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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대공자 1-2

다정독서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6.21 07: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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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긴 잠에서 깨어나 제일 힘든 건 식후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상단을 통해 서역상인들에게 입수한 커피가루에 우유와 당분을 맞춰서 먹어보기도 했지만, 저 철관음 "상아"가 완벽한 비율을 맞춘 커피조차, 늘 금색봉투를 뜯어, 종이컵 3/4 지점까지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맥심 골드모카를 따라잡지 못했다.

내가 겪은 7년은 정말 그냥 긴 꿈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꿈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은 내게 신문물과 문화에 대한 강렬한 충격과 깨인 생각을 가져다 줬지만, 내게서 남궁세가 대공자라는 자릴 뺐었다. 지금 난, 두 달 전의 씩씩하고 패기 넘치는 무공광인 소검광 남궁혁이 아닌, 그저 뜻이 꺾인 많은 실패자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 지금의 상황도 영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니긴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아 이젠 로템 11시 섬멀티처럼 되어버렸지만, 아직 대공자전인 풍현각을 지키고 있으며, 날 빅뱅이나 동방신기만큼 따르는 200여명의 시비들의 추앙도 받고 있는 등, 무가에서 기혈이 막혀 반폐인이 된 사람의 생활치고는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입맛이 변해 꿈을 꾸기 전, 그렇게 즐겼던 벽라춘의 은은한 산뜻함도 철관음의 묵직한 달콤함도, 용정차의 화려한 맛도, 금색 커피믹스의 망상을 넘지 못하고 밍밍한 물이 되어버렸다는 것 정도일까?

안휘의 잠들어 있는 잠룡, 남궁세가는 지금 대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저 아이 내 전담시비인 앵앵이 있다. 남궁세가 시비연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제 스무살의 앵앵은 그야말로 떠오르는 신진세력의 아이콘이다.
나를 따르는 무리인 광풍현회의 총무기도 한 그녀는 지금 시키지도 않은 커피타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사실 차를 타는 일은 굉장한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정제되지 않은 커피는 썼고, 당분과 우유를 많이 넣어서 너무 달았다. 진한 것만이 좋다고 생각해서일까. 철관음 상아가 좀 그리웠다.
철관음 상아는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떠오른 차 타기의 달인이다.
내 딱딱해진 표정을 보고 앵앵은 실망했던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내가 풍현각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막강한 실력자로 떠오른 앵앵이 덕분인데.

"대공자님, 맛이 없으세요?"
"아니야, 괜찮아. 좀 짙어서. 다음엔 뜨거운 물을 조금 더 탔으면 좋겠네. 그래도 맛있다."
"상아언니더러 한 잔 더 타오라고 할까요. 금방 불러올 수 있는데요."
"아니야, 나 아니라도 언제나 그렇게 바쁜 아이를. 커피가루도 얼마 안 남았고."
"전 왜 이렇게 재능이 없죠."
“그래, 내가 보기에도 넌 차엔 맞지 않는 것 같아.”
“미워요!”

울음을 왕하고 터뜨리고 돌아서 뛰쳐나가는 앵앵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와 난 이 정도의 장난은 쳐도 될 만큼 전우애가 있다. 앵앵은 내가 일곱 살 때 내 전담시비로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벌써 15년이니 이젠 시비라는 생각보다 한 살 터울의 여동생이란 생각이 먼저 들어서 괜히 보면 장난을 치게 된다. 자기가 모시는 윗전에게 미워요라니 신선하다.

그리고 저렇게 마음 약해보여도 앵앵이는 강단이 있다. 꿈에서 깨어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앵앵이에게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늘 상전들과 선배시비들에게 의존해 왔던 앵앵이를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서 난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한글을 가르치는 것도 그 일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처음에는 진서를 가르치려고 했었다 하지만, 개인전담 시비라고 해서 하루 종일 탱자탱자 놀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간이 모자라서 한글을 가르쳤다. 앎에 대한 포한이 있던 앵앵이는 고작 두달만에 읽고 쓰기가 자유로운 경지에 올라 나를 놀라게 했다.
식자층이 된 일은 앵앵이에게 굉장한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져다 줬다. 그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재미삼아 이야기해 줬던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낀 앵앵이는 장장 일 년에 걸친 투쟁 끝에 일개 시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쟁의와 단결을 통한 노동운동의 방법을 가르친 것은 나였지만, 사실 현대사회의 노동쟁의 투쟁을 지금 대명천지에, 그것도 시비 두엇의 목숨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생각하는 무림세가에서 이만한 조직을 이끌고 행동한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추진력으론 해 낼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녀는 영리했고, 지혜로웠다.

