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 아파트에 대해 말이 많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이 살벌하게 차별한다고는 하지만 애는커녕 애인도 없는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보증금 500, 임대료 8만, 월 관리비 4만. 알뜰폰 요금과 인터넷, 전기, 수도, 각종 세금을 포함하면 식비를 뺀 월 고정 지출 약 25만.
식비는 빡빡하게 살되 하루 2끼는 무조건 채우는 방향으로. 가끔 주민센터 가서 쌀 받아오면 식비를 꽤 많이 아낄 수 있다.
그렇게 어찌저찌 저축하면서 살고 있다. 딱히 내 인생에 대해 한탄하거나 불만족스럽다거나, 그런 건 살기 바빠서 품어본 생각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불편한 점을 꼽으라면,
띵―.
항상 13층에 멈추는 엘리베이터다.
하루도 빠짐없이 13층에서 멈춘다. 특히 나는 꼭대기층인 15층에 살고 있어서 올라가든 내려가든 반드시 13층에서 문이 열리는 걸 봐야 한다.
"......."
물론 13층에 누가 내리고 타면 내가 이런 말도 안 한다.
아무도 없다. 문이 열리면 항상 비었다. 이 임대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중앙에 있고 맞은편에 계단, 집이 양 끝에 서로 마주보는 구조다.
문이 열리면 그냥 숨을 곳 없이 환하게 다 보인다.
근데 아무도 없단 것이다. 처음에 몇 번이야 예전에 고등학교 때 선생님만 쓰라던 엘리베이터에 내가 쳤던 장난이 떠올랐다.
괜히 학생들 못 이용하게 하니까 일부러 빠르게 계단을 타고 올라 1층부터 5층까지 다 버튼 눌러버리기.
비록 숨은 차지만 그것 때문에 골탕 먹을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면 그것만큼 철없던 시절도 없었다.
출퇴근 시간대만 이용해서 이러는 악질이라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면 될 일이었다.
근데 설계상 미스인지 아니면 정말로 미친놈이 그러는 건지 몰라도 어느 시간대에서나 엘리베이터는 13층을 지날 일이 생기면 항상 13층에서 멈췄다.
물론 13층에 멈추고 그걸로 끝이다. 그냥 빨리 문 닫으면 끝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 아파트 닫힘 버튼은 유독 닳았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유감없는 출근날, 14층에서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 하나가 탔다. 깔끔한 정복이 누가 봐도 갓 입사한 신입 사원 같았다.
띵―.
그리고 유감없이 엘리베이터는 13층에서 멈췄다.
"여긴 맨날 멈추네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말 붙인 건가? 그냥 오며가며 얼굴 보이면 고개 주억거리는 수준이라 설마 말 붙일 줄은 몰라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금방 공감했다. 저 여자도 어쨌든 14층 사람이다. 12층까진 솔직히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멈추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것이다.
"저는 포기했어요. 그러려니 하려고요. 임대 아파트잖아요."
"임대 아파트니까 더더욱 건의해야죠. 몇 번을 관리사무소에 연락했는데요."
아, 관리사무소. 거기 진짜로 연락하는구나. 나야 가끔 뭐 망가지거나 내가 손 쓸 수 없는 문제 아니면 연락을 안 하다보니 잊고 있었다.
하긴 관리사무소가 버젓이 있으면 진즉에 민원이...... 들어갔을 텐데?
"근데도 안 고쳐진 거예요?"
"네. 엘리베이터에 문제는 없다나. 입주민이 꾸준히 누르는 게 아니냐고 도리어 묻더라고요."
"CCTV 없나."
"안 달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겠죠."
여자는 엄청나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이럴 때는 해결책 같은 걸 말하기보단 무조건 공감했어야 했나?
"언제 날 잡아서 13층에 따지러 갈 건데, 같이 하실래요?"
띵―. 1층에 도착했을 때 여자가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 정면에서 보니까 제법 귀여운 면이 있네.
"아, 네, 뭐. 근데 진짜로 악질이면 어떡하죠?"
"혹시 잘 싸워요?"
