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 다른 구절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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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차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술집에 앉아 떠들어대는 이상하고 볼품없는 방식이 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었고, 내 저항의 방법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가면서, 때때로 상황을 이런 식으로 파악했다. 만약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더 좋은 자리와 가치 있는 일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야 자멸해버리면 그만이고, 손해는 세상이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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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참 재밌으리만치 그리스 고전 형식을 따라간다. 이 형식은 지금에 와서도 정말 우스우리만치 잘 먹히는 서사다.
그리스 고전을 두 단어로 함축하자면 "파괴와 재생"이다. 주인공은 남부럽지 않은 태생으로 출발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추락하여 끝없이 방황하고, 끝내는 선지자의 도움으로 다시 각성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조다. 이 선지자는 디오니소스 신일 때도 있고, 이름 없는 현자일 때도 있고, 동무일 때도 있다. 이 서사는 상당히 종교적인 내용으로 시작해 인간 내면의 성찰로 끝난다. 종교적이란 점에서 홍길동전과는 조금은 다르다.
헤세는 불교 등을 망라한 종교 전반을 탐독했던 인물이므로, 그리스 고전에도 익숙했을 것이다. 그는 그 형식을 빌려 와 <데미안>을 써낸 것이리라. 물론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초기 생애는 있는 그대로 헤세 본인의 유년시절이었겠지만. 작중의 선지자인 데미안은 아마 그리스 고전의 형태를 따라가 창조해낸 인물이 아닐까. 솔직히 나는 지금도 이런 이가 헤세의 생애에 실제로 있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기엔 실로 완전하며 또한 '악마적'이고, 초월적인 인물이라서다.
그런 신화적인 형식을 차용한 데미안은 부유한 태생>고난>번민>각성을 따른다. 위에 적은 문단은 데미안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번민' 단계에 이르러 독백하는 내용이다.
"응, xx해봐! 자살하면 그만이야!"의 헤르만 헤세 버전이랄까.
나는 이 문단이 상당히 와닿았다. 손해는 세상이 보는 것이다. 나야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있는가? 나는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괴로웠다. 심지어 내 생각을 억압하려 든다. 그런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무저항이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 했더란 것처럼(그런 말을 갈릴레이는 한 적이 없었다고도 하지만, 뭐 내 어릴 땐 꽤나 유명한 일화였다) 나 역시 "그래도 사회주의가 옳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치 않는다면, 나 혼자서 더 무얼 어쩌겠는가." 하며, 나는 나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저 일본의 누군가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 자긍심이었다."며 불꽃처럼 살다 바람같이 떠나갔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 삶이 너무 두려웠다. 나는 기타 잇키가 아니라 오바 요죠였다. 나 또한 그렇게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 나는 타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나 역시 이해받지 못하는 그 현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던지 "너무 어리석다"며 신경삭 따위를 농담처럼 말하고, 인체 개조를 위시한 초인본주의를 광증처럼 지껄이는 것은 그래서다.
하지만, 그렇게 광인처럼 떠돌다 죽는다 해도 그게 내 손해겠는가? 내가 스테이크를 썰다 죽든 꽁보리밥을 먹다 죽든 나는 결국 죽을 뿐이다. 그 손해는 세상이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 하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인민의 이야기다. 각자가 타고난 역량, 그에 따라 활달히 피어나는 예술, 기술, 방식들을 감히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떠날 모든 인민에게 향한 이야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 하나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세상의 손해지 내 손해는 아니다. 세상 따위는 어떻게 되버리든 좋지 않은가.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결국 저 무의식 속에 던져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것인데.
그 때에 내가 세상을 아쉬워하겠는가? 그런 감각조차 남지 못할 터인데.
그런 자괴에 빠져 나는 이십년여 동안 나를 괴롭히는 데 골몰했다. 어땠냐고 하면, 솔직히 즐거웠다. 이런 가련한 세상에선 미친놈이 제일 즐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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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왔다. 하지만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서 발견한 것이라면, 그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의 필사적인 소원이 필연적으로 그 곳으로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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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변명을 마치고서, 아마 19년 여름 아니었을까? 코로나란 것이 귀에 들리기 이전이었던 것은 확실하므로 아마 그 쯤일 것이다. 그 때에 정말 우연히도 '로자 룩셈부르크 갤러리' 링크를 보았다. 힛갤?인가 뭔가에 오른 글을 꽤 재밌게 읽고난 뒤, 댓글을 쭈르륵 내리다가 그걸 보았다.
피난처? 라는 말은 조금 그렇다만, 아무튼 나는 여길 찾아왔다.
군대에서 보았던 책이 다시금 기억났다. 뭐시기 다락방이란 제목의 책이었는데, 거기서 아무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글귀를 보았다. 왜인진 몰라도 난 그 말이 상당히 마음에 남았다. 온 우주가 도와주니 뭐니까진 아니더라도, 나는 그 이전에도 꽤나 운명론적인 인간이었다. 필사적인 소원이 있다면 진실로 스스로가 그리로 옮아갈 것이라는 그 말은... 운명이란 것에 좀더 무게를 두는 내겐 충분한 울림이 있었다.
