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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마수학과 메일리 교수 - 1

dd(218.146) 2024.05.13 11:36:57
조회 615 추천 10 댓글 9
														

마수학과 메일리 교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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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티는 싫어어.."


가게 뒷문을 조용히 닫자마자 들리기 힘든 그녀의 작은 볼멘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아, 오셨군요.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짧게 하겠습니다."


방금 전 쪽지를 건네 밀었던 여성이 아닌 수상한 남자가 간략한 소개를 펼쳤지만

메일리는 침 삼키는 반응도 없이 빠르게 즉답했다.



"ㅡ그래도 오빠랑 약속은 했으니까, 나는 더 이상 나쁜 짓은 못 해. 용건이 뭐야아?"



메일리와 이미 거리를 두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외관은 검정과 하양이 적절히 섞인 신사복에,

머리에는 어울리는 모자와 함께 깔끔한 매무새를 하고 있을 뿐 이여서 정체를 의심 받기 힘든 평범함 그 자체였다.

그는 인사치레에 이어 소개와 용건을 간단히 건넸다.



"제 이름은 레일rail, 수집가입니다.

용건은 그저 당신의 시간을 저에게 조금 내어 주시는 걸 부탁 드리는 바 입니다."



낮은 목소리와 서두르지 않는 그의 어투가 메일리의 다음 대답을 이끌어낸다.


"ㅡ목적, 장소, 시간, 보수. 이게 내 조건이야.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냥 가겠어"


초면의 대화에는 단계가 있음 직 하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그 차례를 건너뛰고, 서로 본론 만을 곧장 바라고 있다.

한 쪽은 존대, 한 쪽은 신중함으로 짧은 말대답을 섞어가지만, 부자연스러운 흐름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두 사람이 얼굴을 접했을 때부터, 이미 이야기는 결론지어진 따름이다.


"역시.. 그래도, 유감스럽지만 목적을 지금 당장 밝히기는 곤란합니다.

장소는 루그니카 중앙 광장에서 내일 오후 3시 정각에 뵙도록 하죠. 보수는 내일 내어주신 시간만큼 드리겠습니다.

또한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나중에 더 얹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구체적인 금액은 성금화부터 시작하죠."


평범한 소시민이였다면 이야기의 균형조차 성립되질 않아 의심은 커녕 단박에 받아들였을 제안이였다.

메일리가 올려야 할 판 돈은 시간 밖에 없었지만 그가 성금화라는 터무니 없이 높은 가치를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그녀가 과거의 경험에 빗대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금액까지 제시하자 승낙하는 셈 쳤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지금 바로 거절하거나 혹은 보류한다면 뒤바뀔 그의 행동이 궁금해진 탓이다.



"ㅡ그럼 내일 거기서 봐아"



"네, 제안에 바로 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하루 보내시길."


그는 목덜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정중히 숙여 예를 갖춰 그녀에게 인사했지만,

메일리는 간단히 뒤돌아 조용히 웃으며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것은 에밀리아 진영이 왕선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진영에 임시로 속해있던 시점부터 쭉,


메일리 포트루트ㅡ마수 조련사의 존재는 아우그리아 사구에서의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시선들로부터 의아한 눈총을 받아내던 도중이였다.


여러가지 일이 있은 후, 에밀리아 진영의 기사인 나츠키 스바루는 그런 눈총들이 물리적 접촉으로 변해오기전에


나름 세심한 배려가 녹아든 설득을 메일리에게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권유하기에 이른다.



"메일리, 이런 이야기 정말로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이번 만큼은 들어줬으면 해."



"뭔데 오빠? 나 귀찮은 건 질색이라서. 간단하게 해줘어"



"네가 알고 있는 마수에 관련된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능한 널리 퍼뜨려주었으면 해."



스바루의 두 마디가 끝나자마자 메일리는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본다.



"그런거라면...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을텐데에?"



"단언하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너보다 마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확신이 들만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가봤거나, 들었거나, 알고 있던 사람들 중에선 없어.

그 생각이 뒤틀려버린 이상한 마녀들은 빼고 말이야.."



"...그거 꼭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째려보지 마. 나라고 별로 좋아서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라고.

제대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린 결론이야. 메일리 너도 알겠지만 마수는 위험해."



