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이영도 개똥철학 분석글 읽어보니 눈마새나 다시 읽어야 겠다

oo(210.216) 2015.12.02 21:21:27
조회 1656 추천 9 댓글 6

 그런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어야 할 점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를 분석함에 있어 ‘피를 마시는 새’의 도움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예 ‘피를 마시는 새’를 보지 않고 이 글을 썼으면 한 작품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이미 늦었고, 사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에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 사이에서보다 주제의 연계가 더 눈에 띈다. 이미 포착한 사실을 무시해가며 분석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이 글을 씀에 있어 ‘피를 마시는 새’의 인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타자(打者)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뭐 어쩌겠는가.

 

 

 1. 카시다 암각문 채우기

 

 

 작품의 맨 마지막을 담당하고, 또한 번외로 떡밥거리까지 제공하여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암각문의 대부분이 용인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마지막 문장에 와보면 이 글이 용인의 예를 통해서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암각문에서 용인은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고 명확한 예시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끝까지 읽은 시점에서, 우리가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을 직접 채워보려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선택은‘미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족스러운 답인 것 같진 않다. 작품 속에서 비아스나 갈로텍, 케이건과 같은 인물은 사람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좋은 보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례 또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증오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랑도 보여주고 있다. 또는 그 둘이 아닌 다른 수많은 것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는 무엇이 있는가? 打者의 작품을 충분히 많이 접해본 이라면 당연히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만한 후보가 있다. 타인.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등의 작품에서 打者의 인간은 항상 상보적인(complementary)존재적 위상을 가진다. 사람은 ‘나를 위한 나’뿐만 아니라 ‘타자(他者)를 위한 나’로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나의 다른 글 ‘폴라리스 랩소디를 분석해보자’에서 인용된 ‘조이스와 바흐친’ 부분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빈칸에 ‘타인’을 넣으면 카시다 암각문의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 용인의 예민함은 모든 방면에 있어 발휘되는 것 같지만, 역시 두드러지는 것은 ‘받아들임의 극대화’이다. 어쨌거나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우선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인은 가장 먼저 인식하고, 가장 강하게 인식한다.용인에게 있어 ‘흘려들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반응’이라는 점을 주목하자.결국 용인이 아닌 사람과 용인이 만나면 능동적인 주도권은 용인에게 있지 않다. 용인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자각하기도 전에 용인이 알아서 ‘반응’할 테니까. 결국 용인은 한 자아에 침투해 있는 타인의 존재를 가장 명확히 예시할 수 있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다른 답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일 수 있겠다 싶다. 어쨌든 즐길 거리는 많을수록 좋다. 또한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타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람에겐 ‘타자를 위한 나’도 있지만, 역시 ‘나를 위한 나’의 자리도 있는 것이다.그러니 ‘타인’도 만족스러운 답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로 빈칸을 채울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나름대로 생각해낸 답을 하나 제시해 보고자 한다. 내가 제시할 답이 만족스러운 답이라고 나 스스로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이 글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될 것이다.

 

 

 2. 고착 – 남매, 시간의 역류, 케이건 드라카

 

 

 ‘눈물을 마시는 새’ 4권엔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바로 작품에 대한 打者의 직접적인 생각이 담긴 용어사전(?)이다. 작품을 해석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이 길잡이를 이 글에 끌어다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용어사전 중에서도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항목이 무엇일까. 내 생각엔 ‘남매’ 항목인 것 같다.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기도 하고, 가장 직접적인 打者의 논평이 곁들어 있기도 하다. 그곳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매들은 유난히 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케이건-극연왕은 서로가 가진 결코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던 한 순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별하고 있다. 비아스는 화리트에게 오누이의 정을 품고 있지 않지만, 동시에 남매간에 가져야 할 터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카린돌과 화리트는 죽음 이후 하나가 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갈로텍은 세페린에 대한 편집증적인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그녀를 죽음에서 돌아온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결국 그 자신 역시 광적으로 복수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모와 륜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엇갈리는 방향을 향해 걷는 듯싶다. 가장 서로를 위하지만, 그래서 서로가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그러한 관계이다. 천 년이 지나서도, 죽여서도, 죽어서도, 죽음에서 되살아나서도, 남은 생애를 함께 하면서도 작품 속에서 남매들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고착화되어 있다. 打者는 이러한 고착을 용어사전에서 ‘평행선’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작품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은 잘 알고 있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는 세계 자체도 고착되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과거가 현재와 중첩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물론 춤추는 자가 자신의 춤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수많은 정체(停滯)들이 발생한다. 어느 시점에서건, 시간을 한 단면으로 자른다면 그 시간은 순간적이며, 경계적이다. 현재의 사건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결과이며,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원인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그러나 ‘눈물을 마시는 새’의 시간은 멈춰있기 때문에, 또는 멈춘 상태로 흐르기 때문에, 시간의 잘린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는 마치 한계선마냥 두텁다. 그 두터운 현재의 지층 사이로 과거가 침투한다. 현재가 미래의 원인이 되지 못해 미래는 없어지며, 과거의 결과가 되지 못해 과거의 결과들이 현재에 망령처럼 살아 있다. 결국 시간이 역류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설정을 이미 ‘퓨처 워커’에서도 보았고, ‘폴라리스 랩소디’의 바라미 역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존재로서 이런 설정을 도입하고 있다.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과거가 현재를 적극적으로 옮아 매고 있다. ‘퓨처 워커’에선 ‘hjan’에 의해 과거가 현재로 역류하고, ‘폴라리스 랩소디’의 바라미에게 전달된 과거 인물의 유지는 현재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모든 이들 중에서도 이러한 정체가 가장 잘 나타나는 이는 춤추길 그만둔 장본인, 케이건 드라카이다.

