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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갤러리 펌>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 한영우

삼봉선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4.01.31 17:18:56
조회 1669 추천 2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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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게시판 : 도서갤러리

원글 링크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ook&no=515843&page=1

작성자 : 리군

 

 

 

 

 

거인을 만났다. 정도전,

 

사실 별로 관심 가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냥 이성계의 책사, 권력 다툼에서 이방원에게 끔살당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었다. 사극 정도전을 보면서, 그 옛날 봤던 용의 눈물의 생각났다. 그래서 옛날의 추억이 되살아나서 더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도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책을 샀다. 시중에는 여러 가지 정도전의 책이 있었다. 그중 가장 정통적으로 인지된 한영우 교수의 평전을 구매했다. 구매하기 전 여러 책들을 비교해보고 샀다.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만을 30년간 연구를 해 온 사람이었다. 어쩌면 비교를 하고 나서도, 그 30년이란 권위를 무시 못 하고 이 책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만.. 

 

 이 책은 사실 한영우 교수의 논문서<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책이다. 그래서 다른 정도전 평전보다도 내용이 조금 깊은 편이다. (한영우는 일반인이 보기에 쉽게 썼다곤 하나 꽤나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고 있다.) 책의 구성은 일대기를 간략하게 다루고 정치, 사회, 경제, 윤리, 철학 등으로 주제별로 다루고 있었다. 구성 자체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일대기보다 아무래도 주제별로 들어가는 부분이 책의 2/3을 차지했다. 5:5의 비율로 글을 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대기는 다른 배경 설명은 뒤로하고, 오로지 정도전의 인생 자체만을 논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경 설명 부분이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넘겨보니 정치 사회 챕터에 외교에 대한 글이 있는데 거기서 시대적 배경 설명이 자세하게 나왔다. 다른 정도전을 다룬 책들과 비교해보자면 문체 자체는 사실만을 전달해주려는 느낌이 강했다. 논설문이 아닌 설명문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주관이 안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느껴졌었다. 특히나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랑 비교해보자면, 이덕일의 책은 굉장히 주관이 많고 뭔가 주제나 포인트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고 같이 생각해보자는 서술 방식이다. 대체적으로 조금 감정적인 필력이라고 느꼈는데, 한영우의 책은 그런 부분에서는 차분한 느낌을 받았다. 시중에는 또 <정도전의 선택> 이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전형적인 일대기만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배경 설명도 적절하게 해 주면서, 부담 없이 보기엔 이 책이 가장 좋지 않을까 싶었다. 서사적으로 흘러가는 구성이니까, 책을 구매하기 전에 가장 고민했던 것이 <정도전의 선택>과 이 책 두 권중 무엇을 살까가 아닌가 싶다.

 

책의 체계대로 리뷰하기보단 일대기를 중심으로 서사적으로 리뷰를 해 볼까 한다.

 

 

 

출생 ~ 귀향과 방황

 

출생에 대해서는 사실 별다른 문제점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정도전을 탄핵한 상소들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목이, 핏줄이 천박하다는 공격이 많았다. 한영우도 이 부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는데, 신진사대부의 두 계통인 급진파와 온건 보수파, 둘 중 정도전은 급진파의 대표주자였다. 대체적으로 급진파에 속한 사대부들은 출생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온건파는 완벽한 혈통을 타고난 경우가 많았다. 정도전 역시 모계 혈통을 흠잡는 경우가 많았다. 모계 쪽에 서출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흠이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할 때, 조영규에게 지시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조영규와 정몽주 둘 다 연안차씨 집안 외손이다. 하지만 조영규는 서출의 피가 섞였고 정몽주는 온전한 양반의 피를 이어받았다. 게다가 둘의 사이도 안 좋았다.  

 

정도전이 살해될 때, 이방원의 총애를 받는 하륜도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자객을 보내 두문동 72현의 하나인 차원부를 비롯하여 연안차씨 내외의 족친 70여 명을 살해했다. 명목상 이유는 차원부가 정도전에 관련됐다곤 하지만, 여기에도 비밀이 있는데 하륜의 피 역시도 서출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었다. 하륜은 개인적으로 보복을 했는데, 서출에 대한 무시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영우는 주장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나중에 무고로 판명 났다.

