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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 프로젝트: 세계를 구한 과학자 "오펜하이머"

ㅇㅇ(121.166) 2019.10.22 01:29:20
조회 161 추천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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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08월 미국 백악관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의 도입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저에게 전해진 엔리코 페르미와 실라르드 레오의 서로간의 소통을 통하여, 
우라늄을 활용한 핵 연쇄 반응 연구를 활용하는
미래의 새로운 에너지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편지가 훗날 대한민국을 독립할 수 있게 만들고, 세계 2차 대전에 미국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만든
핵폭탄의 개발 가능성이 언급된 최초의 서신이다.

편지 내용에 전체 작성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라고 잘못 전해져 있지만, 실제론 실라르드 레오, 유진 위그너가 주요 작성자였으며,
편지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추천 서명을 받아 전달하게 되어

아인슈타인이 편지 내용 전체를 작성하였다고 현재에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편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미국 정부는 이들의 제안대로 우라늄 광석을 제공하여, 엔리코 페르미와 여러 과학자들에게 핵 연쇄 반응 연구에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3월 23일 브리그스, 콤프턴, 로렌스, 머프리, 어레이는 S-1 우라늄 위원회의 최종권고안 작성 회의를 거쳐서
핵폭탄이 제조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술을 기고했다. 최종 권고안은 부시와 코넌트, 그리고 미육군측 대표였던 브레혼 소머벨에게 제출되었다.

부시와 코넌트의 검토를 거친 최종권고안은 미육군 공병사령부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1942년 6월 17일 루즈벨트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로서 훗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이때 맨하탄 프로젝트는 미육군이 총괄하게되는데 프로젝트 총괄책임을 맡았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당시 원자폭탄의 이론 연구를 하고 있는 3개의 연구소와 별도로 실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연구소를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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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에 있던 맨해튼 계획의 주요 연구·개발 장소


실제 핵폭탄의 디자인을 완성하고, 실현시킬 연구소의 총 책임자의 유력 후보로 "콤프턴 효과"의 192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서 콤프턴과 "사이클로트론 개발과 적용"으로 193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로렌스가 물망에 올랐으나, 둘다 제의를 거절하고 아서 콤프턴과

어니스트 로렌스는 자신들 대신에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하였다.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는 강행하였으며, 이때 맨하튼 엔지니어 지구에 그로브스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상기 보내었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없이 7월 15일에 있었던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중성자에 관련된 계산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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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최초의 핵폭탄 디자인



초기 핵폭탄 디자인이 구체화 되어 갈수록,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맨하탄 프로젝트는 1939년에 극소수(처음 예산은 약 6천 달러)의 예산으로 출발하였지만, 1945년에는 고용 인구 13만 명, 사용 예산 2억 달러(2011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5억 달러(한국화폐 기준 약 3조원))으로 성장하였다. 비용의 90%는 공장 건축과 핵분열 원료의 구입에 사용하였고, 10% 정도는 무기 개발에 사용하였다.


1945년 7월 세계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으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그 다음 3일 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되고, 일본은 결국 연합군의 공격의 항복하였고, 곧 종전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수 많은 살상자가 나왔고,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원자폭탄 계획에 박차를 가한 것이였지만,
원자폭탄이 투하될 장소까지 관여하진 못하였다.

미국 정부에 의해, 군사시설 혹은 무기 공장이 아닌 민간인 거주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는 것은 순전히 미국 정부의 결정이였다.

"우리는 세상이 예전과 다르게 나아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뉴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론 독일의 나치가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였다면, 역사는 뒤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서신에 서명한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 또한,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핵개발에 참여한 맨하탄 프로젝트의 연구진 중 존 폰 노이만,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등은
민간인 지역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대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맨하탄 프로젝트을 성공으로 이끈 공로로 자문 위원회 의장에 선발되었고, 자신의 직위를 활용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미국 정부는 1950년 부터 '셰이크 다운' 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세계 3차 대전 시나리오였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고 이를 저지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미국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계획에 자신의 직위를 활용하여, 미국의 수소폭탄 계획을 최대한 저지하였으나,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는 비밀청문회 서류를 빼돌린 혐의로 모함받아, 소련의 앞잡이, 공산주의자, 좌파로 몰려서,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기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핵계획에서 멀어진 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연구과목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 거리낌 없게 토론하는 자유로운 풍토의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여기서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 이휘소의 연구업적이 빛을 낼 수 있었으며,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프린스턴 대학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후진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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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아인슈타인(왼쪽)과 로버트 오펜하이머(오른쪽), 원자폭탄 투하 이후 핵 계획에서 멀어진 뒤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두 사람에 회의사진


실질적으론 아인슈타인이 나이가 훨씬 많은 대선배이지만, 이미 나이가 많은 아인슈타인은 원로로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고,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내에선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직위가 더 높았다.


1957년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해안가에 2500평 정도 크기의 땅을 산 후 그곳에서 아내,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미국 정부에 의해 핵관련 정책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물리학에 관한 논문 작성을 계속하였으며,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과학사, 사회과학의 역할, 우주의 본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2년 영국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63년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촉구에 따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로부터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여받았다.


1965년에 후두암에 걸렸으며, 투병하다가 1967년에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한 명의 과학자의 헌신이 세계 3차 대전을 막았다고 표현할 순 없지만,


그의 노력의 일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종전을 하게 되었고,


그의 주장과 노력대로 미국이 일으키려하였던 세계 3차 대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펜하이머의 양심이 결국 세계 3차 대전의 발발을 저지한 것이다.


"한 명의 과학자에게 약 60억 전 인류의 미래가 걸려있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지만,


오펜하이머에게는 통용되는 이야기이다.


만약 그가, 맨하탄 프로젝트를 끝낸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미국의 세계 3차 대전 시나리오 대로 수소폭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면,


지금의 인류가 존재하고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과연 태어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오펜하이머의 양심이 맨하탄 프로젝트 이후 세계를 구했다.


맨하탄 프로젝트 주요 기여도

오펜하이머 (1904년 ~ 1967년, 미국)-원자폭탄 디자인, 이론 수집, 총괄진행, 우라늄-235 융합 반응 중성자 계산
노이만 (1903년 ~ 1957년, 미국)-원자폭탄이 지상 거리 피해 최대치 예상 시뮬레이션 계측.
위그너 (1902년 ~ 1995년, 미국)-원자로 건설 총괄책임
실라르드 (1898년 ~ 1964년, 미국)-우라늄 핵분열 및 융합 반응 에너지 가능성 제안 및 맨하탄 프로젝트 최종권고안 초안 작성
콤프턴 (1892년 ~ 1962년, 미국)-핵분열 원자로 개발과 핸퍼드의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 건설을 총괄지도.
로렌스 (1901년 ~ 1958년, 미국)-우라늄 235의 전자기적 분리 방식을 이용하여 원자폭탄 리틀보이 제조 핵심 기술 개발.
보어 (1885년 ~ 1962년, 덴마크)-대응원리에 의한 우라늄 이론 정립 및 개요 정리
페르미 (1901년 ~ 1954년, 이탈리아 출생, 미국으로 귀화)-위그너와 함께 리틀보이 직접제작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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