 

 

 케이건 드라카의 정신 상태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가 스스로 자주 ‘분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분리되는 이유는 그가 두 가지 시간대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모두 과거의 유산들뿐이며, 그것과 관계없는 모든 것들은 그저 스쳐지나가고 있다. 그는 과거에 천착시킨 나가의 배신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희미한 기억만 가지고 있으며, 명확한 시간관념조차 가지지 못한다. 과거 아라짓 왕족이었던 자의 의무이기에 헤인샤 사원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구출대와 이별하자마자 그는 그들과의 구출행을 기억에서 흘려보낸다. 그에게 있어 이제 막 끝난 구출행과 20년 전의 판막음은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둘 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시간의 사건들이 된다. 그가 현재를 살지 않고 과거를 살기 때문이다. 현재 시간에서 그가 자의든 타의든 무엇인가를 행하는 이유는, 그가 과거에 아라짓 전사였고, 키탈저 사냥꾼이었고, 여름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오직 과거에만 존재와 행동의 이유를 두고 있고, 그래서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착이 앞서 말한 세계의 정체를 낳게 된다.

 

 

 3. 키탈저 사냥꾼, 모순, 용의 특별한 힘

 

 

 작품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일종의 메아리처럼 실체 없이 되풀이되기만 하는 재미있는 소재가 있다. 현재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되던 많은 것들이 현재로 소환된다. 흑사자, 용, 왕, 아라짓 전사, 대확장 전쟁, 용인 등등. 그런데 키탈저 사냥꾼은? 과거의 다른 것들이 현재를 무대로 활동하는 가운데 키탈저 사냥꾼만은 이전처럼 케이건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사실 키탈저 사냥꾼은 작품의 경계선상에서 더 많이 부각되는 소재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챕터 0을 포함하여 18개의 챕터 중 3개의 챕터 머리말이 키탈저 사냥꾼 관련 글이고, 4권 말미의 용어 사전에도 그들이 등장하며, 무엇보다도 제목이 키탈저 사냥꾼의 전승이다. 작품의 제목과 챕터 머리말이 작품의 해석에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키탈저 사냥꾼은 독자 입장에선 한 번 쯤 생각해봐야 할 소재이다. 그러나 그 중요도에 비해 작품 자체에선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몇 가지 전승들이 전해지고, 케이건 드라카의 수많은 정체 중 하나가 키탈저 사냥꾼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그들이 스스로를 용의 자손으로 여기고, 모순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 적은 정보에서 우리는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모순’이다. 서로 다른 두 명제가 논리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면서도, 동일한 정도의 진리값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모순적’이라고 부른다. 어느 쪽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두 명제는 정지 상태에서 고착된다. 그러니 모순이 고착 상태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는 서로 맹렬히 대립하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모순은 가장 격렬하면서도 가장 고요하다.

 

 

 키탈저 사냥꾼과 모순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것은 역시 용이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식물로 태어나지만 식물의 가장 큰 적이 되는’ 용은 모순의 물화나 다름없다. 그런데 키탈저 사냥꾼은 모순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모순의 존재인 용을 숭배하며, 용의 자손을 자처한다. 용의 특별한 힘은 무엇인가? 용이 가지는 특별한 힘은 두 가지이다. ‘불을 쓴다’는 점, 그리고‘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불을 쓰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 왜 특별한가? 그 두 가지 능력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4.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하나는 셋을 부른다, 입장들, 모순의 특별한 힘

 

 

 작품의 중심적인 주제는 역시 작품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법이다. 작품 제목인 ‘눈물을 마시는 새’와 그것이 암시하는 ‘왕’만큼이나 자주 반복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이다. 오죽이면 작품의 첫 번째 챕터 머릿말을 담당하겠는가? 그리고 그 금언과 한 쌍이 되는 ‘하나는 셋을 부른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셋’은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이고, ‘하나’는 그들이 상대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선 ‘상대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언뜻 내비쳐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두억시니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륜과 함께 기뻐하던 대선사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대선사는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티나한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기랄, 내가 대적자야! 그까짓 놈들, 내가 다 물리치지.”