 

3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면, 당시 서출에 대한 차별이 엄청난 듯싶었다. 특히나 돌출 행동을 자주 하는 정도전 역시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나 싶다. 부계 계통은 흠잡을 곳이 없지만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 이색의 문하에 들어 성리학을 공부하고 여러 사대부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이름난 문인치고 책 많이 안 본 사람이 드물듯, 정도전 역시도 책을 많이 봤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벼슬을 하기 전 생업에 대해서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약간의 보수를 받곤 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신돈이 없어지고, 공민왕의 권력이 약화된 시기였다. 공민왕은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균관이었다. 그곳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성리학 엘리트들을 육성했다. 정도전도 성균관 교관들(신진사대부 계열)에 추천을 받아, 성균박사(정 7품)에 임용된다. 권력을 쓰는 자리는 아니지만, 매일 명륜당에서 경전을 가르치고 토론하는 직책이어서 이 시기에도 굉장히 많은 지식을 습득하지 않았나 싶다.  

 

정도전은 공민왕의 눈에 들어, 국가의 제사 의식을 관찰하는 태상박사에 임용됐고, 성실성을 인정받아 예의 정랑(정 6품)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공민왕이 암살되고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다시 잡자 신진사대부들은 고난을 겪는다. 정도전은 친명 주의를 외쳤는데, 당시 실권자인 이의민은 그런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도전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나주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인 신진사대부 역시도 대대적으로 탄압을 받아 각지로 유배당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유배 가는 정도전을 붙잡고 염흥방이 '시중의 노기가 좀 있으면 풀릴 것이다. 그러니 가지 말고 기다려라.'라고 은근히 권유한다. 그러자 정도전은 술을 마시고 단호하게 일어난다. '나의 말과 시중의 노여움은 각기 관점이 다르지만, 모두가 나라를 위한 길이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어찌 그대 말로써 귀양을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미련 없이 떠난다. 조금의 타협을 볼 수도 있을 법 한데, 그에게서 타협이란 없었다. 불같은 정도전의 성격을 잘 보여준 대목이 아닌가 싶다.

 

유배지에서 그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한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인들은 배고픔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한다. 태생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생업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글을 쓴 사람들이 많다. 조선만 해도 이황 역시도 그렇고 율곡 역시도 그랬다. 물론 관념적으로 배고픔에 대해서, 백성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말을 외치긴 했으나, 그들이 그런 말을 하고 책을 쓴 곳은 따뜻한 온돌 방이었다.

 

정도전은 많은 저서를 남긴 문인이다. 그러나 건국 초에는 행정 업무와 한양 설계로 바빠서 글을 저술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즉 이 긴 유배 동안 그는 차가운 골방에서 글을 쓰고, 자신의 사상을 완성해나갔다. 더구나 아내에게서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통곡의 편지를 받는다. <삼봉집> 가난이라는 글인데 요지는 이것이다. 당신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입신양명할 줄 알았는데, 당신은 귀향 가있고 집에 쌀은 없고, 친지들은 연락을 끊은지 오래다. 어떡할 거냐?라는 바가지다.

 

정도전 역시 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는 붕우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로 맺어지고 은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고, 그대가 집을 걱정하고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름이 있겠소. 각자 자기의 직분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 성공과 실패, 이로움과 해로움, 명예와 치욕, 얻고 잃는 것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무엇을 근심하겠소.'

 

어떻게 보면 참 무책임한 발언인데,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도전은 사랑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강한 정신력을 지닌 정도전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그의 아내였다는 점. 밥 굶는데 실직한 남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도전은 당당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사실 이런 말을 한 그 역시도 마음이 많이 괴로웠으리라. 어쩔 수 없는 정신승리.

 

그렇게 3년을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곳 농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곳 농부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그의 관념적인 유교사상은 실체성을 가지게 됐다.

