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폴(John Paul)은 1747년 스코틀랜드 남서부 커쿠브리셔(Kirkcudbrightshire)의 평범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났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폴은 13살이 되자 상선의 견습선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국이 공들여 키우고 있던 신대륙 식민지의 무역에 종사하게 됐다. 이 당시 폴의 커리어는 상당히 잘 나갔다. 단 몇년 만에 1등 항해사까지 올라갔고, 1768년에는 자신이 탔던 배의 선장과 항해사들이 죄다 황열병으로 사망해버리자 동료들을 이끌고 배를 지휘하여 항구까지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로 폴은 능력을 인정 받아 서인도 제도 항로 상선의 선장이 됐다.
하지만 고작 2년 뒤, 그의 인생은 시련을 맞이한다. 선원들이 임금의 일부를 선지급하라는 요구를 들며 선상반란을 일으켰는데 폴은 본보기 차원으로 주동자 한명에게 태형을 가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때렸는지 그 주동자가 몇 주 후 사망해버렸다. 이 일로 인해 폴은 과잉처벌을 했다며 체포 당했다. 스코틀랜드 선원사회는 그가 불필요하게 잔인했다며 비난했고, 평판과 인망을 잃어버린 폴은 선장직에서도 쫒겨났다.
폴은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결국 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서인도 제도로 간 폴은 그곳에서 상선 몇 척을 운영하며 다시 재기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선상반란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폴이 직접 주동자를 칼로 베어 죽였다. 폴은 반란진압이라고 항변했으나 결국 식민지 법원은 과잉진압이었다며 유족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도 체포당한다면 짤 없이 교수형일게 뻔한 상황에서 폴은 야반도주를 선택 했다.
얼마나 급하게 떠났는지 그나마 있던 한줌의 재산도 다 내팽개쳤다. 그리고 폴의 상선 경력은 그걸로 완전 끝장났다.
영국의 북미 식민지였던 버지니아로 도망친 폴은 이름 뒤에 존스(Jones)라는 가명을 붙여넣어 신분세탁을 했다.
이제 그는 존 폴이 아니라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버지니아에서 존스는 노예들을 데리고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평생 물질만 하던 뱃놈이 뭍에 올라와서 땅 파먹고 살려니까 그게 될리가 없었다. 그의 농장은 그다지 잘 운영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존스는 본래 선거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인물로, 주군인 대영제국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한 북미 식민지의 모습을 본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 존스는 그 길로 필라델피아로 가서 대륙해군(Continental Navy)에 입대했다. 그리고 선장경력을 인정받아 24문짜리 상선개조 프리깃 알프레드호(USS Alfred)의 장교가 됐다.
신생국 해군의 창립멤버가 된 존스는 곧 대륙해군의 한심한 작태에 실망하고 만다.
이 시절 미해군은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오대양을 지배하는 오늘날의 미해군이 아니었다. 나라 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정부는 돈은 없었다.
심지어 배조차 없어서 상선을 군함이라고 우기는 수준이었다. 전열함은 고사하고, 그나마 있는 배라곤 프리깃이나 무장상선, 브리그나 스쿠너 같은 소형 군함 몇척이 전부였다. 게다가 선원들이고 선장이고 죄다 전투경험이 없어서 항구 밖으로 나가면 나포당하기 일쑤였다. 대륙해군은 제대로 된 작전은 고사하고 침몰이나 안 당하면다행으로 여기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대륙의회의 높으신 분들도 대륙해군의 역할을 '유럽까지 가는 수송선'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꼬라지를 본 존스는 아무리 자신이 상선 출신이라지만, '내가 해도 저 ㅄ들보단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는 로버트 모리스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계최강인 영국해군과 싸우려면 전면승부보다는 사략선 위주의 약탈, 즉 '통상파괴전략'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려는 듯 10문짜리 슬루프함인 프로비던스 호(USS Providence)를 타고 영국령 캐나다인 노바스코샤 인근의 정찰항해를 감행했다.
