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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둔 글을 재탕할거 ㅇㅇ
임진왜란 전후에서 조선과 스페인의 일전을 가정했는데,
사실 스페인 인들이 그 비슷한 것을 기획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를 무려 명나라로 잡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스페인 제국 전체가 나선 것은 아니고, 일제의 관동군마냥, 혹은 영국 동인도 회사마냥 일부에서 독단적으로 밀고 나선 계획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임진전쟁(The Imgin war)"의 저자 사무엘 하레이(Samuel Hawley)씨의 기고문 "The Spanish plan to conquer China"을 보기로 하자고....
"...1586년 4월 20일, 필리핀 마닐라에 최근 설립된 스페인 식민지에서, 교회, 군부, 국왕, 일반 시민 등의 대표들이 모여 중국의 정복을 논의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반대가 없었다. 모든 이들이, 이것이 꼭 이루어져야 하는 점에 대해서 동의했던 것이다. 그 대신에, "어떻게" 그것을 이룰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고, 그 계획은 꽤 상세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과 선박과 머스킷과 대포가 필요할지 자료가 모아졌으며, 어디에서 대포 포환과 총탄을 가장 싸게 구매할 수 있는지, 얼마나 돈이 많이 들지, 무슨 전리품을 취해 와야 하는지, 계획의 궁극적인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등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본국 마드리드의 펠리페 2세에게 보내진 비망록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와 불후의 명성을 바라고, 마음에 두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
“Memorandum of the Various Points Presented by the General Junta of <?XML:NAMESPACE PREFIX = "ST1" />Manila,” signed by Governor Santiago de Vera, Bishop Domingo de Salazar, and 48 others, in Emma Blair and James Robertson, trans. and eds., The Philippine Islands, 1493-1898 (Cleveland: A. H. Clark, 1903), vol. 6, 197-198.
이 책에 따르자면, 중국 정복 계획 자체는 사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 스페인이 정복했던 멕시코 - 당시에 누에바 에스파냐라고 불렸던 - 곳에서는 거의 60년도 전에, 그러니까 아시아는 발보아가 최근 발견한 "남해" 저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만 알려져 있던 그 때에 이미 나왔던 문제였습니다. 1526년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복자였던 에르난 코르테즈(Hernan Cortes)는 카를로스 5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향료 제도 및, 몰루카, 말라카, 중국 사이에 있을 다른 지역들로 가는 경로를 탐사하고, 현재 포르투갈이 하는 것처럼 향신료를 더 이상 무역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국왕 폐하의 정당한 재산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들 섬의 원주민들이 국왕 폐하를 적법한 군주로 섬기도록 만들기 위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가는 원정대의 승인을 요청한 바 있었습니다.
코르테즈는 중국의 정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의 심중에는 최종적으로 아시아에 스페인 제국의 확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쿠바 및 히스파니올라 제도의 정복 이후에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이 뒤따랐던 점을 생각해보면, 아시아의 각 제도에 대한 정복을 하고 나면 조만간 아시아 대륙 그 자체를 정복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알다시피 누에바 에스파냐 - 즉 스페인 - 에서 아시아까지는 무려 9,000 마일이나 되는 바닷길이 놓여져 있고, 아시아에 전진기지를 세우는 데는 30년이 더 걸렸습니다. 미구엘 로페즈 데 레가스피(Miguel Lopes de Legazpi)가 이끄는 5척의 선박과 500명의 대원들이 1564년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갈망하고 있었던 향료 제도들은 포르투갈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레가스피는 필리핀 제도로 향했는데, 이곳에는 경쟁자인 포르투갈 왕국이 진출해있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세부 섬에 최초의 거류지가 건설되고, 1570년에는 마닐라에 거점이 마련됩니다마는...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을 근근히 할 정도였고, 경쟁자인 포르투갈 인들이 1568년, 1570년에 각각 침공을 해 오는데다 1574년에는 중국 해적들이 마닐라를 싹 쓸어 버리고 맙니다 orz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스페인 사람들이 중국으로의 진출을 촉구하는 데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사 마르틴 데 라다(Martin de Rada)였는데, 그는 1569년 누에바 스페인의 총독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필리핀 거류지는 매우 가난하고, 사람들은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국왕 폐하께서, 우리가 알기로 매우 거대하고 부유하고, 고도로 문명화되어 있고, 그 도시나 요새나 성벽이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큰 중국을 정복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우선 이 섬들에 거류지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거류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겉보기로는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데 라다의 의견대로라면, "중국인들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고, 그들의 수와 요새화된 성벽에 의지할 따름이며 성벽이 무너지면 얼마든지 죽여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소수의 병력으로도 정복할 수 있으리라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4년 후, 선장 디에고 데 아르티에다(Diego de Artieda)는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게로 직접 보고서를 올려 이 같은 근거를 상주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은 정복하기 쉬운 인종이라는 데 라다의 주장을 반복하고는, 해안 지대에 사전 원정대를 보내고, "교역과 정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아볼 것을 주청했습니다. 