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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피타고라스 기억법모바일에서 작성

ㅇㅇ(223.62) 2018.08.20 01:36:50
조회 1097 추천 17 댓글 5


피타고라스 기억법

예전 강의 자료가 필요해서 책장을 뒤지던 중, 제일 아래 칸에서 두꺼운 일기장 하나를 찾았다. 보통의 일기장이 그렇듯, 먼지가 하얗게 덮여 있었으며, 처음 몇 장은 나름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름도, 날짜도 없었고, 1과 2, 두 숫자만이 순서를 나타내는 듯 제목으로 붙어 있을 뿐이었다. 종이의 색은 바래 있었다. 내가 일기를 쓴 적이 있던가? 기억을 돌이켜 봤지만, 딱히 집히는 것은 없었다. 일기장이 내 것이라고 그나마 추측할 수 있던 근거는 두 가지. 평소보다 더 흘려 쓴 것 같았지만 내 것으로 보이던 필체와 갖고 있는 여느 공책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표지가 검은 제본 공책이었다는 사실.

‘1. 항상 이성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지나가 버린 사소한 일들에, 사실 그 사소한 일들은 굳이 마주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합리적이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 상처를 입고, 또한 이미 생긴 상처 자국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외면하기를 반복한다. 남들이 본다면 왜 맞서 싸우지 않느냐고 애정 어린 질타를 가할 것이다. 용기를 내, 겁먹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다음부터 잘 하면...... 그래! 나도 잘 알고 있다, 단지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늘 알 수 없는 불쾌함과 불안정함이 마음의 기저에 깔려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은 가지만, 마주하고 싶지가 않고, 마주할 수도 없다. 병든 자아가 메말라 버린 나의 내면을 심술궂은 미소를 띠고 사정없이 두들겨 대며 소름 끼치도록 맑고 텅 빈 소리로 울부짖는 그런 날이 있다. 건조한 목으로는 침을 삼키기도 어렵듯, 말라비틀어진 나의 내면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우울감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언제쯤에야 이 시지프스의 신화는 끝이 날 것인가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본다. 나의 전인격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은 이렇다 할 뿌리도 없이 불안하게 성립된, 어쩌면 단지 학습된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기분 나쁜 찝찝함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디딜 곳이 없는 불안함은 나로 하여금 늘 무언가에 대해 의지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감정이란 것은 결국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요, 행복이나 슬픔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거나 절반이 된다거나 하는 그런 말들은 아주 어릴 적 이미 학을 떼어낸, 의미도 없고 듣기에나 좋은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호소를 하며 비참하게 매달릴 곳은 이성밖에 없었다.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성밖에는 날 떠받들 곳이 없었다. 이렇게 이성에 목을 맨다는 것 자체부터가 스스로가 이성적인 사람은 못 됨을 반증하는 것이지 않을까?’

