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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 대한 일상적 푸념

청년의사(211.230) 2016.02.13 16:37:44
조회 2246 추천 30 댓글 0

"온기가 넘쳐나는 이십대에 마르크스에 미치지 않으면 병신이고, 서른살을 넘어가서도 마르크스에 미쳐있으면 더 병신이라는 속설은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소위 어린 시절에 가지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회적 감수성과 뜨거운 가슴은 봐줄만한 일탈로 취급된다. 하지만 인간 이성에도 한계효용이 있던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체로 경험주의자로 전락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우리 때는 말이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원형으로 된 큰 플라스틱 공이였다. 그 큰 공은 열 수 있게 고안 되어있는데, 그걸 열면 안에 또 공이 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공을 열면 안에 더 작은공이 있고, 그 작은 공을 열면, 더 작은 공이 들어있다.

"이게 뭔가 싶어 마지막 남은 새끼 공을 여는 순간 속은 그냥 텅 비어있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게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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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단편적인 헬조선 : 돈의 부재

오늘날 조센계의 대화 양식에 있어 자극적인 기승전결은 화술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랫만에 조우한 지인과의 술자리를 생각해보라. 잇! 플레이스에서 만나 가성과 진성을 넘나드는 앙탈짐으로 정겨운 인사를 나누는 것도 까먹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얼굴이 좋아졌다느니, 더 이뻐졌다느니 따위의 멘트도 필수다. 육안에 인식이 가능한 변화를 ‘콕’ 집어줘야 상대방은 비로서 힐링스럽고 찰칵스러운 관심받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해묵은 라포를 다시 되새기고 술이 몇 잔 들어간 후, 온정과 공감대의 기호를 주고받다보면 우리의 대화는 비로서 세속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물론 연령대와 성별 혹은 사회적 짬밥에 따라 세속적 대화의 주제는 저마다 상이하다. 하지만 최근 ‘우리’의 대화를 관통하는 핵심적 맥락은 “요즘 참 먹고 살기 힘들다”로 귀결된다. 그 먹고 사는 것이 진학이든, 취업이든, 승진이든 혹은 그 어떠한 자본주의적 생존과 연관된 일화이든, 먹고 살기 힘든 사회적 사실에 대한 투쟁이 우리를 아우르는 대체적인 서사이다. 모진 사회에 대한 투쟁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애초에 ‘찡찡’ 그 자체에 알러지를 느끼는데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즐기는 성향이라면, 도대체 그 ‘요즘’과 ‘먹고 살기’와 ‘힘들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조작적인 정의와 더불어 그에 대한 각각의 예시가 대체 무엇인지 하나 하나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날이 요-만치 서버렸다면, 그 근거 없는 화살을 고스란히 받아줄 상대는 그리 많지 않다.

헬조선. 도대체 지옥이 무엇인가. 지옥의 사전적 정의는 “악한 자들이 사후에 심한 형벌을 받는 곳으로 생각하는 땅 속 깊은 곳의 저승”을 일컫는다. 이처럼 종교적 맥락에서 정의된 지옥이 세속적 맥락으로 넘어올 때, 지옥이란 인생 뭐 됐다 정도에 비유하는 것이 깔끔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헬에 대한 거친 답변을 하자면, 우리 삶의 전반적인 제반 영역에 있어 긍정적이지 못한 ‘음의 상태(-)’가 지옥스럽다고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주변 서사들의 수렴 궤적은 안타깝게도 대체로 일정하다. 우리가 주변에서 목도하는 헬조선은 이상하리만큼 한 쪽에 경도되어있기 때문이다.

