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忙中閑)
조선의 남쪽 끝 한산도 통제영, 조선에서 가장 왜적과 가까이 있는 곳.
거대한 판옥선이 대열에 맞추어 정박된 모습이 가히 통제영의 높은 위용을 보여주는 듯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사들, 둔전을 일구는데 여념이 없는 백성들.
모든 것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통제영. 그리고 그 중심에는,
"통제사 영감 천리입니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운주당(運籌堂) 안의 여해는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들거라 하는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자 녹색 철릭차림의 천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단정히 튼 상투머리가
생각보다 어울린다 여해는 생각했다.
"군관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었다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철릭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과찬이십니다요, 영감."
"군관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이군관이라 불러야겠구나. 말도 다르게 해야...."
"아닙니다요, 그리 안하셔도 됩니다 영감. 아직까지는 천리가 편합니다. 그냥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서애에게 거두어진 이래로 그와 통제사를 오간 것이 수 번도 넘었다. 정읍으로, 여수로, 이제는 한산도로.
친근하게 천리를 대하는 여해의 말투에는 서애와 그 사이의 40년이 담겨있었다.
"영상 대감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 잠은 편히 주무시고 계시느냐?"
천리로부터 받은 서애의 편지를 받으며 여해가 물었다.
"대감께서야 전처럼 바쁘게 지내십니다요. 영의정이 되신 후로부터는 더 바빠지신 듯합니다만,
그래도 지난번 영감을 뵙고 난 후부터는 많이 기운을 차리신 듯합니다. 헌데 잠을 편히 주무시는지까지는
소인도 잘 모릅니다요. 동트기 전 새벽에도, 자시가 넘은 밤에도 늘 집무소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편지를 바라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해가 고개를 들려 천리를 바라보았다.
말에 담긴 천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알겠다. 곧 답을 써줄터이니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여해의 대답에 천리는 가볍게 예를 올리고 밖으로 물러갔다.
"통제사 보시게. 지금 조정은 강화 문제로 시끄럽다네. 하루 빨리 황상께 고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왜적들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을 터인데. 사안이 이렇다보니 요사이 통제영과 수군에 소홀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전하네. ... "
"여전하시군."
힘찬 필체로 써내려간 편지를 접으며 여해는 짤막히 감상을 표현했다.
무릇 재상이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하였다. 아래로 임금을 제외한 만 백성이 있는 자리.
아니. 때로는 임금 또한 백성 중 한 명으로 살펴야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은 전란의 모든 것까지도 받아들여야하는 위치였다.
그 모두를 합친 무게가 얼만큼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자신은 오로지 왜적과 싸우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그것은 무관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이기도 하다.
허나 서애 대감은 다르시다. 이미 이 전쟁은 손 쓸새도 없이 커져 버렸다.
이제 왜적은 전란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왜적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거늘, 명나라부터 전하와 세자 저하 사이의 미묘한 갈등,
멀어져만가는 민심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그분 앞에 놓여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힘드실 대감께서는 오히려 그동안 이곳에 신경쓰지 못했노라 미안함을 전하신다.
조금만은 자신을 위하셔도도 좋으련만, 한결같은 서애 대감의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기야 자신의 뻣뻣함도 대감닮아 그런 것 아니겠는가.
늘 자신은 다음 번이신 분,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자신의 몫으로 감내하시는 분.
여지껏 잘 견뎌오셨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허나 일전에 통제영을 찾아온 서애는 여해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큰 바람에 곧 떨어질 것같은 잎새처럼, 여해의 눈에 비친 서애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죄인이라는 글씨가 그를 가두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벗을 만난 회포를 푸는 자리에 당도한 진주성 함락 소식은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잎새를 땅으로 떨어뜨리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서애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다.
서애의 눈물이 그를 바라보는 여해의 가슴에도 맺히었다.
한참을 둘은 그렇게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천리에게 서애 대감을 맡긴 후에 여해는 운주당으로 향했다. 운주당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고는 눈을 감았다. 스스로에게 자조를 보내던 서애 대감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술 기운을 빌어 서애 대감께서는 자신에게 가슴 속 깊은 심정을 토해내셨다. 아마 그 말은 수백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으리라.
허나 지금은 안된다. 아직 서애 대감께서는 죽으시면 아니된다.
모두가 힘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이 전란은 끝나지 않는다.
왜적이 물러간 후에도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이 땅에 다시 백성들의 풍년가가 울리는 날,
피로 물든 바다가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는 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전란이 끝났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서애 대감께서는 하셔야 한다 여해는 생각했다.
모두가 살기 위해 대감께서는 사셔야 했다.
붓을 들었다. 그리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유려한 여해의 필체가 종이 위에 그려졌다.
' 재조산하(再造山河), 나라를 다시 만들다.'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으실 분을 위해.
한참을 정성스레 답을 쓰던 여해가 잠시 고개를 들더니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돌아온 여해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상자를 여니 은은한 국화 향이 느껴졌다.
아산에서 한 송이, 한 송이를 직접 따서 정성스레 말린 국화차였다.
예로부터 국화차는 머리를 맑게 한다고 하였으니 서애 대감께는 제격일 것이다.
"대감께서는 이 나라의 기둥이시니 늘 건강을 챙기셔야합니다. 천리의 편에 국화차를 보내드립니다."
이 국화차로 잠시동안이라도 대감께서 쉬실 수 있기를, 당신이 품은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시기를 여해는 간절히 바랬다.
"정말로 밖까지 나오지 않으셔도 되었는데...."
"아니다. 다시 먼 길 떠나야 할 텐데, 항상 수고가 많구나."
"두 분 일이신데 고생이랄게 있겠습니까? 소인도 오랜만에 바다 구경도 하고 좋았습니다."
환히 웃은 천리의 얼굴을 보니 여해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 곧 배가 당도할 터이니, 그 배를 타고 가면 된다. 편지와 다른 것들도 서애 대감께 잘 전해드리거라."
"걱정마십시오, 영감.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다시 뵐 날까지 몸 건강히, 무탈하십시오."
말을 마친 천리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잡았다. 얼마 지났을까, 한산도 바다 위에 도성으로 향하는 배가 떴다.
천리가 떠나고 여해는 통제영 수루에 올랐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전란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파도가 잔잔한 날이다.
망중한(忙中閑),
점점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져간다.
바쁜 가운데서 한가로운 때.
지금의 이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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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조각글 차를 여해의 시점에서 써보았음. 글 올리고보니 여해의 시점에서도 재미있을 것같아서.ㅎㅎ
시간 날때마다 (주로 새벽에..) 틈틈히 썼는데.. 원래 스타일이 드라마 속의 빈 부분을 채우는 스타일이라.ㅋㅋ
전작을 보면서도 그랬고.. (그때도 글솜씨는 ㅠㅠ)
는 어떨지 모르겠음요.ㅠㅠㅠㅠㅠ 금손은 어디에ㅠㅠㅠ
서애공, 여해공은 진리입니다. ㅎㅎ 짤은 갤줍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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