"ㅡ흐응..."


"지금까지 생사를 같이해왔던 나도 지금 몸집 큰 마수랑 당장 일대일을 하라고 하면 분명 도망치기 바쁠거야.

절대로. 아니, 그 전에 그런 일에 끼어들질 않겠지만서도!"




부와 권력을 중시하는 다른 저택들보다는 규모가 왜소했지만,


인적이 활발한 밀로드가의 저택에 작은 방이라면 방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메일리의 취향으로 꾸며진 소박한 1층에서의 공간에 아침부터 스바루의 목소리가 채워졌다.


본래라면 사구에서의 활약상과 관계자들의 합의 도출로 그녀의 신변과 자유는 일찍이 과거로부터 보장된 신세여야 했을 일이지만,


그녀가 가진 능력ㅡ마종의 가호가 평화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구속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는 그녀의 시도를 비교적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계기가 필요해졌다.


에밀리아 진영은 그런 애매한 입장을 가진 메일리를 가만히 방치할 수는 없었고,


진영과 가까운 협력 관계인 안네로제 밀로드와 집사 클린드의 비호 아래


지리적으로 덜 주목받는 밀로드가의 저택에 반 쯤 은거하다시피 오늘에 이르기 까지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저택 주변의 튀어나온 녹음을 손질하거나, 당주의 행동거지를 수발하며 북적이는 하인들,


저택에는 밤낮으로 작은 소리들이 돌아다녔지만 메일리에게는 잘 정돈된 둥지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둥지는 영원하지 못하다. 둥지에는 언젠가 떠날 새만 있을 뿐이고, 이제는 그 새들 중 메일리의 차례가 온 것이다.


엘자와 "어머니"가 메일리를 떠난 이후로, 이렇게 그녀에게 길게 말을 걸어주는 존재는 오로지 나츠키 스바루 뿐이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예전부터 이상한 사람이였다. 과거에는 한낱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현재는 그 대상이 지금 면전에서 진중함과 사랑이 한데 섞인 잔소리와 설교를 줄곧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말들은 전부 약속들이야. 약속을 깨면,

나를 포함해서 모두 진짜로 화 낼 거니까, 덧붙여 패널티까지."



그는 선택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간다.



"에에에에에?? 너무 심하잖아... 오랫만에 놀러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 없다구..

응? 조금은 놀아줘.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지났는데 인형놀이도 이젠 질리고

사람들 말도 별로 안 붙여주고 나랑 놀아주는 사람도 하나도 없단 말이야아"



구속 아닌 구속의 생활에 소녀의 인내심은 바닥나기 쉽다.

당장이라도 울상을 지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스바루에게 매달려본다.



"큭... 정말로 미안. 하지만 나도 메일리,

네가 정말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하는 이야기니까..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 응. 좋아.

ㅡ우선은 첫 번째. 그 어떤 이유든, 뭐 든 간에, 죽이지 말 것."



"잠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나도 이젠 어엿한 숙녀라구. 죽인다니 그런 거 안 한지 오래니까..."



"ㅡ크흠.. 두 번째, 내가 다시 방문할 때 까지는, 혼자서 다니지 말 것....

뭐 이건 잘 지켜왔으니까.. 별로 상관 없으려나.."



"네에~ 두 번째 알겠습니다아~"



"세 번째는...이것도 당연하다 싶겠지만서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앞으로 너에게 수상하다 싶은 사람이 접근해온다면, 누구든 아무에게나 바로 알려줘."



"수상한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거얼?"



"뭣, 벌써? 누구? 혹시 너를 해치려고 한거야?!"



"아니 그건 좀... 아니고 여기 클린드라는 사람이 나를 이상한 표정이랑 말투로 쳐다봐...."



"아...아아..그 녀석..은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아니, 수상하긴 하지만..

하는 짓은 전혀 수상하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줘. 별로 지금은 위험인물은 아니니까. 응!"



"푸후훗... 농담. 너무 재미가 없었으니까."



"너...! 그렇게 오빠를 놀리면 못 쓴다구. 방금 내가 한 이야기들, 다 이해했지?

패널티라는건.. 일종의 제약이야. 만약 메일리 네가 약속을 깨면, 제약을 받아 들여야 해."

