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로가 숲에서 약초를 따러 갈 때면 늘 미틸이 따라나섰지만 오늘은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루틸이 피가로를 따라 바구니 한 가득 약초를 따서 돌아왔다. 그리고나서 둘이서 늦은 점심을 먹었고 루틸은 오후부터 리케와 미틸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약속이 있었다. 화창한 오후 정원에서 루틸은 미틸과는 아침식사 이후, 리케와는 오늘 처음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아주 평온하고 멋진 시간이 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식사 만에 본 미틸은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루틸이 놀라 큰소리를 치자, 리케 옆에 선 미틸은 시무룩한 얼굴로 미스라 씨와 싸웠다고 말했다. 휙 외면하고 루틸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 미틸의 무릎과 팔에 난 상처를 루틸이 마법으로 하나하나 치유해 준다.
"왜 미스라 씨와 싸웠니? 화해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화해도 안 했어요."
이런! 루틸이 소리를 높이는 한편, 리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싸움은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리케는 옳음의 덩어리이다. 루틸도 화해는 해야 한다고 미틸에게 말했다.
"어쩌면 미스라 씨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싸움은 어느 한쪽만 나쁜 게 아니야. 미틸에게도 잘못이 있었을 거야."
루틸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미틸은 외면한 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루틸도 원인을 모르는 이상 미틸을 더 나무랄 수가 없었다. 루틸이 리케를 살펴봤지만 아무래도 싸운 이유를 모르는 것 같고, 미스라는 난폭하다고 분개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일단 상처를 치유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 먼저겠지. 싸움의 원인은 미스라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미스라는 천 년도 넘게 살고 있는데 열다섯 살과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스라 씨, 미틸과 싸웠죠?"
"안 했어요."
루틸은 공부를 마친 뒤 저녁에 미스라의 방을 찾아가 미스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방문 옆에 선 미스라는 평탄한 목소리로 꼿꼿하게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틸이 상처가 많이 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미스라 씨와 싸웠다고 하던데요."
"하아?! 나와 미틸이 싸울리가 없잖아요. 분명히 봐 줬어요. 뭐, 조절을 잘못해서 힘껏 날려버렸지만요."
루틸의 말에 미스라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미스라가 보기엔 미틸과 싸우기엔 힘 조절이 필요해서 상대도 안 된다는 말이겠지. 루틸은 겨우 미틸이 다친 원인을 알고 화가 치밀었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강한 마법사가 그런 짓을 하다니, 루틸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스라에게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북쪽과 남쪽은 다른 것이다. 미스라라면 죽여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일단 루틸은 분노를 제쳐두었다.
"그걸 싸웠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그래서 왜 싸웠어요?"
루틸의 말에 미스라는 목소리가 크다고 한 뒤 입을 조금 다물었다. 잠시 허공에 시선을 방황하며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기분 탓인지 무거워진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미틸은 뭐라고 했죠?"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미스라가 묻자 루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대답을 들은 미스라는 그럼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미틸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미틸의 명예를 위한 일인지, 미스라와 미틸에게 불편한 원인인지, 미틸도 미스라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루틸은 알 수가 없다. 원인을 모르면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것도 어렵다.
"미스라 씨까지 어린애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아직 화해하지 않았죠? 제가 도와줄테니까 화해해요. 원인을 알려주세요."
"딱히 싸우지 않았으니 화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스라는 루틸의 말에 딱딱하게 대답했다. 난감한 표정을 하는 루틸도 신경 쓰지 않고, 그런 것보다, 라고 말을 꺼내고 만다. 미스라에게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므로 미틸이나 루틸과는 다른 것이다.
"당신, 오늘 밤도 제 방에 올 거죠?"
"네? 아아...... 네. 그럴 생각이에요......"
루틸은 갑작스럽게 달라진 화제에 당황하면서도 미스라의 물음에 긍정했다. 방에 찾아올 건지 새삼스럽게 확인을 받은 적은 없지만 최근 들어 루틸은 매일 밤 한 번쯤 미스라의 방을 찾아갔다. 잠에 들 수 없는 미스라를 위해 허브차를 만들어 갈 때가 많은데, 그날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수면 굿즈를 준비해 가곤 했다. 루틸 또한 미스라는 대개 밤에는 자기 방에 있으니까 방으로 찾아가겠다고 굳이 말한 적은 없었다.
"오늘 밤에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꼭 오세요."
