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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순례의 길

뫼르달(61.78) 2017.09.24 16:13:04
조회 610 추천 6 댓글 2

 사랑이 대체 뭐냐고 묻자 그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바깥은 여전히 환했다. 가벼운 바람이 손바닥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창문을 문지르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이곳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다. 재작년 5월이었던가, K가 보내준 사진은 그 해 겨울에 찍은 것들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듯한 편지 봉투를 뜯으니 새하얀 눈길이 나왔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언젠가 꼭 걷고 싶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날씨가 많이 춥지만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겠지? 보고싶어.' 짧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K가 떠나고,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서 겨울을 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다행일까, 한번쯤 꼭 사진 속의 그 길을 걷고 싶었으니. 그는 담배를 물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지포를 열어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그와 함께 지내며 이제 라이터를 제법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똥, 똥, 하는 소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연기를 뿜으며 입을 연다.

 "어려운 질문이야. 이렇게 다 큰 남자 둘이서 나누기에는 더더욱."

 말보로가 타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따스한 방안에 연기가 흩어진다. 처음엔 그 냄새가 싫었기에 항상 환기를 시켰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맑고 상쾌한 산골짜기의 공기가 심심하다고 느껴질 정도가 되었으니.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쭈욱 빨아들인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긴데……"

 그는 과거를 회상할 때면 늘 먼 산을 바라보았다. 마치 산등성이에 메모라도 남겨놓은 것처럼, 또는 과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력을 검사하기라도 하듯이.

 "20세기에 일어난 일이군요." "좀 들어, 자식아." 다시 담배 한 모금.

 

 "그때 난 한창 사랑에 빠져 있었지.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할 말도 없고,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도 딱히 대꾸할 수도 없어. 그냥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중학교 무렵의 사랑이란 다 그렇겠지만 무척 서툴고 무른 관계였지. 시골 촌구석에서 평생을 산 내가 뭘 알았겠어? 성교육도 없었고 콘돔 자판기도 없었거든. 텔레비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뭐, 야매로도 배울 길이 없었고. 단지 이따금 서울에 일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형님들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챙기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마요." 새로운 말보로가 갑에서 뽑혔다. 다시 똥, 하고 불을 붙인다. 그는 연기를 내 얼굴에 뱉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그 아이는 서울에서 전학을 온 아이였어.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 너무 식상할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아이들은 역시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싶어.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대부분이 좋은 것들이었어. 어쨌든 그 아이와는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지. 걔 부모님이 가발 공장을 차렸는데, 우리 아버지가 공사를 맡아 아버지들이 꽤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거든. 어른들이 술을 마시면 외동이었던 그 아이와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 어머니가 챙겨주는 과일이나 과자들을 까먹으며 한참 떠들었던 거야. 텔레비젼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아이가 참 대단했지. 서울에서 왔으면 당시에는 텔레비젼, 컴퓨터, 패스트푸드 이런 것들에 맛을 들였을 텐데 얌전히 나와 놀아주었으니 말이야. 나는 동네 뒷산에서 저것 찔레꽃, 저건 진달래, 도롱뇽, 두꺼비와 개구리, 이런 것들을 알려주었지.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 멋있어 보이고 싶었거든. 요즘은 그런 순수를 찾기가 힘들겠지. 아니, 순수의 정의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이야기를 하며 여섯 까치의 담배를 태웠다. 나는 총 여섯 번 불을 붙여주었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사랑이 도대체 뭐냐구요."

 "세상에서 단 둘만 믿는 종교. 터무니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 아이가 서울로 돌아가며 우린 약속을 했거든. 꼭 다시 만나자고, 매일 전화를 하고 편지를 하자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될 줄만 알았어. 나는 옆집 석현이네 슈퍼에서 일을 봐주며 전화를 기다리고, 우체부 박 아저씨를 졸래졸래 따라다녔거든. 정말로 매일. 물론 그 아이도 편지를 보냈고, 전화도 했어. 일요일 아침이었던가? 하루는 내가 부하처럼 데리고 다니던 석현이가 나를 막 찾는거야. 형, 형, 전화가 왔어. 내게 올 전화라고는 당시에는 그것 뿐이었거든.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래서 잠옷차림으로 막 뛰어가서 전화를 받았어. 그 아이였지."

 그는 예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바람이 문을 두드렸다. 다 흩어지지 못한 연기가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손을 휘저어 흩어버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창 밖을 보라는 거야. 새하얀 눈이 내린다고. 나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너무 귀엽기도 해서 웃음을 터트렸지. 서울까지는 자동차로 반나절을 갈 거리인데, 가 본 적은 없어도 얼마나 먼 곳인지는 알았으니까. 내가 웃으니까 걔가 그러더라. 아 맞다, 여긴 서울이구나. 거긴 어때? 나는 낡은 미닫이 문 사이로 바깥 풍경을 바라봤지. 익숙한 골목길 위로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있더라구. 그래서 나는 말했어. 아니, 그래서 웃은 게 아니야. 여기도 눈이 내려. 너무 예쁘다. 그렇게 말하니 걔가 따라 웃더라구.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구나, 사랑이란 맑은 하늘에 눈을 내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그때 난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생각했어."

 "달콤한 이야기네요, 그래서 그 후는?"


 "너도 알잖아, 내 사정. 지금은 이렇게 산골짜기에서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랑 커피나 마시고 있는 거지. 처음엔 전화가 줄어들고, 점점 편지도 멎더라구. 그래도 나는 슈퍼에서 전화를 기다렸고, 박 아저씨를 자꾸 따라다녔어. 믿었으니까. 맹목적인 믿음. 인간의 믿음은 하늘에다 눈을 뿌릴 수도 있는 거라고. 어떤 의미에서 그건 무서운 거지. 오직 둘만 믿는 종교를 하나가 버린다면, 결과는 둘 중 하나지. 숭고한 순교의 길을 걷거나, 믿음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찾아 떠나거나."   

 "아저씨는 둘 중 어느 쪽인가요?"

 그는 또다시 말없이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넘어온 산이자, 그가 평생 넘지 못했던 산이다. 터무니없는 믿음. 그는 이야기 속의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 그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일까. K를 찾아서 떠난 여행, K가 죽은 지도 벌써 일 년이다.

 초라하게 고꾸러진 꽁초들을 본다. 푹 고개 숙인 꽁초가 늘 불쌍했다. 

 "첫눈이로구나."

 창밖으로는 어느덧 세상을 다 덮을 듯한 눈발이 나리고 있었다. 그 눈이 우리의 작은 방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눈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눈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택한 선택지라면 말이다. 


 내일은 K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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