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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마이조 오타로와 헤이세이 문학의 내러티브

가속주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13 18: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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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 2019년 6월호

저자 : 후쿠시마 료타 (福嶋亮大, 문학 평론가)



1. 일본 문학의 곤경


헤이세이의 마지막 시점에서 보면, 왜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이 제로년대 전반에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 독자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았는지 알기 어려워졌을지도 모른다. 2005년 무렵, 교토에서 일 때문에 상경한 나를 자택에 묵게 해 준 동세대의 라이터 (그는 아즈마 히로키 밑에서 메일 매거진 비평지 <파상 겐론>의 편집을 돕고 있었고, 내 데뷔 평론도 이 <파상 겐론>에 투고한 마이조론이었다)가 "일본어는 마이조의 <쓰쿠모주쿠>를 쓰기 위해 존재해온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심야에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아직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경직화된 순문학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일부 젊은 문학 독자들에게 마이조는 문학의 힘에 의해 일본어 표현의 상황 자체를 갱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규정된 존재였다.


제로년대는 출판 불황과 인터넷의 침투로 인해 문단을 비롯, 구태의연한 문화생산 시스템이 자주 거론되던 시기였고, 1973년에 태어나 2001년에 데뷔한 마이조에게는 그 폐쇄된 시스템을 타파하는 변혁의 상징으로서의 면모가 있었다.


마이조 스스로도, 기상천외한 미스터리로 유명한 세이료인 류스이에게 바치는 트리뷰트 작품인 <쓰쿠모주쿠>(2003)에서, 당시 비평의 변혁을 시도하고 있던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나 자신의 담당 편집자 오타 카즈시, 나아가 오타가 창간한 코단샤의 문예지 <파우스트>에 모인 젊은 작가 사토 유야 등을 언급함으로써, 당시 떠들썩한 분위기의 일면을 전하고 있다. 마이조가 단 한 명의 신인 작가로서 고독하게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를 찾는 카오스적 열기와 함께 했음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것이다.


다만, 기존 문학의 쓰기/읽기 방식을 전복하려는 반항적인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이조의 배후에 있던 아나키즘적인 열기는 제로년대가 끝나고,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에 이르러 완전 흩어져 버렸다. 그것은 문학의 밝은 파괴와 재생을 꿈꿀 수 있었던 낙천적인 시대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로년대에 등장한 평론가로 20대를 지내오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의 무력함에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2010년대는 드디어 일본 문학의 끝이 선명해진 시대다. 물론 일본어 문학 자체는 계속 쓰이고 있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지만, 그 양태는 일본 문학이라는 장르의 연속성과는 무관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문학이나 비평이 지금까지 쌓아 온 아젠다(문제설정)를 의식하는 작가나 비평가는 점점 소수파가 되고, 마이조 붐과 같은 불과 10년 전의 일조차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이윽고 최근의 일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일본 문단은 완전히 치매 노인화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러한 퇴행에 항거하기 위해서도, 나는 여기서 제로년대 이후의 문학 상황을 되돌아본 후, 마이조의 등장에 어떠한 문학사적인 위치를 부여해두고 싶다 (그것은, 사태의 언어화를 게을리했던 제로년대 전반의 축제 분위기의 취약함을 재차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업은 머지않아 도래할 본격적인 헤이세이 문학론을 위한 포석이 될 것이다.


2. 로스제네의 내러티브


일단은 화제를 순문학, 특히 소설로 한정하자. 탈냉전과 정보화에 직면한 헤이세이 소설가들은 내러티브(이야기)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헤이세이 문학의 서두에서 내러티브의 갱신을 가장 자각하고 있던 작가 중 한 명은 오에 겐자부로이다. 오에는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에 첨부된 후기 <말하는 법의 문제>(1990)에서 이렇게 적었다.


제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곧 소설의 서법, 말하는 방법을 발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하나 써내려는 순간에 늘 나를 기습하여 위기에 빠트리곤 했던 것은, 이 말하는 방법이 내게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방법이 아니라는 발견이었습니다. 지금의 임시적인 말하는 방법과, 내가 진정으로 발명해야 했던 말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채로 작품을 끝마치기 일쑤였습니다. 오히려 그 두 방법간의 어긋남을 모색하며 다음 소설을 향했다, 라고 하는 것이 실정인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위대한 문호들이 세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글을 썼다면, 20세기 작가들은 그때그때 임시적인 내러티브를 발견하면서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실을 게릴라처럼 잘라내며 써나가는 수밖엔 없었다. 오에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20세기 적인' 작가이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부동의 3인칭 객관자 시점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톤이나 템포나 리듬을 매번 조정해가면서, 그로부터 획득된 화자의 포지션에서 시작해 세계를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것. 이런 전술은 오에에서 훗날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에까지 공유되고 있다. 20세기의 전략적인 문학가들에게 내러티브의 설계는 세계로의 입사각도를 결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 되었다.