크음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곧 앵앵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자님.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아버지가 웬일이지. 돌아올 땐 못난 자식의 생환에 눈물을 쏟으셨던 분이지만, 기혈이 뒤엉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아시곤, 바로 날 내치셨던 분인데…….

“공자님. 차를 올릴까요?”
“그러려무나. 가주님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그저 세가의 방식대로 다과를 차려오너라.”
“예. 공자님.”

내 처소엔 신기한 물건들이 많다. 잠에서 깨어나 꿈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 만든 물품들이 하나하나 방을 채우고 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연필이나 딱딱하게 만든 당과사이에 생크림을 발라 만든 수제 샌드과자를 얻기 위해 드나드는 장로들이 있을 정도였다.
거의 일년만에 보는 아버지는 그대로셨다. 뇌룡검제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큰 몸에 건물에 비해 방이 작은 풍현각이 꽉 차보였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것이 내공을 잃은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받거라.”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은 금장식이 딸린 작은 열쇄였다.
“장로회의에서 결정을 했다. 풍현각은 소가주전이다. 이미 소가주의 지위를 잃은 네가 언제까지나 여기를 쓸 수 없지 않느냐. 내일부턴 명륜전을 사용하거라.”
명륜전이라니, 드디어 떨거지가 되어버린 건가? 명륜전은 2류 식객들의 처소다. 강호의 일급무사만 되어도 백련각으로 모셔지는데, 세가의 장자인 나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오일에 한 번씩 열리는 오일회의 강의가 있는 날이다. 풍현각 옆 연무장에서 야외 강의를 하려고 만들어 놓은 올바른 조직관리론이라는 소책자를 집어든 아버지가 날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 이게 그 네가 만들어 냈다는 소문의 문자냐? 간단해 보이기는 하다만은 네 놈도 사내라면 좀 더 큰 뜻을 품어야 할게야. 뇌룡검제의 장자가 하나 가치 없는 시비들과 시시덕 거리다니. 어디 가서 얼굴을 들지 못할 이야기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다만, 명륜전으로 옮겨도 저 아이는 같이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해라. 종이에겐 내가 설명하겠다.”

남궁종은 내가 소가주직에서 퇴출된 후 새로 소가주 직에 오른 내 이복동생이다. 이부인도 한 번 찾아가 봬야 하는데. 배려가 부족했다. 야심만만한 종이와는 다르게 이부인은 세가의 둘째 부인으로 품행에 어긋남이 없고 후덕하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내겐 친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다.
“무슨 시비의 이동에 남궁세가의 가주까지 나서십니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앵앵이가 조신하게 차린 다과상을 들고 들어왔다. 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데, 극상의 철관음이다. 매사에 신중한 앵앵이 답지 않은 실수다. 아버지는 대번에 얼굴이 흐려졌다. 가주전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고급품이라는 것을 한 모금을 마신 후 바로 아셨던 것이다.
“운종로의 벽제상단을 맡아볼 생각이 있느냐? 그나마 네가 아랫 사람들은 잘 단속하는 모양이구나. 남궁세가의 가주보다 좋은 차를 마시는 걸 보면 말이다. 쓸모가 없는 책은 버려지는 법이다. 네가 내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고 언제까지 칩거생활로 세월을 좀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일하지 않는 자 먹을 필요가 없는 법이다.”
“3개월만 몸을 더 추스른 뒤, 제가 할 일을 결정하겠습니다. 그 때 가서도 제가 쓸모없다 생각하신다면 세가에서 내 보내셔도 따르겠습니다.”
“그래. 몸은 좀 괜찮느냐?”
“좋아지고 있습니다. 의약전 수석시비 초선이의 말로는 기혈이 꼬인 것을 조금씩 풀어가고 있다하니, 이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 정도의 삶은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구나. 난 이만 나가 보마. 길은 하나가 아니다. 무가의 자식이라고 누구나 절정고수가 되는 건 아니란 말이다. 넌 검신의 손자이자 이 뇌룡검제의 장자다. 보중하거라.”
부모의 정은 언제나 못난 자식에게 쏠리는 것인가. 뜨거운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가슴에서 한숨을 토해내듯 인사를 올렸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2. 천재.