 

사실 경우는 다르지만, 나 역시도 1년 정도를 취준생(백수)으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자취방에서 외롭게 혼자서 보낸 시절, 친한 친구의 연락마저도 소원해지게 되고,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경험했다. 혼자 있는 시간. 그도 많이 외로웠으리라, 뒤돌아봤을 때 남들에겐 찌질한 백수의 시간으로 보이던 시기지만, 내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나 자신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던 시기. 그래서 내겐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정도전의 생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은 유배와 방황의 시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정도전의 친구들인 신진사대부들도 각자 유배를 떠났으나 1년이 지나고 다들 복직됐다. 정도전만이 그렇게 홀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집권층에게 찍혔다는 말이다. 글에서 나오듯 복직된 사대부들은 정도전과의 교류에서 조심스럽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저렇게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일지도,

 

 실제로 배운 친구들은 왕래가 없는데, 농민들은 그를 찾아와주고 반겨줬다고 한다. 정도전의 글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의 사상 자체에 있는 민본주의 의식은 아마도 이 때 생성되지 않았나 싶었다.

 

3년이 지나고, 거주지가 나주가 아닌 고향의 영주로 옮겼다. 유배가 풀린 것은 아니라 거주지만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경북 북부 지방을 왔다 갔다 했었다. 그러다가 귀양살이가 조금 완화되어,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됐다. 정도전은 그제야 개경으로 올라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집권층의 한 재상이 자신의 별장을 짓겠다고 정도전의 집을 헐어버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는 집을 5번이나 옮긴다. (같은 이유 인듯) 그런 생활을 6년간 지속한다. 책에는 그가 농민과 함께 걸식도 하고, 초가에서 밭도 갈아서 경직도 하며 식량도 조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나라를 바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길고 긴 방황의 종착점. 이성계를 찾아간다.

 

어쨌든 정도전과 이성계는 혁명에 성공한다. 그리고 슬슬 정도전의 정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승인 이색, 그리고 절친한 지기 정몽주, 그리고 야심가 이방원이 그들이었다.

 

 

 

이색 vs 정도전 - 핵심은 토지문제다.

 

이색과 정도전은 사제지간이다. 더불어 이색은 당시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대 대학 총장과도 같은 지위에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국제적인 인사였다. 그런 스승의 권위에 맞서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시기 감히 누가 이색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정도전은 이색과의 의견 차이를 경험하고 그와는 결별을 선언한다.

 

핵심은 토지 문제를 둘러싼 부분이었다.

 

정도전이 볼 때 가장 농민을 가장 괴롭히는 핵심은 불합리한 토지제도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고려 시대의 토지제도는 차경제(사전)에 기초를 하고 있었다. 생산량 50%를 지대로 바친다고 하는데, 상당히 높은 수치다. 이 시기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국가가 지나치게 인정한 까닭에 농민들은 토지 지주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더불어 고려 말에는 한 토지에 주인이 7~8명이나 돼서 세율을 다 바치다 보면 실상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이에 맞서 정도전은 국가가 개입하여 공전을 늘리고 균전제를 실시하는 것이 옮다고 생각했다. 토지의 소유권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켜 공전제를 확립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전 국민에게 배분하여, 토지를 안 가진 자와 경작하지 않는 자가 없게 하고 빈부와 강약의 차이를 없게 하는 것을 구상하는 것, 그리고 토지의 세금 전조는 무조건 국가가 받는데 1/10으로 확 줄이고 기타 잡 세금 따위는 일절 엄금되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런 정도전의 이상을 실천하는데 많은 지주를 가진 권문세족과 특히 스승인 이색 역시도 반감을 표출했다. 이색은 토지제에 대한 문란에 대해 토지에 주인이 많은 것만을 개선시키면 되겠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이야기했다. 이색 역시도 사실은 대 지주였었다.  하긴 당시의 대지주의 입장에서 보면 저런 소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정도전의 토지제에 공감을 표현 사람이 이성계다. 이성계 역시도 굉장히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색과는 대조적이다. 정몽주는 이 때 어땠을까? 정몽주는 이 때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했었다.