이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250톤급 선박 2척에 잘 무장된 병력 80명이라고 언급되었습니다. 필리핀은 별로 부유하지 않았으므로, 데 아르티에다 선장은 "아무것도 얻을 만한 게 나오지 않는 땅에 돈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필리핀은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데 라다와 데 아르티에다에서 볼 수 있듯, 중국 정복의 동기는 종교적 이유와 부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 라다와 다른 성직자들은 중국 관헌이 포교를 막고 있는 이상, 정복만이 중국인들을 개종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이 당시 중국에서 공인된 크리스트 교 세력은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예수회뿐이었는데, 이들은 중국 관헌을 자극하는 것을 꺼려 마카오 항구에서만 포교를 하였고, 극히 점진적인 포교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 라다와 같은 아우구스티노 회 사제들은 이러한 느려빠진 접근방식에 반대했던 모양입니다. 도미니코 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이교도들이 지배하는 중국으로 가능한 빨리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관헌들이 이것을 막는다면 교회 사상 가장 엄청난 규모의 개종을 막는 세력들은 무력으로라도 무너뜨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중국 정벌론이 확산되면서, 마카오의 예수회 세력들도 스페인이 중국을 정복하고 포교 사업을 주도하게 된면 자칫 그들의 쏟아 왔던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 역시 정복론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16세기 기독교 신자였던 데 아르티에다 선장 역시 중국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데 라다의 생각을 공유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 사업을 본다면, 중국의 부유함도 그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 요소가 되었는데, 그러한 부는 스페인 사람들이 여지껏 누려보지 못한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100개나 되는 중국 주 하나는... (구) 세계의 절반에 상당할 정도이며", 습지대나 정글이나 사막 같이 못 써먹을 땅이 아니라, 잘 개간되어 엄청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던 땅... 즉, 스페인 입장에서는 큰 부를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대개 유럽인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물품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대륙의 인디오들이라면 귀중한 금으로 그냥 바꿔 주었을만한 자질구레한 것들이라면 중국인들은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1573년 펠리페 2세에게 보낸 누에바 에스파냐의 총독의 서신을 보면, "중국인들은 비단과 설탕에서 면직물 및 밀랍에 이르기까지 유럽, 신대륙 및 기타 아시아 지역에서 나오는 모든 물품들을 이미 생산하고 있거나 교역을 통해 얻어내고 있었습니다. 즉, 간단히 말해 중국과의 교역을 하려면 현물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화폐인 은을 가지고 교역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은을 화폐 (원보)로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대명통보(大明通寶)라는 동전과 대명보초(大明寶鈔)라는 지폐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1436년에서는 관리들의 녹봉을 은으로 대납했고, 결국 세금을 은으로 거두는 은납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디에고 데 아르티에다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왜 스페인 사람들이 북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겉으로 보면 강대해 보이지만 실상은 허약해보이는 중국 사람들이 있는데 필리핀 같은 곳에서 고생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데 라다, 데 아르티에다 등을 위시한 스페인 사람들의 중국을 정복하자는 탄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닐라의 스페인 사람들은 이 계획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1576년, 필리핀 총동 프란시스코 데 산데(Fransisco de Sande)가 결국 이 계획을 가동했습니다. 6월 7일 마드리드로 보낸 편지에서 데 산데는 이 계획을 위해 4~6000명의 잘 훈련된 스페인 병사들에 더하여 노획품을 미끼로 끌어들인 일본 및 중국 해적들이면 이 계획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루손(Luzon) 북쪽에서 중국 남부 해안까지는 이틀 간의 항해면 충분했고, 선박의 경우 현지 섬에서 구한 목재들을 이용해 건조한 갤리(galley) 선단을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당도하면 2~3천 명의 병력이 중국 주 하나를 휩쓸어버릴 것이고, 데 산데는 "이것은 식은 죽 먹기며, 사실 무기를 쓸 일조차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00명으로 이루어진 해적들도 3만 명이나 거주하는 큰 마을 하나를 털어먹는 형편이며, 중국인들은 숙련된 명사수도 없고 그들의 화승총(아퀘버스 Arquebus)들은 무용지물이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런 후에는, 다른 주들도 모조리 굴복해버릴 것이며, 폭정에 시달린 중국인들은 스페인의 침공을 명나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킬 기회로 생각할 것이고, 마침내 왕의 권능과 통치와 종교가 그들을 순종시킬 것으로 데 산데는 편지를 마무리지었습니다.
