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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애가(愛歌) _ 66

..(61.81) 2023.09.09 00:22:34
조회 341 추천 21 댓글 7



서희를 창가에 앉힌 주승이 단출한 짐꾸러미를 짐칸에 넣었다

사람들의 열차 안 움직임이 조금 전에 비해 잦아든 것이 아무래도 제물포가 종점인 이 열차가 곧 경성을 떠날 모양이었다

이는 곧 서희가 다카하시와 만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가슴이 답답함을 느낀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된 상황으로 인해 주변의 소리에 더욱 민감할 수 밖에 없던 서희가 막 제 옆에 앉는 주승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럴 것까진 없는데난 네가... 대체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 때문에 시작된 일내가 풀어야지.”


그게 어떻게 너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또 어떻게 푼다는 거지그건 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목소리 낮춰열차 출발한다.”

 

덜커덩거리며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눈에 익은 바깥 풍경이 지나쳐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창밖의 그림이 휙휙 바뀔 때마다 주승의 마음에 뭔지 모를 감정이 깃들었다.

 

경성은 서희와 유라자신의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던 삶의 종적이 남겨진 곳이었다

한때는 끔찍할 정도로 떠나고 싶던 적도 있으나 어쨌든 지금은 경성을 떠올리면 애틋함이 먼저였다.

 

그런 경성이 이렇게나 빨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단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그건 서희도 마찬가지였다

이혁을 만나고다카하시를 만나고부터 서희는 언제든 제게서 멀어질 준비가 돼있는 사람 같았다.

 

자신에겐 그런 서희를 마냥 붙잡고 늘어질 자격이 없었지만자신은 늘 그녀가 제 가까운 곳에서 평범한 이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서희가 손을 뻗어 주승의 팔을 붙들었다그리고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주승이 그런 서희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네 마음 알아.”

웃기시네.”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 걸 어떡해시름이 지속되는 이상 난 계속 불행해 질 거야.”


날 협박하는 거냐?”

내 마음 알아달라고.”

내가 그걸 몰라서 걱정하는 거 같아?”


강주승...”


됐다눈이나 붙여약속된 시간에 깨울테니.”

 

주승의 말에 서희의 손이 스르르 물러나 자기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이로써 끝인 줄 알았던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서희가 그의 말대로 눈을 감고 짧은 잠을 청했다주승이 그녀를 야속하게 바라봤다

그 말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의 것일 뿐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을 참 잘도 하는구나오서희.’

 

 

 

 

서희와 만나기로 약속된 소사(지금의 부천역)가 멀지 않았음을 확인한 다카하시가 무슨 꿍꿍이인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괜스레 이마를 짚었다.

 

마주 앉은 부하 중 하나가 이를 보고는 가방에서 중간 크기의 술병을 꺼내 내밀었다

다카하시가 두통이 잦으니 혹 힘들어하면 주라며 스즈키 하루마가 일전에 건넨 것이었다.

 

좀 드시겠습니까?


그 술에 뭐가 들었는 줄 알고 날더러 마시란 거지?


제가 누구의 손도 타지 않도록 쭉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안심해라... 그렇다는 건 네가 마셔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


또 그렇다는 건여기 있는 누가 마셔도 괜찮을 거란 뜻이겠고.


그렇습니다각하.


그럼마셔서 증명해 봐여기 있는 모두난 그 증명이 확실히 끝난 후에야 마실 테니.


하지만...

어서명령이다.

 

다카하시의 명이 떨어지자그를 둘러싸고 앉은 부하들이 서로에게 시선을 두었다

내내 무감한듯 보이던 얼굴들에 다른 빛이 어렸다

총독이 의심병이 있다는 소문이 거짓 아닌 실제라는 사실에 실망한 모양이었다

태생이 좋은 것 하나로 어느 것도 검증되지 않은 그가 갑자기 제 상관이 된 것도 마뜩지 않았는데이런 나약한 모습이라니 속이 뒤틀렸다.

 

서로 눈치만 보던 그들이 결국 서슬퍼런 다카하시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한 모금씩 돌려 마셨다

다시 다카하시에게 술병을 내밀었다하지만그는 여전히 안심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고작 그 한 모금으로 안전하다 어떻게 장담하지다시 돌려.


하지만임무 중에는 음주가 금지.


총독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그러므로 이것 또한 임무변명의 여지가 있나?


아닙니다각하.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은 독한 술을 세명의 부하가 눈치껏 다시 돌려 마셨다그제야 다카하시가 술병을 건네받았다

열차의 진동에 따라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는 병 속의 술을 바라보던 그가 무슨 생각인지 창을 열어 그대로 밖에 버렸다

부하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왜 마시지 않으십니까?


생각해보니난 누구와도 술을 나눠 마셔 본 적이 없더란 말이지내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건 상당히 끔찍한 일이니까.


그런데왜 저희에게 술을...

글쎄... 왜 일까.

