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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타는 대단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다들 걱정하고 있거든...”
“무슨 뜻이야? 뭘 걱정한다는 건데?”
“며칠 전부터 계속 아르민과 붙어있었잖아...”
“아... 얼마 전 에렌에게 쓴 기술을 자기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몇 가지 가르쳐주고 있을 뿐이야. 알고 보니 그 녀석, 어렸을 때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다더라고... 친구들에게 보호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고 싶다면서 부탁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괜찮은 거야?”
“뭐, 작은 체격을 감안해서 살살 해주고 있어. 녀석이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가만히 아르민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애니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맑고 푸른 눈... 나약해 보이면서도 결의가 담긴 얼굴... 티 없이 순수한 웃음... 자신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어떤 소중한 것을 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애니는 약간 부러움을 느꼈었다...
그런 애니를 보는 크리스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져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애니, 정말 모르는 거야? 아르민의 실체를...”
“무슨 실체...?”
“여자애들 사이에선 이미 다 알려진 줄 알았는데... 하긴, 넌 우리와 어울리지를 않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다. 아르민은 말이야, 이전부터 악명이 자자해. 성적인 생각이라곤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아주 귀엽고 얌전하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는,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여자랑 몸을 비벼볼 생각들뿐이라고 말이지... 그러다 이미 여러 차례 두들겨 맞아놓고도, 도무지 자제할 줄을 몰라. 그리고, 놈이 상대를 기만하기 위해 즐겨 쓰는 주된 레퍼토리가 둘 있거든. 하나는 바다를 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강해지고 싶다... 혹시 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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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왜 요즘은 나랑 안 해주는 거야?” 아르민은 애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보채댔다. “벌써 사흘째야...”
“네 성욕에 관해 안 좋은 얘기를 들었거든... 그래도 널 믿어보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같이 할 때 네 그곳을 계속 살펴봤는데...” 애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잃어버리고 말았어, 사람과의 신뢰를...”
“자, 잠깐, 뭔가 오해가 생긴 거야...” 아르민은 애니의 앞을 막아서며 최대한 귀엽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머릿속엔 바다 생각뿐인걸... 그거 알아? 바다는 지평선까지 전부 소금물인데, 거기서만 사는 물고기도...”
“토할 것 같아... 얼굴 들이대지 말아줄래?”
“우으...” 애니의 기세에 위압당한 아르민은 물러섰다.
‘내 비장의 카드인 바다가... 통하지 않아...?’ 아르민은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애니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렵사리 신뢰를 얻고, 슬슬 본격적으로 수위를 높여갈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해볼 방법이 없을까...? 무엇을... 버리면 되지? 내 선한 소년 이미지와... 또 무엇을 버리면...’
다음 순간 아르민의 얼굴에 괴기한 웃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둡고 사악한 발상이 떠올랐을 때 나오곤 하는, 아르민 특유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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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 나는 널 속이고 이용했어!” 아르민은 애니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용도 아니면 네 무술이 뭔 쓸모가 있는데? 동작만 크고 요란하지, 별로 아프지도 않던걸? 어떤 사기꾼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내가 핑계거리로나마 관심을 보여준 걸 고맙게 여기라고!”
애니는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뒤로 돌아 아르민을 노려보았다. “이봐, 아르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안 아플 수 있었던 건 내가 힘을 조절해줬기 때문이야. 혹시라도 네 작고 말라빠진 몸이 다칠까봐... 내가 정말 진지하게 했다면 넌 나와의 신체접촉을 즐겨댈 수도 없었을걸...”
“아하, 힘을 숨기셨다? 그것 참 편리하군.” 아르민은 얄밉게 이죽거렸다. “내 추리는 이래. 에렌과 라이너는... 널 봐줬던 거야. 여자를 상대로 너무 거칠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데 너는 눈치 없게도 네가 진짜 강하다고 멋대로 착각해버린 거지. 그리고 나도 네가 내 성욕에 도움이 될 동안에는 진실을 말해줄 이유가 없었어. 별다른 고통도 겪지 않으면서 네 몸과는 아주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 너의 병적인 과대망상은 치유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비대하게 팽창해 버린 거야.”