펠리페 왕으로 보낸 다른 편지에서는 데 산데는 아마도 당시 왕실의 재정 긴축을 감지했던 듯한 모양이었는데, 이러한 정복의 비용이 매우 적게 들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무급으로라도 갈 것이고, 무장은 자비로 갖추게 될 것이라고 했지요. 유일한 비용은 갤리선을 건조하고, 포수나 대장장이, 기술자, 포탄, 대포 등을 구입하는데 중개상에게 지불할 정도이며, 식량은 필리핀 현지에서 댈 수 있으며, 병사들은 젊고 튼튼하며 열의에 넘쳐 있다고 써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펠리페 2세는 데 산데의 요청을 기각합니다.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데 산데 총독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공직에 머물러 있는 동안 집요하게 그의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가기 위해 필리핀을 떠나기 바로 전 해인 1579년 5월 30일까지도 마지막으로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1581년 6월 4일 마드리드에 도착했습니다만... "읽어보았는데 대답해줄 필요도 없다 (Seen, and no answer is required)" 라는 코멘트가 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중국 정복욕을 가진 것은 데 산데만이 아니었는데, 그의 후임자 곤사로 론퀼료(Gonzalo Ronquillo : 1580~83 재직)와 산티아고 데 베라(Santiago de Vera : 1584~90)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계획은 점점 더 장대해지고 세밀해져 갔는데, 1586년 4월 20일 데 베라 총독은 마닐라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이것을 검토합니다. 이번에는 원정대가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스페인 사람 수백명을 포함해서, 스페인 본국으로부터의 증원군 10,000명 혹은 12,000명을 추가하고, 가능하다면 현지 토착민 5~6천 명에 비슷한 수의 일본인들을 일본 예수회 선교사들이 모집해 온다는 것입니다.
고로 총인원 2만~2만 5천 명의 원정대인 셈이지요. 더해서, 포르투갈 인들도 이 원정에 끌여들이기로 했는데, 그렇게 되면 "이것만으로도 중국측이 굴복할 것이고, 심각한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수는 많겠지만, 충용무쌍한(..) 스페인 인들은 그들을 썰어낼 것이며, 참혹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생각은 졸렬하기 그지없지만, 포르투갈인들을 끌여들어 그들과 함께 중국을 분할해 먹자는 안건만은 그들과의 쓸데없는 분란을 막아 줄 것이었는데, 1494년 대서양의 케이프 베르데 제도 서쪽 370 리그 지점에 그어지고, 1529년 확정된 스페인-포르투갈의 영역 분계선을 확실하게 해 줄 것이었습니다)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누구를 지정할지도 주의가 기울여졌는데, 이점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들이 쿠바에서도 그랬듯 한때 풍요로운 지역을 완전히 박살내놓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예전 방식대로 들어간다면 중국같은 풍요롭고 부유한 지역을 황폐화시켜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만. 아무튼, 원정대의 지휘관은 산티아고 데 베라 총독으로 낙착이 되었습니다.
마닐라 쪽의 계획은 요구되는 병기에 이르기까지 자세했습니다. 병사들의 개인 무장에 더해서, 스페인 본국에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 추가 무기들이 요청되었습니다. 500정의 머스킷, 4,000자루의 파이크, 갑옷 1,000개, 누에바 에스파냐 산 부르군디식 투구 1000개, 그리고 확정되지 않은 수의 아퀘버스 등. 현지에서 포를 주조하기 위해 4명의 대포 기술자들과, 1~2명의 기술자, 기능공 몇 명이 더 요청되엇습니다.
화약과 탄환들은 따로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지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은 중국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대구경 및 중구경 대포 탄환 역시 중국에서 겨우 개당 2~3 레알(화폐 단위)에 살 수 있었는데, 주조하자면 8~10레알이나 들기에 이쪽이 더 나았지요.
