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약
1. 1970년 월남전이 한창일 때, 미국 특수작전부대가 월맹 수도 하노이 바로 옆의 수용소에서 과감한 포로 구출 작전을 시도했다.
2. 손타이 수용소 습격으로 알려진 아이보리 코스트 작전은 미군 포로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특수 작전 수행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까지 미국 정보부는 월맹에 450명의 미국 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굶주림, 고문,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미 국방부는 이들 중 일부를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50년 전 미군 특수작전부대가 월맹 수도 하노이 바로 옆에서의 포로 구출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시도했다.
아이보리 코스트 작전의 주요 목표는 손타이 수용소에서 약 50명의 미군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전례 없는 습격 작전
(손타이 수용소)
이를 위해 미 국방부는 그린베레와 공군 특공대 등 총 148명의 자원자로 구성된 합동 특수작전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지상군 총지휘관인 엘리엇 P. 시드너 중령과 함께, 아서 D. "불" 시몬스 육군 대령이 있었다.
시몬스는 포로 구출 경험이 있는 이였다.
2차 대전 당시 레인저로 필리핀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인 카바나투안 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성공으로 이끌었다.
공격대는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딕 미도우즈 대위가 지휘하며 수용소 안뜰에 착륙하여 포로들을 구출하는 "블루보이", 외부에 착륙하여 필요한 경우 화력 지원 및 증원을 제공하는 "그린리프", 마지막으로 수용소 주변을 확보하고 월맹군 증원군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은 "레드와인"이 있었다.
687마일의 거리를 비행해야 했던 항공 패키지는 인원 수송을 위한 HH-3E 졸리 그린 자이언트 1대와 HH-53 슈퍼 졸리 그린 자이언트 헬리콥터 5대, 길잡이용 MC-130 컴뱃 탈론 2대, 공중 급유를 위한 HC-130 허큘리스 2대, 근접 항공 지원을 위한 A-1E 스카이레이더 5대, 제공권 확보를 위한 F-4 팬텀 10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여러 대의 해군 항공기가 레이드 전후로 하노이 동쪽에서 교란을 실시할 것이었다.
CIA는 라이언 모델 147 드론과 SR-71 블랙버드에서 촬영한 영상을 통해, 공격대가 훈련한 플로리다 에글린 공군 기지에 수용소의 정확한 목업을 만들었다.
(손타이 레이드 헬기에 탑승한 그린베레 대원)
이 복제품은 매우 정확하여 경비병이 지원군을 호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자전거까지 구현했다.
D-Day 전까지 지상군은 170회의 리허설을 마쳤고, 공군은 미국에서 268회의 연습 출격을 완료했으며 모두 야간에 실시했다.
임무의 중요성 때문에 대원들은 일종의 야간 조준기인 싱글포인트 조준기와 CAR-15 소총용 30발 탄창을 비롯한 최첨단 장비를 지급받았다.
또한 이들은 미군임을 식별할 수 있는 계급장이나 표식이 없는 군복을 입었다.
레이드 기획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노출될 것을 우려했다.
라오스, 캄보디아, 월맹에서 비밀 월경 작전을 수행하던 특수 작전팀은 정보 유출로 인해 많은 팀이 발각되거나 전멸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이공 본부에서 월맹에 정보를 넘기던 첩자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들이 곤경에 처할 경우를 대비한 계획은 서로 뭉쳐서 근처 강둑을 파는 것이었다.
충분한 공중 지원을 통해 철수하거나 공격대가 전멸할 때까지 월맹군의 우세한 병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작전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지 포로를 잡는 것이 아니다."라고 시몬스가 마지막 브리핑에서 대원들에게 말했다.
수용소가 하노이에 가깝다는 것은 그곳의 월맹군 경비대가 수천 명의 병력을 요청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태스크포스는 미국에서 태국의 CIA 시설로 날아갔다.
며칠간의 휴식을 취한 후 태국의 발진 기지로 갔다.
11월 20일 밤, 태스크포스의 발진 명령이 떨어졌다.
'여러분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작전 전 포로들에게 경고할 때 쓰인 하얀 메가폰을 들고 있는 딕 미도우즈 대위)
태스크포스는 목표물에 접근하여 월맹군의 허를 찔렀다.
블루보이를 태운 HH-3E 헬기가 안뜰에 충돌했고, 작전 대원들은 수용소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우리는 미군입니다. 머리를 숙이십시오. 구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리십시오. 곧 감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수용소 내부로 들이닥친 부대의 지휘관인 딕 미도우스 대위가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한편, 그린리프를 태운 HH-53은 기지를 혼동하여 500야드 떨어진 100~200명의 중국군이 밀집해 있는 2차 목표에 부대를 투입했다.
짧지만 격렬한 총격전 끝에 그린리프의 22명은 단 한 명의 피해 없이 수백 명을 사살하여 중국군의 위협을 무력화했다.
당시 현장의 선임 장교였던 시몬스는 리볼버로 월맹군 경비병을 죽였다.
다시 목표로 돌아와, 블루보이의 대원들은 월맹군 경비병을 모두 제압했지만 빈 감방만 발견했다.
미도우즈는 포로가 없음을 뜻하는 암호인 "네거티브 아이템"을 무전으로 보고했다.
공격대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경계선을 해체하고 헬기에 다시 탑승하여 태국으로 향했다.
작전은 28분 만에 끝났다.
성공적인 실패
(손타이 공격대원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리차드 닉슨 대통령)
작전의 1차 목표는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었지만, 2차 목표는 포로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국이 포로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월맹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레이드 이전에 손타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F-105 파일럿인 R.E. 스미스 소령은 1973년 송환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레이드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월맹에서 포로 생활 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월맹은 포로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잘 조직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이 우리를 송환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화됐다."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작전의 정보적 실패는 미국 정보기관의 재편으로 이어졌고, 군 내 유기적인 정보 수집 능력을 구축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레이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도 가져왔다.
처음부터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이러한 특수 임무를 수행할 전담 부대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불과 몇 년 후, 찰리 베크위스 대령이 델타포스를 창설했고 딕 미도우즈가 이곳의 창설 인원으로 있었다.
이 부대는 곧 이란 혁명 세력이 미국인 66명을 인질로 잡은 후 이란에서 이와 유사한 작전을 수행하도록 요청됐다.
손타이 공격대의 정신은 미국 특수 작전 커뮤니티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
-끝-
교차 검증을 위해 번역한거지 정보글로서의 가치 따지면 후대에 끼친 영향과 작전 실패시 시나리오 밖에 없어서 그냥 히스토리넷 버전과 오늘 밤 또는 내일 올릴 센티넬 버전 읽는거 추천함
센티넬 버전으로 손타이 레이드 재탕도 끝내고 다시 다른 주제로 넘어갈 예정임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