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style="text-align:left;"><b>식인종의 역사</b> </div><br /><div style="text-align:left;"><span style="font-size:1.3em;"><b>지구 최악의 식인종 짱깨</b></span> </div><br /><br /><div><span style="color:#801FBF;"><b>전란이나 기아 천재지변이 아닌 평상</b></span><b>시에</b> </div><div> </div><div><span style="color:#801FBF;"><b>수천년간</b></span><b> 인육을 시장거래 유통시키며 즐겨 먹었다는 중국인</b> </div><div> </div><div><span style="color:#801FBF;"><b>아프리카보다 더 야만스런 인류 역사상 최하 최악의 식인종족 중국인 </b></span> </div><br /><div><span style="color:#2B8400;"> 중국의 오랜 식인전통과 보편화된 인육거래 인육요리문화</span>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중국의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춘추필법 대단한 중국 정사(正史)에만도 220차례나 기록되어 있다.</span> </div><br /><div>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span> </div><br /><div>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span>醢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 저며서 말린 고기), </div><div><span style="color:#2B8400;">‘자’(炙 :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span><span style="color:#2B8400;">기록했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span> </div><br /><div>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醢)’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span> </div><br /><div>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span><span style="color:#2B8400;">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span> </div><br /><div>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span><span style="color:#2B8400;">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span> </div><br /><div>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div><div><span style="color:#2B8400;">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 </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span> </div><br /><div>'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div><div><span style="color:#2B8400;">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span> </div><br /><div><span style="color:#2B8400;">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span><span style="color:#2B8400;">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육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삼장법사가 </span><span style="color:#2B8400;">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span><span style="color:#2B8400;">나온다 </span>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 </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 </span><span style="color:#2B8400;"><시체에서 인육을 떼어가는 모습></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중국에서 처음으로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span><span style="color:#2B8400;">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span>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중국사회상을 폭로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span> </div><div> </div><div><span style="color:#2B8400;">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span> </div><div><span style="color:#2B8400;">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span><span style="color:#2B8400;">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span>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801FBF;"><span style="color:#2B8400;"><b>식인풍습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b></span></span> </div><div> </div><div>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가 수천년을 이어 면면히 지속되었고 </div><div> </div><div>중국내 오랜전통의 특이한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가 없으며 </div><div>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div><div> </div><div>중국인은 왜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절대 믿지 않는지, </div><div> </div><div>왜 돈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div><div> </div><div>왜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div><div> </div><div>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미동조차 