 비형과 륜은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당신이 대적자였소. 그럼 길잡이에게 물어봅시다. 케이건? 티나한이 그 두억시니들을 저지할 수 있겠나?”

 “만용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케이건의 말투에 비형은 그만 미소짓고 말았다. 티나한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비형을 쏘아봐준 다음 케이건을 쳐다보았다.케이건이 먼저 말했다.

 “수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소. 티나한. 당신 길잡이의 판단을 믿으시오.”

 티나한은 길잡이 케이건을 존중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승심 또한 존중했다.

 “너는 상대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소.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

 “전혀 다른 말이오. 투정이 심한 어린애에게 투정이 왜 나쁜 건지 자상하고 끈기있게 설명해준다면 그것은 어린애를 ‘상대하는’ 거요. 하지만 어린애의 머리를 돌로 내려찍으면 그건 그냥 어린애를 ‘죽이는’ 거요. 내 방법은 그런 식이오. 잔인하고 추하고 악의에 찬 것이지.”

 티나한은 부리를 닫고는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대적자’는 물론 ‘간단히 말해서 방해되는 것 다 때려 부수는 파괴자’이다. 그러나 대적자의 ‘때려 부숨’은 자신의 ‘죽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케이건은 말하고 있다. 이 대화 도중에 쥬타기 대선이 대적자의 행동에 대해 길잡이의 조언을 구하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즉 대적자의 ‘때려 부숨’은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지, 무작정 ‘죽이고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피를 마시는 새’에서 ‘상대함’의 의미에 대해 다루는 또 다른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옛날이야기?”

 론솔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노쇠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지만 사모 역시 옛날이야기만 중얼거리는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그의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사모는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멘이 길잡이일 것이다. 그을린발은 대적자일 테고. 하지만 나는 세 번째 레콘을 찾지 못했다. 세 번째는 요술쟁이다. 그 여자, 아니, 남자일지도 모르지.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내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론솔피는 멍한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왜 그 셋을 찾아야 하는데?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했지. 뭘 상대하려고?”

 “치천제.”

 론솔피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엘시가 황제가 되려면 치천제는 사라져야 한다.

 “계속 말해봐.”

 사모는 론솔피가 상대한다는 말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해석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

 

 

 “나는 상대한다고 했지 상대하는 방식은 말하지 않았다. 레콘들은 신을 경배할 수도 있다. 혹은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투쟁할 수도 있다.만약 레콘 길잡이와 대적자, 요술쟁이가 사람의 신과 싸우기로 한다면 레콘은 마족이 되겠지.”

 론솔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너는 우리가 마귀 종족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그래.”

 그 단호한 태도는 론솔피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다. 론솔피는 사모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했다.

 “혹은 신의 금군 종족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사모는 팔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나 인간, 나가도 그렇다.”

 

 

 부정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상대함’의 방법이다. 만약 부정한다면, 죽이는 것, 일부를 부수는 것, 설득하는 것이 각각‘상대함’의 방법이 된다.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대상과 마주하는 것은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한다’는 말은 ‘상대하는 방법들을 갖추고 자신과는 다른 대상과 마주서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내 앞에 있는 내가 아닌 자는 동등한 높이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하나’는 ‘상대하는 대상’이고, ‘상대함’은 ‘하나와 마주섬’이라면, ‘셋’은 무엇인가? 왜 하필 상대하려면 셋이 갖춰져야 하며, 그 셋이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에서 내 능력만으로 이것을 답하는 것이 조금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니 이 방면에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의 말을 빌려와야겠다. 내가 인용하려는 인물은 헤겔이다. 헤겔은 모더니즘의 완성자이자, 수많은 안티 철학자들(즉 실존주의자,생철학자, 포스트모더니스트 등)을 거느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사람의 사상을 모두 이해한 후 작품에 완벽히 적용시키는 것은 나에겐 무리이다. 나는 그에게서 ‘변증법’만 살짝 빌려오도록 하겠다.

 

 

 철학 자체든 그것에 사용된 용어든 간에 헤겔의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칸트의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변증법’도 사실은 칸트의 용어이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오성(悟性)의 기능과 한계를 그은 후, 이 한계를 넘어서는 사변적 이념을 시도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한다. 이성은 ‘완전한 통일에의 욕구’ 때문에, 순수오성의 종합을 통한 이성추리를 시도한다. 이 이성추리는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인 심리학적 이념은 다시 네 가지 이율배반(二律背反)을 낳는다. 그것은 각각 다음과 같다.

 

 

㉠ 정립 – 시공간은 한계를 가진다

 반정립 – 시공간은 한계를 가지지 않고 무한하다.

㉡ 정립 – 세계의 모든 복합적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성립된다.

 반정립 – 세계의 어떤 복합적 실체도 단순한 부분들로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 정립 - 세계에는 자유에 의한 원인이 있다.