초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은 공허감을 안고 있는 시니컬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의지만은 놓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기록할 수 있는 건 단지 리스트일 뿐이다. 소설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는 구절로 알려져 있는 1979년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도, 화자는 데릭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에게 글쓰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거짓말하며, "지금, 나는 말하려고 생각한다."는 적극적인 결의를 표명하고 있다. 비록 말할 내용은 없다 해도, 말하고자 하는 자세를 설계할 수는 있다, 이 점에서 무라카미는 오에의 <말하는 법의 문제>를 계승한 작가이다.


그에 반해, 제로년대 이후의 일본문학에서 표면화된 것은, 말할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자세조차 유지하기 어려워져 간다는 사태이다. 그것은 오카다 토시키나 마에다 시로와 같은 1970년대에 태어난 이른바 로스트 제너레이션(거품 붕괴 후의 불황 속에서 청춘기를 보낸 세대)의 극작가들에게 있어 두드러진다. 그들의 연극 화법은 양식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탈선이 많은 너저분한 '말'에 가까워졌다. 격식 차린 말투를 피하고, 궤도 없는 수다의 화법을 구사하며, 그들은 도시 젊은이의 생태에 접근한다. 그것은 오에와 동세대의 전위적인 극작가인 스즈키 타다시가 벽지인 도가무라에 거점을 두고 방법론적인 단련 (스즈키 메소드)을 통해 강인한 이야기와 신체를 재발명한 것과는 대조적인 전략이다.


이런 과장된 '말'의 고조는, 두 사람이 2007년에 연달아 간행한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오카다의 소설 <3월의 5일간>은 시부야를 배경으로 하여, 원나잇을 하는 남녀가 러브호텔에 5일간 숙박한다. 이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장황한 독백을 이어가지만, 그것은 911 이후의 '테러와의 전쟁'을 배경으로 시부야의 마비적인 분위기 속에서, 헛소리같은 부유감을 동반한다. 거기엔 0도의 온도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정서로 가득 찬 시부야의 거리가, 말하자면 허구의 화자로 등장하여 러브호텔의 '특별한 시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 시간과 동화되어 침대에서 구르는 화자들은, 더 이상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지금 나는 이야기하겠다"는 강한 결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카다는 <나의 장소의 복수>에서도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자고 있는 아내를 1인칭 화자로 설정했다.


한편 마에다의 소설 <그레이트 생활 어드벤쳐>에서는, 주인공인 청년은 동거 상대의 방에서 게으르게 게임만 할 뿐으로, 움직일 의지도 없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시시한 장난을 치며 시간을 쓸데없이 소비할 뿐이다. 마에다는 니트나 프리터의 생활에 뿌리내리면서, 그 의미적인 빈곤함을 철저히 했다. 더 이상 이야기하려는 의지를 잃은 게으름뱅이 화자는, 그 지리멸렬한 '이야기'의 리듬을 통해 사회의 뒷골목의 정동공간(情動空間)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오카다가 러브호텔의 방 한 칸을, 마에다가 커플의 방을 각각 '무대'로 삼은 것은 상징성이 있다. 더 이상 주인공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하는 이 무기력한 자세로부터, 사회적 현실의 단편을 언어로써 훔쳐내는 것에 오카다와 마에다의 진가가 있다. 그들이 발명한 빈둥거리는 내러티브는, 소설가에게 있어서 이야기하기 위한 자세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 때, 극작가 출신인 그들은 모로 누운 앵글에서 시작해, 사회에서 낙오된 어른 인간들을 포착하기 위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능숙하게 풀어낸다.


1973년생의 오카다나 1977년생의 마에다는,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소극성을 선택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로스제네 삶의 의미적인 빈곤함을 역이용해, 오에나 무라카미는 흉내 낼 수 없는 낮은 자세로부터의 내러티브를 실현했다. 이 '상징적 빈곤'의 문학을 2010년대에 이어간 것이, 1979년생 무라타 사야카이다. 그녀의 2016년 베스트셀러 <편의점 인간>은 좋고 나쁨을 떠나 이 소설은 2010년대를 대표하는 순문학 작품이 될 것이다. 굳이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올드미스'의 자폐증적인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규격화된 삶에 아무런 의심 없이 동화되어 간다. 일상적인 업무를 바르게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그녀의 귀에 들어온 것은, 반짝반짝하고 깨끗한 가게 안을 채우는 '편의점의 소리' 뿐이다.