헬조선 논쟁에서 지옥스러움은 우리의 전반적인 제반영역이 ‘헬’스럽다기 보다는, 순수 경제적인 상황이 ‘헬’스럽기에 여타 다른 영역 마저 헬이라는 세속의 가면을 써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그대로 대부분의 헬조선 논쟁은 순수 경제적 영역의 박탈에서 출발한다. 그만큼 먹고 살기 위한 ‘돈’ 그 자체의 집단적 갈증의 정도가 임계점에 달하고 있으며, 사실 그 지점도 이정표 없는 빙판길 같아서 어디까지 미끄러질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헬조선을 위시로 하는 수저계급론과 계층론은 사실 한국 사회에 여태 빤-히 보였지만 직시하기를 거부했던 계층적 논쟁이 수면 위로 그저 올라왔을 뿐이다. 원래는 안그랬나? 경제적 자본을 매개로 우리의 ‘팔자’가 결정되는, 그놈의 돈 결정론에 다시 한번 나는 고개를 숙인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어느새 공동체의 가치, 성찰적 인사이트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바라보자 따위의 대안적 움직임은 어린 시절 방문 잠그고 자위하던 설레임 보다도 못하다.

그래 돈 중요하다. 그렇다면 나에게 헬조선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아무래도 나는 소위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혹자에 따르면 삼시세끼 챙겨먹을 여력이 되는 집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제적 영역에서 파생된 헬조선적 특징들에 대해 씨부릴 수 있는 자격이 공론장에서는 절대 부여되지 않는다. 그래도 사회적 담론이니 만큼, 뭔가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르르 같이 목소리라도 내야할 것 같다. 근데 애초에 논의 자체가 먹고사는 문젠데, 감히 사회가 어떻다느니 추상화나 그리고 있는 대학원생이 감히! 뭘! 어떻게! 알겠는가. 조금 전에도 배부르게 한 끼 때우고 아메리카노도 즐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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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먹고 살기힘든 헬조선 신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박탈의 ‘굴레’에 약간이나마 몸을 얹은 경력이 있어야 한다. 반대의 논리를 적용해보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 먹고 살만한 수준의 교환가치를 지닌 화폐만 있으면, 적어도 ‘헬’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완화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있는 새끼와 없는 새끼라는 양극의 스펙트럼 속에서, 나는 가진자가 됐다 못가진자가 됐다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사회가 어떻니, 정치가 어떻니를 논하는 것은 제 아무리 진정성을 갖춘다고 한들 변방의 오랑캐가 울부짖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웬-만하면 보일 줄 알았던 보이지 않는 손이 온 세상을 풍족하게 먹여살릴줄 알았고, 또 그렇게 배워왔다. 혹시 브람스를 좋아하시냐는 둥 준비해온 대사를 쏘아대며 낭만적 사대주의에 빠져 살던 엄빠의 과거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 마냥 잔향만 그득하다. 아가리에 풀칠도 못하는 최저임금에 좌절하고, 기성세대가 골라 들어가던 기업에 들어가기란 하늘에 별따기일 뿐더러, 요즘 어디에서나 등판하는 세대갈등의 프레임도 결국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너네가 뭔데 더 쳐먹고 앉아있냐로 귀결된다. 어디 그뿐인가, 소위 타자지향성과 힐링감성으로 점철된 김치녀와 김치남의 까탈스러움은 나날이 늘어만가고 있다(나 포함). 그래도 이 위험천만한 사회에서 차갑기 그지 없는 사회적 사실 그 자체만이라도 받아들이자는 취지로 아둥바둥하는 각종 청년단체와 대안모임, 지식인들이 제시하는 거시적 사회 담론에 대한 피드백은 정말 그냥 그-저 그렇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그렇구나. 잘 알겠습니다, 근데 그래서요?”

