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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역] 보리스 그로이스 - 에른스트 윙거의 사상 (완성본)

김갑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0 22: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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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윙거의 「노동자(Der Arebeiter)」(1932)는 대부분의 비판가들에게 정치적 텍스트로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근대의 기술과 새로운 조직의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전체주의 국가의 창조에 기여하려는 정치적 계획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텍스트의 본래 의도는 오히려 개인의 불멸성에 대한 윙거의 관심에 있다. 니체가 선언한 것처럼 '낡은 신'이 죽은 이후에 불멸성은 자신들의 고유한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개인들의 개별 능력에서 존속한다. 기술의 비유에 관한 윙거의 생각을 따라간다면 이러한 의도는 아주 분명해진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개인적 체험에 대한 논쟁임이 드러난다. 윙거는 그러한 체험이 가능할 뿐 아니라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시민적인 개인주의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이념적 운동을 위한 토대가 된다. 시민적인 개인주의는 모든 이에게 '자연적인' 인권을 부여했고 자유민주주의는 19세기를 특징지었다. 원래 윙거는 두 개의 다른 주장의 기초를 세울 증명 자료로 기술을 이용한다. 하나는 개인의 체험에 대한 시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해는 20세기에 이미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사회적 세계가 합리적인 기술의 지배를 통해 조직되기 때문에 개인의 체험이 예전의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주장이다.


윙거는 개인의 경험을 나타내는 말로 '개인의 체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특징은 보편적 개념인 '삶'을 내포한다. 체험은 삶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자신의 텍스트에서 윙거는 전통적이고 시민적인 이데올로기는 유일무이함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삶을 절대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 최고의 도덕적, 법률적 의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윙거는 [유일무이함이 사라진] 근대 기술 세계에서 이 개념 [개인적 체험]은 타당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는 증명을 거듭거듭 시도했다. 또한 개인의 삶에 대한 법적 보호, 인권, 민주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에 전체주의에 동조했던 많은 작가들과는 반대로 윙거는 매우 고유한 담론과 수사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어떤 국가, 민족, 인종, 계급에도 굴복하지 말 것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그는 공동체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윙거는 개인의 경험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기술 세계에서는 [고유한] 개인이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개인의 인권을 지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호해야 할 어떤 개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인을 공동체에 굴복시키려는 정치적 강제는 모든 현실적 기능을 결여하고 있다. 윙거의 입장을 따라가다 보면 개인화되지 않은 근대 기술의 주체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 주체는 바로 '노동자'다. 기술 시대에 노동자는 경험의 담지자이지만, 더 이상 개인적이지도 인격적이지도 않으며 대량생산의 방식에 의해 표준화 된 주체다. 대중과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주체는 인권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경험들이 비인격적이고 대량생산되고 언제든지 재생산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체는 또한 불명한다. 윙거는 자신의 정치적, 미학적 기획을 위해 의도적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인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희생시킬 것이 없기 때문에 지켜야만 할 것도 없다.


윙거가 유일무이한 경험의 불가능성을 확언한 것은 아니지만, 유일무이하고 반복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특성과 관련하여 그러한 경험이 평가절하 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세계에서는 언제라도 반복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대량생산의 경험만이 가치있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것에 대한 평가절하는 개인의 취미판단에서 기원한다. 윙거는 일반 대중이 대부분 개성적인 것 보다는 대량생산 제품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려는 전형적인 소비자는 표준 모델을, 즉 믿을 만한 상표명을 가진 차를 선택한다. 소비자는 오직 그를 위해서만 제작된 원본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1) 근대적 개인은 단지 표준화된 것과 대량생산된 것만을 인정한다. 재생산이 가능한 대상은 언제나 교환 될 수 있드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확실한 파괴 불가능성과 불멸성을 약속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메르세데스를 사고로 폐차했다면 그는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동일한 모델의 다른 차를 살 수 있다. 윙거는 사적인 경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선호(選好)가 동일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표준화 된 것과 대량생산한 것을 우수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가장 성공적인 영화는 관객의 취향에 상관없이 일관되고 언제나 동일한 정서를 생산하는 영화다. 연극을 보는 것과 달리 영화를 보는 것은 더 이상 유일무이한 체험이 아니다. 근대 과학기술은 그 대신에 다른 무언가를 제시한다. 그것은 불멸성에 대한 약속이다. 반복 가능성과 재생산 가능성에 의해 이행될 수 있는 약속이다. 그것은 근대적 개인이 의도된 감정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의 삶을 대량생산에 적응시키는 순간에 실현 된다.


