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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 우리 사랑의 조각들 3

편린(125.184) 2019.12.15 23:38:49
조회 1314 추천 6 댓글 1

시경에게 계속 이 주제로 이야기해보았자 재신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거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경이 믿는 공주이기도 싶고 아니고도 싶고 재신도 몰랐지만 당장은 피곤함을 잊고 싶을 뿐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며 시경에게 재신이 물었다.



“근데 은시경씨. 나 어디서 뭐 입고 자요? 방은 두 개인 것 같은데 여기는 옷방 같은데.”



재신의 말에 시경의 얼굴은 낭패를 본 기색이었다. 그도 그렇다시피 재신을 다른 곳에 데리고 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시경은 재신의 말을 듣자 더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마트가 안 닫았을 겁니다. 우선 마트에 가서 잠옷이랑 옷을 사는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근데 은시경씨 나 너무 피곤해요.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도저히 다시 나갈 자신이 없는 재신은 머리를 굴렀다. 한참을 생각하는 재신을 바라보며 시경은 안절부절못했다. 재신이 쓸 수 있는 물건들은 생필품이 다였지 옷이라던가 잠자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호텔이라도 예약하나싶다가도 재신이 제 눈앞에 없다면 불안한 시경은 거기까지 선택은 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 시경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재신은 태평하게 말했다.



“그냥, 오늘은 은시경씨 옷입고 잘래요. 내일 사러가요. 내일 일하러가요?”

“내일까지 쉬는 날입니다. 하지만 공주님 제 옷은 공주님한테 어울리지 않고, 깨끗한 새옷을 입는 것이....”

“은시경씨. 괜찮아요. 꼭 무슨 불면 바스라지고 숨이라도 쉬면 날아갈 것처럼 대하는데 나 그런 사람아니예요. 은시경씨가 생각하는 공주님도 그렇지 않을 거구요.”

“하지만....”

“진짜, 너무 피곤해요. 기력이 없어요. 나 여기서 바로 쓰러져서 잘 것 같은데?”

“아닙니다. 공주님. 그럼 제가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시경의 말에 재신은 이 사람이 원리원칙을 꼭 지키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한 숨을 쉬었다.



“혹시 내가 전에 이런 말 안했어요?”

“네?”

“답답하다구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 같았다. 답답이라고 부르던 재신의 말은 똑같았다. 하지만 다시는 듣게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시경은 재신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아직도 그리 답답하십니까?”

“아니, 그냥 그렇다구요. 진짜 ... 그런 말 들었어요?”



고개를 숙인 시경에게 다가간 재신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반응할지 모르고 그냥 툭 내뱉은 말인데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근위대장이라고 하길래 그냥 똑같은 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재신의 행동 하나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섭섭해지려고 했다.



“아,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럼 나갈까요?”

“아, 공주님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닙니다.”



재신이 제 얼굴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자 시경은 표정을 바꾸고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재신은 시경의 말을 별로 믿지않았고 시경도 재신이 믿어주길 바라지 않았다.



“나가기 피곤하시면 씻고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제가 혼자 나가서 사올게요.”

“내 취향 어떻게 알고요?”



재신의 말에 시경이 픽하고 웃었다. 재신의 옆에서 작은 악세서리를 골라주기도 했고 보좌하면서 재신의 모습은 항상 눈에 담고 있던 시경이었다. 재신은 시경이 재신의 마음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답답이라고 했지만 시경은 항상 재신을 쫓았다. 그리고 재신이 떠난 뒤에도 오롯이 재신만을 기억하는 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재신의 취향조차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 공주님 곁에서 항상 있었습니다. 모를 수가 없었어요.”

“잠옷 취향이잖아요? 그리고 공주라면 치렁치렁한 드레스만 입었을 것 아니예요?”

“사복도 자주 입으셨습니다.”



재신의 말에 첫 만남이 생각난 시경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뜨리자 재신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같이 가요. 나 혼자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애.”

“네?”

“여기 별로 할 것도 없을 것 같고. 여기서 생활하긴 해요?”