“무슨... 개소리야...”
“사실, 여자 주제에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아무리 노력해봐야 계집애인데... 솔직히 나도 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남자니까!”
애니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아르민을 향해 몇 걸음을 내디뎠다. “닥쳐, 억지쟁이야... 네 말 자체도 헛소리지만, 애초에 전혀 남자 같지도 않은 놈이 무슨... 정말 어이가...”
“내 말이 틀려? 그럼 지금이라도 나를 제압해봐!” 아르민은 애니를 향해 모형 단검을 이리저리 휘저어댔다. “주먹을 써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계속 말로만 맞받아치고 있는 거 아냐? 그건... 나한테 항복하는 거잖아?”
애니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 예고 없이 아르민의 가느다란 다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아르민의 목구멍에서 고음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애니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아르민으로부터 단검을 빼앗는 동시에, 그의 왜소한 몸을 땅에 강하게 내려박으며 그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 주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아르민, 제대로 한 번 겪어보니 어때? 꽤나 아프지? 이제 느꼈겠지만, 내 무술은 어린애장난이 아니야. 이 정도 고통이면 네놈의 발정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
그곳을 확인한 애니의 표정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말도 안 돼... 분명 엄청나게 아프도록 차고 던졌는데...”
“거봐, 안 아프다고 했잖아? 어린 시절 날 패던 골목대장만도 못한걸...” 아르민은 애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음란하게 속삭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하게 느끼고 있어. 네 다리근육의 탱탱한 감촉에서, 내 목에 와 닿는 네 숨결의 따스함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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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트 훈련병... 레온하트 훈련병!”
샤디스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애니는 가까스로 아르민을 향한 주먹질을 멈췄다. 아르민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황홀한 표정을 띠고 그녀 아래 깔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인가? 이건 심각한 징계감이야. 당장 따라와. 그리고 알레르토, 자네는 어서 의무실로 가게...”
애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르민에게서 떨어졌다. 여전히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야 알겠어, 아르민. 너는... 여자한테 맞는 걸로도 흥분하는 거구나. 처음부터 접촉만이 아니라 고통까지 원했던 거야. 그래서 계속해서 날 도발한 거고... 이 기술은 인간용이니까, 짐승만도 못한 네놈한테는 통하지 않을 수밖에.”
“빨리도 알아차렸네...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맞게 해줘서 고마워...” 아르민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애니는... 정말 다정한걸...”
애니는 아무 말 없이 샤디스를 따라가면서 이를 갈았다.
‘죽여버리겠어, 아르민 알레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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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이제 도망칠 길은 없어. 이 건물 주변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있거든. 네가 자발적으로 항복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해서, 시간을 벌어두긴 했지만...”
“그렇구나...” 애니는 멍하니 대답했다. “내 정체가 들킨 건... 역시 아르민 너 때문이지?”
“맞아. 벽외조사 때 애니가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일관되게 인명을 빼앗는 것만은 피하려고 하던 여성형 거인이, 오직 나만은 한참을 추격해가며 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나한테 개인적으로 살의를 품은 사람이리라고 추측했지.”
“그래... 내 무술에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어... 그걸 네놈이 성적 흥분의 기회로만 삼은 것을 깨닫고... 아버지와 나의 존재 자체가 모독당한 느낌이었지...” 애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 같은 발정난 인간쓰레기 하나 때문에 이 정도로 몰리게 될 줄은... 결국 나는... 전사가 되지 못했어...”
아르민은 한동안 흐느끼는 애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무 절망하지 마, 애니...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뭔데...?”
“내 취향... 알지? 여기에 한동안은 아무도 안 들어올 테니까... 지금... 여기서... 그때 그 기술을 써서... 한 번 더 해주면 안 될까...? 물론 보이는 곳에 상처가 나는 건 피해야겠지만...” 아르민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는 사실... 너와 보낸 시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 그리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지만... 널 좋아해. 그러니까 약속할게. 내 말대로 해주면... 네가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받고 항복할 수 있도록, 병단을 설득해줄 거야.”
