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대감, 천리입니다."
하삼도에 내려간 천리가 돌아왔다. 이제는 군관이 되었으니 이군관이라 칭하는 것이 맞지만, 천리는 아직까지 자신을 ‘이군관’이라 칭하는 것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서애 또한 이런 천리를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천리가 가져온 소식에 향해있었다.
"통제사는 잘 지내고 있던가?"
"예, 대감. 통제사께선 도리어 제게 영상 대감께선 잘 지내시느냐, 잠은 잘 주무시냐며 이것 저것 물어보셨습니다요."
"내가 힘들다던들 직접 왜적들과 싸우는 통제사만 하겠느냐? 먼 길 오가느라 늘 수고가 많구나."
서애의 칭찬에 천리는 씨익 웃음을 짓더니, 서찰과 작은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의 남쪽 끝, 통제영에서 온 것이었다.
"통제사께서 대감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작은 상자에 시선이 향했다. 서애는 말없이 책상 위의 것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알겠다."
침묵을 깬 서애의 말에 천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물러갔다. 이제 집무소는 서애만이 남아있었다.
이제부턴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서애는 찬찬히 편지를 펼쳤다. 종이 위의 유려한 통제사의 글씨가 그를 반겼다.
"영상 대감께 말씀 올립니다. 대감, 대감께서 신경써주시는 덕분에 통제영은 아직까지 버틸만합니다. 허니 대감께서는 이곳에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
강화 문제로 씨름하느라 통제영에 마음 쓰지 못한 것에 대한 통제사의 답이었다.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왜적의 두려움과 나라의 기대를 모두 품은 통제사는 도리어 자신에게 괜찮다 말하고 있었다.
"... 대감께서는 이 나라의 기둥이시니 늘 건강을 챙기셔야합니다. 천리의 편에 국화차를 보내드립니다."
작은 상자는 평소에 차를 즐기는 서애를 위한 통제사의 마음이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여니 코 끝에 달큰한 국화향이 스쳤다.
'살뜰한 인사같으니라고.'
국화차를 우리는 서애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집무소에 퍼지는 국화향을 맡으며 서애는 찬찬히 눈을 감았다.
무관답지 않은 부드러움을 가졌으나 그 안에는 그 어느 무장보다 단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
통제사, 아니 여해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40년 전 건천동에서의 두 사람은 어느덧 삼도수군통제사와 영의정이 되어있었다.
바다에 여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전세는 1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강화 문제로 고민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공이 컸다.
연전연승, 깊은 절망이 내린 조선에 그의 존재는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하늘이 아직은 이 나라를 버리지 않으심인가.
여해의 존재는 수 백리 떨어진 도성의 서애에게도 큰 위로였다. 그를 볼 때마다 이따금 자신의 죄가 덜어지는듯한 느낌까지도 들었다.
허나 이는 부질없는 위로일 뿐, 지금의 자신은 명백한 죄인이다.
끝없이 북으로 향하기만 하는 파천길 위에서도,
힘들게 명과 마음을 맞춰 평양을 되찾은 순간에도,
서애는 끊임없이 자신이게 죄인이라 되뇌였다.
잊기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서애는 '죄인'이라는 말이 서서히 그를 옭아매가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들려왔을 때, 온 몸이 묶여진 듯 서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죄인이 되었으나, 그 죄를 덜어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천천히, 서애는 감았던 눈을 떴다. 잔에 채워진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수색(水色)이 그를 반겼다. 이윽고 달큰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온 몸에 차의 온기가 느껴졌다. 품속에 있는 여해의 글씨에도 이 온기가 전해지길 서애는 바랬다.
'재조산하(再造山河), 나라를 다시 만들다.‘
전쟁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금수강산의 강토, 가을에 도성을 채우던 백성들의 풍년가와 웃음,, 30여년 간 믿어왔던 나의 왕까지도...
지금 여기엔 없는 것들.
그러니 살아야한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아야 한다.
살아서 다시 이 나라를 만들어야한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차 맛이 참 좋군."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머리에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 하니, 이는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눈을 감고 차를 머금었다. 국화향이 퍼지더니 이내 머릿속의 생각이 비워졌다.
잠시 동안은,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동학에 다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귓가엔 둔전에서 들었던 풍년가 소리가 들린다.
평온했던 시절이었다.
국화향이 참으로 좋다.
"대감, 대감!"
다급한 듯 자신을 찾는 신군관의 목소리.
감았던 눈을 뜨고 자세를 고친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전란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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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팅이랑 댓글만 달다 글쓰는 건 첨이네;;;;
며칠 전에 올라온 서애 대감 차 마시는 짤 보고 뻘글 올려봄요. 금손이 아니라..... ㅈㅅㅈㅅ
서애 대감, 여해공은 언제나 옳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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