 반정립 – 자유는 없고, 일체가 자연(결정적)이다.

㉣ 정립 - 세계원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어떤 필연존재가 있다.

 반정립 – 이 계열에서 필연적인 것은 없고 일체가 우연적이다.

 

 

 각각 모순적인 두 명제가 동시에 참으로 증명되는 이러한 이율배반이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가상의 논리학(Logik der Scheins)’이기 때문이다. 이 가상의 논리학을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헤겔의 철학은 칸트가 형이상학의 한계라고 못 박아 놓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정립(Thesis)과 반정립(Antithesis)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종합(Synthesis)을 기획한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서의 변증법이 나타난다. 나는 변증법을 헤겔 철학 전체와 연계하여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변증법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항을 특별히 알아놓아야 한다. 첫째, 변증법은 모순적인 두 대상을 공존시킨다. 둘째, 정립과 반정립이 일단 변증법을 통해 종합되면, 그것은 지양(止揚, aufheben)된다. 지양이란, 정립과 반정립이 각각 자신이 가진 의미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상호작용 속에서 각 의미를 보존함을 뜻한다. 좀 어렵게 설명되었는데, 예를 간단히 들어보자. ‘낮’과 ‘밤’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 둘의 종합인 ‘하루’라는 말 속에서 낮과 밤은 공존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의 의미를 긍정한다. ‘삶’과 ‘죽음’도 모순적이지만, ‘일생’이라는 더 높은 차원에서 동시에 긍정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지양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어떠한 존재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서로 모순적이다.

 

 

 변증법을 개념의 시초에서부터 추적했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지도 모르지만, 사실 변증법은 거칠게 사용한다면 굉장히 넓은 범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의 대화, 그중에서도 특히 토의나 논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는가? 서로 대립되는 두 입장이 말을 매개로 하여 상대의 입장을 변화시키려 한다. 만약 합치된 결론이 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면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것이다. 한 입장만 변화하여 다른 입장에 동화되어버린다면, 그것도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두 입장과 다른 제3의 입장에서 통일된 결론이 도출된다면, 그것은 ‘종합된’ 것이다. 정말 거칠게 말하자면, 변증법은 서로 다른 입장들이 발생할 때마다 시도된다. 우리가 한 입장에 서서 다른 입장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상대할’ 때마다 변증법은 시도된다.

 

 

 이제 작품에 대입만 하면 된다. 셋은 왜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선 상대하려면 대상을 찾고, 판단해야 한다.(길잡이) 그리고 대상과 맞서야 한다.(대적자) 마지막으로 그 대상과 내가 지양(止揚)되어야 한다.(요술쟁이) 요술쟁이의 역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설명은 사모 페이의 말에서 나타난다.

 

 

 “정의와 요술은 반대되거든.”

 “응?”

 느리게 움직이는 햇빛을 따라 사모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우아한 발놀림으로 허리와 다리를 차례로 데웠다.

 “정의(正義)를 가장 간단히 정의(定義)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거지. 내 목숨과 네 목숨은 같다. 따라서 내 목숨과 네 목숨은 똑같이 대해야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요술은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지. 주테카가 세 번째 레콘이라면 그는 요술쟁이여야 하는데 정의를 사랑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양의 과정이다. 결국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와 ‘하나는 셋을 부른다’라는 두 금언은 변증법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셋’은 ‘하나’를 ‘부숴버림’으로써 상대할 수도 있다. 변증법적 지양은 상대함의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셋이 하나를 ‘변증법적으로 상대할 때’ 기묘한 현상, 즉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에 모순이 특별한 힘을 가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모순인 것은 지양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용은 모순의 알레고리이다. 용은 불을 사용한다. 헤겔이 인용하는 철학 중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것도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세계의 근원이자 근본원리라고 말한다. 불은 ‘만물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원리를 보여주며, 변화와 생성은 언제나 모순되는 것의 교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有)와 무(無)라는 두 모순적 개념의 지양, 유가 무가 되고, 또 무가 유가 됨은 ‘생성, 변화’에서 가능하다.(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794 를 읽으면 된다. 네이버캐스트 철학의 숲 – 헤라클레이토스 편. 아니면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도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또한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모순을 계속해서 변증법을 통해 지양하면 결국 어떤 완전한 일자(一者)로 귀결된다. ‘너와 나’가 지양되면 ‘우리’가 되고, ‘우리와 저희’가 지양되면 ‘사회/국가’가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로 지양되면?

 

 

 “증오와 반목이 영원할 거라는 저주처럼 들리는군. 어떤 한 종족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단 하나의 종족만이 승리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까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빛이 탄로났으니까요.”

 “그렇군.”

