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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로아의 새들(59.151) 2022.05.22 12: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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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어냐?"

채근하는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물음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음에도 나는 짧은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웅얼댈 정도의 기력조차 안 남은 모양이군. 그래도 문제될 건 없지. 시간이 부족한 것보다야 훨씬 나아."

낡은 창고 지붕을 따라 난 톱니 모양의 가로대가 수의 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바짝 마른 혀 아래 가득 찬 음습한 핏기를 느끼면서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잘 들어라. 이 땅의 그 누구도 이 같은 몰락이나 멸망을 바라거나 예상하지 않았다. 너는 물론이요 네 주위의 그 누구도 그러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열꽃을 피우는 달이 예순 번째로 떠올랐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일이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지. 그리고 달궈진 흙 위로 기어다니던 조그맣고 새까만 것들이... 부정한 맥서의 흐름들이 이윽고 들풀과 잉걸불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먼 북쪽 군도에서 일어난 그것들은 역병처럼 빠르게 움직였으며 가차없이 불어났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불가해한 섭리에 따르면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별안간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이밀고 혼란스럽기만 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망각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이려는 마지막 순간에 옷깃을 잡아채 나를 건져낸 것이다.

"바랑에 감싸인 저주가 주인을 바꿔치듯, 블리커들은 물길을 타고 칼브레도나이에서 가장 거대한 대륙의 변방 도시로 떠내려오기에 이르렀다. 부정한 맥서는 포말을 타고 떠내려온 물풀과 바닷말에서 갈로아 도살장의 기름 보관 창고로, 그리고 선창의 시궁쥐와 들개들의 발톱과 이빨에 달라붙기 시작했지."

그림자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내게는 어차피 무어라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기력도 없었다. 몇 군데 살갗이 벌어져 피가 흐르다 말라붙거나 여기저기 검푸른 멍이 피어올랐다고 해서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그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뤄낸 것이라고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전부인 변변찮은 인간이, 분별을 가지고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찌는 여름 저녁 배수로의 물곰팡이처럼 불현듯 생겨난 골치아픈 의문이 이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온몸을 휘감았다. 두려웠다. 상반신을 힘겹게 기대어 둔 석벽이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무너져내려 나를 뭉개버릴 것 같았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것 같나? 물질폭풍이 일어난 때로부터 고작 한나절이다. 앞으로 이 항구 도시 전체가 휩쓸릴 때까지 단 이틀도 걸리지 않을 거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선창가 저지대에 위치한 술집 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러거 출신 파교도들 무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갈로아에서 외경해 마땅한 존재란 오직 바다뿐이었으나, 그자들은 공공연히 낯선 신의 이름을 주워섬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삼는 이는 없었다. 번팅 북부 변두리의 작은 항구 도시에서 아발드라닉이라는 이름은 구전 설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미신의 한 조각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번팅은 무너지고 있었다.

"파멸이란 본디 이리 찾아오는 것이다. 징조나 포고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야. 한때는 나도 어리숙한 희망을 품곤 했지만..."

나는 언제든지 정신을 잃고 차디찬 고깃덩어리 신세로 전락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친 상태였다. 거칠게 불어터진 팔다리 거죽 위로 더럽게 엉겨붙은 먼지와 재 아래에서 부풀어 올라 아우성치는 사혈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깨는 녹이 슨 것처럼 한 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뭉칠 대로 뭉친 근육들이 핏줄을 짓눌러 손발이 저려왔다. 나는 정말로 죽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갈로아 부두의 부랑아들, 아비와 어미가 없는 놈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찌감치 그래왔을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이내 품속에서 거대 원시 생물이 휘두르는 부속지처럼 낯설고 흉하게만 느껴지는 길다란 막대를 내밀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이름이 뭔가?"

잉걸 속에 파묻어 달궈놓은 꼬챙이 끄트머리처럼 새빨간 광채가 막대 끝에서 피어올랐다. 곰팡이 핀 밀기울이나 성가신 날벌레처럼 보이는 빛가루가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가 폭발하듯 흩어져갔다.

그림자는 허리를 굽히고 내 흐리멍덩하게 뜨인 눈을 응시했다. 그 윤곽이 점차 선명해지면서 어둠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나는 그가 바싹 마른 잎가지 같은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알레타 폰조. 내가 물려받은 이름입니다."

눈이 시린 그 기묘한 현상에 정신을 뺏겨서였는지, 호흡이 한결 가벼워지고 손발을 옥죄던 날카로운 통각이 무디어졌다. 

"알 게 뭡니까? 부두쥐나 반시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갈로아가 괜히 사생아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요."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소연이라도 하듯 뇌까렸다. 고개를 들어 그의 그늘진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려 했지만 불가독의 암호문처럼 막연하고 답답한 감정만이 느껴졌다. 고템 신전 입구의 흑단 조각상처럼 색조가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어둠이 그의 얼굴에도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 기묘한 시선은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나를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래, 아무래도 상관없다. 수도 전승원 시험에서처럼 출신을 따지자는 건 아니니까. 어쨌거나, 갈로아에서 나고 자랐다면 아마 일평생 맥서를 다뤄본 적도 없을 테지... 내 말이 맞나?"