이 인간은 날 경호원으로 데리러 가는 거였어?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정문을 나가자마자 이렇다 할 인사 없이 헤어졌다.
근데 보통 이런 건 경비 아저씨한테 시키지 않나? 원래 그런 거 하라고 경비 일 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퇴근하는 길에 경비실 들러서 한 번 물어보는 것쯤이야 되겠지. 나는 까먹지 않으려고 오늘 일을 메모했다.
7월 4일 화요일
오전 8시 20분 경, 13층에서 엘리베이터 멈춤. 14층 여자가 말 걸었음. 조금 귀엽게 생김. 관리사무소는 엘베 작동 문제 없다고 함. 엘베 안은 cctv 있는데 밖엔 cctv 없어서 확인 불가. 아마도 13층 입주민이 매번 누르는 것 같음. 퇴근할 때 경비 아저씨한테 13층 얘기하기.
"거기 귀신 들린 거 아녜요?"
"재작년 신축에?"
"에이, 매니저 오빠. 요즘 죽은 귀신이 신축이라고 피하겠어요?"
내가 두 번 다시 띨빵한 후배한테 괴담이랍시고 얘기하나봐라.
"형, 저 한 번 가봐도 돼요? 저 그런 심령 스팟 좋아하는데."
이젠 태준이까지 이러네. 요즘 애들 너무 풀어줬나?
"심령 스팟 아니라고. 일 해, 일."
"썰 풀어놓고 그러시는 거 너무한 거 아녜요?"
"괴담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고."
"언제 한 번 갈게요!"
"퇴근할 때쯤엔 집에 가고 싶다고 곡소리나 내면서 말은 잘해요."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뷔페 식당이 이 근방에 별로 없는 데다가 요즈음엔 방학도 다가와서 그런지 손님이 제법 몰렸다.
다들 죽상이 된 채로 퇴근하고, 나도 마지막으로 점검할 거 다 점검하고 임대 아파트로 돌아갔다.
물론 가는 길에 오늘 적은 메모를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네, 한 번만 확인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 이거 드세요! 고생하시잖아요. 네! 고생하세요!"
그런데 선수를 친 사람이 있었다. 오늘 봤던 그 여자였다.
"어? 퇴근하세요?"
"그쪽도요?"
"아, 네. 아, 그리고 같이 13층에 안 가도 돼요. 경비 아저씨한테 얘기했거든요."
"네, 방금 봤어요. 부디 말로 해서 되는 쪽이면 좋겠는데요."
"비관적으로 생각할 게 뭐 있나요?"
여자와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근데 이거, 잘하면 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인생에도......? 아니, 아니지. 너무 과분한 걸 바란다. 지금 내 생활비에 연애가 끼어들면 쪼들려서 못 산다.
돈 때문에 서러운 연애는 대학 때 졸업했잖아. 정신 차리자.
"이번에도 13층에서 멈추겠죠?"
7층을 지나고 있을 때 여자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죠."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네요."
"봐서 뭐하게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니까 하는 소리죠."
띵―.
도착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올렸다. 14층.
"어?"
"어."
우리는 잠깐 당황해서 멈췄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내가 급하게 열림 버튼을 눌렀다.
"내리셔야죠."
"어, 어어.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조금 올라간 뒤 띵―. 15층.
나는 내리고 나서도 얼이 빠져서 한동안 엘리베이터를 쳐다봤다. 엘리베이터는 한동한 잠잠했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은 저녁 8시니까 웬만해서 다들 집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은, 왜 하필 오늘 엘리베이터는 13층에서 멈추지 않은 거지?
나는 급하게 오늘 메모에 추가했다.
7월 4일 화요일
오전 8시 20분 경, 13층에서 엘리베이터 멈춤. 14층 여자가 말 걸었음. 조금 귀엽게 생김.(+썸 탈 기회가 있지만 과감히 포기) 관리사무소는 엘베 작동 문제 없다고 함. 엘베 안은 cctv 있는데 밖엔 cctv 없어서 확인 불가. 아마도 13층 입주민이 매번 누르는 것 같음. 퇴근할 때 경비 아저씨한테 13층 얘기하기.(<-이거 14층 여자가 해줌) +퇴근길 엘베 13층 안 멈춤.<-???