그녀에겐 의미적인 삶이 완전히 박탈되고 있었지만, 그런 박탈은 굴욕이 아니라 편안함이나 안심과 연결되어 있다. 오카다와 마에다의 주인공은 방에 드러누워, 이야기의 쾌락에 몸을 맡기면서도, 그 마비적인 상황이 기간 한정인 것도 인지하고 있고, 그것이 독특한 풍미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은 의미론적 빈곤을 철저하게 갖춘 편의점의 시스템과 기능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내러티브는 철저하게 규격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더이상 시스템에 동화될 수 없는 불모의 내러티브이다. 이야기도 승인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적 빈곤자로부터 이야기를 성립시켜 나가는 것, 이 점에서 <편의점 인간>은 제로년대 이후의 로스제네 문학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사람, 이 맥락에서 언급해야 할 작가는 1971년생 엔죠 토우이다. 엔죠의 전략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처럼 문학을 다루는 데 있다. 그 화자는 종종 특정한 시공에 얽매인 유한자로서 존재하는 것을 중지하고, 오히려 자기소멸을 통해 이야기의 시스템을 무한화하려고 한다. 예컨대, 2007년의 데뷔작 <Self-Refernce ENGINE>의 익명 화자는 작품 말미에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 미리 설계되지 않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구조물"을 자칭하며, 자기 자신을 소멸로 이끈다. 혹은 변칙적인 사소설인 2015년의 <프롤로그>에선, 언어체계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한자를 습득하기 위한 화자가 등장한다. 어느 쪽이든, 엔죠는 유한한 화자를 소멸시키고, 언어생성 엔진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상황을 본뜨려 하고 있다. 그것에 의해, 인간적인 주체는 한없이 축소되어 간다.


엔죠는 '디지털화된 츠츠이 야스타카'라고 해야 할 실험적인 작가인 한편, 말해야 할 내용은커녕 말하려는 의지조차도 내려놓는 동세대의 로스제네 작가의 소극적 내러티브 전략을 은연듯 공유하고 있다. 그 전략적인 소극성에 의해, 엔죠의 소설에선 이야기의 주권이 인간에서 언어로 양도된다. 등장인물이나 책이라고 하는 제도의 해체를 모색하는 1972년생 후쿠나가 노부도 포함해, 이 세대의 남성작가는, 이전에 나온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닌 '이야기를 향한 의지'를 아이러니컬하게 말소함으로써 내러티브를 역설적으로 성립시키려 했다.


3. 헤이세이의 여성 소설가와 '신화 없는 신'


1990년대부터 제로년대에 걸친 일본 문화를 포괄적으로 논한 우네 츠네히로의 <제로년대의 상상력>은, 소설가 이상으로 TV드라마의 각본가(미야토 칸쿠로, 이노우에 토키시 등)나 만화가(요시나가 후미, 요시다 아키미 등)들의 작품에서, 가치의 상대화와 네오리버럴리즘 시대에 있어서의 성숙이라고 하는 난제에 임하려고 하는 상상력을 인정했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엔죠 토우가 대두한 2007년을 '포스트모던 문학의 리바이벌 붐이 일어난 해'라고 총괄하고 있지만, 소설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던적인 아이러니의 부활은, TV드라마나 만화에 있어서의 이야기의 업데이트와 정확하게 반대의 관계에 있다. 오카다나 마에다는 이야기를 저공비행시킴으로써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회복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소설과는 다른 연극적 수법에 익숙했기 때문, 특히 상황의 설정에 능했던 덕이 크다.


소설가들의 내러티브 전략이 대체로 수축해 가는 와중에, 90년대 이후 여성 소설가들이 내러티브의 서술을 갱신하려 하고 있었던 점에는 주목할 만하다.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1960년대 전후 출생의 헤이세이 여성 작가들(오가와 요코, 가와카미 히로미, 다와다 요코 등에 의해 대표되는)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차세대로, 또한 로스제네의 선행 세대에 해당하며 헤이세이 순문학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이전 쇼와의 '여류작가' 들이 자주 일본풍 옷을 입고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게, 헤이세이의 여성 작가들은 때때로 이과적인 백그라운드를 갖고, 인간 이외의 (동물부터 다신교적인 의미의 '신'까지) 것들을 이야기의 권리자로 격상시키려 시도했다. 예컨대, 오가와 요코의 <작은 새>(2012)에선, 인간의 이야기보다 새의 지저귐을 더 사랑하는 형제가 등장한다. 혹은 다와다 요코의 <눈 속의 에튀드>(2011)는, 3대의 북극곰을 화자로 삼아 냉전기부터 포스트 냉전에 이르는 세계를 재차 회고한다. 이러한 '이종의 내러티브'의 선구자로서, 가와카미 히로미가 1998년 간행한 <하느님>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이 단편집에서는 곰, 유령 삼촌, 갓파 같은 이상한 생물들이 '나'를 방문한다. '나'는 무작위의 수용기로서 이 기묘한 신령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는데, 그 때문에 독자들은 비일상적(신화적)인 존재가 일상적(비신화적) 지평에 의해 아무런 저항 없이 출현한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비범한 존재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 곁에 '마레비토'로서 찾아오는 것이다.