그러니 이번의 약속들은 반드시 지켜 줘야 해. 꼭,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니까!"


"네네네~ 이해했으니까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가만히 있을게요~"



"그러니까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휴... 아무튼 이만 가볼게.

신경 못 써줘서 정말 미안해.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안네로제랑 클린드가 다 설명해 줄거야.

다음에는 정말 신경 쓸 테니까."



"흐아... 너무 힘들다.. 왕선만 끝나면 다 끝인 줄 알았더니 신경 쓸 일이 갑자기 쌓여도 너무 쌓이잖아.."



의외로 흔쾌히 승낙해주는 메일리의 저자세에 긴장이 조금 풀린 스바루는 푹 떨군 고개로 한숨을 쉬며 고생을 토로했다.


뾰루퉁한 표정을 지은 메일리를 방에 남겨놓고, 뒷 머리를 긁적이다 조심스레 방문을 닫은 후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 클린드의 마중을 받으며 밖에 있는 파트라슈를 타고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바보 오빠."


작은 창문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일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층 다이닝 룸에서의 간소한 아침식사가 끝난 후 하인들이 준비시켜놓은

애프터 티를 가지며 세 사람은 진지한 이야기를 거듭 이어나갔다.



"ㅡ이러면 계획은 이렇게 만전인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네에"



메일리가 차를 훌쩍이며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낯선 시도에 문제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지식과 경험은 풍부하나 증거와 설득력이 부족. 약소(弱小)"



클린드에게도 이번 문제점을 뚜렷하게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미 글과 그림으로 존재하는 단순한 교재와 말솜씨만으로는 힘들겠죠.

효과적인 학습을 위해선 교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겠군요."



어린 나이임에도 밀로드가 저택의 당주라는 책임을 맡고 있는 그녀는 서로 간의 눈빛을 교환하자마자 말을 붙인다.


"스바루 님께 전해 들은 바로는 메일리 양에겐 특별한 가호가 있으시다고....즉, 마수를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맞아. 거기서 말인데, 내 생각엔 마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게 좋겠어.

나, 마수라면 자신 있으니까아"


마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자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비치기 시작한다.

십대 티가 한창인 소녀의 관심사에 취미가 주제로 다뤄지는 것은 흔한 일 이였지만,

그것이 마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마수를 어디서 확보하냐...겠군요. 클린드?"



"아쉽게도 마수 탐색은 무리입니다. 유감(遺憾)"



"흥, 쓸모없군요. 가만히 있어도 쓸모 없는 건 마찬가지. 하인들을 시켜 최대한 정보를 모아보세요.

메일리 양, 당신도 최대한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에밀리... 크흠.. 에밀리아 님의 진영에 속해있는 이상,

관련된 일을 있는 힘껏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하니까요."



클린드의 시원찮은 답을 듣자마자 실망한 기색이 엿보이더니

에밀리아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어조가 바뀌는 안네로제는 열의로 가득 찬 듯 보였다.


"이행. 존명(尊命)"

클린드는 탁자 위의 빈 찻잔들을 모아 정리한 후 자리를 떠나 1층에 있는 하인들을 움직일 준비를 하러갔다.


"그건 알겠는데, 저기, 별로 우리만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들어보니까, 오빠네들이 왕선인가 뭔가에서 이겼다며? 그러면 도와줄 사람도 많아진 거 아니야?

뭐라도 써 보내면.."



"안되겠군요, 그 방법은. 이미 생각해보았지만, 애초에 이 문제는 당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에밀리 쪽도 지금은 전부 손 내밀어 줄 틈 없이 바쁜 상황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준비된 답안지를 꺼내 든다. 그녀는 재차 흐름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저택 밖에선 메일리 양은 관계자와 항상 동행하셔야 되고,

두 번째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끔 당신의 입장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득 해야 한다는 것이 되겠군요."



"이야기만 들어보면 꽤 쉬울 것 같은 데에"



"이건 난이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대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시간은 충분하겠지만, 실패한다면 당신은 감옥처럼 이곳에 갇혀 평생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르죠."



건성으로 흘리듯 말하는 메일리에게 안네로제가 불쑥 일갈한다.



"엑...! 그건 좀 너무하잖아아.."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당신은 지금보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알았어, 알았다구. 하면 되는 거잖아.."