근대적 경험의 기술적이고 대량생산적인 성격은 계산된 효과 안에서 (경험의 총합인) 근대의 주체성에 작용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적인 주체를 교환 가능하고 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만일 재생산 가능하고 비인격적이고 대량생산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에 공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이미 말했듯이 특정 개인에게 가치를 부여하거나 특별한 인간의 삶을 보호해야 할 명확한 근거는 더이상 없다. 윙거는 단지 기술에 의해 계획적으로 보벌된 인간 유형만이 우리 시대의 적절성 또는 가치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유형을 '노동자의 형태'라고 표현한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돌아온 윙거는 더 이상 인권에 대한 수사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총동원'에 대한 이전의 텍스트 「총동원(Die Totale Nobilmachung)」(1930)에서 그는 근대의 전쟁을 완전한 익명 상태에서 인간의 신체를 파괴하는 기계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파괴 양식에서는 개인의 체험의 영역에서 진행되던 모든 것들의 의미가 중지된다.


알 수 없는 병사의 익명의 죽음은 완전히 무의미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메르세데스처럼 병사도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러한 맥락에서 윙거는 병사와 노동자를 불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기술적인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은 반드시 기계를 모방해야 한다. 심지어 그를 파괴하는 전쟁 기계까지도 모방해야 한다. 실제로 이와 같은 복제의 기술은 불멸성의 기술 형식에서 배가된다. 기계 자체는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것은 죽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작동하고 일한다. 따라서 기계는 종종 불멸성의 상징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앤디 워홀이 '기계가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비록 윙거보다 한참 후이긴 하지만 그 역시 대량생산과 재생산 가능성을 불멸성의 길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의식없는 기계가 되겠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 또는 악몽같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기계가 되는 것은 워홀과 마찬가지로 윙거에게도 개인적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후의 유일한 가능성이 되었다. 윙거의 주요 전략은 불멸성을 얻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기계적 소외 속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문화적 기념 제도에 대한 윙거의 태도는 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근대성의 맥락에서 이러한 제도들은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인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윙거는 모든 박물관과 도서관을 파괴하거나 적어도 그 파괴를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량생산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것 같은 유일무이한 대상들을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기술적인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박물관을 사적이고 미적인 체험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어떻게 전체 기술 세계가 예술 작품으로 격상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통찰력을 기르고 숙고해야만 한다. 윙거의 경우처럼 1920년대의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게도 기술과 동일시된 예술의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의 과제는 기술적, 미학적, 정치적 계획의 도움으로 말 그대로 세계와 지구 전체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급진적인 예술가도 예술 감상의 특권적 장소인 박물관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제부터는 단지 산업적인 예술만이 예술로서 가치가 있다고 호소했다. 윙거가 이러한 급진적인 미학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은 아주 높다. 자신의 글에서 윙거는 소련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반복했다. 그는 또한 타틀린의 '기계 예술'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예술 프로그램은 베를린의 다다이스트와 리시츠키 및 예렌부르크 같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독일에 소개되었다. 윙거의 미학 형식과 구성주의자의 형식 간의 차이는 다음의 점에서만 성립한다. 윙거는 고대적이고 고전적인 양식에 대한 자신의 경탄을 구성주의적 구호에 결합시켰다. 물론 그 양식이 높은 수준의 대량생산성과 균질성을 표현하는 한에서 말이다. 따라서 그는 군복의 세계뿐만 아니라 중세카톨릭과 고대 그리스의 건축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보편성에도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양식들은 수준 높은 대량생산성과 규칙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윙거의 논증은 러시아 구성주의자의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을 내포한다. 두 경우 모두 전통적인 미학의 종말과 새로운 기술의 승리를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둘에 공통적인 것은 세 부분으로 된 프로그램인데, 이것은 새로운 미학, 새로운 미학적 삼수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학적, 정치적 질서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미 근대 기술의 승리가 실현되었다면 그러한 정치적 프로그램의 필연성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분명 윙거가 기술의 역사적 승리에 만족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기술은 또한 특정한 시각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 형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즉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의식으로, 새로운 불멸성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기술이 아니라 새롭고 다른 경험과 지각을 유도하는 관점의 변화에 있다. 그의 목적은 기술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하도록 독자를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윙거는 전체 문명과 그 문명을 담고 있는 이 세계를 유일무이한 기성품으로, 총체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할 것을 권한다. 뒤샹은 근대문명에 의해 생산된 일상 용품을 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이미 증명했다. 근대 미학의 맥락에서 윙거의 전략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단지 박물관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문화 보관소나 적어도 해석의 영역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관점의 변화 자체는 유일무이한 미적 경험, 즉 복제하거나 대량으로 제작할 수 없는 한 번 뿐인 미학적 작업을 표현한다. 이러한 미적 작업은 세계 전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는 유일무이하고 자율적인 총체, 즉 유일무이하고 훌륭한 관조 대상이 된다.