아무 일도 없는데 오늘 오는지 확인을 하고 꼭 와 달라고 다짐을 할까? 미간을 찌푸리는 루틸을 보고도 미스라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그럼, 하고는 루틸을 방에서 내보내려 한다. 등을 떠밀린 루틸은 돌아서서 미스라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결국 미스라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억지로 이야기를 끊는 것이 왠지 수상하다. 쾅 닫힌 문 너머 복도로 나왔을 때 루틸은 복도를 걷고 있던 미틸과 눈이 마주쳤다.
"형님! 또 미스라 씨한테 갔다오신 거예요?"
미틸이 종종걸음으로 루틸에게 달려오며 그렇게 묻자 루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싸운 이유를 물어봤다고 하면 미틸이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루틸은 미틸이 묻는 말에 웃으며 얼버무렸다. 미치루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그것을 한숨으로 바꾼 뒤 벌써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형님이랑 같이 먹으려고 막 형 방에 갈 참이었어요."
미틸은 그렇게 말하고 루틸의 오른손을 잡았다. 루틸보다 작은 손이다. 자신보다 조금 따뜻한 그 손을 루틸도 꼭 잡고 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미틸은 네! 하며 발랄하게 대답하고 웃음을 짓는다. 미틸은 아주 착하고 영리한 아이다. 루틸은 그 성장이 기쁘기도 하고 조금 쓸쓸했다. 마법관에 오고 미틸에게는 많은 마법사와 친해지고, 그전에 루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미틸은 이제 없는 것이다.
"저기요, 형님. 오늘 같이 자도 될까요?"
그래서 조르듯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미틸이 말했을 때 루틸은 조금 놀랐고 기뻤다. 자신과 닮은 녹색 눈이 조르듯이 쳐다보아도 항상 '이제 다 컸으니까'라며 미틸을 달랬지만 요 근래에는 같이 자자는 말을 듣지 못해서 그만 두말없이 승낙해 버렸다.
"잘 시간이 되면 내 방으로 와."
"네!"
미틸은 밝게 대답했다. 루틸은 미틸이 잘 시간이 되기 한 시간쯤 전에 허브티를 내렸다. 미스라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 하다 보면 잘 시간에 루틸도 졸리게 될 것이다.
"미스라 씨."
콩콩 미스라의 방을 노크한 루틸이 방 주인을 부른 후 기다리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대를 이마에 끼고 초승달 베개를 껴안은 미스라는 이제 언제든 잠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들어오세요 하고 방에 들여보내준 미스라에게 루틸이 머그잔을 하나 건넸다. 미스라는 받은 머그잔에 코를 대고 향을 맡은 뒤 그것을 든 채 침대 등받이에 대고 누웠다. 초승달을 내려놓은 손이 침대시트를 탁탁 두드리자 루틸이 그곳에 앉았다.
루틸이 꿀꺽하고 허브티를 마시는 동안 미스라는 빙글빙글 잔을 돌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 미스라는 평소와 같아 보인다. 별 다른 것 없는 항상 있는 밤이다. 루틸은 싸움에 대해 이어 물어보고 싶어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오늘 밤 이 방에 자고 갈래요?"
"네?"
잔의 수면을 보면서 불쑥 미스라가 말했다. 이제껏 미스라가 그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루틸은 놀라서 미스라를 쳐다봤다. 미스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루틸은 지그시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약간 숙인 루틸의 머리카락이 루틸의 붉어진 얼굴을 살짝 가려주었다.
"루틸."
평소 미스라가 잘 부르지 않는 루틸의 이름을 부르고, 조금 전 시트를 두드리던 손이 루틸의 허벅지에 앉았다. 시야에 들어온 검게 칠해진 손톱과 미스라의 손에 루틸은 눈을 꼭 감았다. 듣고 있어요? 묻는 말에 루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뭘 기다려요?"
미스라가 물으며 루틸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루틸은 이런 미스라를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루틸이 수다에 푹 빠져 밤늦은 시간이 되어버린 적은 있었지만 미스라가 뿌리친 적도 없었다. 갑자기 자고 가라니......
이 방에서 일인용 침대에 둘이서 자는걸까? 미스라는 잠에 들 수 없으니 루틸이 잠들면... 미스라는 어떻게 할까? 그것은 루틸이 자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역시 이 좁은 침대에서 자는걸까. 함께 잔다면 좁아서 서로 껴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루틸."
