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일반] 이 갤러리를 보면서 생각난 게 있는데, 전에 다니던 학원에앱에서 작성

ㅇㅇ(14.53) 2020.06.04 21:04:40
조회 1329 추천 28 댓글 9
														

명문(名文)을 붙여 놓던 형이 있었어.

교실 공용 참고서 사이사이나 액자로 가려진 벽면에, 시간표가 붙여진 보드에 가려지게, 심지어는 칠판 위 태극기 뒤에.



그 포스트잇을 처음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어.
나는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같은 반 형이 벽면에 붙어 있던 고흐의 해바라기가 들어 있는 액자를 들추는 것을 보게 되었어.

그리 친하지 않던 형이었어. 나는 학원에서 나이가 조금 어리다 보니 같은 반에서는 식사 시간에 운동을 같이 하던 서너 명, 그리고 룸메이트 정도와만 얘기를 했어. 그 형도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반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그룹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어.

사실 기숙학원에서는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간관계에 적절한 선을 그어 두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겠지만서도 학원이 워낙 개판이다 보니. 우리 반에는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표현해야 할(속어로 찐따) 두 명을 빼면 대체로 친하게 모여 다녔거든. 그 형은 배척받는 건 아니지만 거기서 좀 벗어나 있는 두세명 중 하나였어. 나도 그랬고.


그런 사람이다 보니 나도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아마 그 형도 그랬을 거야. 책상 위에 항상 세계 철학사니 자살론이니 하는 책이 몇 권 올려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끔씩 선생님(금수저였음)과 대화할 때에 즐거워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도 없었고. 그런 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특별함이니까.

하지만 액자를 들춘다니, 이상한 일이잖아. 교실에 놓인 액자는 그냥 풍물처럼, 길을 가다 보면 수없이 지나는 가로수처럼 그 자리에 항상 놓여 있는 거 아니야? 길을 가다가 누군가 가로수를 오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 당황스럽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저 사람이 왜 가로수를 오르려고 하나, 하고 궁금하지 않을까? 내가 느낀 감정이 딱 그거야. 나는 그 형에게서 묘한 호기심을 느꼈어.


시간은 열두 시를 막 지나려고 하고, 교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하던 사수생도 방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3층 기숙사에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2층으로 내려와 교실에 불을 켜고 들어갔어. 그리고 액자를 들추어 봤어. 거기에는 파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어.
유명한 '변신' 의 첫 문장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5.



내가 이 포스트잇을 읽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1~4번은 어디에 있을까, 였어. 이 포스트잇이 5번이라면 당연히 1~4번도 존재하겠지. 솔직히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아서 설렜어. 갇혀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다 보면 별 게 다 즐거운 모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꽤 재미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기이한 행동이잖아. 왜 그는 이런 것을 썼는가. 왜 그는 액자 뒤에 이것을 숨겼는가. 왜 하필 변신인가. 등등. 더군다나 평소에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2번은 꽤나 쉬운 위치였어. 노력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라고 쓰여 있던 반대편 벽의 액자 뒤에 숨겨져 있었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

2.



조금 시간을 들여야 했던 3번은 코르크보드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던 급식표 뒤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3.



변신과 이방인, 안나 카레니나. 변신은 읽어 봤지만 정말 '보기' 만 했던 책이었고, 이방인도 그랬어. 책 뒤의 해설을 봐도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책들이었어. 안나 카레니나는 총 세 부라는 두께에 눌려 펴 보지도 않은 책이었어. 그러나 저게 첫 문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 하면 꼭 목록에 있던 문장이었거든. 그러니까 셋 다 첫 문장인 거야. 유명한 첫 문장.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나에게는 왜 하필 변신과 이방인, 안나 카레니나인지 궁금해하기에도, 1번과 4번을 찾아내기에도 시간이 없었어. 그만 ​자러​ 가야 할 시간이었거든. 열두 시 삼십분이 소등 및 취침 시간인데, 찾아내는 사이에 열두 시 이십오분이 된 거야. 남은 포스트잇이 등잔 밑에 놓여 있다고 해도 부족한 시간이었지.

나는 일단 방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연필을 챙겨 와, 5번 포스트잇 뒤쪽에 이렇게 적었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라고. 그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문장이야.

그 날 밤은 괜히 잠이 잘 안 왔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d8efa11d02831ee99512b64ee64d67099c224c4024ea8fba54546f39a73cf9eea26c7f7e84847224342e282170dcf8b7e3c9f803fc83fb6971af4b25939df449c8264