아버지가 나가시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앵앵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눈에도 토라진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이젠 자기가 나의 보호자라도 된 양, 다탁 앞으로 앉아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락을 해서, 오늘 오일회 모임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해라. 그리고 오늘 안으로 명륜전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니 그리 알고. 추헌에게 이야기해서, 다 두고 새로 만든 물건들과 네가 보기에 소용될 것만을 정해서 옮기도록 하거라. 아, 너도 같이 옮겨가는 것이니, 새로 들어올 시비에게 풍현각에서의 처신을 알려주도록 하고.”
조금 찢어지고 눈매가 매서워서 날카로워 보이는 앵앵이의 눈이 또 눈물로 가득해졌다. 쇠락한 오라비의 처지가 보기 안쓰러워서겠지. 입술을 꾹 깨문 앵앵이는 돌연 결연한 눈이 되더니 내게 말했다.
“공자님. 제가 모임을 소집하겠어요.”
“그러지 마라. 저번에 내가 말해 준 적이 있지 않느냐. 힘이 있다고 사사로이 그것을 사용하다보면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진 쪽은 여전히 세가다. 주변의 비난을 잠시 참아낼 용기를 갖기만 하면, 시비 몇 쯤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지도부 스물만 죽인다면 남궁세가 시비연합회라는 뿌리가 깊지 않은 단체는 금방 와해될 것이다. 그리고 명륜전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풍현각은 지금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다.”
“그래도, 그래도요. 이건…….”
“집이 바뀐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질 않느냐. 명륜전은 그야말로 세가의 외각이다. 네가 움직이는 것도, 사람들을 키우는 데도 유리한 점이 많다. 단출하게 짐을 챙기거라. 어서 움직여. 추헌이를 불러서 짐을 싸도록 하고. 난 종이에게 좀 다녀와야겠다.”

종이는 지금 대연무장에서 일대제자들과 수련을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경쟁심만 없었다면 소탈한 성정에 부지런함과 우직함을 갖춘 좋은 녀석인데. 남궁세가의 직계로 태어나고서도 내내 나와 비교당하며 자기 발로 서지 못한 지난 20년이 종이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정이 완전히 바뀐 지금 지난날의 설움으로 나를 박대한다고 해도, 형으로서 내가 참아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종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이부인은 명륜각으로 옮긴 후, 찾아봬야겠지. 어쩌면 종이의 나에 대한 질시는 어머니를 빼앗겼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부인은 거의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날 가슴으로 키우면서, 아무래도 자기 자식에겐 좀 더 신경을 덜 쓰셨던 것이다.
누군가 등 뒤에서 가뿐 숨을 내쉰다고 봤더니, 할아버지 처소의 수석 시비인 철상아가 내 뒷꼭지를 보고 뛰어와서 반색한다.
“대공자님, 어딜 가세요?”
“넌 어쩐 일이냐? 이 시간엔 거의 손님들 때문에 처소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검신께서 외출하셨습니다. 큰 주방 정희가 철관음과 딱 맞을 다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해서 시식을 하러 가는 길입니다. 맛이 괜찮으면 이따가 대공자님 야참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오늘은 번잡스러울테니 내일 가져오너라. 자세한 이야기는 앵앵이에게 듣고.”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오늘은 오일회도 있어서 기대하고 있는데요.”

오일회는 일종의 공부모임이다. 앵앵이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시비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하기야 기혈이 온통 꼬여 조석으로 누워지낼 때니 만나는 사람들도 간호를 담당하고 식사를 담당하는 시비들뿐이기도 했지만. 앵앵이는 머리가 좋았다. 오일회도 사실은 앵앵이가 요청해서 만든 것이었다. 제 목소리를 가지려면 일단, 자신의 발로 일어서는 것이 중요했다. 세가의 생활의 달인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나는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개개인의 질적향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부단한 실험정신과 기록만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 수 있을 거라면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진서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생활의 달인들에겐 기록과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일단은 오케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일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안휘 일대를 빛내는 차타기의 달인 철관음 상아가 탄생했던 것이다.
상아는 유달리 미각이 예민한 아이여서, 원래부터 차를 잘 탔었다. 나도 상아가 타는 차를 즐겨서, 식사 후에는 늘 상아의 차를 마셨었다. 그런 상아에게 난 그냥 감각으로만 차를 타지 말고 계량을 통해서 가장 좋은 차의 맛을 찾아내라는 조언을 해줬었다. 그 때부터 상아는 차를 탈 때마다 늘 모래시계와 찻잎의 숫자를 작은 서첩에다 기록하게 되었고, 3개월 후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만의 철관음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아. 사실은 내가 오늘 풍현각에서 나와서 명륜전으로 가게 되었거든. 그래서 오늘 모임은 갖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앵앵이가 전달하겠지만, 너도 광풍현회 아이들에게 오늘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도록 해. 괜히 헛걸음하지 않게.”
“명륜전이라니요.”
“자세한 이야기는 앵앵이에게 들어라. 난 종이를 만나러 가야 해서.”