않는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div><div> </div><div>왜 중국인은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 다 모여 사는지, </div><div> </div><div>그 엄청난 인내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div><div> </div><div>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 위주인지, </div><div> </div><div>(그래서 중국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매우 폐쇄적이고 </div><div> 성장규모에 한계가 있으며 기업의 존속수명도 매우 짧은 편이다.) </div><div> </div><div>등등 </div><div> </div><div><b>모든 중국인의 사회문화적 기저배경 내면의식과 일상문제를 살피고자 한다면</b> </div><div><b>그 저변에 깔린 중국특유의 식인풍습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b> </div><div> </div><div>중국인들의 서로에 대한 인간적 불신은 </div><div>바로 중국의 독특하고 장구다대한 식인문화에서 기인한다. </div><div> </div><div>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div><div> </div><div>오랫동안의 식인풍습은 그의 말처럼 </div><div> </div><div><b>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b><b>信義 그 자체를 없애 버렸다.</b> </div><div> </div><div>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는 </div><div>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로 그때만 예나 도덕 따위의 단어가 나온다. </div><div> </div><div>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div><div>강자 앞에서는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div><div>중국인 특유의 철저하고 냉혹한 현실주의 사고방식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div><div> </div><div>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 하나가 </div><div>‘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div><div>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div><div> </div><div>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div><div>식인 풍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div><div> </div><div>注 ; 여러 명이 뭉쳐서 숫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div><div>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div><div> 잡아먹히는 순서로 봤을 때 머릿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이다. </div><div> </div><div>임어당은 삼대 뿐 아니라 </div><div>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등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집에서 사는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div><div>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의 인내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div><div> </div><div>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div><div>그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침묵과 순종적 인내를 강요했다. </div><div> </div><div>싫어도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처세 또한 </div><div>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div><div> </div><div>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는 것이다.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FFFFFF;"><b>중공은 불과 수십년 전 </b></span><b>文革혁명 때도 홍위병들의 인육만행 창궐 </b> </div><div> </div><div>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지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보면, </div><div>스키타이 민 족은 친족이 죽으면 애도끝에 자신과 일체화시키는 의식으로서 </div><div>그 인육을 먹어버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식인의 역사는 유구하다. </div><br /><div>문화인류학자 스타이메스의 분류에 의하면 </div><div>(1)전쟁이나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 </div><div>(2)신명에 희생하고 공식의례로서, </div><div>(3)그것을 먹음 으로써 병이 낫는다할 때, </div><div>(4)형벌이나 복수의 수단으로, </div><div>(5) 충성이나 용맹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 </div><div>여러 사람 앞에서 인육을 먹었다고 했다. </div><br /><div>민족성이 워낙 선질인 우리나라에는 식인속과는 인연이 극히 멀다 . </div><div>임진왜란에서 수복된 한양 거리에서 기민들이 식인했다는 기록이 없지 않으나 극히 예외에 속하며 </div><div> </div><div>살인이나 살식이 아닌 </div><div>부모 목숨 살리고 부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살을 에고 피를 쏟아 먹이는 </div><div>중국이나 야만족들의 인육식과는 정반대취지의 효도 인육식만이 보편화돼 있었다. </div><div> </div><div><b>그런데 참 끔찍하고 기이하게도</b> </div><div><b>이웃 중국에서는 식인을 끽인이라하며 고대부터 많은 문헌에 아주 자주 등장하고 있다.