알 수가 없다. 아니, 하나는 분명해졌다.
엘리베이터는 고장난 게 아니다. 누군가가 누르고 있던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이번엔 도대체 왜?
"엇, 안녕하세요."
"아."
맞은편 집 문이 열리더니 아저씨 하나가 담배를 물고 나왔다. 그러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던 날 보고 인사하니 나는 당황해서 물러나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 타시려고......?"
"아, 아뇨. 이제 들어가려고요."
"아, 네."
아저씨는 적당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버튼을 눌렀다. 15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는 바로 문을 열었고, 아저씨를 태운 뒤 내려갔다.
얼마 안 가 13층에서 멈췄다.
실내에서 흡연이 안 된다고 13층에서 담배 피울 사람처럼 안 보였다.
그러니까 나와 14층 여자가 지나간 사이, 그 짧은 간격에 13층 입주민이 다시 13층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고작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일.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멈추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짐짓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늦저녁에 일어난 일이라 괜히 부정적으로 생각한 걸 수 있다.
13층 입주민도 사람이지 않은가. 화장실 가는 사이 나와 14층 여자가 지나가버리면 손 쓸 방도가 없다.
나는 잠시 계단을 쳐다봤다. 저녁 6시가 되면 항상 계단에 불이 들어왔다.
시공에 대해 잘 모르지만, 계단 오르는 소리가 시끄럽단 민원을 고려한 건지 몰라도 계단 오르내리는 소리는 잘 안 들리는 편이었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생각하자.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있으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 같다.
샤워하고 늦저녁을 먹고,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이나 시청하는데 머릿속에서 13층이 떠나가질 않았다.
지금쯤 14층 여자도 13층을 생각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내일 만나면 분명 13층에 대해 얘기하겠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네. 14층에 사는 것만 알지 1401호인지 1402호인지도 모르고.......
피곤하다.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야겠다.
다음날, 14층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 있나. 출근부터 했다.
경비실을 지나고 나서야 경비 아저씨한테 13층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볼 걸 싶었다. 되돌아가기엔 버스를 타버렸다.
메모하는 걸 잊어서 퇴근 후에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14층 여자는 여전히 만나지 못했고.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13층에서 멈췄다.
목요일,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불길한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면 14층 여자는 그리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항상 제 시간 맞춰 출근하니, 비정기적인 건 14층 여자였다. 생활 습관이 잘 안 갖춰진 건가? 아니면 입사한 곳이 좆소였다든지?
어쩌면 그때 차려입은 정복은 면접 보려고 맞춘 걸지 모른다. 근데 여긴 자취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인데 백수로 지내는 게 가능하려나.
14층 여자를 만난 건 주말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햇반이 2+2 행사 중이라 좀 쟁여두려고 갔는데, 마침 거기서 라면 먹고 있는 14층 여자를 발견했다.
"어."
"아."
부끄러운 행색을 들킨 것 같은 표정이 일품이었다. 알아보지 말 걸. 하지만 동시에 저 여자가 경비 아저씨께 13층에 대해 문의했으니 이쯤이면 결과도 들었겠지 싶어서 인사하려고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 혹시 저번에 13층 관련으로 경비실에 문의하셨잖아요."
내가 서론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자 여자는 눈을 번뜩이더니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아, 그거요. 13층에 입주한 사람이 없대요."
"네?"
"말 그대로요. 13층엔 사람이 안 산대요. 아무래도 범인은 제 맞은편 1402호, 아니면 12층 중 한 곳일 거예요."
14층 여자의 말에 나는 잠깐 충격에 빠졌다. 거기에 아무도 안 산다고? 그럼 14층이나 12층에서 굳이 내려가거나 올라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빠진단 말이야?
고작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일이잖아.
아주 아주 아주 가끔 빼먹긴 해도 그걸 아침 점심 저녁 안 가리고 매번 하는.......
"저기, 혹시 말이에요."
"네?"