 

뜻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런 얼굴을 한 다카하시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웠다

그의 시선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손목시계의 초침으로 향했다.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란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세 명의 부하 모두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이내 픽 쓰러졌다

저마다 의자에 기대 약 기운에 빠져 들자비로소 다카하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차가 소사역에 진입하기 불과 5분 전이었다.

 

임무 중 술 취한 자들에게 어떤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 알 터내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을 거다.

 

끼익역으로 들어서면서 열차의 속도가 늦춰졌다

마음이 바쁜 사람들이 이른 준비를 끝내고 좌석에서 일어나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다카하시가 재빨리 그 무리 속으로 합류했다.

 

열차에서 내려서자각 칸에서 내린 승객들이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방향으로 바삐 움직였다

아무래도 역 밖으로 나가기 위한 출구가 한 군데 밖에는 없는 모양이었다그렇다는 건 그들 또한 여기 서 있는 저를 지나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제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오롯이 받으며 인파 속에서 서희를 찾기 위해 눈을 빛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그리웠던 이가 제 시야에 들어온 탓이었다.

 

터벅터벅다카하시의 두 발이 어쩌겠단 생각도 없이 무작정 앞서 나갔다

상대와 자신의 간극이 좁혀질수록 마음은 더 조바심이 나 걸음이 빨라졌다

거침없는 그의 행보를 알아챈 주승이 다카하시를 알아보고 묵례를 했으나그가 안중에 있을 리 만무했다.

 

세 걸음두 걸음한 걸음... 드디어 그녀와 만난 다카하시가 외형은 잘생긴 미소년 같은 서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

 

처음엔 깜짝 놀라 버둥거리는가 싶던 서희가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다카하시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악귀라 불린다고 들었는데... 그의 체취는 여전했다.

 

...

그리웠다가슴에 사무치도록 말이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었던하다못해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던 그리운 이가 손에 만져졌다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움의 크기만큼 목이 메여 어떤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그저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듯이 그를 꼬옥 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며 기다리고 있던 주승이 불안했던지 주변을 둘러봤다그가 서희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가야 해인파가 죄다 빠져나가면 눈에 띄기 쉬우니어서.”

 

주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희가 다카하시를 살며시 밀어냈다.

 

어서 가야해요.

그래.

 

인근에 이혁 사장이 마련해 둔 곳이 있어내가 앞서 걸을 테니 따라와.”

 

주승이 짐꾸러미를 들고 앞서 나가자서희가 다카하시의 몸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란히 함께주승의 뒤를 따랐다.

 

 

 


이혁이 서희 부부와 주승을 위해 준비해 둔 곳은 일본식 가옥으로 된 여관이었다

여관의 입구에 들어서 긴 복도를 지나면 중앙 뜰이 나오는데그들이 머물 곳은 그보다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치상 상당히 독립적이고 비밀스런 그 공간은 그들이 머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밖으로 통하는 쪽문이 여기서 가깝다하니만약의 경우 속히 빠져나갈 수도 있을 터였다

아마도 그들의 안전을 걱정한 이혁의 배려지 싶었다.

 

일행을 안내한 여관 주인이 물러가자주승 또한 볼 일을 보고 오겠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그리움이 잔뜩 쌓인 부부에게 회포를 풀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두 사람만이 남은 공간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다카하시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던 서희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마와 눈썹오똑하게 선 콧날 등 그의 얼굴선을 손으로 천천히 덧그렸다

종종 그가 그리워 손의 감각을 떠올려보곤 했었는데전보다 더 야위었다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서희의 손이 미끄러지듯 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다카하시가 더는 못참겠다는 듯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동안... 내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는 걸넌 알까?


...


지금의 난... 내가 끔찍한 악몽에서 비로소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언제고 깨어날 달디단 꿈 속에 빠져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그리고 두렵다그것이 후자일까봐.


꿈은 아니에요.


그래그럴 순 없지이렇게 네가 보이고 만져지니까하지만꿈처럼 아주 짧은 현실이지.


그간 어떤 악몽 속에 사셨기에두렵기까지 한 거에요?


네가 없는 악몽...


그리고 렌이 악귀가 되어야만 했던 악몽이요?

 

서희의 목소리로 들은 악귀라는 단어가 그 어느때보다 날이 선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내리꽂혔다

다카하시가 서희를 제 품에서 놓고 슬픔에 젖은 눈으로 내려다봤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심판자의 앞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죄인처럼 입술을 달달 떨며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저 때문이었겠지요아름다운 악기를 만지던 그 손으로 칼을 잡고 피를 흘리는 악귀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살며시 떨리는 음성이었지만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각오했던 탓인지 서희는 그의 앞에서 의연했다

그녀가 여리고 아담한 체구 속에 강인한 의지를 가진 여인이었다는 걸 다카하시가 새삼 깨닫고 불안해졌다

이렇듯 자신에게 온 이유가 무언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내가 렌을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줄게요렌의 아버지... 다카하시 무네노리 육군대신을 만나고 싶어요.

 





p.s 나조차도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싶어 낯이 뜨겁네. ㅠㅠ 미안해요.




애가(愛歌) _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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