 사모 페이는 알고 있었다. 라수는 언젠가 환상벽에서 읽은 그 충격적인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도깨비와 레콘, 나가, 인간은 두억시니를 남겨놓고 빛이 되어버렸던 첫 번째 종족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 네 신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되면 더 이상 윷가락은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다른 세 종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족도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 만약 네 종족 중 한 종족이 완전성을 획득하면 다른 종족은 변화 없는 정체에 빠져버리게 되므로.

 “우리 네 종족은 모두 동시에 완전성을 얻어야 합니다. 한 종족이라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종족이 준비가 될 때까지 끝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되도록 그것이 즐거움이길 바랍니다.”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

 

 

 (…)

 

 

 “……30만 년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모는 비늘을 부딪쳤다. 그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동작에 엘시는 충격을 느꼈다. 사모는 고통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거?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고상해질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지. 엘시. 그대에게 미래를 알려주지. 나 자신의 이해가 얕기 때문에 약간 조악한 표현을 쓰게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사과하마. 사람들은 앞으로 30만 년 동안 서로를 가장 가치 있는 사냥감으로 대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얻게 되지. 그런 자각을 느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30만 년이다.”

 

 

 5. 방법론 – 용인, 군령자, 왕, 일기와 수수께끼와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 하늘치

 

 

 모순은 완전성을 담보한다. 신이 실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관에서 완전성은 아마도 가능한 개념일 것이다. 이미 ‘빛의 종족’의 전례가 있으니 당연히 가능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사람들은 어쨌든 삶에 충실하다보면 30만 년 후에 완전성을 획득할지도. 그러나 기다림은 길고, 세계엔 그 기간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몇 가지 모티브들이 발견된다.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우리가 글의 첫 부분에 언급했던 용인이 있을 수 있다. 용인은 특유의 예리함을 통해 완벽히 타인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용인은 한계를 지닌다. ‘드래곤 라자’에서 엘프가 왜 세계로부터 도태되는가? 일반인 사이의 용인은 륜의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용인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하늘치와 퀴도부리타라는 한 쌍을 감당하기도 버거워했다.

 

 

 군령자는 서로 다른 영(靈)들이 하나의 육(肉) 속에 공존하는 자이다. 군령자가 모순의 결합을 체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은가? 확실히 군령자는 하나의 육체 속에서 다수의 영혼들을 공존시키며, 이를 통해 영혼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작중 갈로텍과 탄실 구마리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군령자의 영혼은 ‘영적 잡종’이다. 그러나 군령자에게서 일어나는 영혼의 결합은 확장적이지 않고 수렴적이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잠시 말을 잠시 빌자면 ‘개념의 확장 대신 개념의 소거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군령자들의 영혼은 ‘현재 군령자의 육체’가 살아가는 방식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변증법의 종합(Synthesis)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영혼이 가진 종족적 특성을 ‘버리는’ 방식으로 결합한다. 어쨌거나 육은 영에 의지하고, 영은 육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령자 역시 완전성을 위한 충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용인도 군령자도 안 된다면, 왕은 어떤가? 왕은 라수 규리하가 보장하는 좋은 답이기도 하다. 천지척사에서 라수는 사모에게 “하지만 우리에겐 왕이 있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왕은 무엇인가? 왕은 대리자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유지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동체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자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왕은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폭력성을 희생을 통해 해소해주는 자로 설명되며, 이것은打者가 말하는 대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의 직접적인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은 기실 공동체의 폭력성 말고도 다른 수많은 것들을 대신한다. 대호왕이 된 사모 페이가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점이 이것을 명확히 해준다. 왕의 얼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아라짓 전사들은 왕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상상해낸다. 도저히 위조해낼 수 없고, 그래서 헷갈릴 수도 없는 나가 특유의 목소리조차 병사들은 마음대로 창조해낸다. 왕으로서 살아가는 한 사모는 자신에게 투사되는 공동체의 욕망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왕이 입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집단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을 ‘희생’을 통해 해소시키고, 이것이 완벽하진 않아도 ‘서로가 하나됨’의 감각을 그 구성원들이 익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은 완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은 사실상 외부적이고, 그래서 일시적인 해결책이다. 구성원들‘끼리’ 해소된 모순이 아니니 입장의 차이는 여전하다. 언젠가 벌어질 때까지 봉합해 놓은 상처나 다름없다. 집단을 유지하려면, 그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모순을 일으키는 입장들을 계속해서 ‘죽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자를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후자를 ‘피를 마시는 새’에서 보게 된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아직 있는 것 같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네 선민종족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며, 그에 따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 이 네 종족의 서로 다른 개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피를 마시는 새’의 단행본엔 통신연재본에는 없었던 글, 즉 작품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하이스 대학의 무명 학자의 일기’가 있다. 그 일기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나가는 ‘세상을 가깝다고 말하는 자’이다. 나가는 표면, 경계에 위치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에 걸쳐 있고, 외부와 가장 직접적이다. 나가는 ‘가깝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음과 떨어져 있지만 외부의 영향에 예민하고(외부의 불꽃을 볼 수 있을 정도로),정신적으로 타인과 ‘말’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연결되지만 냉철한 이성을 공유할 뿐 영혼 깊숙한 감정을 공유하진 않는다. ‘눈물을 마시는 새’ 단행본 4권의 용어사전에 나오는 ‘심장탑이 하늘과 땅을 잇고 있다’는 표현은 나가의 경계적인 위치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과 사람 사이에 위치하는데, 그들이 받은 선물인 ‘신명’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가지기 때문에 신에 가까울 권리를 가지며, 그래서 신의 권리인 불사(不死)를 조금이나마 따라할 수 있게 된다.