사회는 정직하다. 가치라는 렌즈를 끼고 보는 사회는 좌로 기울기도 하고, 우로 기울기도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사회 그 자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인위적이면서 동시에 자연발생적인 하나의 가공물이다. 사회는 결-코 급작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 아무리 서구사회가 섹시함으로 얼룩진 혁명을 경험했다고 한들, 그것은 지속적인 반목 관계의 누적과 맥락적 당위성을 요구한다. 서구 사회가 돈 다 대주는 복지국가인들, 헬조선이 나라 돈 하나도 안 보태주는 사회인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보고있는 그 사회, 그 현상 자체는 결국 한 사회가 누진적으로 추구해왔던 내적 합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정부 지금까지 뭐했노. 나도 군대 갔다오고, 공부도 열심히했고, 느그가 요구하는데로 살아봤는데, 느그는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고 줄줄이 선거때만 달려와서 뜬구름 잡는소리하고, 이거 직무유기 아이가?

 

허무하다. 왜 애초에 잘하지 못했을까. 이럴줄 몰랐나? 이렇게 된 이상 잘 바꾸면 안되나? 왜 늦었을 때가 시작하라고 하잖아! 풀뿌리 몰라? 밑바닥이 중요한거야! 우리 합심해서 하나씩 해보자! NGO도 가입하고 청년정당에도 가입하자! 청년좌파 우와! 변화는 우리로부터 온다! 물론 시간이 걸릴꺼야.. 생각해봐 우리 한민족의 긍지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겪었던 시련과 고뇌를 생각해봐! 일제시대에 저항하던 재야 지식인들과……… 아,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었다.

온기가 넘쳐나는 이십대에 마르크스에 미치지 않으면 병신이고, 서른살을 넘어가서도 마르크스에 미쳐있으면 더 병신이라는 속설은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소위 어린 시절에 가지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회적 감수성과 뜨거움 가슴은 봐줄만한 일탈로 취급된다. 하지만 인간 이성에도 한계효용이 있던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체로 경험주의자로 전락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우리 때는 말이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원형으로 된 큰 플라스틱 공이였다. 그 큰 공은 열 수 있게 고안 되어있는데, 그걸 열면 안에 또 공이 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공을 열면 안에 더 작은공이 있고, 그 작은 공을 열면, 더 작은 공이 들어있다. 이게 뭔가 싶어 마지막 남은 새끼 공을 여는 순간 속은 그냥 텅 비어있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게 인생이야.”

 

청소년기 복종 이데올로기와 인적자본

이빨 사이로 침 뱉으며 남의 집 귀한 아들 콧대를 내려 앉혀가며 지내왔던 중고교 시절과, 천부적 재능도 없으면서 어깨까지 머리를 기르고 전자음악 해본다고 깝치던 20대 초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맥락없이 급작스럽게 좌파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사회를 고치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일념으로 살고있다. 내 인생에 뭔가 굴곡과 드라마가 있었던 것 같지만, 막상 보면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강조하신 꼰대들의 말이 꼭 틀린 것 같지는 않다. 타고난 본성이 게으르고 아무것도 안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게 내 성격이라면, 나의 밖에 있는 체계에서는 언제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며 노력은 결실이라는 열매를 불러온다는 말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 사조를 받아들이고자 억지로 연극을 해대며 몇 년을 살아봤지만, 나는 그 노력이 무슨 노력인지도 모르겠고 그 열매가 무슨 열매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다 붕뜬 것 같다.

“수학의 세대교체! 대세는 메가스터디!”

오늘 아침 등교길 버스에 붙어있던 광고이다. 혹자에게는 이 광고가 거리낌 없이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유심히 보다 보면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모르는 이가 보면 위대한 한국인이 여태 증명되지 못한 대수기하학 난제를 풀어내서 대대적인 국위선양을 하는줄 알겠지만, 사실은 수억을 들어가며 높은 수능 점수를 꿈꾸는 학생들과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학부모들을 끌어들이는 사교육 광고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교육과 관련된 사업체의 공공 노출 빈도는 상당하며, 떄론 그 단편적 풍경들이 너-무나도 한국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여기서 교육을 매개로 한정한 것은 교육이야말로 한 국가의 생산레짐과 그 역학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인 잣대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맥락에서 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어찌됐든 간에 나라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인적 자본을 형성하는 것이다. 애초에 교환과 거래를 조건으로 삼는 ‘자본(Capital)’이라는 단어를 왜 ‘인적(Human)’에 갖다붙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인적 자본의 축적은 생산주의적 맥락에서 엄청난 이념적 우월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베짱이 같던 국민들을 개미화시키고, 특히나 남한과 같이 발전국가적 색채가 뚜렷한 곳에서 인적자본의 강조는 개발중심 이데올로기로 편입시키는 최적의 훈련이자, 현존하는 가장 합법적인 사회적 사업임에 틀림없다.