헤세도 똑같은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헛웃음이 났다. 결국 인간은 다 같은 것이다. 다 같은데도 서로를 왜 이해하지 못할까! 저 유럽인과, 70년은 건너 뛴 동양의 내가 서로 같은 생각을 지금 향유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 우리는 서로 같은 놈들인데. 어째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감상으로 로갤을 눈팅했다. 처음 내 생각은 "혁명"이란 단어가 상당히 멋져보여서 그저 거기에 미혹된 얼치기들 공간이겠지. 나라고 뭐 다르지 않지만. 혁명 그 자체에 경도된 게 아니라, 혁명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내 편견 이상이었다. 나는 기뻤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단 그 사실이 어찌나 큰 구원이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아마 내 심경은 정말 모를 것이다.
그 때서야 나는 가까스로 두 발로 섰다. 여전히 내 살 파먹는 취미를 향유하는 중이고, 그렇게 여전히 더듬더듬하며 더디게 가는 중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현실이 무섭지 않다. 나 뿐만이 아닌 이 길이 더 이상은 슬프지 않다.
내가 몇 번인가 참 자주 썼던 말이지만,
로갤이 있음에 참으로 나는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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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많은 고독감을 맛보았다. 내 앞에는 보다 더 깊은 고독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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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내 두 발로 서서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실로 힘든 일이었다. 그간 부러 무시했고, 도망치고, 보지 않으려 애쓴 모든 것을 목도하고 나니 정말 모든 게 시급했다. 나라는 개인은 무얼 할 수 있을까? 뭐라도 해야하지만 나는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곤혹이 찾아왔다. 그것은 도망치며 나를 괴롭히던 때와는 또다른 고독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더 이상 피할 도리는 없더란 것이다.
동지가 있음에 구원받고, 동지가 있음을 알고 난 지금은 더 이상 "나 혼자 뭘 어쩌라고 응애?"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피할 도리가 없다. 내 곁에 있는 동지를 피하는 것은, 그것은 인의에 어긋난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나는 데미안을 읽어나갔다.
그 끝에 헤세는 드디어 독자를 구원으로 이끈다. 결말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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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했지만 가장자리까지 찰랑찰랑 채워진 와인 잔처럼 다정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로군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당신이 꿈꿨던 것처럼 완전히 당신 것이 된답니다. 당신이 변함없이 충실하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지도 않는 욕망에 굴복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무엇을 소원하는지 난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욕망을 깨끗이 단념하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정당하게 소망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 소원이 성취될 거라고 확신하며 요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소원은 성취될 겁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갈망과 포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두 경우 모두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전부 다 극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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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게도, 내 어머니도 늘 내게 하시던 말씀이다. 세상 모두가 너를 도우려고 준비 중인데 너만 그걸 모른다. 네가 나서기만 하면 그들 모두가 너를 조금씩 도와주며 뜻하는 바로 향할 수 있게 이끌어 줄 텐데! 라 하셨다.
내 어머니도 분명 그런 조력자 중 하나였으리라. 그러나 우리 사이에 골이 깊었고, 나는 그녀의 도움조차 청할 수 없었다. 이것은 내 용기나 자존감 문제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이의 굴곡이 그마만했던 탓이다. 계속 말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박힌 가장 큰 족쇄고, 저주다.
말 그대로 나는 모든 게 두려웠다. 하지만 내 친모의 말씀따나, 그럴 이유가 없더란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면 그것은 극복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런 최소한의 환경을 얻길 바라는 그 마음으로 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내 행복 뒷편에 수많은 슬픔이 있고, 산처럼 높은 시체가 있다면. 행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인간을 등진 것이다.
끝으로, 아브락사스 다음으로 유명한 구절을 쓰고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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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다. 잘 꾸민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도 않다. 무의미, 혼돈, 광기 그리고 꿈의 맛이 날 뿐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지 않는 이들의 삶처럼 말이다.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자, 좁고 긴 길이다. 지금껏 누구도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그 길의 끝까지 가려고 애쓴다. 어두워서 더듬거리며 걷는 이도 있고, 환한 길을 성큼성큼 가는 이도 있고, 저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각자가 출생의 흔적들, 태고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끝까지 지고 간다.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는 이들도 많다. 상반신이 인간이 되고 하반신은 물고기로 남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인간이 되는 행운을 바라며 자연이 던진 대담한 시도들이다. 우리 모두가 같은 어머니, 대지의 여신에게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협곡, 저 깊은 심연에 내던져진 주사위들이어도, 저마다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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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룰 이해할 수는 있어도, 결국 그런 체를 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시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아것이 가장 큰 슬픔이다.
나를 비롯한 이 모든 슬픈 짐승들이 끝까지 향할 수 있다면, 그 끝은 결국 공산주의일 것이다. 공산주의는 서로를 이해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그런 마음으로 우리 력사의 다음을 바라며, 뭐라도 해보려 용쓰고 있다.
데미안은 재밌는 소설이니,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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