아우그리아 사구에 다녀온 이후로 분명히 그녀가 무엇인가 잘못한 행동은 없었다.

그저 저택에서 얌전히 착한 아이처럼 숨어 지내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변은 그녀의 자유를 계속해서 죄어왔다.

답답했다. 물론 본인도 가호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잘못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안네로제의 한 마디가 그것을 강하게 상기 시켜주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제자리 걸음이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죄책감을 회피하듯 무심코 가볍게 던진 이제까지의 대답들은 제자리 걸음 밖에 되지 못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까? 결국 그녀의 마음 속으로부터,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갈망의 불씨가 일 순간 트인다.



"좋습니다. 문제를 인지하셨다면, 저도 더 이상은 무리 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제 마수 확보에 앞서 기초적인 준비부터 할 차례군요. 금전적 문제는 알아서 해결할테니,

메일리 양은 가호의 준비와 앞으로의 계획 만을 신경 써 주세요."


책임감과 침착함이 자연스레 섞여 나오는 어린 당주의 언동에

메일리는 질렸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해서라도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때 무일푼의 흑발머리 소년이 처음 이 세계에 발 딛은 이래,

잠시동안 얼떨떨한 표정과 자세로 멋쩍게 서성거렸던 루그니카의 중앙 광장에는

NS라는 글자가 큼지막히 박혀진 져지복을 입은 그의 평소 모습을 본 따

그의 위업을 칭송하는 거대한 황금상들이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대죄주교들과 3대 마수가 모조리 토벌당한 평화의 시대를 뽐내듯이 흰 색 비둘기가 하늘에 걸린 빨랫줄처럼 위아래로 거닐고,

오전 정각을 가리키는 시계탑의 철소리와 종소리가 웅장하게 울리며

중세시대의 그것을 표방하듯 루그니카의 소음을 찰나의 순간이지만 일거에 정리한다.

용차와 다양한 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뒤섞인 느릿느릿한 행렬은 질서를 그리며 흰 줄무늬가 이따금 섞인 바닷색 하늘 아래

높이가 저마다 다른 석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풍경을 햇빛 줄기들이 감싸는 것으로 덧대어 꾸며졌다.

도시의 근위병들은 외진 골목길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다툼소리만 아니라면 공간만 차지할 뿐이다.

그 도시의 잔잔한 풍경에, 집사복 차림의 클린드와 푸른색 소녀복 차림의 메일리가 비집고 들어와,

한 옷가게 앞에 멈춰서기 전 까지 인파의 그림폭에 가세한다.


"정각의 종소리, 볼일을 서둘러야겠군요. 속행(速行)"


클린드는 소규모의 용차와 하인 무리들을 동행하며 밀로드가에서 일찍 루그니카 곳곳을 돌아다니며

계획에 필요한 물자들을 부지런히 사들였지만 시간은 넉넉하게 기다려 주지 않았고,

메일리는 반대로 시간이 늘어질수록 눈에 담아둘 볼거리가 늘어나 기분이 느긋해졌다.

저택에서의 기나긴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형벌과도 같았다. 같은 시간이라도 장소가 다르면, 의미가 달라진다.

"여긴 언제나 활기차서 좋다니깐, 저기, 클린드, 나 저기서 내 옷 좀 사면 안될까?"


"ㅡ저택 내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텐데요? 시간 끌기는 안됩니다. 부정(否定)"


단호한 태도에 살짝 기가 꺾이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이대로 포기해서는 아깝다. 좀 더 파고들어 기회를 엿본다.

천천히 걷는 클린드의 앞을 불쑥 가로막으며 메일리는 간절하게 부탁해본다.


"딱 한 번만이야. 제에에에에에발, 응? 약속할게. 안 들어주면, 평생 미워할거니까아"


그는 메일리의 말은 들은 체 만 체인지,

대답을 잠시 보류하고 고개를 돌려 시계탑의 두 초침과 용차에 담겨진 짐들, 그리고 인파를 둘러보다 결국 입을 열었다.