 

아무튼 정도전의 사상이 이상적이고 최선의 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의 고려의 문란한 수취제에 비해서는 많이 개선된 점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시행하면서(과전법) 많은 난항도 겪고 실제로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런 토지제도를 생각한 것의 중심에는 백성을 위하는 민본 사상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때 얼마나 난항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반대파 세력들의 공격으로 질린 이성계는 하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자도 생각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반대했다. 핵심인 이성계가 없다면, 안된다고, 만류하고 만류했다. 정도전의 주장에 이성계 역시도 은퇴를 번복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었었다. 그런 이성계를 바로잡아준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전제 개혁과 우왕과 창왕의 폐위를 놓고 틀어질 대로 틀어진 이색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정도전은 믿었던 지기들을 하나씩 잃기 시작한다. 어쨌든 이 사건을 통해서 권문세족과 지주들은 군사권(최영)을 잃음과 동시에 경제권도 없어지고 있었다.

 

 

 

정몽주 vs 정도전 - 고려냐 조선이냐?

 

슬슬 조선의 창업이 오를 무렵, 중립적이던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을 자처하고 정도전의 앞길에 막아섰다. 민심도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한다고 흉흉했다. 백성들의 동태를 보고 수구세력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뭉친다.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정도전과 조준 등의 급진적 신진사대부를 공격한다.

 

대체로 온건적인 성향의 사대부들이 정몽주와 함께 뜻을 모았다. 서로 간에 절친한 지기, 힘든 시기 <맹자>를 건넨 친구. 그리고 지금의 정도전의 이념에 중심인 <맹자>를 준 친구, 스승을 넘어서자 이젠 절친한 지기가 가장 강력한 적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태종 이방원을 이야기할 때 외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신들의 숙청, 그리고 외가 세력들의 척결, 형제의 난, 따르던 측근들의 정리 등등... 비정하지만 그의 내면은 외로웠으리라, 그러나 정도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믿었던 지기와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결국 서로를 헐뜯고 비방했다.

 

특히 이 시기 정몽주 일파가 정도전을 공격한 것의 주요 내용은 정도전이 가장 싫어하는 천출의 핏줄 이야기가 꼭 섞여있었다. 정도전 역시도 필사적이었다. 이미 스승과의 사투를 생각했을 때,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로 작정한 그였으니까,

 

그러나 이 시기, 이성계는 정몽주 일파의 강력한 일침을 받고 의기소침해져 가고 있었다. 더구나 이성계 역시도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를 하고, 정도전 역시도 귀향을 밥 먹듯 다니고 있을 시기였다. 이 기회를 틈타 수구세력은 군사력을 장악한 이성계를 살해하려고 했었으나, 이 때 구원투수로 나온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이방원은 핵심 인사인 정몽주를 스나이핑 했고, 정몽주의 죽음으로 혁명 세력들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

 

 

 

3. 정도전 vs 이방원 - 왕조의 권력을 둘러싼 사투

 

새 왕조가 개창 되고, 정도전은 바쁜 나날을 보낸다. 먼저 인사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권력까지 신속하게 장악을 한다. 새로운 정부를 위해 수도를 옮기고 수도의 행정을 구상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이런 데다가저술서인 <조선경국전>과 <불씨잡변> 등의 정치서와 철학서도 펴 낸다.

 

<조선경국전>에 따르면, 그는 군주는 관념상 지존의 자리고, 실권은 재상이 지녀야 한다고 했다. 즉 군주는 사적으로 토지를 가져도 안 되고(명목상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라고는 함..), 의견 등을 이야기할 때 재상과 함께 의논을 하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재상은 군권력과 인사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제도라면 군주가 어리석더라도 재상이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럼 여기서 의문점이 드는데 재상이 타락한 자가 오르면 어쩌겠는가? 정도전은 교육에서 해답을 찾았다.

 