갈로아에서 평생을 보낸 노인들은 구사자들이 재앙을 몰고 온다는 옛날 얘기를 떠들곤 했지만, 나는 그런 미신에 흔들릴 정도로 둔한 적이라곤 없었다. 다만 다른 도시들에 사는 인간들이 맥서를 다룰 능력이 없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에 관한 얘기는 항구를 오가는 떠돌이들에게 숱하게 들어왔다.

"아, 말로만 듣던 구사자신가 봅니다? 운도 좋으시네요. 평소 같았으면 팰롱티 거리에서 구걸하던 거렁뱅이들한테 둘러싸인 채 뼈도 못 추리고 몰매나 맞았을 텐데, 죄다 핏물 흐르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으니 적어도 그런 쓰레기들 걱정할 필요는 없으시겠어요."

"눈먼 증오는 갈로아만의 특산품이 아니지. 나처럼 번팅 곳곳을 빌어먹으며 떠돌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단 말이야. 인간이란 얼마나..."

그는 내 대거리질이 못마땅했는지 푹 내리깐 목소리로 꾸짖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날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쯤 해 두지, 폰조. 그것들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실제로 목격했으니, 이젠 살고 싶은 마음이 좀 동하나? 나라고 이 말도 안 되는 역할을 떠맡고 싶었을 것 같아? 높은 성의 아씨들 말마따나, 미쳤다고 이런 구역질 나는 추락한 궁창으로 스스로 발을 들였을 것 같냐 이 말이야?"

화가 났다. 피양동이, 주술사, 파교자...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구사자들은 나나 이곳 사람들 같은 평범한 이들과는 달랐다. 물론, 다를 수야 있다. 그건 잘못된 게 아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달갑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들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나야 그네들 입장에 서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맥서가 어쩌니 달이 저쩌니... 어쨌든 그 구역질나는 괴물들이 결국은 구사자들 때문에 생겨난 거라는 거 아닙니까? 영감님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최후의 순간이 찾아오고 나서야 속죄하려 무릎을 꿇은 얼치기 같습니다. 마지막 구제업자가 된 기분이 어때요? 대체 나같은 일개 짐꾼한테 뭘 기대하길래 이러는 건데요?"

악다구니를 썼다.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온몸에 난 상처들 틈바구니로 고통과 붉은 피를 흘려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초연한 듯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가 번팅을 건져낼 거라는 희망에 기대는 거지."

스토마툴을 오가는 대형 정기선들의 정박일 또는 작은 사냥선들이 떼를 지어 출항했다가 돌아오는 날 같은 때엔, 언제나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 선주들이 찌푸린 표정으로 하역장 근처를 배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갈로아를 떠도는 부랑아나 다름없던 나 같은 놈들에게 그런 돈벌이를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엔 공급과 수요는 언제나 엎치락뒤치락하며 선창가의 도살장들을 메우곤 했다. 나보다 어깨는 훨씬 좁은 주제에 머리통 하나는 더 컸던 팸시를 따라 종종 들르곤 했던 술집에서 발림주 따위를 밤새 들이키고 겨우 허름한 저지대의 임시 가옥으로 돌아와 뻗는 날이면, 나는 캐피탈 번화가에 사는 어느 부유한 감적술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는 삶을 상상하며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갈로아 변두리의 축축한 선창가에서 견뎌내야 하는 삶은 뱃마루가 풍랑과 축축한 부츠 바닥에 무뎌지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서슬이 시퍼런 토박이들의 욕지거리와 머나먼 도살장에서 울려퍼지는 먹먹한 마찰음이 하루 종일 귓속으로 파고드는 걸 내버려두다 보면 자연스레 자극과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둔감함은 곧 새로운 감각이 되고 모두가 그것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도적인 불통이야말로 갈로아 특유의 소통이자 공생인 것이다.

"내가 자네를 건져낸 것처럼 말이야."

"구사자들은 전부 영감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나 보죠?"

"기적이라면 기적이지, 더러운 맥서에 삼켜지지 않고 완벽하게 혈류를 되돌려놨으니까. 하기야 자네 같은 외면자들이 다루는 복원술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벌어진 살가죽에다 벌겋게 달군 쇠붙이를 문지르거나 대놓고 꿰매는 정도 아닌가?"

"그치들은 우릴 그렇게 부르나 보죠? 이것 보세요, 제가 뭘 어쩌길 바라시는데요?"

"구제해야지. 지치고 부서진 구사자의 소망이나 원대한 신념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죽지 않고 계속해 살아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무얼요? 누구를 구한다는 말입니까?"

"구해? 아무리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 쓰러져있기로서니 어떻게 그리 한결같이 얼빠진 소리만 할 수가 있나?"

"하지만 방금..."

비명이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주(主)등대의 너불거리는 빛이 가까워질 때쯤이면 간이 선착장과 나무 적재함이 쌓여 있는 창고 터에서 들려오는, 악의에 가득차 울려퍼지는 고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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