"ㅡㅡㅡ좋습니다.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빠르게 결정하시길. 속결(速決)"


"해냈다!! 그럼 혼자서 금방 갔다 올테니까, 응? 진짜 잠깐만 기다려줘어"


클린드의 고개가 마침내 끄덕여지고 동의를 받아낸 메일리는

그제야 힘이 들어간 발걸음으로 옷 가게의 문 자락에 손을 댄다.



"어서오세요, 손님. 이 가게는 처음이신 것 같은데 편하게 골라보세요."


"응응~ 다 고르면 말해줄게~ 흥~ 흥흥~"


햇빛을 뒤로 하고 가게에 삼켜진 메일리는 말 그대로 소비의 행복을 누리기 시작한다.

비록 안네로제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는 느낌이였지만,

그녀가 지원해준 금전 만은 엘자와 동행하며 떠돌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주머니를 풍족하게 채우고 있었다.

대문의 장식마저 형형색색의 리본으로 꾸며진 가게에 들어서자, 잘 정돈된 옷과 옷감들,

가게의 향수와 천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냄새가 도시의 먼지에 찌든 후각을 어루만져 유혹하고 손짓한다.

루그니카 광장 한복판이라는 입지 좋은 장삿 목에 일찍이 자리 잡아

상품의 매입과 출하가 안정되어진 탓에 주인의 친절과 여유로운 말투까지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 메일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이미 가게에 들어와 있는 다른 손님들처럼 잠깐의 시간을 즐기는 동안,

또 다른 한 여성이 행렬에 가득 찬 대로를 빠르게 휙휙 통과하며 주변의 주의를 의식하다 그 옷 가게로 들어간다.

클린드는 분명히 그 여성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지만, 제지하지 않고 다시 할 일에 집중한다.


"어머, 어서오세요 손님. 오늘은 가게가 붐비네요~ 편하게 고르세요~"


그 손님의 동작은 의아함이 느껴질 정도로 분명히 빨랐었다.

다만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일정한 보폭, 그러나 메일리의 뒤를 착실히 향해있었다.

낯선 걸음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향해있다는 사실을 메일리 또한 과거의 경험으로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미 경비병이 사방에 널려있음에도, 대낮의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손님들로 번잡한 가게에서

당당하게 말 없이 상대의 뒤를 올곧게 노려오는 사람의 목적을 단시간에 생각해내기는 힘들다.

목적이 소매치기라면 인적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곳이 절대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고,

암살이라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조건이다.

마수들과 함께였다면 선택지는 간단했지만 무방비여서는 아쉬울 뿐이다.

이성적 추론이 빚어내는 결론에 걸리는 시간을 메일리의 과거의 경험이 단축 시키고 있었지만,

해답이 나오기 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더욱 빨라졌다.

도망쳐야할까? 뒤 돌아서 맞서야 할까? 당장 멈추라고 말할까?

답을 내지 못한 채, 옷을 고르는 척을 하고 있었던 메일리의 행동을 멈추게 만든 것은

어느샌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 수상한 손님이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여지는 여성의 한 마디 였다.


"메일리 님, 당신에게 보내진 쪽지입니다."


"에...잠깐...?"


"방문 감사합니다. 또 들러주세요~"


상품을 잡고 있는 메일리의 오른손 대신, 왼손에 작은 쪽지를 쥐어주며 한마디를 건넨 후

긴 머리의 뒷모습을 보이며 그녀는 조용히 왔던 길을 돌아가 가게 주인의 인사와 함께 정문으로 가게를 재빨리 빠져나갔다.

메일리는 그녀를 불러 세우길 포기하고 왼손의 쪽지를 펼쳐보았다.

편지의 내용 또한 방금 그녀의 한 마디처럼 간소했다.

'가게 뒷문으로'

낯선 이가 보내는 유혹. 처음은 절대로 아니였다.

실전 경험은 질리도록 했었지만, 이번 만큼은 예외였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쪽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그것으로 끝나 다시금 평온하지만 저택에서 지루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드물게 찾아온 일탈의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혼자서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메일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좋아!"


결정을 굳힌 메일리는 상품을 고르는 척 하다

가게 주인의 시선이 다른 손님의 부름에 쏠리는 찰나의 틈을 타서 가게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북적대는 루그니카에서의 볼일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클린드의 눈치를 들키지 않으면서도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가 아마도 눈치채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인들도 물자들을 정돈하고 당주와 집사에게 확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흥밋 거리와 늘어난 옷들 덕분에

계획이 성공할 때 까지는 지루함이 다소 없어지겠다는 기대가 메일리에게 생겼다.