당시 교육관에 대해서, 정도전은 소수 엘리트주의적인 인재 양성 정책을 폈다. 배움의 기회는 노비를 제외하곤 모두 다 평등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정한 실력을 통해서 상위 학교로 진학시키는 제도, 고려 시대 음서가 워낙 성행해서 정도전은 실력주의로 관료를 뽑자고 주장했다. 즉 문호는 차별 없이 열어놓는데, 상급 학교로 진학하려면 공정하게 실력으로 올라가야 한다. 최종적으로 우수하게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관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의미 없는 대학 졸업장들을 보며, 어쩌면 정도전의 저런 방식도 괜찮지 않나도 싶다. 지금의 우리 시대의 대학은 필수 아닌 필수지만 몇몇 네임드 학교를 제외하곤 별 메리트가 없기도 하니깐, 개인적으로 나도 대학은 정말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학문의 길로 가려는 사람만 대학을 가는 것이 국가적으로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선별된 관료가 행정을 두루 거쳐서 재상이 된다는 것인데, 사실 솔직히 내가 봐도 너무 왕권을 경하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군주는 특성상, 자신의 왕권 강화를 항상 생각하는데, 군주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불합리적인 소리긴 했다. 물론 태조는 정도전의 공이 너무 커서, 뭐라 할 순 없었겠지만, 야심가 이방원에게는 이런 사상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도전은 군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문무 양권을 장악하고 그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훈련에 만전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을 잘 몰랐는데, 당시 분위기가 완전 전시체제였다는 점이다. 태조가 정도전이 지은 <진법>을 읽고, 지방 각 도에 보내서 응용하고 못 하는 사람들에게는 곤장을 내리곤 했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위의 정치적인 이념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기도 하다. 왕조 초기에 군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서 권력의 행방이 결정 나기 때문이다.

 

특히나 왕자들과 귀족들의 사병을 국가로 환원하라는 정도전의 명령에 이방원은 직감했겠다. 군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정치적인 색감이 뛰어난 태종이니까, 이런 핵심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정도전을 주살하는데 성공하고 왕좌를 차지한다. 그리고 정도전은 마지막 정적에게 살해당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군권을 장악한 정도전이 왜 그렇게 쉽게 죽었느냐는 데에 대해서 저자는 이방원이 그만큼 불의의 기습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한 나라의 군권을 다 장악한 사람을 암살하기란 쉽지 않다. 즉 그만큼 대처하지 못 했던 순간을 잘 포착한 이방원의 타이밍이 돋보였다.

 

내가 생각한 점은, 왜? 이방원을 정도전은 인정하지 않았느냐?라는 점이다. 그의 <조선경국전>에 따르면 왕은 적장자가 있는 것이 관례지만, 자질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태종 이방원이 왕조를 건국한데 가장 큰일을 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조는 이방원의 과격한 성품이 싫어서 싫어했다. 개인 자질로 보면 이방원은 당시 15세에 과거를 급제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다. 거기다 태조가 곤경에 처했을 때 구한 공도 있다. 정도전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라곤 생각한다. 왜 세자를 방번 방석에 올리는 것을 수락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실제로 태종은 자신이 집권을 하자마자, 개국 공신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한다. 인정받고 싶었던 태종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조선의 꽃 세종 - 과연 태종의 희생 결과물로만 볼 수 있는가?

 

태종 이방원을 이야기할 때 항상 들었던 이야기가, 왕조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악행도 서슴없이 저질렀다고 한다. 실제로 맞고 그래서 공신들 대부분을 척결하고 외가 세력에 대해서도 정리를 깔끔하게 해준다. 그렇게 잘 닦아놔서 세종이 꽃피울 수 있었다고 태종의 그런 헌신과 자기희생이있어서라고 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세종의 치적은 정도전 역시도 영향을 많이 줬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가 설계한 조선의 뼈대, 행정 체제, 사상과 관념 등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태종이 권력적으로 청소를 했다면, 실제적으로 조선의 행정 문물을 정비한 것은 정도전이다. 태종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어서, 정도전이 설계한 행정 체제를 수정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신권 중심의 의정부 서사제를 6조 직계제로 바꾼 것 외에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정도전의 행정이 탁월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신권과 왕권의 미묘한 지각변동 이후, 세종은 그 둘을 잘 조합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도전과 세종의 공통점. 바로 민본주의 사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하늘은 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서가 세종이 삼봉의 저서 역시도 봤을 것이다. 그런 정도전의 사상이 세종에게도 나왔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세종은 백성의 하늘은 임금이 아닌 밥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이 <삼봉집>에서 나온다. '입는 것과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예의를 안다.' 이 부분은 <관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서 이런 공통점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유학적인 시각의 경제관을 못 벗어났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그래도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로 볼 때는 의미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정도전, 어쨌든 뜨거운 사나이.

