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의한 행위를 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는 계급의 적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과 짐승을 마치 체화된 습관인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짐승의 차이란 무엇인가요? DNA 구조가 다르다는 것? 인간은 지능이 높지만, 짐승은 상대적으로 지능이 낮다는 것? 인간은 목재, 콘크리트와 철로 만든 주거지에서 살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다는 것?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몇 가지 속성을 추출해내서 하나의 추상적 보편을 구성하거나, 어떠한 규정을 근거로 해서 하나의 유(類)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유 역시 개별과 보편의 연관을 함축하고 있는데,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유적 존재', '유적 본질'이라고 할 때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유를 의미합니다.
유(類)와 종차(種差)의 관계는 보편자·특수자·개별자의 변증법을 이해해야 정확히 다룰 수 있는 문제라, 사실 인간의 유적 본질,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설명하는 데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헤겔, 포이어바하, 마르크스의 수많은 저작을 참고해야 하는 것이므로, 만만한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저는 이에 대한 아주 간략화한, 대략적인 설명만을 서술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를 정립한 포이어바하의 글부터 검토해야 합니다. 포이어바하야 말로 '객관과 주관의 변증법으로서의 인간', '대립물의 매개연관으로서 존재인 인간'이라는 개념을 구축했습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그에 대해 비판했을 때의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포이어바하가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해서 "부단한 매개연관의 양상으로서 인간"이라고 했을 때, 두 사상가는 그것이 추상적인 언명이라는 한에서 그 타당성을 인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두 사상가는 이 점에 대해서 포이어바하를 비판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포이어바하에 대한 두 사상가의 비판점은, 포이어바하가 감성(구체적 대상)과 오성(추상)의 변증법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두 항을 모두 현실적 삶과 무관한 추상 일반으로 해소해버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포이어바하는 《미래 철학의 근본 원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고대 전환기 철학이 아직 인간의 축복으로 생각한 것 즉 조국, 가정, 세속적인 유대관계, 일반재화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을 육체적인 삶보다도 더 좋게 생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육체를 본질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행복을 모두 육체적인, 다시 말하면 외부적인 사물과 분리시켜 단지 영혼 속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외에 어떤 것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발견하며 현실적인 세계 대신에 상상적이고 예지적인 세계를 설정한다. 여기서는 모든 현실적인 것이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미래 철학의 근본 원칙》, 이문출판사, pp. 56-57.)
포이어바하는 고대 신플라톤 철학가들이 인간을 대해 논함에 있어, 그것의 본질을 감성적인 존재와 분리된 "영적인 무언가"로 간주했다는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실은 그 "영적인 무언가"로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발견하며 현실적인 세계 대신 상상적이고 예지적인 세계"를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더욱 명확해지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예지적인 세계"는 "감성적인 세계" 또는 "현실적인 세계", 즉 감성적인 것의 반영으로서의 그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활동이 당장에는, 그것이 예지적인 것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결국에는 감성적인 것의 대응 결과에 불과하다는 게 포이어바하의 통찰입니다.
포이어바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화합니다:
"실제로 현실적인 것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것으로 현실적인 것은 감각의 대상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며 감각적인 것이다. [...] 인간은 유년시절에 모든 사물을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본질로 파악한다. [...] 감각을 통해서만 자아는 비아(非我)가 된다. [...] 감성만이 이러한 상호작용의 비밀을 해결해 준다. 감성적인 본질만이 서로 서로 작용을 한다. 나는 나에 대해서 자아이고 동시에 상대방에 대해서 타아(他我)이다. 그러나 이런 타아는 단지 감각적인 본질로서만 가능하다. 추상적인 오성은 그러나 이러한 대자존재(對自存在)를 실체, 원자, 자아; 신으로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오성이 대자존재를 이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자의에서다." (pp. 63-64.)
피히테가 말하였던 자아와 비아 간의 투쟁을 감성과 오성 간의 투쟁으로 대응하여 이해하는 포이어바하는 감성적인 것이 즉자태이며 규정적인 것의 지위를, 오성적인 것이 피규정적인 것의 지위를 지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객관-주관 변증법이 포이어바하로부터 노골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계도 엿보입니다. 그는 이 연결을 "순전히 자의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객관-주관 변증법의 작용 형식으로서 인간의 활동을 자의 일반(마르크스는 아마 이것을 '직관'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으로 해소해버립니다. 아시다시피 자의는 불안정한 선택의지로 필연에 대한 인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그러한 인식과는 거리가 먼 자의 일반을 인간 영역에서 객관과 주관의 상호작용의 주춧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객관과 주관의 상호작용은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합목적적인 노동, 즉 외부 자연을 능동적으로 개변하는 활동(능동적인 실천)으로부터도 성립됩니다.