여기서 그는 첫 전과를 올렸다. 그는 16척 가량의 영국 국적의 배들을 나포하고, 해안가에 있던 어촌을 약탈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그는 대위로 승진한다.
이후 존스는 다시 한번 편지를 썼는데, (허가만 해준다면) 자신이 슬루프를 몰고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가서 영국의 무역루트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알렸다. 이는 항구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한심한 작태의 대륙해군 장교들 중에선 상당한 안목이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아프리카 서해안, 지금의 기니만 일대는 인도의 향료를 싣고 돌아오던 유럽배들의 주로 통상로였다. 해안가니까 식수와 식량을 조달하기 편하고, 길 잃을 걱정도 없고, 날씨도 대양보다 온화해서 배들이 지나다니기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수에즈운하보다도 더 붐볐다.
하지만 존스의 아프리카 원정안은 반려 당했다. 대륙의회는 그 이유로 두가지를 들었다. 첫번째로, 일단 그렇게까지 멀리 가서 작전을 해야한다는게 (지들 딴에는) 설득력이 없고, 두번째로 그럴만한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1778년 4월, 아프리카로 가지 못한 존스 그 대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다른 작전을 감행했다. 그는 레인저 호(USS Ranger)를 지휘하여 영국의 뒷마당이었던 아일랜드 근해까지 접근했다. 이 곳에서 존스는 '와이트헤븐'이라는 시골항구에 대한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이건 미친 짓'이라며 상륙을 거부했고, 하는 수 없이 존스는 수병 30명을 직접 이끌고 가야 했다. 그래도 깡촌항구라서 그런지 와이트헤븐에는 영국군이 없었다. 존스일행은 부두에 적재되어있던 화물들에 불을 지르고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으로 존스는 영국 남부에 위치한 실리 제도의 세인트 메어리 섬(St Mary's Isle)으로 갔다. 그 곳의 영주였던 셀커크 공작(Earl of Selkirk)을 납치하겠다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세운다. 영국귀족을 납치하면 적어도 수백명의 대륙군 포로들과 교환할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작전 당일, 공작은 런던으로 출장을 간 길이라서 집에 없었다. 쳐들어간 수병들은 으리으리한 공작의 저택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그 한심한 작태를 지켜보던 셀커크 백작부인은 존스일행에게 이거 가지고 얌전히 돌아가달라며 은제 식기가 가득 들어있는 보따리를 주었다.
존스일행은 얼씨구나하며 이걸 가지고 돌아갔는데, 나중에 배에 와서 열어보니 자루 윗부분만 은이고 밑에 나머지는 죄다 석탄이었다.
빡친 존스와 레인저 호 선원들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무언가 상징적인 전리품을 찾아 헤매다 괜찮아보이는 목표를 발견했다.
바로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항구 앞에 정박해있던 드레이크 호(HMS Drake)였다.
사실 드레이크 호는 식민지 상인에게 판매하려고 건조된 상선이었는데, 전쟁이 나자 영국해군이 매입하여 군함으로 개조한 배였다.
당시 드레이크 호는 선원 상당수가 부재였고 무장상태도 좋지 못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존스와 식민지 촌놈 해적단들은 벨파스트 근해에서 대기 타다가 드레이크 호가 항구 밖으로 나오자 마자 들러붙어서 포격을 가했다. 드레이크 호는 사용가능한 대포가 많지 않아서 몇발 쏘지 못했고, 레인저 호는 수병들의 숙력도가 꽝이라서 딜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존스는 드레이크 호의 인원이 더 많다고 오판하여 접안하여 백병전을 했다면 금방 이겼을 전투를 근거리 총격전으로 질질 끌었다.
두 배는 꽤 1시간 동안 교전했으나, 양측의 피해는 다 합쳐도 30명이 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드레이크 호의 선장 조지 버든이 눈먼 머스킷 탄환에 헤드샷을 당해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한 영국 수병들은 백기를 올렸다. 존스는 관대하게도 버든 선장의 시신과 아일랜드 출신 선원들을 풀어주고 드레이크 호만 나포하여 동맹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을 물 먹이기 위해 미국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는데, 대표적으로 미국국적 사략선들에게 자국 항구를 개방해줬다.)