 

경세가를 평가할 때, 개인적으로, 보는 부분은 그 사람의 정치사상보다는 경제관념을 주로 본다. 그리고 2순위가 군사학에 대한 지식이다. 현실적인 마키아벨리와 비교해보면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관점 + 군사학적인 관점이 돋보이는 사상가다. 정도전은 어떨까? 민본정치의 기본은 경제사 상이라고 하는 부분, 그리고 나름의 신권 중심의 정치사상, 그리고 병서를 저술한 병법가, 실제적인 행정 능력에 대한 부분, 더불어 나름의 철학적인 사상까지,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고 생각됐다. <손자병법>에서도 전쟁의 기본은 경제력이라고 말하며, 경제관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 부분도 생각났다. 

 

 다른 사상가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정도전의 삶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관념적으로 생각한 부분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말이다. 저술적으로 논설하는 단계가 아닌 실제적으로 실천을 하려고 했던 지식인. 그의 정치 사상서의 중심적인 관점은 <맹자>다. <맹자>는 사실 유교 정치서적인데, 내가 봤던 <맹자>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에 가까웠었다. 그런 <맹자>의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정도전. 이상을 이상으로 끝내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그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보며 독서에 대해서도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많이 했었다. 나도 <맹자>를 봤을 때는 참 재미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58세에 죽은 정도전, 그의 60 인생의 1/6을 귀향과 방황으로 보냈다. 이 시간 동안, 정도전은 실제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고 몸으로 백성을 느꼈다. 위인들에게 보이는 공통점, 시련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변화하는데, 정도전은 그 시기를 잘 이겨냈던 점이 인상 깊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그는 진정으로 민본주의 사상에 대해 눈 뜨게 된다. 그래서 유학자이면서도 백성들을 위한 실용을 먼저 생각한 정도전.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적인 사상을 조선 초에 생각해 낸 사람.

 

그가 불교를 심하게 배척한 이유 중 하나도, 승려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모습, 그리고 신돈의 실정 등이 있다. 뭐 물론 성리학자라서 불교 자체에 호의적이진 않지만, 당시의 불교가 많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서 그러지 않나 싶다. <불씨잡변>을 쓴 이유도 한영우는 당시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의식해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그의 주옥같은 명대사 '밥버러지' <삼봉집>은 과연 이 밥버러지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정도전은 모든 백성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놀고먹는 사람은 국가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사농공상 중 직업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간민'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구조적인 취업 사태를 그가 보면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서울에도 그가 이룩한 열정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흥인지문(인), 돈의문(의), 숭례문(예), 소지문(지), 보신각(신) 한양의 문을 설계할 때도 그는 자신의 이념을 담아내려고 애썼다.그뿐일까 광화문을 비롯해 서울의 행정구역 역시도 그가 만든 것들을 그대로 쓰는 곳도 있었다. 그가 지은 이름은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다.

 

처음 드라마에서 시작한 호기심, 그냥 이성계의 문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멋진 사람이라서 놀랐다. 드라마가 나온 배경에는, 요즘 애민을 위한 정치인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도 싶다. 책은 굉장히 자세한 부분까지 잘 설명하고 있다. 사실 내가 쓴 글에 나온 부분은 극히 일대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실제로, 그가 행한 많은 행정적인 업적 (출판, 언로, 교육, 사회제도), 그리고 사상적인 업적, 문학적인 업적 등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하길 권해본다.

 

사실 책의 어조 자체는 굉장히 차분한데 내용이 가슴을 뜨겁게 했던 책이었다. 비 오던 주말 밤, 이 책을 읽느라 밤을 지세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책이다. 뜨겁고 열정적인 인생을 살다 간 그의 인생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시로 표현도 해 봤었다.

 

 한영우 교수의 책은 <다시찾는 우리역사>를 봤었는데 참 만족했었다. 정도전에 대한 평전 역시도 아주 만족스럽다. 아쉬운 점을 굳이 꼽으라면, 사진 자료가 컬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일대기 부분을 좀 더 배경 설명을 심화해주면 어떨까도 싶다. 한영우 교수의 책을 검색해보니 <율곡 평전>도 있던데 관심이 간다.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참 많은 책이었다.

 

 

갤러형들 연휴 잘 보내길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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