물론 그는 오성적인, 또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에 대해 말하지만, 이를 객관-주관의 상호작용이 끊어진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로만 취급됩니다. 동지들도 아시겠지만, 마르크스는 그 반대로, 외적 필연성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능동적인 노동, 즉 자아실현으로서의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는 이를 (이성적)인간의 대상적 활동으로 간주합니다. 마르크스는 이성을 구체와 추상의 부단한 매개연관을 전제한 속에서 파악하지만, 포이어바하는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 했습니다.
인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주관 변증법을 자의라는 형태 일반으로 해소해버리는 포이어바하는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존재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는 감각, 직관, 지각, 사랑의 존재이며 이러한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이고 존재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가치가 있다. [...] 지각과 사랑 속에서만 이 사람, 이것 등에서의 '이-' 즉 개별자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이고 여기에 유일하게 사랑의 무한한 깊이와 신성과 진리가 있다." (pp. 64-65.)
포이어바하는 추상화된 지각과 사랑 속에서 인간이라는 개별자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감각적인 것으로서 지각과 사랑("바로 '이-'가 사랑 속에서만 절대적 가치를 가지므로 추상적 사유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 속에서만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p. 65.) 곧 인간의 유적 본질을 이룬다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포이어바하의 문제점은 감성적인 것과 오성적인 것(또는 이성적인 것)의 상호작용을 옳게 말하다가도,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감성적 활동과 합목적적 활동을, 그리고 세속적인 활동과 종교적인 활동을 이원화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포이어바하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감성적 활동과 합목적적(이성적) 활동을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합니다. 아직 인간을 다루지 않는 단계의 영역에서 그는 둘을 매개되는 항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인간적 행위라는 영역에서 두 항을 서로에 대해 매개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불변자로 간주합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것입니다:
"포이어바하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인 세계 및 세속적인 세계로의 세계의 이원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 [...] 세속적 기초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 (《저작 선집》, 제1권, p. 186.) [...]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p. 189.)"
우리는 포이어바하가 지니는 의의와 그 한계를 파악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하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철학적 이해》(새날)에 기입되어 있는,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한 T. I. 오이저만(그는 결국에는 변절하였지만, 사회주의권에서 나름 정통파로서 입지를 굳힌 바 있습니다)의 글을 보기로 합시다:
"계획적이고 목적의식적이며 조직적인 활동인 노동과 생산, 명확한 과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일, 그리고 관념 속에서 노동의 결과물을 예측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일 등은 지식을 지닌 존재, 사고와 의식을 소유하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다. 이러한 노동의 필수조건들은 인간의 발전과 완성의 결과다. [...] 그것은 본능적인 동물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 인간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의 등장은 동물계에 그 원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인간의 철학적 이해》, 새날, p. 93.)
인간의 유적 본질이란 인식주관에 작용하는 자연의 합목적성, 즉 외적 필연성에 의해 대상적인 욕구를 지니고 이 살아있는 구체에 의해 생성된 욕구를 노동 실천을 통해 지양하고 이러한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자연을 개변하는 것입니다. 그 개변된 자연에 의해 다시 (더욱 높은 수준의)대상적인 욕구를 지니게 되고, 그 욕구를 다시 지양하는 것(노동 실천)도 유적 본질입니다. 유적 본질은 본래 인간종이 탄생되기 전, 동물적 단계의 '모종의 생산 활동'을 그 모체로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이란, 인간종이 형성되기 전의 동물종의 유(類)로부터 생성된 것입니다. 그 과정은 수많은 조건과 연관되며, 질적 변화를 거듭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오이저만은 말합니다.
아주 단적으로만 말하자면, 인간은 물질의 자기운동의 일정 국면에 의해서 생성된 인식주관과, 기존의 객관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인데, 그것은 자연에 의해 촉발된 인식주관에 의한 자연의 개변으로 정리됩니다. 객관적 실재로서 자연이 자기운동을 통해서 주관을 생성하고, 그 주관이 자연필연성을 보존하는 선에서 자연을 개변하고, 개변된 자연은 다시 그것의 반영으로서 주관을 생성하는 것, 이러한 끊임없는 운동이 인간의 유적 본질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그저 물질(자연)의 자기운동이 이루는 특정한-일면적 체계 내 모든 운동 양상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이 지니는 구체적인 측면, 그것의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은 진화학(자연적인 것의 범주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범주까지 포함하는 후성유전학적 틀로서)상 인간의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이 지니는 내용을 분석·종합하여 더욱 높은 수준으로 확립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 생명과학, 심리학 연구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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