루틸을 부르는 미스라가 루틸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올려다 보는 미스라의 녹색 눈은 갈망하는 아이의 눈을 닮아, 그것을 본 루틸은 조금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의 눈을 보고 떠오른 건 동생 미틸이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복도에서 만난 녹색 눈과 약속을 했었다.
"죄송해요. 저 오늘은 미틸과 잘 예정이에요."
"하? 그런거 거절하세요."
루틸이 쥐어짜낸 목소리로 말하자 미스라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불쾌함을 드러내는 미스라를 달래기 위해 루틸이 '내일이라면' 하고 말했지만 미스라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돼요. 오늘이어야 해요."
미스라의 말에 루틸은 위화감을 느꼈다. 루틸은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전혀 몰랐다. 왜요? 루틸이 묻자 미스라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헤맨 뒤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저녁에 미틸과 싸운 원인을 물었을 때와 같이 대답했다.
"......미틸과 싸운 이유와 관련이 있나요?"
루틸이 묻자 청록색 눈동자가 둥그래졌다. 미스라는 거짓말을 못하는 남자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더니 결국 두 사람의 싸움이 원인인 것 같다. 루틸은 한숨을 내쉬고 왜 싸운 건가요, 하고 물었다.
"싸우지 않았어요. 미틸이 덤벼들었을 뿐이에요. 밤에 형님을 독차지 해서 치사하다고."
"에"
미스라는 무거운 입이 벌어져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 사람이 싸운 원인은 루틸이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미스라 씨는 뭐라고 답했나요?"
"루틸이 마음대로 오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랬더니 안 쫓아내시잖아요! 라며 미틸이 말해서..."
거기까지 말하던 미스라가 입을 닫았다. 말을 더듬는 것은 아마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루틸은 웃어버렸다. 그 후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는 모르지만 루틸은 그 결과가 대충 예상이 갔다.
"오늘 누가 저와 같이 자는지 승부하는 거예요?"
"뭐......맞아요."
오랜 침묵 끝에 긍정하자 루틸은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미스라는 루틸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아 천 년이 넘었는데도 무슨 시시한 짓을 하고 있는걸까.
"미스라 씨! 예전에 태어난지 15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었잖아요! 아이와 그런 일로 싸우지 마세요."
이 승부는 미틸의 승리네요. 루틸이 그렇게 말하자 미스라는 눈을 찌푸리며 머그잔을 쥔 루틸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뛰었지만 미스라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승부에 이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루틸의 심장은 차분해졌다.
"싸우는 게 아니에요. 승부예요. 그리고 난 지는 게 제일 싫어요."
"정말. 미스라 씨는 어른이죠? 미틸은 제 소중한 동생이니까 봐 주세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아이와 다퉈서 상처까지 입었으니까요. 네?"
루틸이 설득했지만 미스라는 듣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입으로 꼼짝 못하게 하룻밤 동안 여기에 묶어 놓을게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미스라 씨, ㅡㅡ. 할 수 없네요. 그럼 오늘 밤은 셋이서 자요. 제 방에 미틸이 올 예정이니까 제 방에서 셋이서요. 침대 하나로는 좁으니까 미스라 씨는 마법으로 자신의 침대를 가져 오세요."
"네? 내가 혼자서 자는 건가요?"
"미틸과 자고 싶다면 제가 혼자 잘게요."
"곤란해요. 그 말대로라면 분명 당신과 함께 자는 쪽이 이기게 되는 거겠죠."
"정말! 승부는 제가 없던 걸로 할 거예요! 미틸과 화해하고 같이 자요."
루틸의 제안에 미스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는건지 우울한지 미스라가 무슨 생각으로 한숨을 쉬었는지 루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스라는 알겠습니다 하고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일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네?"
가요, 라고 말한 미스라가 주문을 외우고 공간을 이동하는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는 밤에 가라앉은 루틸의 방이 보였다. 갑니다, 루틸은 서둘러서 일어나 미스라가 두고 가지 않도록 따라갔다.
"대답은?"
미스라는 루틸 방 등불에 마법으로 불을 밝힌 뒤 루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루틸은 승낙하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과 똑같다. 눈을 꼭 감고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입 안이 조금 마르는 듯 했다.
알겠어요. 루틸이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틸이 방에 찾아온 것이다. 루틸은 그것을 알고 조금 안심했고, 미스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급강하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타이밍이 조금 나빴다. 화해시키는 것도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루틸은 한숨을 승낙의 말과 함께 삼키며 방문을 열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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