 

 

 도깨비는 ‘세상을 느리다고 말하는 자’이다. 도깨비는 빠르기 때문에 쉽게 질리지만, 더욱 빠르게 새로운 대상을 찾아낸다. 그들이 선물 받은 ‘불’은 이러한 그들의 ‘빠름’을 잘 보여준다. 불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것들도 빠르게 변화시킨다. 순간을 즐기며 끊임없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창조해내는 도깨비는, 그래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피와 폭력을 싫어한다. 그것을 만나면 그들은 ‘죽음도 쫓아오지 못하는 속도’로 도망가거나(어쨌든 이미 도깨비불이 된 어르신은 죽음조차 따라잡기 힘겨워한다), 아니면 상황 자체를 종결시켜 그것을 끊어버린다. (페시론 섬과 아킨스로우 협곡에서처럼)

 

 

 레콘은 ‘세상을 엉성하다고 말하는 자’이다. 그들은 비길 수 없는 단단한 육체로 무장하고, 어떤 사람도 설득할 수 없는 완고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겐 자신의 육체만큼이나 단단한 자신만의 무기와, 자신의 정신만큼이나 굳은 사명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의 무기는 신만이 줄 수 있는 단단함을 갖추고 있다. 무기를 든 레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상들은 엉성하고 무른 것들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선민종족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일도 그들의 시각에선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하늘의 왕독수리를 맞추기 위해 깊게 뿌리내린 나무를 뽑아 던질 수 있고, 물을 길어 쓰기 위해 운하를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명 학자의 일기’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말하는 자’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 대답은 무명학자의 몫이지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작품에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무명 학자의 일기보다 더 모호하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만한 소품이 하나 더 있다.

 

 

 문 : 나가와 도깨비, 인간, 레콘이 살고 있는 집에서 누군가가 바닥에 바늘을 떨어뜨렸다. 잘 보이지 않는 바늘을 찾아내는 방법은?

 답 : 도깨비가 바늘이 뜨거워질 정도의 도깨비불을 퍼뜨리고 나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바늘을 눈으로 확인하여 집어올린다. 그리고 인간은 온힘을 다해 레콘을 말려야 한다. 설득력이 충분하다면 레콘이 집을 들어올려 흔드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칼리도 지방에 전해지는 수수께끼.

 

 

 기발하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이는 이 소품이 네 선민종족의, 특히 여간해선 작품에 잘 나타나지 않는 인간의 특성을 언뜻 보여준다. 이 소품에서 도깨비는 불로 ‘바늘을 재빨리 변화’시키고, 나가는 ‘표면에서’ 바늘(외부)의 불꽃을 본다. 레콘은 아무렇지도 않게 ‘엉성하게 결합된 집과 바늘을 해체’시킨다. 그리고 인간은 ‘설득’을 통해 레콘을 말린다. 인간은 ‘설득하는’ 존재이다. 세계에서 나가는 ‘거리’를, 도깨비는 ‘속도’를, 레콘은 ‘강약’을 보고, 인간은 ‘관계’를 본다. 아마 무명 학자는 군령자에게 ‘세상은 뒤죽박죽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그들은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라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명확해 보이지 않는 대상에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하여 ‘연결되어 존재’한다. 규리하 공작으로서 정우 규리하의 지위가 적법한지 적법하지 않은지는 도깨비에겐 ‘시시한 일’이다. ‘레콘 조사가 되고 싶은 것’과 ‘하늘낚시터를 만드는 것’ 사이에 등호기호를 붙이는 것은 레콘에게 ‘수단과 목적을 헷갈린’ 판단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상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그것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보고, 그 관계 사이에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그래서 도깨비에겐 시시할 따름인 적법성을 따져보고, 레콘에겐 헷갈릴 따름인 수단과 방법의 동일시를 합리화한다. 대상이 정의되어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어떤 관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지 알 수 있으니까.간략히 말해, 인간에게 있어 관계는 현상학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움직임, 운동, 연결, 한 곳과 다른 곳의 사이에만 존재한다, 마치 바람처럼, 혹은 ‘어디에도 없는 신’처럼.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은 나늬이다. 나늬는 작품에서 ‘네 종족이 모두 아름답다고 느끼는 전설적인 미인’으로 표현된다. 또 작품 후반부의 그리미 마케로우의 말에 따르면 미모든 달리기든 나늬는 ‘모든 종족을 따라오게 만드는’ 인간이다. 나늬에게는 또 다른 개성이 있는데, 나늬에겐 그녀와 닮은 자매인 ‘보늬’가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보늬가 나늬보다 떨어지는 미모를 가진다고 판단되며, 그래서 나늬와 비교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는 점이다.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보늬가 부정이라면 나늬는 긍정이다. 나늬는 모든 종족이, 모든 사람이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가치를 상징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작품에서 데오늬 달비가 ‘달리기로 사람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나늬이기 때문에, 나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마치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 쉽다. 사실, 사람들의 나늬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다른 이의 말을 빌리겠다. 조카딸에게 쓴 편지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작품 ‘백치’를 쓴 주요의도가‘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아름다움이 무엇이기에 세상을 구원하는가? 아름다움은 가치평가이며, 개인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인식의 장벽을 낮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에서 내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긍정할 수 있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움은 능동적이고, 지향적이며, 참여적이다. 모든 사람이 한 명의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모두가 나늬를 통해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늬는 ‘모든 사람이 하나로 지양될 수 있다’는, 완전성의 신화(神話)이다.