"13층에 멈추는 거, 14층이랑 15층으로 가거나 거기서 내려갈 때만 그러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13층엔 아무도 안 살고요."
"네."
14층 여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럼 누군지 몰라도 매번 13층의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14층이나 15층으로 올라갈 때만 13층 버튼을 누른다는 거네요?"
"어?"
"그렇잖아요. 엘리베이터는 단 한 번도 13층에 멈춰있던 적이 없어요. 경유지처럼 13층에 잠깐 멈추고 14층이나 15층으로 올라가거나 12층 이하로 내려가지."
"어어어? 진짜네요?"
14층 여자는 내 말 뜻을 이해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리하자면 이렇다.
엘리베이터는 단 한 번도 13층이 목적지인 적이 없었다. 왜냐면 13층엔 사람이 살지 않으니까. 1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12층 이하에서 14층, 15층으로 올라갈 때.
14층, 15층에서 12층 이하로 내려갈 때.
2층~12층에 사람이 다 내리고 13층에 올라가 멈추는 경우, 14층에 사람이 다 내리고 13층에 내려가 멈추는 경우.
둘의 경우는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13층을 무조건 지나야 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아요?"
14층 여자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걸 생각할 바에 CCTV 다는 걸 기다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14층 여자는 괜히 힘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차마 부정하기 힘든 말이라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좀 과하게 생각한 것 같네요."
"그래도 뭐, 13층에서 멈추는 것 말고 별 일 없으니까요. 스트레스 받을 바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14층 여자는 자기가 먹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햇반을 사려고 왔단 걸 상기했다. 햇반 코너를 슬쩍 보니 이곳에 자취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몇 개 없었다.
"그쪽도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어차피 조만간 CCTV 달릴 테니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14층 여자를 보내고, 나는 햇반을 산 뒤 임대 아파트로 돌아갔다. 당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아파트는 10층을 넘어가고 있었고,
12층에서 멈췄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시 올라가 13층에 멈췄고, 14층까지 올라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데 13층에서 한 번 더 멈추고 1층까지 내려왔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5층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뭔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뭘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에 열림 버튼을 눌러 붙잡았다. 그리고 15층 버튼을 다시 눌러 끄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빈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빈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13층에 멈췄다.
그리고 15층에 올라가 멈췄다.
여기 엘리베이터는 층수 버튼을 눌렀다가 끈다고 명령이 남아있는 구조가 아니다. 설령 남았다고 해도 특정 층에서 멈추고 문이 닫힐 때까지 버튼이 눌려있지 않으면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저 15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13층을 누른 사람이 일부러 15층으로 보낸 것이다. 자기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게끔.
우연이다. 정말, 지극한 우연이다. 왠지 모르게 내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서 13층에 멈추기 전에 잠시 생각 좀 하려고 내린 거였다.
바로 탈 거니까 올라가지 않게 15층을 다시 눌러 끄고 내린 거였다.
그리고 이 상황. 명백한 '실수'의 현장.
이걸로 하나 확실한 건 그 띨빵한 후배의 귀신 얘기는 개잡헛소리라는 것이다. 진짜 뜬금없이 생각나네.
어쨌든 13층에 버튼 누르는 것도 사람이란 건 확실히 알겠다. 그렇다면 저번에 13층을 그냥 넘어간 것도 실수일까?
실수가 아니라면 무언갈 하고 있다는 걸까? 하루 24시간 엘리베이터만 주시할 것 같은 놈이?
왠지 모르게 오싹해졌다. 아닌 밤중에 이런 생각을 하니까 괜히 불안해지고 그런 거겠지?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역시 13층에 한 번 멈추고 쭉 내려왔다.
띵―. 문이 열리고 발을 들였다. 솔직히 한 번 더 기만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햇반 들고 이러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오늘은 일단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15층을 누르고 13층에 멈추길 기다렸다. 그래도 한 번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지나간 흔적이 보일지 말지 보고는 싶었다.
어쩌면 자길 속인 것에 분노하며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등 뒤가 오싹해져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띵―. 15층입니다.
.......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황급히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또다.