 

멋드러진 성과로 보답할 줄 알았던 한강의 기적이 먹히던 시절, 부지런함과 우둔함은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반드시 가져야했던 ‘미덕’이였다. 하지만 탈생산주의적 사조 – 보다 정확히는 생산주의가 먹히지 않는 – 가 스멀스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이러한 부지런함은 꼰대스러움으로 포장되고, 세대 전환의 변곡점에 서있는 우리는 그간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창의력과 독창성을 갑작스레 요구받기 시작했다.

나의 어린시절을 회자해보면, 새학기마다 작성해야되는 인적사항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의 직업과 소득을 기재해야했고, ‘꿈’ 혹은 ‘장래희망’ 따위의 낭만적 공란을 알맞게 채워 제출해야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가고 싶은 대학을 우선 순위대로 적고, 장차 갖고자 하는 ‘희망직종’을 반드시 적어야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요구했던 꿈이나 장래희망, 혹은 중고교시절 요구했던 희망직종을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말바꾸기에 불과했던 것 같다. 어찌됐건, 내가 직접 겪고 경험한 일이고, 또 그 누구보다 ‘바람직한’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적응도 못했기 때문에, 나름 아웃사이더의 비판을 해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나라 의무교육에서 창의력과 독창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은, 우리는 12년 간의 의무교육을 통해 ‘사회적 바람직함’을 지속적으로 주입받는다. 생산주의의 시작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등교를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학교에서 정해준 의복과 두발기준을 준수하고, 자체적 자율성 보다는 스승과 제자라는 권력관계를 위시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생산성의 주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겉으로는 조선 특유의 정문화로 부각된 사제관계가 떠오를지는 몰라도, 유교주의가 깔린 조선식 의무교육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철저하게 ‘위-아래’라는 양극단에서 스스로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를 익힌다.

참 뭐 같이 썩어빠진 부산에서 남중 남고 생활을 자-알도 보냈다. 중학교 시절 넥타이가 삐뚤어졌다고 선생에게 아구창을 맞아, 기분이 상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을 뱉고 싶었다기보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암묵적인 기대에 부응하려고 그랬던거 같다. 세상에서 그렇게 비참하고, 또 오래 맞아본 적이 없다. 다 떄리고 나니 삼일 간 학교에 나오지 말란다. 침 그냥 닦으면 그만인 것을.

 

나의 반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문제가 마음에 안들어 오번 보기를 자의적으로 만들어 문제를 풀었더니,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그대로 배를 까인 기억이 있다. 너무나도 분개하며 엄마한테 일러바쳤는데, 우리 엄마는 제발 어른한테 좀 그러지 말라며 선생님께 드릴 봉투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그 뒤로 난 맞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이번 중간고사 석차가 올랐으니 앞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과 부모님 그리고 나라는 묘한 삼각관계의 기류속에서 소속감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붕 뜬 학교 생활을 했다. 짜증나게도 중학교 2년 내내 그 사람은 나의 담임이였다. 더욱 웃긴 것은 이 대목을 쓰는 이 순간에 호기심으로 그 선생의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을 했는데 나온다는 사실이다. 기왕 이렇게 된거 공개한다. 송쾌복씨.