이 전투로 영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100여년 전 영-란 전쟁이후로 영국 본토는 공격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간 영국 전체는 식민지 촌놈들의 다음 노략질이 있지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했다. 영국인들은 존스와 레인저 호에 대해 기사도 정신을 무시한 야만적인 약탈행위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추태를 덮으려는듯 '민병대 4개 중대가 쳐들어왔다'고 과장해서 보도했다.
이 전투로 영국이 입은 피해는 아주 미약했지만 그 심리적 가치는 매우 컸다. 바로 영국 본토 해안에서 해전이 벌어졌고, 영국군함이 나포 당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세계의 모든 바다를 지배한다는 대영제국이 자신들의 앞마당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영국 본토를 약탈한 존스의 명성은 이내 곧 대륙의회 높으신 분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대륙해군을 그저 '프랑스까지 가는 특사를 실어 날라주는 셔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능력 있는 선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프랑스 특사로 와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존스의 활약상에 감동하여 그를 도와주기 위해 프랑스 측과 쇼부를 쳤다. 그렇게 프랭클린은 존스에게 군함 한 척을 얻어다 주었다.
그 배가 바로 42문짜리 군함 보놈 리샤르 호(USS Bonhomme Richard)였다. 영어발음으로는 '본 험 리차드'라고 읽는다. 보놈(Bonhomme)은 프랑스어로 '친절한, 호의를 보이는 사람'을 뜻한다. 이는 프랭클린이 필명으로 쓰던 이름이다.
다만 그렇게 좋은 배는 아니었다. 이 배는 원래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쓰던 상선으로, 7년 전쟁으로 프랑스가 인도 식민지 대부분을 잃자 프랑스 해군에게 매입된 것이었다. 무장은 구식이었고, 배의 속도도 매우 느렸다. 그래도 존스는 이런 구식 배라도 좋다며 받아갔다. 거기다 루이 16세는 존스의 용맹을 칭찬하며 3척의 프랑스 해군 소속 소형 함선들을 더 붙여주었다.
프랑스 측의 호의는 절대 공짜가 아니었다. 프랑스 해군장관 자케스 샤몽은 '긴급상황 시 프랑스 선원들이 존스의 지휘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 적힌 계약서에 사인을 강요했다. 한마디로 대놓고 하극상을 인정하라는 거였다. 배 4척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기세였던 존스는 어쩔 수 없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마침내 출항한 존스의 소함대는 영국 근해를 돌면서 여러 척의 영국배들을 나포했다. 그런게 시계반대방향으로 쭉 돌아서 북해 인근에 이른 9월 23일, 영국 동해안의 플렘보로 곶(Flamborough Head)에서 리차드 피어슨(Richard Pearson) 선장이 이끄는 영국해군 5급전열함인 세라피스 호(HMS Serapis)와 슬루프함인 스카버러 백작 호(Countess of Scarborough)와 마주쳤다. 이 배들은 발트해에서 목재를 실고 오던 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초계를 돌던 군함들이었다.
당대 프랑스 해군은 영국해군에 비해 숙력도가 많이 떨어져서 더 많은 숫자와 체급을 가지고도 영국해군에게 쳐발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피어슨은 이 승부가 해볼 만 하다고 판단하여 먼저 선빵을 날렸다. 이에 존스도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며 휘하 함선들에게 신호기를 보냈다. 보놈 리샤르 호는 세라피스 호를 맡았고, 나머지 3척의 프랑스 군함들은 스카버러 백작 호를 맡았다.
사실 양측의 전력은 비등비등했다. 일단 세라피스 호는 덩치가 전열함이라서 대포가 훨씬 많았다. 그에 비해 보놈 리샤르 호는 상선개조 군함이고 구식이었다. 배의 숫자는 존스 쪽이 더 많았지만 보놈 리샤르 호 빼고는 전부 프리깃, 브리간틴, 스쿠너 같은 소형함선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세라피스와 '맞다이'가 가능한 배는 보놈 리샤르 호 뿐이었다. 영국 측의 스카버러 백작 호도 슬루프라서 그다지 도움은 안됐다.