다만 금전 감각을 잊은 채 무자비하게 사용된 메일리의 씀씀이에 희생되어,

그녀의 두 손에 남겨진 거스름돈의 반짝임이 급격히 줄어든 모습을 목격한 안네로제는

지금 막 사치를 끝내고 저택 1층에 도착한 메일리와 정반대의 온도였다.

사람들이 다시 채워진 저택의 분위기는 되려 급격히 무거워진다.


"아...하하.... 저기.. 그.. 오랫만에 밖에 나가니 갖고 싶은 게 많아져서 싶어서 그만.... 그러니까아"


저택의 응접실에서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메일리는 금액 정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안네로제에게 두 손을 벌리고

차가운 시선을 열심히 외면하며 봐달라는 표정으로 멍청히 서있었다.

그 메일리의 옆에서 클린드는 눈을 감으며 한 쪽 다리를 꿇고 잠시 자리를 지킨다.

"ㅡ메일리 양, 이제 보니 당신은 개인적인 문제 뿐 아니라 금전에도 책임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저는.."

귀 티가 흐르며 각 잡힌 푸른색 코트 드레스 차림을 입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교조적인 단어들이 조합되기 시작한다.

메일리의 입장은 숨 막힐 지경으로 다다르며ㅡ


"기다려 주시길. 모든 잘못은 저에게. 책임(責任)"


안네로제의 어조가 칼날처럼 변하기 전에 클린드는 한 손으로 왼쪽 눈의 모노클을 만지며 대화의 선제를 가져오려 시도한다.


"제가 예전부터 줄곧 말씀드렸지만, 클린드,

당신은 오로지 소녀들이 곤란해질 때만 매번 빠짐 없이 감싸려하시는군요.

그 자세 만은 칭찬해드리겠습니다만.. 제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오늘 일어난 메일리 양의 잘못은 제가 일부러 용인했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잘못. 사죄(責任)"


잠시 후 남녀의 말소리가 몇 번인가 이리저리 오고 가다 그치고,

클린드와 메일리, 두 사람에게 각자 책임을 분담하여 지워지는 쪽으로 끝이 나버린다.

마수 조련사가 앞으로의 저택 일과 시간 중 금전 교육을 매일 아침 짧은 시간 동안 집사에게 강제로 받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저택 전체가 어둠에 감싸여 침묵으로 빠지며 하루가 끝나기 직전,

2층에 있는 당주의 방에서는 클린드가 어느새 보내놓은 작은 종잇 쪽지가 안네로제의 눈에 읽혀지고 있었다.

'예상대로 덫에 걸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분부 하신대로 앞으로도 살펴보겠습니다.'

옅은 미소, 희미한 희열이 깃든 작은 눈동자의 초점이 쪽지의 마지막 글자까지 다다른 후,

방 안의 촛불이 타는 소리를 내며 쪽지를 삼키고 같이 사라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녀에게 있어서 살인은 엘자와는 취급이 달랐다. "어머니"에게 지령을 받은 금일 밤부터,

엘자와 함께 비교적 활동하기 편했던 야음을 이용해 다양한 표적들을 일처럼 살해해왔을 뿐이다.

언제나 배후에서만 철저히 행동했던 메일리의 손은 그 만큼 깨끗했다.

그녀들이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꾸며졌을지 모르는 인생을 살았던 피해자들의 흔적들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현장에서 활동했던 엘자와 마수들의 몸 만을 혈흔으로 더럽히는 것을 끝으로

조용하게 생의 마침표가 찍혀버렸던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면 휴식을 취한다. 메일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부터, 잠 들기 전에 잠자리에 환하게 비치는 한 줄기 달빛은 어딘가 싫었다.

달빛은 이제 메일리에게 있어 단 잠을 방해하는 성가신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 첫 날에는 달빛이 방해물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살인청부업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과거와,

사구에서 스바루들과 생사를 같이하며 목숨을 소중히 했던 당시가 서로 비교되며

어느샌가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라났던 죄책감이였다.