학창 시절 참 말 주변도 좋고 장난도 곧잘 치는 친구가 있었다. 소위 잘노는 친구인지라 선생님께 자주 혼나곤 했는데, 혼날 때 마다 아빠 없이 자라서 이따구냐고, 선생님은 그 친구가 편부모 가정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가정 여건이 넉넉치 않아 촌지 따위는 낼 수 없는 환경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생활력이 좋고 명석했던 친구였는데, 학교와 교사들은 그 친구가 소위 ‘노는 아이’이고 집안이 형편없다는 잣대를 토대로 이미 공고한 선입견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또 그것을 적용시키는데 여념이 없었다.

반장도 컨트롤 못하던 교내의 분위기를 잘 다스리는 친구였고, 학업성적과 집안은 좋지 않았지만, 교실에서 꽃소금과 같은 가미의 역할을 하는 그런 친구였다. 어떤 집단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친구는 3학년 2학기 그 어느날 가족과 함께 잠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경제적으로 힘들었겠지, 그게 주된 이유였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학교가 그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는 없었을까? 조금이나마 가정사에 개입하여 손을 뻗힐수 없었나?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이였을까? 공교육에 대한 나의 신뢰는 거기서 무너졌다. 오묘한 일이다.

물론 내가 목격한 한국 교육’체제’의 왜곡은 나만의 단적이고 주관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주체로서, 그리고 제 3자로서 목격한 우리 사회의 의무교육의 큰 맥락은 결국 생산주의를 위한 토대를 형성하는 것 그 이상-이하도 아니였다. 윗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거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만으로는 교사들의 체면이 잘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새 그땐 그랬지라는 기분이 들만큼 시간이 흘렀기에, 헛웃음도 나오고 쓰라린 한숨이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폭력과 위선이 지배하고, 편애와 혐오로 점철된 썩어 문드러진 부산의 사립 중-고등학교의 실태에 대해 나는 고발하고, 또 고발한다. 어찌됐건 체제종속적인 친구들은 거진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다. 선생들 입장에서는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애초에 순서대로 줄을 세울꺼면 제대로 세우던가, 이도 저도 아닌 전근대적 악취를 그대로 풍겨대던 그때의 기억은 회상하기도 싫다.

도대체  바람직함이라는 추상적 선을 누가 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름’의 사람들을 ‘옳음’으로 밀어 집어넣는것, 그것이 한국형 인적자본형성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청소년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태가 해결되었다고 한들, 나는 한국 특유의 교육현장 이데올로기의 추악함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언제나 선생들이 강조했던 그 한마디처럼. “학생이라면 마땅히!”

인적 자본과 생산성의 맥락에서 남한 사회를 엿먹이는 캐치프레이즈는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그래도 OECD 연간 통계 몇 가지만 긁어오면 헬조선 시민의 긍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물론 국가간 사회적 맥락이 전혀 상이한 상황에서 공통된 측정도구 몇 가지를 가지고 사회 전체의 성질을 규정하는 행위는 분명 질적인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왜곡된 생산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몇 가지를 수치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OECD 기준 남한의 노동시간은 연간 약 2285시간으로 세계 1위이다. 또한 노동생산성, 즉 투여한 노동시간에 대비한 생산물의 정도 또한 최하위에 머물러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로 팔려가기 이전에 인적자본 형성이 대체로 교육에서 이루어진다면, 교육관련 현황은 어떠한가.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꼴찌, 과학 흥미도 꼴찌, 고등교육 국가부담율 꼴찌, 사교육비 지출 1위, 공교육비 민간부담 1위, 대학교육 가계부담 1위. 오-래된 교육의 상명하복식 제도고착성을 어떻게 바꾸리. 어떻게 해체하리. 못 바꾼다면 차선은 무엇일까, 혹시 차선의 차선은 있는가? 그렇다면 대안을 어떻게 만들리. 만든다 한들 어떻게 대체하리. 토양과 거름과 기후, 그 모든 것이 좋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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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만이 미덕입니다