이 전투는 사실상 1:1의 전투였다.
당대 해상전투에서는 '함대교전 시 전열함은 전열함끼리, 소형함은 소형함끼리만 싸운다'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큰 함선은 작은 함선을 건드리지 않았고, 작은 함선은 큰 함선에게 덤비지 않았다. 이는 유럽식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된 관습이었다. 그 외에도 실리적인 이유가 존재했는데, 자신보다 작거나 큰놈을 까봐야 시간 낭비고, 그 시간에 비슷한 체급과 다이다이를 뜨는게 더 효율적이라는 계산이었다. 만약 작은 배의 선장이 정신 나가서 큰 군함에게 선빵을 갈긴다면 그 즉시 불문율이 깨지고 자비따윈 없이 일제사격을 맞고 침몰 당했다.
존스는 보놈 리샤르 호의 빈약한 무장을 조금이라도 강화시켜 보려고 대포를 몇개 더 장착했다. 하지만 수병들의 숙력도가 낮아서 영국해군의 2발 쏠 때 이쪽은 고작 1발 쏘는게 전부였다. 속력도 더 빨랐던 세라피스 호는 보놈 리샤르 호 주변을 뱅뱅 돌면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계속되는 포격으로 인해 보놈 리샤르 호의 선원 절반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피어슨 선장은 배를 가까이 대서 존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제 끝난 거 같은데 명예롭게 항복하지 않겠나?'
그리고 존스는 이에 맞서 '항복해서 저주 받을 바에 차라리 배와 함께 죽겠다'라며 거절했다고 미국 역사서에 쓰여있다.
또한, 비공식적으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I have not yet begun to fight!)'
(역사가들은 존스가 평민 출신이었으므로 오히려 이쪽이 진실일거라고 추론하고 있다.)
두 배가 가까워지자, 존스는 수병들에게 백병전 준비를 지시했다. 보놈 리샤르 호 수병들은 삭구를 던져 배를 접안 시켰고, 머스킷 사격과 수류탄 투척을 해댔다. 대포 역시 조준이 필요없는 영거리라서 그냥 마구잡이로 갈겨댔다.
이 때, 윌리엄 해밀턴이라는 수병이 던진 수류탄이 세라피스 호의 갑판을 구르다가, 선창 해치 아래로 쑥 빠져 포갑판 탄약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라피스 호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원래는 전투중에는 유폭 위험으로 해치를 개방하지 않는데, 이때 세라피스 호의 포갑판은 너무 많은 사격으로 인해 화약연기가 가득 차 있었고, 피어슨 선장은 포수들의 시야 확보를 위해 연기를 빼려고 잠시동안 해치 개방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방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 폭발로 인해 세라피스 호 갑판에서 싸우던 영국 수병들과 해병대 절반이 죽었다.
여기에 더해서 보놈 리샤르 측 수병들이 마구잡이로 쏴대던 눈 먼 대포알 하나가 세라피스 호의 주 돛대를 부러뜨리는 럭키샷이 나왔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프랑스 해군의 프리깃 얼라이언스 호(USS Alliance)가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갑작스레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세라피스 호에게 포격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당시 함대전은 동급의 군함끼리만 붙는게 불문율이었는데 미치지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얼라이언스 호의 선장은 프랑스 해군 장교였던 피에르 론데(Pierre Landais)였는데, 프랑스군들 사이에서도 '또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을 자주하던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안 그래도 갑판이 날라가서 정신 없던 세라피스 호는 양쪽 모두를 상대로 대응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은 존스는 수병들과 프랑스 해병대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참고로 존스는 프랑스에서 출항하기 전, 규정인원보다 훨씬 많은 해병대를 승선시켰다. 아마 이런 단함전투를 염두해 둔 조치였다. 그래서 당장 양측의 백병전 인원은 보놈 리샤르 호가 훨씬 많았다.