읽기 어려운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애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그 기술이 그렇게 흥분된다면... 한 번 더 해줄 수도 있어...”
‘좋아. 어차피 이년을 이용하고는 바로 배신하면 되니까...’ 아르민은 생각했다. ‘그때 때려준 건 고맙지만, 죽이려고까지 한 건 얘기가 다르지. 네스 반장을 인간방패로 소모하지 않았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최대한 잔혹하게 고문하고 처형하라고 단장님께 건의해주겠어. 절단된 몸은 해부될 거고 나머지 조각들은 소금에 절여서 야생동물에게 뿌려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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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이것도 몰래 가져왔어. 잘했지?” 아르민은 신이 나서 모형 단검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대강 생각해본 건 이래. 나는 강간범이고, 이걸 들고 너를 강간하려다 오히려 너에게 제압당하는 거야. 너는, 강간당할 뻔 했다는 사실 자체도 화나지만, 나 같은 허약한 남자가 감히 너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는 점에 더더욱 격노해서, 나를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거지. 너의 순결을 빼앗으려던 나에게 응분의 처벌을 내리기 위해, 너는 빼앗은 단검으로...”
“그래그래,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애니는 창문을 내다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런데 아르민, 여자한테 고통 받는 게 정말 그렇게 좋아? 그럼 다리를 아주 세게 차여도 괜찮겠지...?”
“응, 좋고말고... 다리를 차이면 아프잖아. 아픈 건 좋아...”
“급소를 반복해서 짓밟히는 것도...?
“그런 거 좋아... 너무 좋아!”
“거인화에 따른 어마어마한 열기와 압력으로 통구이가 돼버리는 것도...?”
“물론 아주 좋... 잠깐, 뭐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 아르민은 이미 애니의 몸 아래 깔려있었다.
“넌 머리가 좋지만, 그걸 발휘하기에는 너무 발정이 나버렸던 모양이야. 내가 정말 네 약속이 거짓이라는 것조차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어?”
애니는 반지에 숨겨져 있던 칼날을 드러내보였다. 아르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실적으로,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거인화해 탈출을 시도하는 것뿐이야. 성공한다면 무사히 벽 너머로 가는 거고, 실패한다면 수정체에 들어가야겠지. 어느 쪽이든 후회는 없어. 다만...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 수정체에 들어간 나를 상대로, 네가 어떤 희롱과 추행들을 자행할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네놈만 없어지면, 정말 마음 편하게 싸울 수 있을 거야.”
“지, 진정해... 우, 우리 이성적으로 한번 대화를...”
“이미 늦었어...”
마지막으로 아르민의 그곳을 확인한 애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가라앉았구나... 아르민, 내가 널 때려줘서 다행이었지? 그때 너는 네 도박에서 이겼어... 하지만, 나의 도박은 지금부터야...!”
기겁한 아르민은 애니에게서 벗어나려고 발악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극도의 공포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칼날이 베고 지나간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애니의 선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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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 애니의 수정체를 깰 방법은, 당장은 없는 것 같아.”
“그렇군요...”
“그리고... 아르민의 시신 근처에서 모형 단검이 발견됐어. 훈련병 때의 추억에 호소하면서 애니를 설득해보려 한 거겠지...”
멍하니 서있는 에렌을 바라보는 한지의 표정에는 죄책감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에렌, 정말 면목이 없어... 내가... 끝까지 말렸어야...”
“아니에요, 한지 씨... 아르민은 항상 그런 녀석이었어요...” 에렌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대화를 바랐고, 이성의 힘을 믿었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 언제나 목숨을 걸 준비가 돼있었죠. 어쩌면, 그놈이야말로 진짜 죽고 싶어 안달난 놈이었어요...”
건물의 잔해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 에렌은 죽은 아르민에게로 다가갔다. 마침내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하며, 에렌은 친구의 새까맣게 탄 시체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아르민... 알고 있었어... 네가 누구보다도 용감하다는 것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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