공부하기 싫어서 씀
자동등록방지

추천 비추천

28

고정닉 12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자동등록방지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72 설문 연예인 안됐으면 어쩔 뻔, 누가 봐도 천상 연예인은? 운영자 24/06/17 - -
151704 일반 독붕이들아 e북볼때 뭐 쓰냐? 구글북스? 리디북스? [4] ㅋㅋ(27.35) 20.06.30 254 0
151703 일반 돈키호테 도착 [3] ㅇㅇ(175.223) 20.06.30 293 10
151702 일반 백 년 동안의 고독 그새끼가 너무 허무하게 죽은 것 같음 [6] ㅇㅇ(1.231) 20.06.30 69 2
151701 일반 6월결산 [4] ㅇㅇ(106.102) 20.06.30 102 8
151700 일반 책사러옴 [7] 나보코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02 2
151698 결산/ 6월 결산 [6] 삶은흑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490 11
151697 일반 나쓰메소세키 마음이 슬픈내용임? [5] ㅇㅇ(180.66) 20.06.30 274 0
151696 결산/ 6월 독서 결산 [8] 배고픈독린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147 4
151695 일반 백 년 동안의 고독 읽었는데 ㄹㅇ 인생소설이네 [4] ㅇㅇ(1.231) 20.06.30 256 1
151694 일반 그림 전공/원리 관련 책 없을까 [4] 고스테이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86 0
151693 일반 최고의 삼국지 작가 [6] 어떤작위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33 1
151692 결산/ 6월에 읽은 책들 [2] ㅇㅇ(223.38) 20.06.30 193 3
151690 일반 안녕하세요 한국 1960~90년대 배경 소설 또는 수필 추천부탁드립니다 [11] 입문(121.173) 20.06.30 171 0
151689 일반 알라딘 포장 어떠냐 요새 [6] ㅇㅇ(125.128) 20.06.30 154 0
151688 일반 인생이 존나 드라마틱한 작가 누구 있을까? [8] ㅇㅇ(110.70) 20.06.30 152 1
151687 일반 서점에서 밥 딜런 타란툴라보고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1] 어떤작위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67 1
151686 일반 대학원 때 이 시는 무슨 뜻으로 썼나요라고 묻고 싶었는데 [4] 어떤작위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32 0
151685 일반 독갤인구에 10대가많은가 [3] ㅇㅇ(106.102) 20.06.30 139 0
151682 결산/ 6월 결산 & 상반기 워스트 [23] 구천이&별당아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504 10
151681 일반 여기 철학책 읽는사람있나요?? [4] ㅇㅇ(223.62) 20.06.30 124 0
151680 일반 카를 구스타프 융의 <인간과 상징> 어려운 책이야?? ㅇㅇ(211.36) 20.06.30 78 0
151679 일반 독붕이들아! 셰익스피어 읽을 때 [2] 나보코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86 1
151677 일반 호밀밭의 파수꾼 읽을껀데 재미있음? [4] ㅇㅇ(1.221) 20.06.30 208 2
151676 일반 [레 미제라블(1862)] 2권까지 감상 소감 [1] 橡木盾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56 1
151675 일반 나도 6월 결산 [7] ㅇㅇ(61.253) 20.06.30 335 11
151674 일반 독붕이 삼국지입문하려는데 추천점요 [1] ㅇㅇ(106.249) 20.06.30 75 1
151673 일반 나 책좀 찾아도 ㅇㅇ(61.254) 20.06.30 43 0
151670 일반 왜 비문학은 플로우차트 없음? [3] ㅌㄴㅇㄱ(39.7) 20.06.30 151 1
151664 일반 나도 책장공개해본다 [37] ㅇㅇ(182.228) 20.06.30 1322 31
151663 일반 최진석 책 읽어본사람 있음? [1] ㅇㅇ(218.159) 20.06.30 105 1
151662 일반 난 인간실격이 공감이 안 되네 ㅜ [6] 윤기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28 1
151661 결산/ 6월 결산 [20]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774 16
151660 일반 기복 없이 책 쓰는 작가가 있을까? [8] ㅇㅇ(211.36) 20.06.30 149 0
151659 일반 어그로)책 읽는 여자 망상 [9] 콩쿠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82 4
151658 일반 인칭성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임?? 요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61 0
151656 감상 반쪼가리 자작 짧은 감상 오펜하이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52 3
151654 일반 책이 가장 대중적인 시기가 언제야? ㅇㅇ(220.122) 20.06.30 81 0
151652 일반 내 아는 사람들중에 문창과 페미들 있는데 [6] ㅇㅇ(1.211) 20.06.30 410 0
151650 일반 독붕이들 대체 정체가 뭐냐?ㄷㄷ; [3] 대하소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68 1
151649 일반 위대한 개츠비는 작품은 별로였는데 글은 좋았음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05 0
151648 일반 그래서 독붕이 너네들은 카페에서 책 읽는 여자한테 말 걸어봤어? [10] ㅇㅇㅇㅇ(39.7) 20.06.30 467 0
151647 일반 문학작품들 다 이럼? [1] ㅇㅇ(183.96) 20.06.30 111 0
151646 일반 올해 이상 대상이 장강명이었다는 썰이 있던데 [3] 어떤작위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11 1
151645 일반 보너스 나온 기념 플렉스 목록.jpg [4] 장몸비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00 0
151644 일반 소설 표백은? [4] 고스테이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155 0
151642 일반 yes24 이거 책 교환가능함? [3] 기술기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253 0
151641 일반 카페에 혼자 책 읽는 여자한테 말 거는 거 어때? [17] ㅇㅇㅇㅇ(39.7) 20.06.30 373 0
151640 일반 이상우 신간 존나 재밌음! [7] 어떤작위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377 11
151639 일반 공산당선언 펭귄클래식어때? 홍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87 0
151637 일반 삶의 절반-프리드리히 횔덜린 [6] 책은도끼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30 137 7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