(존스가 태우고 온 '프랑스 해병대'라는 부대는 전원 아일랜드 출신들로 이루어진 외인부대인 '와일드기스(Wild Geese)'였다. 이들은 고향을 핍박하는 영국과 싸우려고 프랑스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영국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싸웠다.)
결국 영국해군은 세라피스 호의 주갑판을 빼았기고 선창 아래에서 들어가 농성해야 했다. 이 시절 배의 주갑판을 빼앗기면 배를 조함할 방법이 없으므로 산채로 나포 당하는거나 다름 없었다. 이번에는 존스가 반대로 피어슨에게 항복을 제시했다. 그리고 마침 얼라이언스 호는 고자가 되어버린 세라피스 호 옆에 대놓고 붙어서 선창 아래를 향해 포도탄을 마구 갈겨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이었던 피어슨은 싸우다 죽기보다는 명예로운 항복을 택했다.
한편 프랑스 해군의 브리간틴과 스쿠너는 영국해군의 스카버러 백작호를 상대로 일방적인 추격전 끝에 나포에 성공했다. 위에서 얼라이언스 호가 보놈 리샤르 호를 도와주러 온 것도 이미 이 쪽 게임이 끝나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투는 대륙-프랑스 연합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존스와 선원들은 승리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함이었던 보놈 리샤르 호가 초반에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세라피스 호 보다 더 크게 손상되어 화재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라피스 호를 나포하기 위해 인원 대부분이 건너가있던 상태라서 화재를 진압할 사람도 없었다. 프랑스 해군 배 3척에서 지원 온 수병들까지 동원하여 불을 꺼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존스는 배를 포기했다.
그렇게 영국 전열함과 싸워 이긴 첫번째 미해군 군함 보놈 리샤르 호는 9월 25일 자정 0시에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나포한 세라피스 호로 옮겨온 존스와 수병들은 영국수병들을 선창 아래에 가두고 이 5급 전열함을 동맹국 항구로 끌고 가려 했다. 하지만 아까 얼라이언스 호가 옆에서 갈겨댄 포도탄으로 인해 배 옆구리에는 구멍이 엄청 크게 뚫려있었고, 영국 수병들은 이 틈으로 나가서 새벽에 보트 몇개를 풀어 부상당한 피어슨 함장을 태우고 죄다 탈출해버렸다. 존스와 선원들도 그들이 탈출한는 모습을 보았지만, 딱히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요크셔 해안가에서 이를 지 켜보던 수많은 영국인들은 영국수병들이 탈출하여 해안가로 돌아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귀환길도 상당히 쉽지 않았다. 약이 오른 영국해군 군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추격을 해오고 있었고, 프랑스해군 선장들은 서로의 공적을 두고 지들끼리 아가리 파이팅 중이었다.
원래 프랑스로 가려던 존스는 항로를 돌려 세라피스 호를 네덜란드 영토인 텍셀 섬(Texel)에 좌초 시켰다.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었으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을 원하던 나라였다. 네덜란드 해군은 영국해군에게 접근금지를 선포하고 존스와 수병들을 데려갔다. 존스는 암스테르담으로 정중하게 압송되어 융숭하게 대접 받았다. 그는 살롱에서 네덜란드 귀족들과 사교계 인사들과 만나 '영국해군을 물리친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존스의 활약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전체에 퍼졌고 그의 커리어하이를 장식했다.
좌초한 세라피스 호를 압수한 네덜란드 해군은 배를 도크로 끌고 가 2주 동안 말끔히 수리해주었다. 영국은 세라피스 호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그 요청을 무시하고 이 배를 다시 존스에게 인계했다.
영국 정부는 주 네덜란드 대사를 통해 존스는 전쟁 범죄자이며, 대륙해군이 나포한 세라피스 호와 스카버러 백작 호를 돌려받기 위해 딴지를 걸어댔다. 일단 대륙해군은 '식민지 반란군 소속'이므로 유럽국가들에게 공인된 국가가 아니고, 무국적 선박인 세라피스 호와 스카버러 백작 호는 암스테르담에 기항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입을 맞추어, 다음날이 되자 두 배를 프랑스 해군 소속으로 바꿔버림으로서 또 한번 영국을 물 먹였다.
