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당시 독일의 ARD(독일연방공화국 공영방송협회)의 일본특파원 소속이었다. 그는 광주에서의 시민과 계엄군이 충돌 했다는 짤막한 소식을 듣고 5월 민주항쟁이 진행중이었던 5월 20일.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모티브가 되던 김사복과 함께 광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족이지만. 그당시 5월 광주의 참상을 최초로 보도하던 기자는 NHK 소속 PD 와타리 마사오였다고 한다.)
김사복과 위르겐 힌츠페터는 5월 20일,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영화속에선 김사복이 개인택시로 묘사되었음) 광주로 달려갔다. 서울을 벗어나 제지당할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휑한 도로가 불길해 휑한 도로를 촬영했다 한다.
광주에 진입하자 군인들이 검문들로 진입을 못하게 막았었다. 그러나 우회로를 찾고 가던 도중 영화와 같이 한 마을에서 청년들을 만나 트럭에 올라타 청년들과 같이 갔다고 한다.
그후 광주에 체류하던 도중 엠네스티와 평화봉사단들의 소식을 듣고 광주의 참상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다음날 새벽 4시. 총성이 울려 건물 옥상에서 취재하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두 청년이 총성으로 인해 주검으로 발견되는 것을 목격하자, 그는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취재를 시작했다.
힌츠페터는 만 하루만에 광주에서 빠져나와 서울 단스크 호텔에서 필름을 쿠키통에 숨겨두고 (영화속에선 차량속에서 쿠키통에 필름을 숨김) 일본 나리타를 경유해 곧장 독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23일. 광주로 또다시 잠입을 하며 광주에서 취재를 시작하고 폭도들이 점령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깨기위해 두번째 필름을 다시 보내 방송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5월 민주항쟁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생전 했던 말이다.
"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 우리 독일인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했던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
그는 3년 뒤, 취재를 시도하다 계엄군에게 부상을 당해 기자를 그만두어야 했었고, KBS 일요스페셜에 나와 다큐에 나와 증언이 되었기도 하다.
그는 결국 2016년, 심장병을 앓고 있었던 관계로 타계 직전 광주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유족들이 반대해 그의 신체 일부만 5.18 구묘지 입구에 봉안 되었다고 한다.
5월의 여명이었던 민주항쟁은 잊혀지지 않고, 계속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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