과거의 미야자와 겐지는 민족지적 풍요를 배경으로 한 동물 동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예컨대 <나메토코 산의 곰>은 아이누의 이요만테와의 관련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가와카미가 말하는 곰이나 그 밖의 동물들은, 그런 장엄한 신화의 우주를 짊어지고 있지 않다. <하느님>은 언뜻 보면 범신론적인 애니미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거기엔 오히려 신화의 코스몰로지(우주론)를 잃은 고독한 신이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가와카미는 이른바 신화 없는 신과의 일련의 커뮤니케이션 기록으로서 <하느님>을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권두의 단편 <하느님>에 나오는 곰은 인간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아이들에게조차 따돌림을 당하는 일종의 난민처럼 묘사되고 있다. 곰에게는 곰으로서의 신앙의 대상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권말의 <풀 위의 점심식사>에선 이 예의바른 난민적인 이종과 '나' 사이에는 희미한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가와카미는 근대 문학을 특징지어 온 '고독'이란 테마를 인간에서부터 이종으로 이전시켜 난민적인 신들과의 공생을 우화화한다.


여기서 이야기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모형화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근대의 신화에서는 특별한 세계에 비범한 존재가 나타난다. 신화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유일무이한 신이나 영웅으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세속화, 민주화된 근대 소설에서는 오히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인간이 성장해서 점점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성장 이야기 (빌둥스로만)가 활발해진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소설이 되면 처음부터 비범한 존재가 시치미를 떼고 평범한 세계에 불쑥 나타나게 된다. 신화의 우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데, 신만이 마치 자신이 나설 차례를 잘못 알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 일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가와카미는 그야말로 성스러운 옷을 빼앗긴 진기한 '신'들을 스트레이트하게 그렸다.


거기에, 또 하나의 모델로서 카톨릭적인 것과 개신교적인 것이라는 두가지 상상력 타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신과 인간의 중간지대에 성스러움을 띤 마술적 채널(교회의 성사, 성인에 의한 중개 등)의 확산을 인정한다. 반대로, 후자는 성스러운 신과 왜소한 인간 사이의 성스러움을 억제하여, '세계의 탈마술화'를 진행하기 때문에,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말하는 것처럼 그 세계는 지극히 '외로운 것이 될 것이다.' 일본 근대문학이 이른바 프로테스탄티즘적인 쓸쓸함과 함께했던 반면, 앞서 언급한 미야자와 겐지의 문학은 예외적으로 말하자면 가톨릭적인 마술적 채널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문학도 대체로 근대문학의 프로텐스탄티즘적인 외로움을 혐오하고, 세계를 재마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헤이세이의 여성작가 내러티브는, 언뜻 보면 이른바 가톨릭적인 성(聖)의 확산(신화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이 풍만함을 결여한 앙상한 뼈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랭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마술을 부리면서도 그 마술의 세계에 있는 외로운 고독자의 표상을 끌어들인다. 이는 그들보다 어린 나이인 1976년생 가와카미 미에코에게도 해당된다. 그의 대표작 <젖과 알>(2008)은 성과 생식이 뒤얽히는 여성의 신체를, 유방 확대술에 대한 오브세션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 신체는 어디까지나 의고적인 이야기가 낳은 이미지이며, 서술의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실체는 오히려 희박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페티쉬한 욕망으로 실체화시켰다면, 가와카미 미에코는 여성의 신체가 지닌 제어 불능의 섬뜩함을 최종적으로 '잘려진 거울'의 이미지 속에 가둬, 성스러운 채널을 절단해 버렸다. 겉으로는 신비롭게 보이는 신체가 뒷면에서 보았을 때 이미지의 박제일 뿐이라는 이중성이 그곳에는 있다.


아무튼 헤이세이의 여성 작가들은 불가사의한 이종(신화 없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그 자체를 화자로 삼아, 소설의 내러티브를 재편성하려 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내러티브를 인간 의외의 존재에게 맡기는 편이 오히려 인간적인 테마(감성, 지성, 역사 등)도 표현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 외양의 가벼움과는 다르게 여기엔 절실한 문제가 어른거린다. 그 문제란, 오늘날 일본 문학에서는 비인간이라는 커다란 차이를 도입하지 않으면, 인간을 관찰하는 것도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런 척도로부터 말하자면, 인간적 감정과 괴리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말하는 무라타의 <편의점 인간>은, 로스제네의 빈곤함의 모티브를 계승하면서도, 헤이세이 여성 작가들의 '이종의 내러티브'를 답습한 작품으로서 읽힌다. 무라타에게 있어서도, 풍부한 의미의 세계로부터 퇴각한 외계인적인 화자야말로, 오히려 소설의 발생원이 될 수 있었다. 무라타의 상상력이 결코 진공 지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한 제로년대의 이야기의 재산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여기서 강조해 두고 싶다.