쟤는 누구집 자식이래? 재는 공부 잘한데? 쟤는 대학 어디다녀? 무슨 과? 만나는 사람 있어? 집안은 어때? 있는 집 자식이야? 이번에 취직했어? 어디들어갔데? 이번에 괜찮은 사람이랑 선본다며? 차 있어? 집은 좀 살아? 야 너 결혼한다며? 식장 어디야? 애 낳았다며? (그 아이가 객체가 되어..) 쟤는 누구집 자식이래? (무한 Loop)

한국사회를 꿰뚫는 사조와 관념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우리는 출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를 살아왔고, 앞으로도 출세에 대한 욕망은 계속 공고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 차원에서는 생산주의적 사조를 강조하고, 개개인은 출세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 양식에 기여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인적자본의 축적과 출세 사이에는 대단한 연관이 없는 것 같다. 사회에서 제공하고 요구하는 개개인의 역량이 정말로 ‘쓸모 있다면’ , 개개인의 출세욕구가 제 아무리 이기주의에 입각한다고 한들 그것이 모이면 사회의 생산성에 조금이라도 연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헬조선의 인적자본은 생산성과 연계되지 않는다. 교육이 잘못 됐거나, 애초에 생산성에 대한 측정이 잘못 됐거나, 아니면 정말 풍수지리적으로 동아시아 후발 개도국의 한계이거나. 뭐지.

 

푸념 : 현재 나의 지위에서

“대학생활이요?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교수님과 고전이론을 탐닉하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곳, 그것이 대학 아닌가요?”

안타깝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저런 짓거리를 좋아해서 안타깝다. 나는 요즘 대학생이라면 다 한다는 경영/경제 공부를 회피하고 소위 돈 안되는 인문/사회의 매력에 빠졌었다. 당장 학비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힘들게 벌어야 할만큼 하부구조가 덜컹거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것이 대학이라고 믿었었고, 지금도 대학은 그래야만 한다는 형이상학적 신념만은 굳건하다.

하지만 요즘 대학에 진학하는 9할의 학우들은 대학을 사기업 취직의 가교역할 정도로 바라본다. 사실 그게 다니까. 시계추를 돌려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어찌 저찌 하다가 순수학문을 좋아하게 된거지, 애초에 일자리를 아예 생각안하고 대학에 왔다면 그건 정말 거짓말이다. 생산주의의 맥락하에서 개개인의 출세가 강조되는 이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 혹은 대학의 ‘시기적’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사실 대학의 교육과 일자리의 관계성과 관련해서 내가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소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도 없다. 구라빨로 대충 퉁치려고 해도, 나는 소위 요즘 사회에서 스펙이라고 불리는 것은 쌓아본적이 없다. 양심이 없다고 해야되나, 집에서 생활비 타서 쓰고, 좌파 정당에 몸 담고, 기업 기준에서 딱 싫어하는 NGO들에만 활동했었다. 더군다나 나는 애초에 한국 사회가 상정하는 엘리트적 요소– 굳이 예를 들자면, 유교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일류 대학과 있는집 자식 끼리 모이는 네트워크 – 를 가지지도 않았거니와, 인생 목표도 소위 한국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아무리 의견 개진이 자유로운 민주사회라고 한들, 나는 취직이나 일자리, 기업과 관련된 주제는 주로 회피해왔다. 오히려 반대 기제로 포용만 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저에는 결국 내가 안 해봤으니 나는 말 하면 안되겠지, 덜 힘든 사람은 더 힘든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겠나라는 이유에서이다. 그게 맞고, 맞아야 한다. 하지만 기왕 헬조선 논의를 하는 만큼 무슨 소리라도 얹혀서 해보고 싶다.

