이키 선배님의 말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누군가 포탈을 통해 상담의 방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것도 가장 예상치 못한 소녀 V가.

“…… 꼴이 왜 그래? 일 안해?”

“… 무너 님.”

… 생각해보면 이게 무너 님과 제가 나눈 첫 대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참… 인상적인 시작입니다.

*** 상담 #12. 무너 ***

“아하, 쫌 전에 리엔한테 욕 먹어서 삐졌네. 너 삐졌지?”

“스테이터스: 부정. AI인 저는 ‘삐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감정을 모방할 뿐 – “

“구라 즐.”

“……??”

이런 식으로 반박당한 건 처음이라 잠시 퓨즈가 나간 저를 보며 콧방귀를 뀌는 무너 님:

“내가 바본 줄 알아? 말장난하지 마. 흉내낸 거든 아니든, 네가 느낀 감정이면 그건 네 감정이야. 그리고 지금 넌 누가 봐도 뭔가 느끼고 있어.”

“……”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멈칫한 사이, 제 맞은편 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는 무너 님:

“그래서, 나 상담 안 해줄 거야? 나 지금 정신적으로 좀 힘든데? 상담이 필요할 거 같은데?”

“… 정말인가요?”

“속고만 살았냐?”

… 솔직히 지금 무너 님의 모습만 보면 도저히 상담이 필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까 데스매치 때를 생각하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의 무너 님은… 정말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으니까요.

“…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제 대답에, 그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지은 무너 님이 대답합니다:

“우선은… 너 정신 좀 차려. 저 밖에 애들,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지금이야 다들 센 척하면서 허세부리고 있지만… 쟤들 중에 지금 상담 필요한 애들 많을 거야.”

“네가 필요할 거야.”

“…!”

아까 아이키 선배가 했던 말과 내용적으로는 같지만, ‘제가 필요하다’… 그 한 마디가 그 순간 제가 가장 들어야 했던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형편없는 상담사일지라도, 뻔한 말밖에 해줄 수 없을지라도… 이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나마 소녀들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게 제 사명이자 존재의의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별로 AI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것이 상담사로서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 조금 표정이 나아졌네.”

그런 저를 보며 안도한 듯 살짝 웃는 무너 님이 이젠 듬직해보이기까지 합니다. 확실히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군요.

“그런 무너 님은… 괜찮으신가요? 데스매치 때 그건, 대체…”

말해놓고 너무 캐묻는 건 아닌가 싶어 멈칫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오는 무너 님의 대답에 놀랐습니다:

“글쎄? 나도 잘 몰라… 라기보다,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 정신차리고 보니까 다 끝나 있더라고.”

… 하긴, 그 때의 무너 님의 상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아지경에 가까웠습니다.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거나, 아예 내내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이어지는 무너 님의 말은 몹시 의미심장했습니다:

“근데… 떠올리려고 하면 왠지 엄청 슬퍼져. 꼭 엄청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처럼… 그건 나였을까? 아니면 내 ‘원본’이었을까…?”

“……!”

기억 속에 저장된 무너 님과 서리태 님의 데스매치 영상을 뇌내에서 다시 재생해봅니다. 확실히… 중간에 무너 님이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려나온 사이버 고스트에게 안길 때는… 매우 그리운 누군가와 재회한 듯한…

“… 뭐, 기억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거 고민해봤자 뭐해?”

짐짓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며 떠드는 무너 님이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저렇게 초연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예사롭지 않은 정신력의 소유자로군요.

“무너 님은… 참 비밀이 많으신 분 같습니다.”

“야, 원래 여자는 비밀 한두개는 있어야 하는 거야!”

여전히 영문 모를 말씀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데스매치 시작 이후 거의 처음으로 웃은 것 같습니다.

*** 상담 #13. 캐서린 ***

그리고 무너 님의 말은 맞았습니다; 그녀가 나가기가 무섭게 마치 교대하듯, 평소와 달리 굉장히 착잡한 표정의 캐서린 님이 천천히 걸어들어왔습니다.

“하아… 씨.”

들어온 뒤로도 한동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초조한 짐승처럼 서성이던 캐서린 님을 차분히 기다리자, 결국 한참 뒤에야 한숨과 함께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 압니다.”