4. 마이조 오타로와 이야기의 양면성


다만 2010년대에는 이들의 내러티브 실험도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편의점 인간>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라타 사야카가 순식간에 '포스트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유력 작가로 떠오른 것은 예외지만, 내러티브의 재건을 시도한 헤이세이 작가들도, 근년은 이렇다 할 새로운 실험작은 없다. 그리고 20세기의 소설가로서 내러티브의 갱신에 지속적으로 임해 온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도, 과거 작품의 자기모방 모드로 (엔죠 토우 풍으로 말하자면 self-Reference Engine) 들어가 버린 것처럼 보인다. 순문학의 실체는 반년에 한 번 있는 아쿠타가와상 축제라든가, 화제 만들기가 선행된 연예인 소설 정도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 허무한 현상을 보면, 제로년대의 문학에는 아직 경직화를 깨는 역전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가능성을 더욱 발굴하기 위해서도 여기서 당대 마이조 오타로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이조는 데뷔 초부터 이야기에 대해 자각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예컨대 나츠카와 가의 폭력적인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 <나츠카와 사가>의 제 2작 <어둠 속의 아이>에서 마이조는 미스터리 작가인 나츠카와 사부로에게 "어떤 종류의 진실은, 거짓말을 통해서밖에 말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정공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버거운 것들을, 이야기라면 (잘만 하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진실을 거짓말을 통해 말하며, 그런 창작물을 통해 눈물을 초월한 울음/웃음을 초월한 즐거움/통증을 초월한 고통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다.


이야기가 우연히도 쓰는 측과 만나서, 그로부터 이 세계에 출현하게 된다. 즉, 방금 말했듯이 이야기는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작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샤샤삭 꺼내 쓸 수 있는 손쉬운 것이 아니다. 가위나 자와는 다른 것이다. 이야기와 만나고, 이야기와 딱 맞는 말하는 이를 찾을 수 있는 럭키한 작가만이,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 내의 평론에서는 마이조가 오에 겐자부로나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의 작가로서 '말하는 방법(내러티브)의 문제'를 계승하려고 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야기의 힘에 의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신념 하에, 마이조는 젊은 남녀 화자에게 작품의 주도권을 준다.


물론, 단순히 이야기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오에나 무라카미 이전으로의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조가 고단샤 노벨스에서 출판한 초기 작품에 이야기의 두 가지 기능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마이조의 2001년 데뷔작 <연기, 흙, 혹은 먹이>에서는, 가정 폭력에 의해 흩어진 가족을 다시 한번 통합하려는 정력적인 화자로서, 나츠카와 가의 막내 동생 시로가 등장한다. 미국에서 외과 의사가 된 후 고향인 니시아카츠키초에 돌아온 시로는, '깨어 있는지 잠이 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몽유병자처럼 방황하며 왕성한 입담과 외과수술의 기량을 통해 가족이 입은 상처를 말 그대로 '봉합'한다. 시로의 열띤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연결시키는 마법이었다.


그에 반해 <어둠 속의 아이들>에서 사부로의 말로는 비참하다. '가짜만 만들어 남에게 보여주며 살아온 남자'인 삼류 작가 사부로는 나츠카와 지로가 부리는 폭력의 수령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스스로 범죄에 휘말려 몸이 절단나 흩어져 버리는 이 귀결은, 마이조가 이야기를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이조에게 있어서 이야기와의 '만남'은, 때때로 그 화자 자체도 산산조각낼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다. 여기엔 분명 옴 진리교나 고베 연속 아동 살상사건이라는 위험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90년대 일본의 범죄학적 상상력이 반영되어 있다. 마이조 자신도 오늘날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의 모티프에 집착해 왔다.


이 두 권의 초기작에서, 마이조는 단지 폭력을 그렸을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가 어떻게 폭력과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에 대한 인식론이라는 일면이 존재한다. 왕성한 이야기의 시공 속에서 마이조의 주인공은 정도를 잊어버리고 이성이 마비된 채로 폭력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 때 <연기, 흙, 혹은 먹이>의 화자가 꿈꾸는 듯한 상태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에 비해 <어둠 속의 아이들>의 화자는 외부의 폭력에 노출되어 지옥으로 밀려남으로써, 비로소 '영혼의 구제'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 '말하는 주체'의 강력함과 부서지기 쉬움, 즉 봉합과 분해라는 양면성이 마이조의 폭력 표상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마이조 본인의 위치와도 호응하고 있다. 마이조의 큰 특징은 일종의 지평 융합, 즉 여러 콘텍스트의 합성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마이조의 소설에는 신본격 미스터리의 지평이 있고, 만화/애니메이션의 지평이 있으며, 미국 현대 문학의 지평이 있고, 동시에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하이브리드성이 있다. 마이조는 그야말로 외과의사인 나츠카와 시로처럼 이들 각각의 '지평'을 꿰매어 문학을 이야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즉 광의의 '번역적 주체'였기 때문에, 일본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는 존재로서 주목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종교배는 작가에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마이조의 연상에 해당하는 오노 마사쓰구나 아베 카즈시게는 각각 일본의 변방에 뿌리를 두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향도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전제에 대해 되묻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 1970년생인 오노의 소설에는 나카가미 겐지의 오류노 오바같은 위대한 어머니 화자가 아니라, 외려 어머니의 친척(이모)이야말로 포섭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후쿠이현의 살벌한 지방 도시를 무대로 한 마이조도 큰 경향을 공유하고 있지만, 오노나 아베의 소설이 일단 안정된 내러티브로 쓰여진 것과는 달리, 마이조의 '이야기'는 이종교배이기 때문에 강력함과 부숴지기 쉬움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후술하듯, 이러한 특징은 <쓰쿠모주쿠>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5. <파우스트> 작가들


'폭력은 타자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한편, 물리적인 접촉에 의해 타자와의 연결을 과잉화하기도 한다'는 양면성을 나타내려 할 때, 마이조가 연하인 니시오 이신이나 사토 유야와 함께, 80년대 이후에 대두한 신본격 미스터리의 재산을 이용한 것은 간과할 수 없다.


