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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백마고지 전투

無念의鳥人 2006.05.17 17: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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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에 대해선 간단히 내글로 쓰고 싶긴 하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해서 글 하나 퍼옵니다.   백마고지전투('52.10.6∼15)는 한국전쟁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를 확보하고 있던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제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과 12차례의 공방전을 반복하면서 중공군이 7번 고지를 점령하고, 국군이 7번 역습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등 고지의 주인이 14번 바뀌는 혈전이 거듭되면서 피아간에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하였으나,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공 제38군은 그들 제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1.'52년도 전황 : 교착된 전선과 회담의 지연  유엔군사령부에서는 휴전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하였던 군사분계선 문제가 '51년 11월 27일 현접촉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휴전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협상이 난항에 빠져 지연될 경우에도「적극적인 방어개념을 바탕으로,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적에게 압력을 가한다」는 소극적인 방책을 수립해 두고 있었다.  반면, 공산군은 가급적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함과 동시에 난공불락의 진지를 구축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 주로 야간에만 이루어졌던 진지공사가 1개월의 잠정휴전기간은 그들에게 마음놓고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해준 셈이 되었다. 이에 따라 '51년 12월 말경 공산군의 진지에는 고지의 전방은 물론 후방에까지 참호와 교통호를 구축하고, 각종 화포와 병력의 수용시설까지도 지하에 구축하여 유엔군의 어떤 화력에도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52년 중반에 접어들었으나, 휴전협상은 타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쉽게 타결될 것으로 판단하였던 포로협상에서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시 군사력으로 승부를 가려야만 하게 된 것이다.  이때, 공산군은 국군이 담당하는 몇 개의 특정지역의 고지에만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였다. 그 이유는 ① 휴전 반대하는 한국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어 휴전에 굴복하도록 강요 ②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요 지역으로는 동해안의 351고지, 중동부지역의 수도고지, 지형능선,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 이다. 전초진지에 불과한 지역에 대하여 대규모 병력과 화력을 집중,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이 수없이 반복되고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 백마고지의 전술적 가치  백마고지는 철원 서북방 12km에 위치한 395고지을 중심으로 북서에서 남동으로 능선이 뻗어 내려 약간 긴 구릉을 이룬 고지로서, 전선이 교착된 뒤로 철의 삼각지대를 감제하는 중요지형지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를 구성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백마고지를 적이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아군부대의 주보급로가 마비되며, 주저항선을 고대산일대로 조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 휴전회담에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당시 미 제8군이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은 삼각지대의 저변을 잃게 되는 작전상 커다란 해를 입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1개 군을 투입하여 철원 공격을 계획하게 되었는데, 그 주공의 목표로는 바로 백마고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적은 백마고지를 탈취하고 철원평야 일대를 제압한 다음, 차기 공세의 발판을 구축하고 통신망, 보급선을 단축시킬 기도였다. 3. 피아 작전계획  가. 중공군 제38군 및 예하 제114사단  중공군 제38군은 효성산(△619)을 중심으로 봉래호로부터 역곡천에 연하는 지역을 담당하였다. 우익을 제114사단에, 고암산(△780)을 거점으로 하는 좌익을 제113사단에 각각 부여하고, 제112사단을 군예비로 하여 남산태에 집결보유하였다.  제114사단은 효성산을 중심으로 하는 우일선에 제341연대를, △500를 주봉으로 하는 좌일선에 제340연대를 내세우고, 제342연대를 효성산 후면에 사단예비로 집결보유하였다.    나. 국군 제9사단  사단은 제30연대로 좌, 제29연대를 우, 제28연대와 제51연대를 예비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단은 편제부대외 배속된 제51연대, 1개 포병단과 전차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4. 작전경과 : 12차례의 공방전과 14번 바뀐 고지주인  가. 사단정면에서는 소규모 탐색전만 국부적으로 반복될 뿐 6월 이후 3개월 동안 교착상태가 계속되었으나, 10월 3일 중공군 제114사단 340연대의 곡중교가 투항함으로써 아군은 적 공격계획을 입수하고, 395고지를 강화했으며 봉래교 폭파에 대비해서 10일분의 식량을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공군 제38군은 '52년 10월 6일 06:00부터 시작된 포격에 이어 19:15에 중공군 제114사단 340연대의 2개 대대가 395고지를 중심으로 그중 1개 대대는 고지 주봉에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진격, 제30연대 11중대를, 또 다른 적 1개 대대는 주봉으로 진격 제30연대를 공격하여 왔다. 이날밤 적과는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끝에 적에게 심한 피해를 입히고 이를 격퇴하였다.  다. 7일밤 적은 2개 대대 병력으로 4번째 공격, 제30연대는 고지에서 철수하였으나, 제28연대 2개 대대의 역습으로 다시 탈환하였다. 이후 제28연대가 고지에 배치되었다.     라. 8일 05:30 고지일대의 안개를 이용, 중공군은 예비인 112사단 334연대의 2개 대대를 투입하여 5번째 공격하였다. 제28연대는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지원을 받지 못한 가운데 이날 08:10에 주봉을 적에게 피탈당하였다. 사단은 17:00 제28연대 3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실시하였다. 대대는 적과 8시간 여의 격전 끝에 23:05 주봉을 다시 탈환하였다.  마. 5차례 공방전에서 제28, 30연대는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고 적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한 사단은 국군 제51연대를 배속받아 우일선 제29연대와 교대시키고 제29연대는 사단 예비로 임무를 전환하였다.    바. 8일 자정부터 적은 제파식 공격으로 03:00에 고지와 우측능선 일부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날이 밟자 고지정상에 17,700여발의 포탄과 공군화력을 집중하고 9일 밤 제29연대 2개 대대가 야간역습을 감행 9일 자정에 고지를 재탈환하였다.  사. 10일 재반격에 나선 적은 정상을 향하여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더니 03:30 피아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제29연대 1대대는 9부 능선으로 일단 철수 후, 제2대대의 증원을 받아 역습을 실시, 06:0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아.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공격하여 탈환하였고, 또다시 적이 반격하여 점령하자 제28연대가 제30연대를 초월공격을 재개하였고, 10월 15일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을 완전히 격퇴시키고, 백마고지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다. 5. 작전결과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8,234명이 사살되고 추정사살 6,098명과 포로 57명 등 14,000 여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작전기간중 피아 간에 발사한 포탄수만 보더라도 중공군이 5만 5000발, 아군측이 21만 4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이 포탄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전술항공은 754회 출격(야간출격 76회 포함)하여 2,700발 이상의 일반포탄, 358개 네이팜탄, 750발의 5”로켓탄을 투하였으며, 제53전차중대와 미 제73전차중대가 고지 좌우 측방에서 사격지원을 하였다.  백마고지전투는 단기간의 전투로써는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하였으나 국군 제9사단이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계속하여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으며, 중부지역의 작전을 위해 필수적인 주요 도로(3, 463, 464번)를 확보함으로서, 중부지역의 작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군 지휘관의 전투지휘능력과 국군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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