“아, 그게 관사에서 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 사는 집 아닌 것 같지.”



재신인 일어나서 현관으로 걸어가자 시경이 그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공주님, 다리는요?”

“왜요?”

“오늘 많이 걷지 않았습니까. 다리가 안 아프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프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재신의 발걸음은 꼭 날아갈 가버릴 나비같았다. 시경의 마음에 팔랑팔랑 날아와 찾아왔던 나비처럼. 금방에라도 떠나갈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해도 시경은 추억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잘알지만 붙잡고 싶은 것도 시경이었다. 시경은 흔들리는 재신의 손을 잡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끝내 잡지는 못하였다.



“마트는 가까워요? 멀어요? 걸어갈 수 있어요? 아니면 차를 타고 가야하나?”

“걸어가고 싶으세요? 가까운 거리입니다. 골목을 지나가서 신호등을 건너면 마트니깐요.”

“그럼 걸어가요. 불빛들이 이렇게 많으니 기분이 좋네요.”

“그래요. 공주님.”

“근데 마트가서도 그렇게 부르면 진짜 사람들이 오해해요.”

“어, 하지만....”



재신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 시경이었다. 재신은 매해 추모영상이며 추모 다큐가 재생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신이 떠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시경은 추모영상에 나온 재신을 멍하니 바라보며 얼마나 아픔을 가슴깊이 새겨넣어야했던가.



“무엇보다 그렇게 부르면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아요? 애칭같잖아요.”



재신의 말에 시경의 귀끝이 붉어지자 그 모습을 보고 재신은 웃었다.



“농담이예요. 만약에 말이예요.”

“네.”

“내가 기억을 찾고 공주님이 아니라면 말이예요.”



재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주님은 죽었고 그와 똑같은 자신이 공주일 리가 없지만 정말 아니라면.



“그때는 내 이름 불러줄거예요.”

“네, 그러겠습니다.”



시경의 말을 들은 재신은 고개를 돌려서 걸어가며 말했다.



“아, 은시경씨한테 질 것 같아요.”

“네?”

“은시경씨 말에는 믿음이 커서요. 내가 공주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은 없잖아요.”

“전 믿습니다. 공주님이 다시 돌아오신 것을요.”

“진짜 영화같겠다. 나는 실감이 안나요.”

“저도 실감이 안나요. 공주님. 다시 사라져서 혼자일까봐요.”



시경의 말을 듣던 재신은 시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사이였을까. 시경의 감정은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재신에게도 절절히 느껴질만큼 깊게 느껴졌다. 하지만 재신은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마트가서 속옷도 사야하고 옷도 사야하고 잠옷도 사면 되겠죠?”

“네? 네.”



속옷이란 말에 나갔던 정신이 들어오는 것같아 시경이 화들짝 놀라자 재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응큼한 생각했구나. 은시경씨?”

“아닙니다.”

“근데 왜 자꾸 빨개져?”

“.....”

“은시경씨 하얘서 다 티나요.”



재신이 시경의 코앞까지 와서 이야기하자 시경은 뒤로 다시 물러섰다. 재신은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시경을 놀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우리 내일은 뭐할까요?”

“음, 하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모르겟어요. 기억을 찾으려면 뭘 해야하는지. 근데 은시경씨 출근은 언제라고요?”

“내일까지만 쉬고 입궁해야합니다.”

“그럼 나는 뭐하지?”



재신과 떨어질 생각도 못한 시경에게 재신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마찬가지였다. 재신은 정보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민등록이 말소가 된 재신은 쉽게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결국은 이 사실을 궁에 알려야했다. 분명 궁에 알리면 재신은 궁에 돌아갈 것이고. 시경에게는 아쉽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좀 놀까?”

“제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안전한 것으로요.”

“왠지 디게 재미없을 것 같아.”



재신의 말에 시경은 몰래 웃었다. 재신이 반짝반짝 빛나던 그때와 같은 것처럼 재신이 떠난 뒤로 시경도 그대로였다. 고리타분하고 재미없고 재신만 사랑하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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