제로년대 중반 <파우스트>의 주력 작가가 된 이 세 사람은, 수수께끼 풀이의 논리적 치밀함을 추구한 신본격 미스터리를, 광의의 범죄 소설로 변환해, 폭력의 전시를 위한 매체로 바꾸어 버렸다(추가하자면, 미국의 토마스 해리스나 제임스 엘로이의 범죄 소설 영향도 있다). 그에 따라 그들의 소설에서는 역사도 정치도 경제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며, 폭력만이 순화되어 제기된다.


그들의 전신에 해당하는 것은, 고베 대지진 직후인 1996년에 컬트적인 미스터리 작가로 데뷔한 1974년생 세이료인 류스이다. 효고현 태생의 세이료인은 지진 재해의 충격 속에서, 인간을 퍼즐 조각처럼 그리는 신본격 미스터리의 특징을 파고들며 바보같을 정도로 많은 인간들을 마치 게임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대량의 말장난을 도입해, 탐정의 추리조차도 장난과도 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세이료인의 파격적인 미스터리는 말장난을 남용하며 삼라만상을 언어 차원에서 내포하려는 과대망상적 욕망을 안고 있다. 따라서 거기엔 실질적으로 특정 관점을 지닌 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일본어의 일상적인 조합을 부수고, 그것을 우주적 표현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세이료인 스스로의 비정상적인 상상력이다.


이 비정상화된 미스터리 풍토에, 소년 만화의 요소를 가미하면서, 체념을 포함한 교훈적인 화자를 도입한 것이 1981년생 니시오 이신이다. 세이료인 류스이와는 달리, 니시오의 미스터리는 폭력에 접촉하는 화자에게 큰 역할을 맡긴다. 니시오의 주제는 우주적인 기개가 아니라, 오히려 과대망상에서 탄생한 잔인한 행동을, 언어의 힘으로 끝내는 데에 있다. 그러나 세이료인의 세례를 받은 후, 제대로 된 이야기 방법으로 망상과 폭력의 확대를 수습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니시오의 초기 작품 화자로서 탐정 역인 '이짱'은 '거짓말쟁이'를 자칭하는 것이다. 이짱의 추리는, 절대적인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컬트화된 세계 (거기선 작중 인물의 이름도 기기묘묘한 것이 된다)의 완전한 수복은 불가능하다는 체념 하에, 살육과 혼란을 일단 수습하기 위해 발화하는 시니컬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1980년생인 사토 유야도 자학적인 이야기에 의해 작품을 음산한 인상으로 물들인다. 홋카이도 태생인 사토의 2001년 데뷔작 <플리커 스타일>에서는, 광기에 홀린 카가미가 일족을 중심으로, 화자인 청년이 지닌 일그러진 충동, 특히 여동생과의 근친상간적인 욕망이 폭로된다. 마이조의 나츠카와 사가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휴식처이기는커녕, 도착적인 성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플리커 스타일>의 주인공은, '너무 연결되는 것은 광기의 근원'이란 말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작품 내의 현실을 전하는 화자야말로, 가족의 광기에 완전히 중독되어 파멸에 가까워지고 있던 것이다. 샐린저의 소설 (특히 글래스 사가)을 즐겨 인용하던 당시의 사토 유야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밖에 신뢰할 수 없다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같은 해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 이은 2002년 장편 소설 <수몰 피아노>에 이르면, 사토의 방식은 한층 첨예화된다. 사토는 여기서 세 화자를 병렬하면서 주인공이 트라우마적인 기억을 잊기 위해,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자기 뇌에 심어놓은 것을 파헤쳐 나간다.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는 악의에서 벗어난 대가로 생생한 시간을 결정적으로 잊어버린다. 이 작품의 서두는, 시간이 교착되어 있을 뿐 공격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사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2002년에 들어서도 속도의 차분함을 바꿀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추월이라는 것을 도통 모르고 그것에 비하면 대류하는 맨틀의 움직임이 약간 더 극적이고, 제트기의 존재는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거북의 한 걸음조차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것만큼의 찬사와 갈채를 한 몸에 받을 것이다. 그런 야유가 나올 만큼 완만한 그것이지만, 그래도 근면함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시간은 착착, 그리고 착실한 정확함을 가지고 모든 물질, 모든 현상에 평등한 공격을 퍼붓는다.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버리고, 굴욕적 경험을 허위의 이야기로 덮어쓰고, 게다가 그 덮어쓰기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린 비참한 범죄자, 그는 이 망각의 대가로 '시간'이라는 존재의 기반을 잃는다. 파우스트계 작가들은 대체로 개념적인 서술을 선호했지만, <수몰 피아노>는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그것은 그들이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행위'(시간이나 정체성이나 존엄)의 상실에 대해 예민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수몰 피아노>에서는 이미 종래의 시민사회도, 문학적 교양도, 양식적 지성도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사토의 초기작은, 이 상징적 빈곤의 사막에서, 정체성에 관한 소설을 쓴다고 하는 사투의 기록인 것이다.