SF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헬적인 한국형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딱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잠재적인 생산가능인구가 대동단결하여 아예 구직을 아예 안해버리는 것. 둘째, 잠재적인 소비가능인구가 대동단결하여 소비를 아예 안해버리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뒤에 문제는 아몰랑이다. 나는 이 두 상황이 현실에서 가능할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가 여기서 끌어오고자 하는 개념은 ‘참여’의 가치와 참여로 인해서 어찌저찌 모양새나마 ‘건강한’ 사회의 틀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남한 사회의 그 ‘사회’가 사회스럽나?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와 이해집단간의 상호작용이 최소한으로 이루어지는 항상성이 유지된다면, 나는 한국 사회에 그 어떠한 불만도 갖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사회는 ‘그’ 사회도 ‘저’ 사회도 아닌 것 같다. 사회가 저마다 달라도, 사회의 공통적인 특성은 반드시 존재해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회의 존재? 존재 여부를 떠나서 개개인의 참여? 참여가 의미가 있으려나. 보다 정확히는 이렇게 ‘조선반도식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참여라뇨! 요즘은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는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의 형성과 고착이 정말 개인의 단위에서 이루어졌을까. 인간은 인류 역사의 변천에 종속되어 있는 구체적이고 고고학적인 존재이므로, 매우 다양하고 개별적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사회 구조에 있어 거의 ‘원자’로 취급되는 인간은 사회 구조의 심연 속으로 계속 모습을 감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개인의 성질을 규정하는데 있어 해당 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증거로 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물론 딜레마이긴 하다. 개인이라는 양면성의 쟁점에서 볼 때, 과연 개인이 집단의 영향 아래 형성되는 건지, 혹은 인간의 유전적 특성상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한 답을 내리긴 어렵다.

하지만 서구 사회가 합리적 개인주의를 스스로의 사회에 ‘배태’한 것은 ‘씨족’적 존재의 인간들의 개인주의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긴 부르주아적 사회 관계와 도시의 형성, 생산과 산업의 성숙, 양가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기능, 과학과 기술의 독점적 발전, 고유의 지식 체계 형성 뭐 대충 책에서 보는 그런 말들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서구의 개인성과 서구의 사회성이라는 재료를 저울에 올려보면, 사회로 무게가 쏠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Final Portfolio

나의 의문은, 왜 서구의 경우 사회가 국가를 만들고 규정하는데, 남한의 경우는 국가가 사회를 만들고 규정할까-까지 간다. 게다가 여기에서 개인주의적 가치 혹은 개인성을 논하는 것이 – 물론 그 개인성의 하위 개념이 많겠지만– 가능한가? 개인주의적인 색채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것을 핵심 사조로 삼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회 아래에서 작동하는 개인이다. 뭉쳐서 연대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한국형 모더니티와 적합하지도 않다고 본다.

다만 건강하고 의미있는 합리적 개인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게 무엇인지, 혹은 비 합리적인게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주체가 존재해야한다. 그 것이 국가든 사회든. 우리는 헬조선의 망령하에 어쨋든 살아남아야하는 서바이벌의 연속선에 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뭉쳐진 개인들의 대응, 그것이 헬조선에 대한 대응책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여기에 태어났다. 보다 정확히는 여기서 태어나버렸고, 또 어찌됐든 살아가고 있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먹고사는 과정을 과격하게 표현 해보자면,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DNA와 기질적 특성을 잘 볶아 먹으면서,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의 내재화된 특성, 이를테면 여러가지 제도와 문화, 관습,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실 정치 또 경제적 특성들과 맞장구 치듯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에 적응하면 어차피 태어나 버린거 징징대며 그냥 쭉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개인의 기질이 그 사회가 제시하는 합리성과 충돌하게 되면 사회의 합리성에 대한 개인의 일탈이 반드시 뒤따른다. 그 대안이 자살이건 이민이건 혹은 ‘맞춤’ 그 자체를 거부하는 특정한 행동양식이건, 우리는 결국 주어진 조건에서 투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의 전개과정에 있어 이른바 헬조선은 시민들의 행동양식을 ‘조정’했는가 혹은 그저 겸허이 ‘받아’들였는가. 고민 해볼만한 가치가 있으면서도, 별로 하기 싫은 고민이기도 하다.


출처 :디스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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