안전하게만 느껴졌을 어둠을 기어코 뚫고 들어와 서늘하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달빛이 그렇게나 싫었던 것이다.

창문을 닫고 이불을 힘껏 둘러 얼굴을 숨겨도 달빛에게서 숨을 수 없었다.

언짢음을 숨기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댄다. 몸에 감싸고 있는 이부자리의 촉감이 이상하다.

마치 예전에 자주 만져 댔었던, 이미 죽은 마수들의 촉감이였다.

굳어버린 사람의 시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밖에서 들려오는 밤곤충들의 조용한 잡음이 이제는 사람소리처럼 들린다.

환청이다.

"으흐..." "흐어...." "...아..."

듣기 싫은 소리. 천을 더욱 손으로 끌어모아 귀를 막는다. 쿵쿵. 이번엔 나무를 두들기는 소리. 문소리다.


".....메일리..."


쿵쿵. 쿵쿵. 쿵쿵. 쿵쿵쿵. ...그만,

쿵쿵쿵쿵쿵. 멈춰. 듣기 싫단 말이야.


"......메일리 님..."


쿵쿵.

"메일리 포트루트 님, 아침입니다.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으으응...."


그녀의 몸을 밤새 감싼 잠자리의 천 들은 땀으로 조금 젖어있었다.

그녀는 방금까지 느낀 것이 악몽이란걸 인지했지만, 이렇게 생생한 경험은 처음이였다.

그와 별개로, 몸은 움직이기 버거운 모양이였다. 밤잠을 망친 소녀의 작은 몸은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니라며 눈꺼풀조차 각성을 거부한다.

방문을 두드리는 하인에게 명령할 입장조차 못 되었지만,

지금 무시한다 해도 곧 얼마 안 가 근엄한 표정과 말투로 그녀를 훈계하러 올 클린드의 성실함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집사님께서 일찍이 2층의 서재에서 아침 교육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만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알았어어.. 준비할게... 흐아암."


어느샌가 달빛은 흔적도 없고,

창문 틈새로 은은하게 방을 비추는 아침 햇살과 함께 들려오는 아침새들의 평온한 목청 소리,

방문 너머 희미하게 들려오는 하인들의 부지런한 소리들이

수면의 유혹을 가까스로 떨쳐내며 가볍게 기지개를 켜내는 메일리의 움직임을 돕는다.

몸에 걸친 잠옷 차림을 벗어나 방의 거울을 보며 일상복으로 새로 단장하고,

방에서 나가 간단히 몸을 세척한 후 마지막으로 머리에 항상 하던 보라색 마름모 모양의 머리핀을 꽂는 것으로

몸 단장을 재차 일단락하며 서재로 올라갈 준비를 끝낸다.

그녀의 표정은 계단을 한번 씩 오를 때마다 나빠졌다.


"지루한 건 정말 싫단 말야아....."


아직은 잠 기운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의 어눌한 말투와 몸의 움직임을 질질 끌며,

어째서 인지 보기 싫은 얼굴, 있고 싶지 않은 장소, 하기 싫은 일에 시간을 쓰기 위해 별 수 없이 서재 입구의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시길, 입장(入場)" 도망칠 수 없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 신세처럼 그녀는 풀이 죽어 처량한 태도로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혼자 서재 정가운데서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닫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침묵의 의사 표현을 보내는 그의 얼굴이였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에게 더 가까이 오라며 조용히 손짓한다.

메일리는 의아한 표정을 짓지만 곧장 다가간다.

몇 걸음 밖에 되지 않는 거리까지 좁혀지자 그는 비로소 입을 떼고 소리를 힘껏 낮추며 말한다.

"지금 부터의 이야기는 현재 계획과는 별개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부디 곧들어주시길. 경청(傾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점심이 지나 다이닝 룸에서 또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하인들이 듣는 가운데, 세 명은 본격적으로 계획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준비해 놓았던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치며 장소에 손가락을 짚고 안네로제 쪽에서 먼저 주제를 꺼내 들었다.


"계획을 시작할 장소를 미리 정해두자면.. 후보지로써, 수문도시 프리스텔라도 좋을 것 같군요.

지금 저희도 그 곳의 사람들이 보내온 물자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

예전에 일어났던 참사를 경험한 사람들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계획을 시작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로 여겨지는군요."