일찍이 테라야마 슈지는 1968년 희곡 <잘 있거라, 영화야>에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대리인' 뿐이다... 나도 분명 누군가의 '대리인'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의 대리인일까?' 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써 냈지만, 30여년 후 사토 유야는 괴로운 현실의 이야기로부터 도망쳐, 빈곤한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활용되고 있는 비참한 '대리인'으로서의 화자를 정하고 있다. 게다가 테라야마가 타인에게 '대리'되어 존재의 근거를 빼앗기는 것에 마조히스틱한 쾌락을 감지한 것과 다르게, 사토의 주인공은 그런 박탈의 에로스마저도 잃어버리고 시간이 수몰된 후의 척박한 사막을 헤매기만 하는 것이다.


6. <쓰쿠모주쿠>와 이야기 중독자


돌이켜 보면 쇼와 시대의 대중소설 작가들은 급조된 근대를 혐오하며 주인공의 여유로운 성장 시간을 과거의 일본에 요구했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대중적인 서브컬쳐에는, 많은 순문학이 가지지 못한 안정된 시공이 존재한다. 반면 헤이세이의 <파우스트> 젊은 작가들이 가리킨 것은, 서브컬쳐의 영역에서도 이 느긋한 시공이 붕괴하고 있다는 통절한 인식이다.


세이료인이 망상적인 종합소설의 비전을 본받았다면, 마이조와 니시오, 사토라는 세 명의 작가들은 그 오컬트적인 세계에, 각자의 각도에서 화자를 재차 침입시켰다. 그들의 작품은 중립적인 화자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위험한 집착 (근친상간에서 토막살인에 이르는)을 지닌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독자는 때때로 엉터리 추리를 포함한 주인공의 괴이한 이야기에 말려들면서, 작중의 사건을 읽어내야 한다.


객관성이 없는 이야기의 퍼포먼스로 심리묘사나 현실묘사를 생략하려고 하는 전략은 본래 80여년 전에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슌킨 이야기>(1933)에서 의도적으로 전개한 것이지만, 파우스트계 작가들도 그와 비슷한 욕망을 안고 있으며, 그러한 선상에서 일본 문학사를 반복하고 있다. 단지,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그들의 주인공에게 빈번하게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를 말하도록 하게 시킨다는, 수동성의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은 사토의 <수몰 피아노>는 물론, 그 다음해 나온 마이조의 문제작 <쓰쿠모주쿠>에서 하나의 절정에 달한다.


이 괴상한 제목의 작품은, 주인공 쓰쿠모주쿠가 비정상적인 출산으로 태어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모와 목소리로 인해 주변의 어른들을 실신시켜 버리는 쓰쿠모주쿠는, 그 후로도 수많은 비정상적인 잔학한 사건과 조우하고, 탐정으로서 그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 이야기는 곧 강제로 리셋되어, 다음 장에서는 쓰쿠모주쿠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앞 장까지의 사건은 세이료인 류스이가 기록한 이야기로서 봉투에 넣어져 새로운 쓰쿠모주쿠에게 보내진다. 쓰쿠모주쿠는 평소에 쓰토무라는 평범한 이름 (동생한테 빌린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이야기에 쫓기며 스스로가 쓰쿠모주쿠라는 '창작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줄거리는, 지금까지의 마이조 작품과 비교해도 이질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츠카와 사가에 있어서 폭발적인 말투를 지닌 주인공이 많은 시련에 직면하며 진짜 인생에 도달하려 한다. 나츠카와 형제에게 있어서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은 직결되어 있다. 그에 반해 <쓰쿠모주쿠>의 화자, 주인공은 세이료인 류스이라고 하는 컬트적인 화자에 의해서 창출된 초인적인 메타탐정 쓰쿠모주쿠다. 쓰쿠모주쿠 자체가 '창작물'인 이상, 그가 이야기(추리)를 아무리 거듭해도, 그만의 유일무이한 인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쓰쿠모주쿠>는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결정적으로 분리되어버리는 상황에서, 그래도 이 둘을 묶고자 악전고투하는 화자를 그린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쓰쿠모주쿠는 '나는 신이다' 라는 위험한 망상과 함께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는 성경과 묵시록의 '모방'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마이조는 이야기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장면을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처녀 잉태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쓰쿠모주쿠라는 괴상한 자칭 '신'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상의 지평에 당돌하게 출현한다, 이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포스트모던한 이야기의 전형이다. 마이조는 가와카미 히로미 등과 같은 '신화없는 신'을 그리고 있다.