윙거는 자신의 글에서 유일무이한 개인적 경험의 불가능성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한 번 뿐인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가능성을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폭로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윙거가 말한 대량생산성 속에 있는 불멸성을 약속한다. 우리가 여러 근거에서 알 수 있듯이 불멸성은 동시에 역사적 종말에 대한 최종적, 탈역사적, 계시적 폭로를 의도한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이 윙거의 텍스트의 핵심을 형성한다. 윙거가 「노동자」에서 제시한 기술 세계에서 그 텍스트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는 어떤 종류의 인격적이고 미학적인 메시지를 위한 장소도 없고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윙거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는 자신의 지위가 불만스러웠다. 분명 이것이 그가「노동자」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윙거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작가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의 글들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었고, 개별 독자들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나 미학적인 동의 같은 기준에 따라 평가 될 뿐이었다.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처럼 윙거는 독자들에게 단지 '개인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독자의 의식과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했다. 그는 책을 읽는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것 대신에 독자의 삶을 평가했다.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얼마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작가는 단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과를 원한다." 독자를 과소평가한 까닭에 윙거는 스스로 생산자나 노동자와 같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소비자에 대한 그의 경멸과도 일치한다.


근대 자유경제의 기능 가운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비자를 지배하겠다는 의지는 윙거의 정치적 비전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이다. 노동자가 생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노동이 생산한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전체사회가 무한한 생간의 이념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전쟁이 생산된 재화의 유일하게 가능한 소비자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노동 단위에 따라 조직화된 사회들로 세분된 세계에서 전쟁은 이미 경쟁의 토대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전쟁의 우위는 일반적인 소비 패턴이 없는 세계에서 생산을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윙거는 전쟁을 근대 산업 생산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술적인 사회의 총괄 개념은 '노동자의 형태'다.


대다수 동료들과 달리 윙거는 기술적인 진보를 찬양하였다. 그는 진보를 역사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이 입장을 끝까지 유지하였기 때문에 진보를 선호하였다. 근대의 작가들은 기술적 진보의 지칠 줄 모르는 행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전통적으로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진보는 예술가의 모든 유한하고 개인적인 업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윙거는 그와는 반대로 진보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목적으로 인도하는 발걸음으로 생각했다. 노동자의 육화나 모든 인간이 완벽한 노동자로 변신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목적으로 말이다. '노동자의 형태'에 대한 윙거의 표상은, 신의 모습을 인간 활동의 원인이 되는 부동의 동자로 기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神)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3) 기술적이고 군사적인 진보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노동자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와 같이 완벽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생산한 것을 소비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소비자에게 관대하지도 않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인류가 노동자를 만들어내자마자 정지한다. 기술적 진보는 완벽한 완전성에 도달하는 그 순간에 끝난다. 절대적인 노동자는 길고 고단한 테러와 전쟁을 거쳐 모든 잠재적인 소비자를 최종적으로 파괴하고 제거 했을 때에만, 매우 지당하면서도 무한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기술적 진보의 끝을 보여주는 무한한 평화와 영원한 주말의 비전은 말레비치의 '하얀 인류'의 미래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비전은 역사의 종말에 뒤따르는 무한한 소비의 도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전을 월등히 능가한다. '노동자의 형태'는 전혀 소비되지 않는다. 즉 노동자의 최종적이고 역사적인 권력 획득 이후에 노동은 비노동 또는 자유 시간과 동일해진다. 그러나 윙거가 노동자를 계시록적인 미래와 결부시켜서 기술적 진보의 종말을 앞당겼으며, 자신의 텍스트를 지금 여기에서 불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미래의 독자가 아니라 독자 없는 미래를 위해 글을 썼다. 미래의 인간은 「노동자」의 잠재적 독자가 아니라, 윙거가 설계한 생활 세계의 거주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렵다. 윙거는 그의 미학적 비전을 정치적 실천으로 변경하고 현실과 기술적 세계 그리고 그것의 미학적 지각 사이의 균열을 막는 데 국가의 권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윙거의 정치적 기획은 내가 이미 기술했던 미학적 기획과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윙거는 자유민주주의적 자유와 경제적 선택의 자유의 배후에는 기술 관료적인 정부 기관의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이처럼 위계적으로 조직된 기술 관료적 통제는 결코 자유주의적이지 않으며 전적으로 독재적이다. 왜냐하면 시민 주체의 벌거벗은 실존이 기술의 작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속의 가장 좋은 예로 윙거는 전기를 든다. 민주적인 지배하에서 사람들은 어떤 더 큰 충격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어떤 정당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서의 불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전기를 끊을 수는 없다. 기술에 대한 우리의 종속은 아주 깊고 내밀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윙거의 묘사는 실제로 정확한 것이며 심오한 진리의 불꽃을 확실히 포함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완고한 정치적 기획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권리의 폐지를 내포하는 새로운 전체주의의 관점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 수사적 진술이 아니다. 윙거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반복했다. 학문의 자유는 민족국가에 대한 반역이며 언론의 자유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운명은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강요되어야 하며 이에 대해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윙거는 이러한 프로그램적인 요구를 정식)화했는데, 여기에는 아주 이상한 점이 있다. 이러한 급진적 요구는 그가 직접 분석한 결과로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 이미 기술 관료적인 통제가 현실이며 시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자유가 환상이라면, 왜 윙거는 그렇게 격렬하게 그것의 파괴를 요구해야만 하는가? 윙거는 초기 에세이「총동원」에서 자신의 기획이 미국적인 민주주의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크며 다른 곳보다 더 잘 실현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 기술이 그의 비전을 이미 실현했다고 한다면, 그는 무엇때문에 '노동자'의 독재를 현실하기 위한 이러한 정치적 부가물을 필요로 했을까?