아니, 이번에는 명백히 '고의'로 보내줬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고의가 정녕 맞을까? 단순한 내 착각인 건 아닐까?
머리가 괜히 복잡해졌다.
사실 문제 해결은 정말 간단하다. 13층에 내리는 것이다.
13층에 내려서 누가 버튼을 누르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적어도 누르러 오든지, 오려고 하다가 날 보고 도망치든지 하겠지.
아무리 계단이 소리가 덜나도 집 안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단 소리를 못 듣는 거지 계단 앞에서 계단 소리가 안 들리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럴 자신이 있나? 사실 없다.
정말 단순한 일인데. 단순한 사건인데. 그렇게 스스로 되뇌어도 용기가 솟아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이랄까, 나도 이런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지만 함부로 확인해선 안 된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하자니 무어라 말할까? 저기, 누가 저희 임대 아파트 13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자꾸 누르는 것 같아서요.
경찰이 얼마나 황당하게 여겨서 블라인드에 하소연 썰을 풀지 상상간다.
14층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괜히 스트레스 받을 바에 받아들이랬지. 사실 잘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14층 여자 때문에 신경 쓰이게 된 거잖아.
다 그 여자 때문이었어!
다신 상종하지 말아야지.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집에 들어간 뒤 핸드폰을 켜서 메모했다.
7월 9일
13층 버튼 누르는 사람이 실수함. 이후 15층으로 오는데 13층 그냥 넘어감. 신고하기도 애매한데 뭔가 불안함. 왜 불안한지 모르겠음. 그냥 사람이라면 이딴 짓을 계속 할 리 없어서 그런가? <- 의외로 설득력 있을지도. 어쨌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음. 1401호 여자랑 상종하지 말자. 걔 때문에 괜히 심란해짐.
메모를 끝마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보더라도 모른 척, 바쁜 척, 피곤한 척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멀어질 것이다.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아도 된다. 서먹서먹한 거야 원래 아파트 이웃들이 다 그렇잖은가.
전에 살던 임대 주택 사람들만큼 미친년놈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 뒤로 14층 여자는 기이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웬만해서 한 번은 마주치겠거니 싶었는데 도통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 편의점에서도 안 보이고, 출근길, 퇴근길에서도 안 보였다. 나도 여기 입주민들과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니 안 보인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게 여길 시점은 7월 말이었다. 여름 폭염에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2박 3일 정도 집을 비웠다가 올라온 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웬 청년 하나가 짐을 들고 낑낑거렸다. 괜히 시간 끄는 게 싫어서 도와주자 청년이 땀을 닦으며 감사를 표했다.
"아, 감사합니다."
"이사 오시나봐요?"
"네, 1401호예요."
1401호?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딘가 심각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1401호...... 뭘 잊은 거지? 뭔가 이상한데?
"혹시 1402호에 사세요?"
"네? 아뇨. 저는 1501호에 삽니다."
나는 15층에 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으로 훑다가 13층은 테이프로 꽉꽉 싸매서 누를 수 없게 만든 걸 발견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 혹시 제가 소음에 예민해서 그런데......."
"아, 괜찮아요. 평일엔 퇴근하고 바로 자고, 주말에는 집에서 게임만 하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하하, 죄송해요. 제가 전에 살던 곳에서 층간 소음 때문에 이사했거든요."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자연스럽게 떠들던 도중, 나는 이 남자가 13층에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띵―. 나는 아주 자신 있게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했다.
14층.
"이게 마지막 짐이었는데 실례되지 않으면 음료 한 잔이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며 가며 계속 볼 텐데 천천히 대화 나눠요."
"아, 넵. 그럼 안녕히 가세요."
문이 닫히고, 조금 올라갔다가 띵―. 15층.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 메모를 확인했다. 내가 까먹은 것들, 놓친 것들이 혹시 여기에 기록됐나 싶어 하나하나 읽어봤다.
내가 찾은 건 7월 9일의 메모였다.