이 신화적인 성스러움의 부재를 메우는 것은 망상과 중독의 힘이다. 쓰토무(쓰쿠모주쿠)는 일종의 이야기 중독자로 묘사된다. 알콜이나 마약에 중독된 환자가 결코 유혹을 끊을 수 없듯이, 쓰토무(쓰쿠모주쿠)도 '신'의 이야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이조는 이 작품에서, 서브컬쳐화한 하이브리드적인 이야기가, 화자와 독자에게 어떻게 폭력과 현기증과 망상을 가져다주는지를 교묘하게 묘사해낸다. 이야기 중독자로 의존증 환자가 된 쓰쿠모주쿠는,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말하려 할 수록 스스로의 분신들이 만들어내는 망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본래 정체성을 부여해줘야 할 이야기는, 화자를 방황케하며 분열시키는 일종의 저주, 즉 배드 트립을 발생시키는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엔 분명 <수몰 피아노>와의 공통성이 있다.


문학사적인 자리매김을 생각해보면, <쓰쿠모주쿠>는 나카가미 겐지의 1988년 대표작 <천년의 유락>의 비평적인 후계자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천년의 유락>에서는 오류노 오바라는 특권적인 화자 밑에서 여자를 매료시키는 에로스를 발산하는 저주받은 미청년이 '골목'에서 환생을 거듭하다 죽어간다. <쓰쿠모주쿠>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머니 내지 아내와 공생하는 주인공이 여러 번 환생해 분신을 생성하지만 오류노 오버와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쓰쿠모주쿠를 키운 여성부터가 학대와 방치를 반복하는 붕괴된 어머니었다.


마이조의 경우, 이러한 어머니의 붕괴를 메우는 것은 하이브리드하고 오컬트적인, 이야기를 향한 중독이며, 거기서 태어난 분신을 향한 애정이다. 시코쿠 출신의 오에 겐자부로가 형제애와 그 뒷면으로서의 형제 죽이기의 욕망(카인 콤플렉스)에 홀린 것처럼, 후쿠이 출신의 마이조 오타로도 쓰토무와 쓰쿠모주쿠의 형제애에서 출발하면서 쓰쿠모주쿠에게 스스로의 분신을 몇 번이고 죽이게 만든다. 아버지가 실질적으로 부재하고 어머니와 형제적 존재가 점점 자기분열되며, 주인공을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는 점에서, <쓰쿠모주쿠>는 일본 근현대 문학사의 전형적인 패턴을 악몽화한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게다가 그 이야기의 힘은 때때로 중독자로서의 화자 자체도 붕괴시켜 분열시키게 된다. 마이조는 사토 유야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런 화자의 위기를 표면화시킨 것이다.


7. 이야기의 힘을 재기동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오에 겐자부로가 제시한 <말하는 법의 문제>를 헤이세이 소설가들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간주하며, 화자를 바닥에 눕히는 오카다 등 로스제네 작가, 신화 없는 세계에 이종의 이야기를 도입한 가와카미 히로미 등 여성 작가, 화자를 방항케 하여 분열과 굴욕으로 점철시킨 마이조 오타로 등 파우스트계 작가라는 3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냉전의 끝과 오랜 불황을 거친 이들은 전후 일본의 중산층에 뿌리를 둔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자와도 같은 건전한 내러티브의 자세와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이야기의 주권을 양도하면서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 휴머니즘의 붕괴에 응하는 헤이세이 소설가들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본디 제로년대란, 문학을 포함해 종래의 출판이나 매스미디어나 대학 같은 기존의 제도가 붕괴하고, 이것이 임박한 위기로서 예감되던 시기다. 이제 문학은 성역이 아니고, 문학가도 성직자가 아니다. 그런 강한 자기 부정을 거치지 않으면 문학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때, <쓰쿠모주쿠>처럼 언뜻 보면 일본어를 철저히 모독하고 우롱하는 것 같은 소설이, 역설적인 빛을 동반하며 나타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본 문학은 오래토록, 이야기의 힘에 문화를 통합하는 기능을 부여해 왔다. <겐지모노가타리>부터 <태평기>, 쿄쿠테이 바킨의 독본에 이르는 일본의 내러티브 이야기가, 감정이나 지식이나 역사의 표현까지 도맡아 온 것을 근거로 하면, 오에 겐자부로 이래의 <말하는 법의 문제>는 20세기 문학의 주요한 논점인 동시에, 일본 문학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테마였음을 알 수 있다. 나는 2010년대에 이르러 일본 문학의 실체가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변용은 일본 문학 그 자체의 변용의 축도라는 점에서, 제로년대 문학의 성과와 한계를 재차 판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헤이세이의 끝에서 재차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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