대연무장에 가까이 이르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전해져 온다. 긴 꿈에서 깨어난 후, 기혈이 완전히 망가졌지만, 신기하게도 기감은 더욱 발전해서, 멀리서도 대연무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검을 휘둘러보고 싶다.
쓸모없는 생각이겠지. 종이는 일대제자들의 앞에 서서 대연검 제 4초 뇌전비격을 시전하고 있었다. 단단하고 곧은 검세가 녀석을 보는 것 같았다. 우직한 녀석. 성실한 동생을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렇게 멀리서 그냥 지켜보기만 할 때는. 종이가 나를 발견한 것은 내가 대연무장의 중간쯤을 걸어와서 뇌전비격의 검초가 끝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쳤을 때였다.
“좋구나. 장중한 기세가 꼭 세가를 닮았구나. 내가 아니라 네가 소가주가 된 것이 정말로 천만다행이구나. 종아.”
“형님 오셨소. 어쩐 일이시오. 그 몸으로 검을 휘두르러 오신 것은 아닐 테고. 산보라도 나오신 것이오.”
완벽하게 꼬였군. 한 때 가르쳤던 일대 제자들 앞에서 전대 소가주와 현 소가주가 이런 꼴을 보여봐야 좋을 것도 없고. 어차피 그저 축하해 주러 온 것일 뿐이니 한 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풍현각을 넘겨주려고. 이젠 내가 아닌 네가 세가의 당당한 소가주니까. 난 오늘 부로 명륜전을 쓰련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소. 집이란 그저 수련에 지친 몸을 잠시 뉘일 곳이면 충분하니까. 그 곳은 그대로 쓰시오.”
“아니다. 한낱 풀꽃들도 질 때를 안다. 항차 사람인 내가 도리를 어길 수는 없지. 내일부터 풍현각에서 기거하도록 해라. 그럼 이만.”

종이녀석. 말로만 거절하면 다인가. 아직 어리군. 생각이 저렇게 얼굴에 드러나서야 무공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다. 아니다. 정직한 성정 탓일 것이다. 거짓을 싫어하고 정의를 숭상하는 세가의 소가주로서는 뭐 괜찮을 것이다.
돌아가려다 사내들이 거칠게 호흡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게 보기 좋아서 대연무장 한구석에 앉아 일대제자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 때문인지, 몸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은 금세 달아올랐다.
“전룡쟁투!”
마흔 명의 사내가 내는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려서 꽉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듯 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저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군. 이름이 뭐였더라. 장삼 호법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전룡쟁투는 오른 발을 앞으로 뻗는 기세로 목을 찌르는 척을 하다가 상대방이 검의 옆면을 들어 막으면 왼쪽으로 한바퀴를 돌면서 상대의 하단을 공격하는 대연검의 대표적인 환격이다. 물론 잘 알려진 만큼 변초도 다양하다. 전룡쟁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제 일격이다. 일단 기세가 강해야 환격이 먹힌다. 막지 못한다면 처음의 일격으로 목숨을 거둘 수도 있다. 그래. 장무원이다. 그렇게 가르쳐줬는데, 아직도 저 꼴이라니.
한 마디를 던지려다가 그냥 참았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니까. 저들의 무공교관은 이제 내가 아니라 종이니까. 기회가 있겠지. 다시 한 번 태산같은 기합이 연무장을 울렸다.
“전룡쟁투!”
“전룡쟁투!”

장무원 녀석 이번에도 인가? 녀석의 오른 발이 원래 초식의 위치보다 1/3가량 짧은 위치에 놓였다. 그리고 그제야 난 보게 되었다. 왜 똑같은 초식을 하는 마흔 명의 일대제자들 중 그에게만 눈이 갔는지를 말이다. 녀석의 검은 다른 일대제자들의 검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그 순간 다른 누구보다도 장무원이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세는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패도에서 발생하지만,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쾌검에서도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뻗는 디딤발의 위치를 당김으로서 장무원은 전룡쟁투가 가지는 힘을 반 푼 줄인 대신 족히 세 푼은 앞선 속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전율이 일었다.
종이가 장무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역시 눈치를 챈 것인가? 지금 후지기수들 중에선 종이를 따라갈 무위는 없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니 뭐.

“장무원!, 넌 오늘부로 창궁검단에서 제명이다.”
“아니 왜?”
“검진의 생명은 정확함이다.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혼자서 독주하는 멍청이는 필요가 없다. 너 따위보다 고수는 얼마든지 있다. 다른 이와 함께 하지 못하겠다면 나가는 수밖에. 몇 번이나 지적한 말이니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 방법으로 모두를 맞추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예외는 없었다. 천재는 언제나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려야 한다. 동등한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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