악이 받친 영국해군은 아예 암스테르담 인근으로 몰려와 닻을 내리고 뻣치기에 들어갔다. 존스가 배를 몰고 출항하면 바로 나포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존스와 선원들을 순순히 내주지 않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27일, 자카르타로 출항하는 대규모 네덜란드 상선단이 출발하는 날에 맞춰 존스와 선원들은 선단 사이에 끼어 영국해군의 앞을 당당하게 지나쳐 빠져나갔다.
프랑스로 돌아온 존스는 빼앗은 세라피스 호와 스카버러 백작 호를 루이 16세에게 바친 뒤, 영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준 공로로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다. 존스는 루이 16세에게 하사 받은 검과 훈장을 평생토록 간직했다.
영국해군의 지휘관이었던 피어슨은 비록 패장이긴 했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싸워 상선단을 지켜냈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귀족작위를 수여 받았다.
두번이나 영국해군을 이긴 존스의 활약 탓에 영국해군은 식민지 전쟁에 대한 전략을 변경해야만 했다. 그냥 북미대륙만 신경쓰다가는 언제 또 본토가 공격 당할지 모르는 판국이니 해군 전력을 한쪽에 몰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영국해군 군함들이 본토해안 초계에 투입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존스는 다시 한번 높으신 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륙해군의 실태를 밝히며 제대로 된 인재 양성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것에는 '해군장교양성소' 건립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유럽 국가들의 해군과 접촉하여 학교 건립에 필요한 교관들을 섭외해오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나 높으신 분들은 이 안건을 또 한번 반려했다. 미국 정부는 그럴 예산이 없었다.
존스는 이후 미국 최초의 전열함이 될 아메리카 호(USS America)의 선장으로 임명됐다. 74문의 2급 전열함의 스펙을 갖춘 이 군함은 미합중국 해군의 기함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배는 건조예산이 나오질 않아 인해 건조가 계속 미뤄졌다. 존스는 직접 건조를 감독하면서까지 이 배를 진수시키고 싶어했으나 당시 미국의 낙후된 조선기술 탓에 조금씩 썩어들어가는 퇴물이 되어버렸다.
대륙해군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존스는 결국 미국을 떠났다. 유럽으로 가서 이리저리 이력서를 돌리다가 1787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 흑해함대의 해군 소장으로 스카웃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존스를 맞이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게 힘써달라고 했다.
(당시 유럽의 군대는 국적보다는 신분을 먼저 보던 시대였다. 장교들은 계약이 끝나면 다른나라 군대로 소속을 바꿔 복무하는게 보편적이었다. 영국인이 러시아군에 복무하는 것도 가능했고, 독일인이 프랑스군에 복무하는것도 가능했다)
존스의 공식적인 보직은 '해군소장(Rear admiral)'이었다. 그는 포템킨 제독의 휘하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과 여러번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존스의 군경력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존스를 증오하던 영국해군 관계자들은 러시아 해군에 계속하여 존스에 대한 악성루머를 퍼트렸다. 반역혐의, 스파이 혐의까지 추궁받던 존스는 결국 1789년 4월, 12살 난 소녀를 성폭행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프랑스는 존스와 친분이 있던 세구르 백작(Louis Philippe, comte de Ségur)을 변호인단을 파견하여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존스는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코앞에 두었다. 반면 존스가 몸 바쳐 싸웠던 미국은 이 사건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사실, 당시 미국은 신생국가라서 국제정 위상이 바닥을 기던 나라였으므로 딱히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다 이겨가는 와중에 존스가 소녀와 성관계를 맺은 게 사실이라며 증언을 뒤집어 버렸다. 존스는 그녀에게 '정당한 페이를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여러번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성폭행' 혐의가 '동의하의 성관계'로 바뀌어 무죄가 이뤄지긴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존스는 페도로 낙인 찍혔으며 그의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났다.