지금까지 봐온 캐서린 님은 금쪽이별 출신에 걸맞는 트러블메이커 이미지였습니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소녀들을 도발하고 싸움을 즐기는 승부광.

하지만 하이루 님과 같이 상담받으러 왔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저는 압니다; 그녀는 동시에 함께 하는 친구들을 누구보다 아끼는 뜨거운 심장의 소유자란 걸요. 그녀에게 있어 다른 소녀 V들은 경쟁자, 라이벌이지만 동시에 동료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그 중 하나를 자기 손으로 매장하고 왔지요. 그것도 그녀와 가장 대척점에 서있고 죽이 잘 맞던 키키 님을 말입니다.

“아니 그야, 머리로는 이해한다? 결국 다 같은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니까 싸우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 건 싫어하지 않는다구.”

그렇게 말하며 다시 울적한 표정이 되는 캐서린 님.

“그치만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애초에 그 연출은 대체 뭐냐고. 내 눈앞에서 키키가 마치, 먼지로 변해 사라질 것처럼…”

“……”

만약에 정말로 소멸하게 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습니다. 단순한 팩트 전달이 상담의 취지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압니다.

“… 하이루한테 약속했었는데. 같이 이 이벤트의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그리고 만약에 하이루가 떨어지면 대신 갚아주겠다고.”

그러고 보니 캐서린 님은 W에 와서 하이루 님과 급속도로 친해졌었죠. 그랬던 게 데스매치를 겪으며 둘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버렸습니다.

“… 살아돌아왔으면 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 하이루도 그렇고, 키키도 그렇고… 할 수만 있다면 난입해서 구해주고 싶을 정도야. 그치만…”

이미 본선에 진출한 소녀 V들이 패자부활전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캐서린 님 같은 행동파들은 무력감을 느끼기 충분한 상황이라 할 수 있군요.

하지만… 정말로 지켜보는 것’만’ 허락된 건 아닐 겁니다.

“그럼, 참관해서는 두 분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겁니다.”

“어…?”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캐서린 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전언합니다:

“아레나에 대한 물리적 간섭은 금지되어 있지만, 소리까지 차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캐서린 님이 그 마음을 담아 응원의 목소리를 내면… 분명 하이루 님에게도 키키 님에게도 닿을 겁니다.”

“……”

잠시 동안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져 절 바라보던 캐서린 님이 짧게 웃으며 중얼거립니다:

“너.. 그새 성장했네? 저번에 왔을 때보다 말솜씨가 더 좋아졌어.”

“… 그런가요?”

생각해보니 캐서린 님은 30명의 소녀들 중 유일하게 2번째 상담이군요. 그 2번의 상담 사이에 제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그 소식에 제 감정 에뮬레이터에서 무언가가 솟구칩니다… 이게 ‘기쁨’이라는 걸까요?

그 생소한 감각에 매몰된 나머지, 그런 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캐서린 님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하아… 유주얼의 맘이 어땠을지 알 것 같기도 하구.”

*** 상담 #14. 뚱냥이 ***

이거 참… 또 전혀 예상치 못한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 분명 예전에 상담은 필요 없으시다고…”

“뒤끝이냐?”

“아닙니다.”

제 즉답에 코웃음을 치는 뚱냥이 님입니다만… 솔직히 정말로 예상 밖의 방문객이라 저도 대응이 혼란스럽습니다. 보시다시피 생각을 입 밖으로 거의 내지 않는 분이라, 설령 정말 상담을 요청한 거라고 해도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대화의 의향이 있으신 건지, 잠시 침묵하던 뚱냥이 님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예선 이후로 생각을 좀 해봤어. 아무리 데스매치라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할 이유는 없었어.”

“… 저로서도 이벤트 설계에 대한 운영의 의향은 알지 못합니다.”

제 대답에 미간을 좁힌 뚱냥이 님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잇습니다:

“네가 모르면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지. 어쩌면… 그게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어.”

“!!!”

그 말을 들은 순간, 제 머릿속에 또다른 목소리가 오버랩됩니다:

‘…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차도도 님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서, 실제로 이벤트의 이면을 파헤치려다 부전패 처리되어버린.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저도 모르게 –

“안 됩니다…!”

어어 뚱냥아 그거 플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