 

 

 이제 나늬를 통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완전성을 확실히 담보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할 모티브가 있다. 사실 작품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완전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치. 첫 번째 종족이 남겨준 완전성의 상징이자 완전성에의 약속. ‘피를 마시는 새’에서 사라말 아이솔을 통해 힌트를 얻은 제이어 솔한은 하늘치가 ‘영에 작용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에 어떻게 작용하길래 그것이 완전성으로의 약속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올바른 하늘치 사용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쨌든 하늘치가 영에 작용하는 하나의 예시를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아실 제이어의 하늘치 사용법이 명확히 묘사되지 않은 것에 비해, 이이타는 하늘치와의 신비한 정신적 합일-분화의 과정을 거쳐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이이타는 이이타-하늘치였으며, 하늘치-이이타였으며, 하늘치-하늘치였으며, 이이타-이이타였다. 이이타는 하늘치와의 동화를 거치고, 하늘치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것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재미있는 가정이 떠오르지 않는가? 두 명이 동시에 한 하늘치와 동화하면 그 두 명은 하늘치 속에서 동화될 수 있는가? 동화를 거친 다음엔 하늘치와 그 두 명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또 한 가지, 정우가 하늘치 곁에서 엿새 동안 ‘용이었던’ 이후, 정우 역시 하늘치를 움직일 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정우는 이이타와 마찬가지로 하늘치와의 ‘영의 지양’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하늘치는 작품 속에서 완벽한 신용을 가지는 완전성에의 방법일 수도 있다.

 

 

 6.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매우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역시 ‘완전성의 추구’이지 않나 싶다. 우리는 바로 5번 장에서 완전성을 추구하려는 현란한 시도들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불완전성은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모순적이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타자와도,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를 끔찍이 위하는 남매라 하더라도, 결국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진 않는다. 변증법에 대해 짚어둘 점을 세 가지 꼽았을 때, 나는 세 번째 사항으로 ‘어떠한 존재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서로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적어도 완전성이 실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에선 ‘서로 모순적인 것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순은 그 자체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해 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나는 이 글을 카시다 암각문의 빈 칸을 내 나름대로 채우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추천 비추천

