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그렇다면 당신은 꽤 오래전부터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소?"
네흘류도프는 물었다.
"나요? 벌써 오래전부터지요. 23년 동안이나 나는 쫓겨다니고 있으니까."
"쫓기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리스도가 쫓겼듯이 나도 쫓기고 있는 거요. 나는 붙들려 재판에 걸리기도 하고 사제에게 보내지기도 하고 학자들에게, 바리새 교도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했소. 그러나 나를 어쩔 수는 없었지. 나는 자유니까 말이오. '네 이름은 뭐냐?' 하고 묻더군. 놈들은 내가 이름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소. 나는 모든 것을 거부했거든. 나에겐 이름도, 주소도, 조국도 없소.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이오.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사람이오' 하고 대답해주었지. '나이는?' 하고 묻길래 나는 말해주었지. '세어본 적이 없고 또 셀 수도 없소. 왜냐하면 늘 살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 것이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기에 나는 말해주었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소. 나에겐 하느님과 땅만이 있을 뿐이오'라고 말이오. 하느님이 아버지고 땅이 어머니요. '그럼 황제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고 묻기에 '인정할 것도 인정하지 않을 것도 없소. 황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황제이고 나도 나 자신에 대해 황제요.' 그러자 '너 같은 놈하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기에 나도 말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노라고 해댔지. 그랬다가 지독한 변을 당했지요."
"그래,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 길이오?" 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하느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지요. 일을 하는 거죠. 일이 없으면 구걸을 할 뿐이지." 하고 노인은 말을 맺었다."
-똘스또이의 <부활> 중 (최경준 역, 홍신문화사, p.472-473)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와 더불어 례프 똘스또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소설입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널리 읽혔고 자주 연극으로 번안된 작품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문학예술 애호가들과 연구자들에게는 선술한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떨어지는 편입니다.
종교인들이 아닌 독자들, 특히 비그리스도교 독자들 중에는 작품 후반부에 네흘류도프가 복음서를 읽고 감화되어 길을 찾는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서사의 결말을 맞이하는 대목에서 김이 빠진 분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부활>은 똘스또이의 작품 중에서 굉장히 빠르게 저술되었습니다. 당시 로씨야의 자생적인 그리스도교 토속 종파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절대적 평화주의, 채식주의를 실천하여 탄압을 받았던 '두호보르' 교도들의 캐나다 이주를 위한 지원금을 마련하고자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저술해야 했던 작품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지원금 마련 사업에는 똘스또이와 더불어 당대 로씨야 아나키즘의 거두였던 끄로뽓낀(여담으로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도 참여했습니다.
이른바 '개종' 사건 이후 뚜르게네프와 체호프 등 당대의 위대한 작가들이 똘스또이가 종교에 빠져 자신의 천재적 예술성을 망치고 있다며 개탄스러워 했죠. 실제 개종 이후에 예술관 자체가 바뀐 점도 있습니다. 똘스또이가 실제로 그 무수히 많은 위대한 작품을 제쳐놓고 <까프까스의 포로>라는 짤막한 중편소설을 빼놓고는 개종 전 자신의 작품들은 죄다 '쓰레기'였다며 독설을 퍼부은 적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 <까프까스의 포로>는 체첸 지역으로 파병된 한 러시아 군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반전평화주의적인 성향이 일찍부터 나타난 책입니다. 1990년대에 로씨야연방에서 영화로 각색 및 제작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부활>은 서사적 완성도에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예술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귀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제정 로씨야 말기 여러 인간군상들에 대한 섬세하고도 신랄한 묘사와 풍자,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문호의 천재성이 드러납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두호보르 교도 뿐 아니라 당시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소외되었던 로씨야 정교회 분파들과 소수 종파 신자들의 정서가 매우 위트있게 묘사되어있습니다. 똘스또이는 아마도 이들과 직접 대면하고 동정했던 경험을 거치면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을 더욱 굳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 분파들과 종파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더군다나 <부활>을 통해 퍼진 똘스또이의 사상적 영향은 굉장히 광범위합니다. 1905년 상뜨뻬쩨르부르끄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노동자 집회를 주도했던 로씨야 정교회 신부 게오르기 가폰, <닥터 지바고>의 저자 보리스 빠스쩨르낙,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아나키스트들, 일제강점기 조선의 계몽주의적 민족주의자과 기독교 인도주의자, 심지어 춘원 이광수조차 <부활>과 똘스또이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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