이 글의 논의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바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당시 독일과 러시아에서 사용된 기술의 한계와 결핍으로 인해 권력자는 자신의 기술적 우세를 수사적 방식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전문적인 기술체계를 정치적 위계가 대신하게 된다. 정치적인 극단주의는 여러 목적을 수행했다. 그것은 현실적, 기술적 진보인 척 하는 시뮬라르크다. 그것은 기능적, 예술적, 정치적 디자인 형식의 심미화에 기여하면서 기술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강력하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인다. 실제로 이것은 소련이 커다한 효과를 거두었던 정치적 전략과 일치한다.


그러나 윙거가 그러한 효율성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미적 체험으로 파악했다는 점이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그는 근대 기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적인 긍정이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즐겼다. 무엇보다「노동자」는 오늘날의 독자들로 하여금 할리우드의 공상과학영화라는 장르(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가 선구자격이다.)를 생각나게 한다. 공상과학영화에는 보통 로봇과 중세풍의 기사, 섬뜩한 수도사들이 나온다. 그리고 위계적 질서로 조직된 알 수 없는 비밀조직들이 득실거린다. 이들은 판독할 수 없는 것들을 생산하는데, 그것은 기술적으로 계산 불가능하고 매우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스타쉽 트루퍼스'같은 영화들에서는 이 세상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곤충 떼가 자주 나타나 다른 것들을 점령해버린다. 곤충계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윙거라면 분명 이러한 영화들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스크린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모든 생명체와 기계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교환하고 수리하고 복제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영화 속 영웅들은 자신의 녹슨 타임머신 덕분에 세기를 넘나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상과학영화 속 주인공들은 죽지 않는다.


윙거는 자신의 텍스트에서 아방가르드 미학, 즉 구성주의와 바우하우스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가 단체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실험적이지도 아이러니하지도 않았으며 형식주의적인 어의(語義)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노동자 국가에 대한 그의 비전은 오늘날 현존하는 대중문화를 확실하게 선취하고 있다. 윙거가 글을 쓰던 1930년대에 대중문화는 처음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윙거의 텍스트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초창기 고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유럽을 위해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으로 목표했던 바는 실제로 실현되었다. 오래된 세계에서는 잘되지 않았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실현되었다.


1) "따라서 어떤 특정한 자동자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개성에 맞게 디자인 된 차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는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자동차에 대해 불신을 느낀다. 그가 무언중에 전제하는 품질은 오히려 모델명이나 상표 등이다. ... 이와는 반대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개별적인 성질은 박물관에 있는 골동품 같은 것들의 등급이다." - E. Junger, Der Arbeiter (1982)

2) "그 (익명의 군인)의 덕은 그가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가 전사한 뒤에는 예비군이 그를 대체한다." Op. cit, S 135f.

3) "만일 노동자의 형태를 자기적으로 움직임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힘으로 이해한다면 ... 이는 [기술적 진보의] 과정이 이미 주어져 있는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Op. cit, S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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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4 일반 이용당하는 개독교 개미 & 한국민중의 최대의 적 = 개독교 권민족운동(39.7) 05.16 8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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