7월 9일
13층 버튼 누르는 사람이 실수함. 이후 15층으로 오는데 13층 그냥 넘어감. 신고하기도 애매한데 뭔가 불안함. 왜 불안한지 모르겠음. 그냥 사람이라면 이딴 짓을 계속 할 리 없어서 그런가? <- 의외로 설득력 있을지도. 어쨌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음. 1401호 여자랑 상종하지 말자. 걔 때문에 괜히 심란해짐.
1401호 여자. 듣자마자 떠올랐다. 편의점에서 분명 1402호를 지적했고, 그래서 당연히 1401호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메모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막 이사 온 사람은 1401호에 짐을 풀고 있다.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거지?
왜 엘리베이터는 13층에서 멈추지 않았던 걸까? 이사 하는데 13층에서 자꾸 멈추면 빡치니까 배려한 걸까? 아까 그 청년 떡대 좋던데 사람 가려가며 누른 걸까?
아니, 그럴 거면 내 맞은편에 사는 아저씨도 만만찮은 포스를 가졌는데 그 양반이 타는 엘리베이터라고 13층에서 안 멈춘 건 아니었다.
이삿짐을 혼자 옮기려면 몇 번을 엘리베이터로 오갔을 텐데, 나한테 13층에 대해 한 마디 없다는 건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멈춘 적이 없단 것이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다.
두 번은 고의일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은? 그 이상은? 그건 실수나 고의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없다. 없어진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13층 버튼을 누르던 그 누군가는 내가 내려갔다 온 사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거기에 13층은 누르지도 못하게 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얼마 안 가 경비실 답변으로 확정됐다.
"아, 그때 자리에 없었어?"
"네? 자리에 없었다뇨?"
"아니, 뭐. 입주민들 사이에 사건 하나 일어나가지고. 외부에 수상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는 건 내가 잡겠는데 입주민들끼리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냐고."
"무슨 일인데요."
"경찰 다녀갔으면 말 다했지! LH에선 괜히 흉흉해진다고 급하게 입주민 하나 받은 거야. 잘 대해줘."
"13층은요? 13층에 더는 안 멈추던데요."
"그거? 모르지. 사건 터지고 CCTV 없는 것 때문에 민원 엄청 쌓여서 그저께 급하게 업체 알아보고 어제 달았어."
"......."
"운이 좋은 거야. 살벌했어. 기자 양반들 귀신 같이 냄새 맡고 오는 거 말리느라 진땀 뺐다고."
"그럼 13층은 왜 못 누르게 한 거예요?"
"거기 가지 말라고 경찰들이 한 거야. 원래 싹 조사해야 하는데 입주민들 성깔 알잖아. 아파트라 얌전해 보이는 거지 다들 장난 아닌 거 알지?"
"아직도 조사 중인 거예요?"
"그럼 그게 하루이틀로 끝나겠어?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 봐. 학생 상대해주다가 기자 들이면 나만 욕 먹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진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3층 버튼은 여전히 누를 수 없게 해놨고, 엘리베이터는 더는 13층에 멈추지 않는다.
13층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4층 여자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며칠 동안 메모를 살폈다. 입주민들 눈치를 살폈다. 살피고 또 살피며 그것과 엮인 기억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그러나 내가 알아낸 거라곤 엘리베이터는 이제 13층에 멈추지 않을 거란 사실과 13층 위에 사는 건 나와 이제 갓 이사 온 청년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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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자체는 엘리베이터 배경이 많다는 어느 글에서 시작함.
작품을 쓰기 위한 진상은 있음.
하지만 그게 중요하거나 절대적이라거나 맞추라고 쓴 게 아님.
진상을 자유롭게 추리해줘.
이번엔 진짜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석 안 씀. 진상 없이 무섭게 하기 원툴이라고 해도 됨ㅇㅇ
단, 내가 평소에 쓰는 시리즈인 초자연현상처리반은 대놓고 초자연현상(호러판타지)으로 흐르는 만큼 여기선 그런 경향을 완전히 배제함.
19살 생일 숫자야 숫자 보이는 거 하나 빼면 죄다 담백하게 갔듯이 이번에도 현실 기반으로 추리해줬으면 좋겠음.
읽어줘서 꺼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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