...물론, 중국을 정복하러 간다는데 그 무기를 중국에서 사 오겠다는 이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마닐라 측이 인지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orz
비용 면에서는 상당히 들 것이었는데, 일본 용병들을 고용하고 잡다한 명목에서 또 빠져나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총액 20만 페소가 산정되었습니다. 병사들을 위한 담요며 천이 또한 누에바 에스파탸에서 들여와야 했고, 중국 관헌들이나 유력자를 대접하기 위한 별도의 제품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들여와야만 했습니다. 이를테면 에스파냐 산 벨벳, 주홍색 천, 거울, 유리제품, 산호, 깃털장식, 유화, 깃털 세공품, 지구본 등의 잡다한 물품들, 적포도주나 백포도주 따위의 것들이었습니다.
원정대의 시작 지점은 루손 북부 해얀의 카가얀(cagayan) 강 어귀어서였습니다. 펠리페 국왕의 재가를 받는다면, 이곳에서 중국으로 가는 데는 겨우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데... 거의 10년 전 데 산데 처럼, 이것 역시 지극히 낙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실제 루손 북쪽에서 중국 해안까지는 거의 700km나 떨어져 있고, 4일 넘게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탄 제도나 타이완을 경유해 가는 루트라면 더 걸릴 것이었습니다.) 선박은 이런 목적을 위해서 최적인 건현이 높은 갤리선과 프라가타(Fragata) 선들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선박들은 현지의 재목을 이용해 카가얀 강 어귀에서 건조될 것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스페인 본국에서 조선 장인들이 필요했으며, 숙련된 선원들도 필요했습니다. 삭구, 닻, 고정 장치 등이 또 필요했는데, 이것들은 인도의 고아에서 보내올 것이었습니다.
카가얀 기지에서 출발하고 나면 스페인 원정대는 마카오 북동쪽으로부터 수백 km 떨어진 푸지안(Fujian) 해안에 도착할 예정인데, 동시에 포르투갈 군이 마카오를 출발, 광동 지방으로 돌격해 나갈 계획이었습니다. 성직자 겸 안내인 명목으로 마카오에 체재했던 예수회 사제들이 딸려 가는 이 2개 군은 독자적으로 베이징까지 북상할 것이고, 식민지 기구를 설치할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명 제국의 관리들은 통치 편의를 위해 그대로 남겨 이용하기로 되었습니다.
출발 시기에 대해서, 비망록을 보면 침공은 가능한 빨리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시일을 끌면 중국인들도 눈치챌 것이었지요. 몇 년 전 데 산데가 제안을 해 왔을 때는 그 광대한 영토는 힘 안 들이고, 돈도 피도 흘리지 않고, 먹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단기간 안에는, 그리고 얼마간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는, 어떤 수를 쓰든 간에 그게 불가능할 것이었으므로, 국왕이 즉각 허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데 산데 총독과 같이, 데 베라 총독 역시 마드리드로부터의 허가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펠리페 2세는 유럽 지역에서 너무 크게 전역을 벌여 놓고 있었으며,
- 스페인의 병력 자체는 모자라지는 않았습니다... 1552년 이탈리아 - 독일 - 네덜란드 - 스페인 - 대서양 - 지중해 전 전선에서 총공격을 편 카를 5세의 군대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만 10만 9000명, 롬바르디아에서 2만 4천 명을 집결시킨 데 이어, 시칠리아-나폴리-스페인에서도 추가 모병이 잇따랐습니다. 황제 자신의 직속 부대만 15만이나 되었고, 이 유지비용도 대어 냈습니다. 1574년에 이르면, 플랑드르 지방의 군 하나만도 8만 6,000명에 이를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사적 동원능력은 가공할 만했습니다.
-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이일주 외 역, 한국경제인연합사, p 78~79
다만, 이런 병력들이 노는 병력이 아니고, 다 할 일 다 하고 있는 병력이라서 문제지.
둘째로 재정의 문제로 거의 파산지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ㅂ-
... 당장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의 공식 부채 약 2,000만 두카토를 상속받은 상태였는데, 이 당시 아메리카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연간 20만 두카토 수준이었습니다 orz
<참고 문헌>
주경철,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p 143
"The Spanish plan to conquer China" : by Samuel Hawley (http://www.samuelhawley.com/imjinarticle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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