9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272530 무갤 홍어들 오늘 발악을 하네 [13] 하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15 782 27
272455 은강불괴라는게 실제 쓸수 있는 말이냐? [34] 외ㅓㅏㅇㄹ너ㅗ(211.109) 15.12.14 22903 66
272431 한국무협지는 무협지가 아니지 김용이 진짜지.. [10] 김용이 진짜 무협지의 신(125.189) 15.12.13 1322 15
272379 독고구검 썰과 개인적 해석 [신조협려-소오강호] [25] 천화(182.172) 15.12.12 2762 8
272275 이후의 4-5화 분량은 안봐도 알거같다. [4] ㅇㅇ(221.162) 15.12.11 1360 16
272259 방취아가 왜 이렇게 좋지 [6] ㅇㅅㅇ(14.52) 15.12.11 1684 18
272103 군림천하 다음편스포한다 [4] 1(118.33) 15.12.09 1642 25
272093 서문연상의 예언 [9] ㅇㅇ(221.162) 15.12.09 2041 18
272025 길도명 희인몽 2-4.txt [7] 몽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8 1332 15
272020 글을 아무리 잘 써도 미완작은 이제 안살련다. 좌백 한테 제대로 데였다. [7] ㅇㅇ(49.171) 15.12.08 1213 18
271967 군림 어차피 답 안 나오는데 ntr 막장으로 ㄱㄱ [3] ㅋㅋ(118.44) 15.12.08 1103 14
271950 [군림천하 19禁 동인지] 갈황♡누산산 [3] 淸皇叔輔政王.. ■x■x(121.165) 15.12.07 7842 15
271923 [군림천하감상] 수다쟁이 진가놈이 말이 없다니 정말 당황했구만 기래ㅋㅋㅋ [9]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7 2560 15
271850 겜판소설이 ㅄ 쓰렉인 이유 [5] ㅇㅇ(123.142) 15.12.06 681 6
271700 [군림천하감상] 용노사식 막판 긴장감 올리기. 낙일방 다음에는 성락중인가 [11]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2152 15
271691 길도명 희인몽 2-3.txt [5] 몽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174 10
이영도 개똥철학 분석글 읽어보니 눈마새나 다시 읽어야 겠다 [6] oo(210.216) 15.12.02 1656 9
271289 백모란의 자식이 9명 이상이라면 구파전체가 의심스럽다ㄷㄷ 아비가 몇이냐 [9]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30 2235 19
271250 마! 산월홈즈 중산왓슨 무시하냐? [13] ㅇㅇ(218.147) 15.11.30 2316 37
271195 설봉 개쩐다 [18] ㅇㅇ(115.40) 15.11.28 2405 12
271134 길도명 희인몽 2-2.txt [8] 몽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7 1886 13
271086 아니 걍 용가놈은 늦게 나온 놈이 쎄다니까 ㅋㅋㅋㅋㅋㅋ [14] ㅇㅇ(218.147) 15.11.27 2128 20
271072 구봉의 수준에 대해 [17] chess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7 1357 8
271056 길도명 희인몽 2 예고편 [12] 몽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6 1033 10
270915 [군림천하감상] 악산대전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겨놓고 싸운다는 병법이야기 [12]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4 2991 14
270762 (팬픽) 희인몽과 길도명.txt [14] 몽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2 1828 22
270625 작가등급 내 기준으로 나열해봄. (작가추천겸)(수정) [42] 읔엨(183.101) 15.11.21 4638 10
270600 [군림천하감상] 서안파트로 왔다는건 무당산이 막혔다는것. 검마는 도대체 [9]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20 2822 16
270424 무갤 생기자마자 와서 쭈욱 눈팅하고 있지만 혐오종자들은 꾸준하네 [19] ㅇㅇ(210.105) 15.11.18 1017 15
270295 이번 불법시위가지고 자꾸 물타기하는 새끼들이 있어서 올린다 [22] 아니시발(159.63) 15.11.17 1204 24
270258 [군림천하감상] 형산파와의 결전을 앞둔 사람 머리 좀 그만 괴롭혀라ㅠ [8]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16 3482 17
270165 쟁선계가 한무 탑이라는건 개거품 아니냐? [16] ㅇㅇㅇ(119.198) 15.11.16 2392 25
270125 전두환이 진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가장 큰 잘못은 [10] asdasd(121.161) 15.11.15 1409 26
270120 좌좀들 웃긴게 닭그네,쥐박이는 표현의 자유고 [5/1] 가스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15 907 22
270116 군림 리뷰나 볼까 하고 왔는데 게시판에 이리 똥이 싸질러져 있냐? [5] ㅇㅇ(111.118) 15.11.15 815 18
270109 노무현 진짜 ㅡㅡ;; [3] ㅇㅇ(211.202) 15.11.15 1315 17
270086 하리는 본인 정치색 때문에 까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13] ㅇㅇ(39.7) 15.11.15 1197 34
269967 [군림천하감상] 단봉의 의중은 뭘까 환우지이록에 있는 무공의 정체 [6]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13 5059 15
269913 스포주의)모용봉이 피규어를 공유한 까닭 추측 [6] ㅇㅇ(211.36) 15.11.12 1320 15
269879 군자복수 [5] 암왕아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12 1020 14
269869 이명박 실제로 본적있는데 무공 익힌줄 [5] ㅉㅉ(125.184) 15.11.12 1389 11
269724 [군림천하감상] 기적의 공산주의자 모용봉. 소림도 못한 무상무공분배ㄷㄷ [29]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09 3735 50
269639 (재탕) 군림천하 결말 (마검패검버전) [5] 남궁산(61.77) 15.11.08 1743 22
269634 [무갤문학] 군림재출 [3] ㅇㅇ(221.162) 15.11.08 1610 9
269529 군림 대필 [7] 하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06 1809 10
269522 [군림천하감상] 검정중원 그 충격적인 존재, 그 경악스러운 출현과 균열 [39]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06 7435 42
269496 오늘 쾌검 정리해준다(진지) [11] 하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06 1689 13
269475 백야가 용노괴 싫어하냐?? [9] 연재나해라(39.7) 15.11.06 1089 7
269443 [군림천하감상] 자자 여러분 대종남파 장문인께서 한곡 뽑아주신답니다요 [16] 렛츠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1.06 2669 14
269404 진짜 호갱들 많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ㅁㄴㅇ(223.62) 15.11.05 843 7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