</b> </div><div> </div><div>한비자에서 제나라 임금인 환공의 요리장인 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요리하여 임금에게 바치고 있다. </div><div> </div><div>원나라 때 문헌인 철경록에는 </div><div>인육맛으로 어린이 살이 으뜸이요,부녀자 것이 버금이며 사나이 것이 가장 하질이 라고 품평하고, </div><div>당시 상식화 돼있던 인육 요리법과 인육을 즐겼던 인물록 을 장황하게 적어 놓고 있으며, </div><div> </div><div>송나라 문헌 계륵편 에는 </div><div>인육을 양각 양이라 하고 어린이 인육을 화골란, 연인의 그것을 불선양, 남자의 그것은 소파화란 은어로 불렸다 했다. </div><br /><div><span style="color:#000000;">중국문학에서도 인육식은 낯선 풍속이 아니다.</span> </div><div>수호지 나 삼국지연의 에도 몇 군데 나오고 </div><div>근대작가인 노 신의 광인일기에도 이 식인속이 그다지 저항감을 수반하지 않고 나온다. </div><div> </div><div>이처럼 중국 역사에 있어서 인육식은 최고급 요리로,죄악시 하거나 금기시 하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다. </div><div>승리에 도취하거나 용맹을 과시할 필요에서 저질러진 인육식의 역사도 유구하다. </div><div>속십팔사략 에 보면 명나라 때 역신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했을 때 복왕을 살해, </div><div>그 인육을 사슴고기와 섞어 찌개를 만들어 먹었다던데 이를 복록식이라 했다 하니 끔찍하기 이를데 없다. </div><div> </div><div>60년대말 중국의 문화혁명때 홍위병의 광적인 소행들이 인권차원에서 많은 고발을 받아왔지만 </div><div>이 무렵 중국 광서성에 서 이들에게 충성을 입증시키는 방법으로 </div><div> </div><div>적어도 1백37명의 반동분자를 잡아 먹게 하는 식인잔치를 베풀었다는 문서가 서방측에 흘러나가 </div><div>뉴욕 타임스지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div><div> </div><div>교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교장선생을 잡아 먹게 하기도 하고-. </div><div> </div><div>식인전통이 있어서가 아니요,또 홍위병이라서가 아니다. </div><div> </div><div>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의 극한에 환멸을 주는 20 세기 최악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div><br /><div><span style="color:#000000;"> -조선일보 1993.01.08 이규태 코너-</span>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FFFFFF;"><b>중국은 늘 인상식이 있어왔다.</b></span><b> </b> </div><div> </div><div>(注; 인상식 人常食-사람을 잡아 먹는것이 일상적인 전통관습) </div><div> </div><br /><div>인상식은 모든 도덕과 질서의 막장이다. </div><div>수많은 침략으로 인하여 </div><div>한족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타민족에게 의해서 </div><div>군량미 대신 사람고기를 즉석에서 제공하였다. </div><br /><div>중국에선 예부터 인육은 돼지고기나 쌀보다 오히려 가격이 더 쌌다. </div><br /><div>알고 있는가? </div><div>중국 역사상 인상식은 늘 있어 왔다는 것을. </div><div>어떤이는 중국의 역사를 보고 </div><div>'사람을 먹다' 란 말만 나오는 인상식 역사라고까지 했다. </div><br /><div>갈족의 군대는 군량미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div><div>양식을 빼앗지 못하면 한족여자를 약탈하여 밤에는 간음하고 낮에서 죽여서 삶아먹었다. </div><div>요하에서 온 모용선비는 업성을 점령한후 5만의 한족소녀를 빼앗아 모조리 부하들에게 줬다. </div><div>사병들은 먼저 간음한후 삶아먹었다. 겨울이 지나자 5만의 소녀는 한명도 남지 않았다. </div><div>북송 말년의 정강 지난 때 금나라 병사가 남침하여, </div><div>강회일대에 식량이 모자르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div><br /><div>당시 군대는 인육을 군량으로 삼았는데 사람을 '두 다리 달린 양' 이라고 불렀다' </div><div>늙고 마른 남자는 '요파화' 라고 불렀는데 그살을 구우려면 불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div><div> </div><div>젊은 여자는 '불선양' 이라고 불렀는데 양고기보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div><div>어린아이는 '화골란'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은 살과 뼈를 함께 먹을수 있다는 뜻이다. </div><div> </div><div> 남자의 양 넓적다리(大腿, 上腿)와 여자의 유방(乳房).허벅지,뱃살,음부 </div><div>는 상육(想肉)이라 불렀다. 그중 최상등품은 당연 상육인데 상육이란, 한입 </div><div>먹으면 너무 맛있어 또 먹고 싶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div><div>맛보면 그 육질의 감칠맛이 마약과도 같은지라, 알다 모르게 찾는 이들이 생 </div><div>겨났고, 이를 계기로 존폐 되지 않은 채 중국에서 아직도 유지되어 온다. </div><br /><div>원나라 말기에 관군의 양식이 부족하자. 역시 백성을 잡아서 먹었다. </div><div>중국에선 인육을 먹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고 풍부하여 3권짜리 요리책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div><br /><div>수나라 말기 제갈앙과 고찬은 살인마였다. </div><div>어느날 고찬이 제갈앙을 연회에 초청했다 . </div><div>주요리는 10살된 쌍둥이 형제였다 한미첩이 술을 따르다 실수를 했는데 </div><div>제갈앙은 그 첩을 큰통에 넣고 삶았다. 그리곤 통채로 식탁위에 얹어놓고 먹었다. </div><br /><div>사실 중국은 망국이었다. </div><div>남북조의 오호난화는 이미 망국이라고 할만하다. </div><div> </div><div> </div><div><span style="color:#FFFFFF;"><b>깨어 있어야 합니다.여러분 주변의 짱깨 또는조선족 범죄자가 여러분의 장기와 인육을 노리고 있습니다. </b></span> </div><br /><div>#조선족 </div><br /><div>#장기밀매 </div><br /><div>#인육 </div><br /><br /><div><span style="font-size:1.4em;"><b>이 블로그 </b></span><b><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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