러시아를 떠난 존스는 스웨덴 해군에도 이력서를 내보았으나 채용되지 못했고, 결국 은퇴하여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내내 고향 스코틀랜드를 그리워했으나, 영국의 증오를 샀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존스는 회고록을 작성하기도 하며 말년을 보냈으나 풍족하진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그는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45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 아파트는 21세기 현재까지도 파리에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그나마 확실한건 그의 프랑스인 친구 피에르 시모누(Pierrot Francois Simmoneau)가 그의 관에 보존용 알코올 처리를 하는 비용으로 40프랑을 기부했다는 기록 뿐이다.
그의 시신은 파리 외곽의 생 루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국가에 귀속된 그의 남은 세간은 혁명정부에 의해 매각되었고, 그는 그렇게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다.
그로부터 딱 100년 하고도 7년이 흐른 1899년, 파리 미대사관 직원이었던 호레이스 포터라(Horace Porter)는 미국인이 존스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양반은 본업은 외교관, 취미가 재야 사학이었다. 그는 생 루이 공동묘지 어딘가에 묻힌 존스의 관을 찾기 위해 혼자서 6년에 걸친 조사를 펼쳤다.
포터는 그의 관으로 추정되는 관 5개를 찾았는데, 4개는 전부 꽝이었다. 그는 암담한 심정으로 마지막 한개 남은 이름 명판도 없은 낡은 관을 열어보았는데, 이 관이 바로 존스의 관이었다.
위에 언급한 친구 시모누가 보존처리를 부담해준 덕분에, 존스의 시신은 100년이 지나고도 어느정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터는 파리 의학대에 정밀검사를 요청하여 결국 이 시신이 존스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포터는 이를 미 대사관에 알렸고, 미국의 잃어버린 영웅을 찾았다는 소식은 제 26대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트럼프보다 먼저 '위대한 미국'을 주창했던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의 연장선으로 강력한 해양 투사력을 위해 해군력의 증강을 원하고 있었다. 미해군의 선각자이자 아버지 격인 존 폴 존스의 시신 발견은 그런 그의 정책에 날개를 달아주는 듯한 소식이었다.
거기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미국의 소설가 페니모어 쿠퍼와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는 존스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써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고, 이제 모든 미국인들이 존스의 업적을 알게 됐다.
(프랑스 정부는 시신반환 전에 파리에서 국장으로 존스의 장례를 다시 치뤄줬다.)
루즈벨트는 당장 존스의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올 방안을 짰다. 그의 시신을 실어가기 위해 장갑순양함 브룩클린 호(USS Brooklyn)와 3척의 다른 순양함들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도착했다. 함대가 시신을 싣고 미국 동부 해안에 당도하자, 이번에는 미해군 대서양 함대 전체가 마중 나와 귀환길을 사열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 4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미해군 사관학교 '애나폴리스'에서 존스의 영전식이 치뤄졌다.
애나폴리스는 존스가 건립하고자 했던 해군장교 양성소의 현실판이었다.
오늘날에도 애나폴리스의 예배당 지하 홀에 가면, 청동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존 폴 존스가 안장된 거대한 석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석관 주변에는 생전 그가 지휘했던 알프레드, 프로비던스, 레인저, 그리고 보놈 리샤르와 세라피스, 얼라이언스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미해군의 아버지이자, 미해군에게 최초의 승리를 안겨준 위대한 제독'이라고 각인된 명판이 놓여있다.
존스의 이름은 1993년 취역한 알레이버크급 구축함 3번함(DDG-53)의 이름으로 사용되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영화 '배틀쉽'에서 외계인들을 상대로 혼자서 열심히 싸우던 바로 그 배다.)
그 뿐만 아니라 존스가 지휘했던 보놈 리샤르 호 역시 그 상징성 덕분에 함명을 계승하여 계속 미해군에서 사용 중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본 험 리처드 호'는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6번함(LHD-6)의 이름으로 명명됐다.
참고로 이 배는 운명의 장난인지, 2020년 7월 의문의 화재로 인해 배가 손 쓸수 없을 정도로 불타버려서 결국 미해군에서 스크랩처리 되고 말았다.
자신의 조상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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