본래 프리스텔라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밀로드가의 관계자들이였지만,

그 곳을 구원해준 에밀리아 진영의 행동 덕택에 어느샌가 물자까지 지원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셈이다.

수문도시의 광장에도 물론 에밀리아의 기사, 나츠키 스바루의 위업을 기리는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대참사의 여파까지 정리되어 도시의 원 경관과 본래의 생활을 되찾은 주민들이 너도나도 자진하여 보은을 하겠다며

예전부터 물자 지원으로 진영 자체는 물론 가까운 관계자들에 이르기에 까지 그 마음을 기쁘게 대납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여 루그니카 근처로 향한다.


"ㅡ리파우스 가도의 길목은 지금도 용차를 타고 수 많은 상인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상인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한다면, 우리가 발품을 파는 대신 상인들의 입 소문으로 빠르게 이야기가 퍼질 여지는 충분합니다."

상인들에게도 결코 나쁜 이야기가 아닐테죠. 그들의 생활은 일 특성 상 마수의 위협에 항상 노출 되어있는 셈이니까요."


백경 토벌 이후 거구의 시체와 함께 가도에 쓰러져 있던 플뤼겔의 거목은 사라진 지 오래다.

벌써 수 많은 사람들의 땔감, 자재, 혹은 종이로 각종 쓰임새를 다하고 해체되어 길의 시야를 더는 가리지 않는다.

깊게 패여진 땅 자국 만이 그 날의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두 가지 장소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는 와중 클린드와 메일리는 침묵을 줄곧 지킨다.

"음..."

의미 모를 한숨을 쉰 다음 안네로제는 다음으로 본론을 꺼내든다.


"장소 논의는 여기까지. 메일리 양, 당신은 계획해 둔 무언가가 있나요? 의견을 첨언해주시면 좋겠군요."


"...마수가 없다면 나는 귀여운 숙녀에 불과하다구. 나한테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마수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하인들이 성과를 보일 때 까지 지금도 성심껏 수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기다림, 고작 그 뿐이로군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채로 말이죠."


"......"


메일리는 대꾸하지 못한다. 클린드는 이번엔 나서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의자에서 자리를 지킨다.


"이런 상황이지만 제가 지켜본 결과 지금까지 당신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도 않더군요."


"아니야, 나는 가호 때문에.."


"그 가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아니였나요? 그것은 핑계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쉬운 길을 선택해왔을 뿐입니다.

그저 남이 시키는 것만 따르며 수동적으로 살아 온 거죠. 안 그런가요?"


"......"


육체적 통증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칼이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이다.


"저는 그렇게 인생을 사는 부류들은 노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만해. 그 이상 하면 진짜 화 낼 거니까."


"저희는 스바루 님의 부탁을 받은 것 일 뿐,

저희가 당신을 계속 보살펴 줄 의무는 없습니다. 당신도 아실텐...?"


"이제 됐어."


대화가 끊어진다. 메일리의 감정, 시선, 동작은 전부 바깥을 향한다.

자리를 박차며 뒤돌아 보지도 않고 화난 표정으로 한 마디를 집어 던진다. 저택을 나갈 셈이다.

메일리를 제외한 두 사람의 표정은 일체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난 알아서 할거니까, 말리지 마."

그녀는 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 또 다음 문, 1층의 정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도달한다.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인들은 그녀를 붙잡아 두지 못한다. 드디어 둥지의 새가 둥지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다.

창문으로 메일리가 저택을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조금 지나쳤을지도, 선택은 옳았습니다. 同意(동의)"


"하아... 당신은 소녀에게만 유독 마음이 약해지니 결국 제가 나섰잖습니까..

하지만 이걸로 어떻게든 됐습니다. 준비하시길."


"네"


이제 메일리에게 있어 저택은 완전히 뒷전이다. 오로지 신경 쓰이는 건 오후의 일이다.

수중에 돈도 없고 몸 뿐이다. 마수도 없이 갑자기 급작스런 상황에 던져진 마수 조련사는 애써 초조함을 숨기며

어디로 가야할지 조차 모르는 채 일단 걸음을 계속한다. 우선은 오늘 오후 3시까지 있을 곳이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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