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가져온 짐은 딱히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어제는 2번, 오늘은 3번 캐비넷으로 짐을 옮겼다. 왜 그랬을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핵폭탄이 터져, 낙진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하 대피소로 피신해 구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몸은 이미 피폭이 진행 중이었고, 사실상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사람들은 대피소에 사람 키만한 캐비넷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개인 짐을 보관하는 데 사용은 하되, 사람이 죽을 때마다 번호 순대로 캐비넷에 시신을 보관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본래 아무 의미가 없었던 캐비넷 번호는 이로 인해 “죽는 순서”라는 미신이 생겨버렸고, 먼저 죽기 싫었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숫자가 낮은 쪽의 캐비넷을 사용하기 꺼려했다.

캐비넷의 수는 인원에 비해 꽤나 여유로웠지만, 끝번호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가장 나이가 많은 한 노인을 지목하여 1번 캐비넷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노인은 순순히 1번 캐비넷에 자신의 짐을 넣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죽은 것은 노인이 아닌 끝번호를 욕심내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노인이 2번, 3번... 계속해서 그 다음으로 낮은 번호의 캐비넷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노인은 그럼에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을 참으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묵묵히 자신의 짐을 다음 칸으로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