“과거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독특한 기억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펜들이 바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마지못해, ‘아낙시메네스, 공기, 아낙시만드로스와 탈레스의 절충적 수용’이라고 적힌 필기 두 줄 아래부터 펜을 굴렸다.
‘피타고라스 기억법’
“그들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눈을 떠 일어나기 전에 그대로 누워서 그 전날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사건 하나, 대화 하나 그대로 기억해보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마치 바둑기사들이 그들의 대국을 복기하듯이.”
‘잠에서 깨자마자 전날의 사건, 대화 기억’
“이세돌도 최근에 있던 알파고와의 경기 이후 복기를 했겠죠? 아무튼, 그들은 그렇게 전날의 일들을 복기하듯 기억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보며, 그들 자신에 대해 더 다가갔습니다. 심지어 대화도 그냥 그대로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그 대화가 어떤 감정적, 그리고 논리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던 것인지를 고민하면서요.”
‘기억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반성 및 고찰’.
“저도 이런 기억 훈련을 꼭 한번 해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조금 힘드네요.”
학생들은 낮고 두서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의 나잇대에 이런 기억 훈련에 대해 알았더라면 시도해봤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젊으니까 꼭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현대의 치매 예방 치료법 중에도 치매 환자들에게 그 날에 있던 일들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을 두 어 개 정도 기록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있는데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겠네요.”
‘현대 치매 예방법, 기억에 남는 두 어 개 일을 기록’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피타고라스학파는 인간을 이원론적 존재로 보았습니다. 영혼과 육체로 나뉘는. 그들에게 영혼은 비가시적이며 불멸하는 것이고, 육체는 가시적이며 소멸하는 것입니다. 특히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무덤이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기억법도 이런 이원론적 관점의 일환으로 봐야겠죠.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기억으로, 즉 영혼으로 본 것이죠. 반면 최근에 유행했던 마음 수련이라는 게 있죠? 거기서는 오히려 기억을 지우는 수련 방법을 제시한다고 하는데요. 그럼으로써 자신을 더 바라볼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관점의 차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판단을 해야겠죠.”
‘피타고라스학파, 이원론적 인간관, 영혼과 육체, 육체는 영혼의 감옥’. 교수는 탄산수를 들어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마침 이세돌과 알파고의 경기에 대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번의 경기 결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선, 강의 내용과 억지로 연관 지어 보자면, 인공지능이야말로 피타고라스학파를 충실히 계승하는 그 무엇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공지능에게 기록은 고스란히 데이터로써 축적이 되겠고, 그것은 결국 그들의 영혼이, 영혼이란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되어갈 테니까. 아무튼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졌다? 작게는 이런 바둑이라는 분야를 떠나서 다른 대부분의 분야에서도 인간이 그들의 상대가 되기 어렵죠? 아마 이제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여태까지 둬 왔던 대국들의 기록을 모두 지우는 것. 적어도 그들이 쌓아온 데이터, 즉 영혼을 지운다면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테니까요. 물론 또다시 축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 물론 우리 인문학도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아마 인공지능은 인문학에 진출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근처의 빈 강의실에서 숨어 잠을 자다가 깼다. 숨을 헐떡이며 다음 강의가 있는 강의실 뒷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자리를 맡아 둔 친구의 옆에 고개를 까딱이며 앉았다. 마침 출석을 부르는 중이었고, 대답하고 나서야 시원한 벽에 기대어 땀을 식힐 수 있었다. 개요 소개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중국의 근세철학과 양자역학 간의 유사점을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딴짓하기로 마음먹으니 그렇게 마음이 여유로울 수 없었다. 강의에서 벗어난 풍족한 의식의 향연. 하지만 딱히 할 것은 없었다. 그냥 독한 술이나 몇 잔 털어 마시고 잠들고 싶었다. 공책에 바로 전 강의의 내용이 보였다. 음, 피타고라스 기억법?

잠에서 깨어 일어나기 전에 해야 할 것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처음이니 그렇게 엄숙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제는 무엇을 했던가?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그 시각은 오전 일곱 시 반이었다. 눈을 떠서 기분 나쁜 부팅을 마친 뒤, 학교에 정말 가야 할지 두어 번 습관적으로 되뇌고 이불을 걷어찼다. 몸을 일으켜야 했다. 핸드폰의 알람을 껐다. 보일러의 온수 버튼을 누르고 마른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갔다. 환기를 위해 밤 동안 열어 둔 작은 창을 닫았다. 밤새 창을 열어 놨음에도 결국 마르지 않은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집에 도착할 때쯤 빨래가 완료되도록 세탁을 예약해 뒀다. 세면대에서 따뜻한 물을 튼 뒤, 변기에 앉아 볼일을 봤다. 볼일을 본 뒤 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서였다. 엉덩이를 닦고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셨다. 쿨링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적응되어서인지 더는 청량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디워시로 몸을 닦고, 양치하고, 세수를...... 차라리 중국 근세철학과 양자역학 간의 관계를 밝히는 이야기가 더 쓸모 있어 보일 지경이다. 교수는 우주론과 존재론 어쩌고 하며 떠들고 있었다. ‘우주론과 존재론’, 씻고 나와 옷을 입고 어제 들었던 가방을 그대로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나치게 빛나는 햇살 아래에서 눈을 찡그리며 학교로 향했다. 가다가 더워서 가볍게 걸친 겉옷을 벗어들고 마저 가던 길을 갔다. 목이 말라 자판기에서 500원 동전을 넣고 생수를 뽑았다. 조금 서둘러 강의실에 들어가 친구가 앉은 곳을 확인한 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인사를 건넸다. 가방을 열고 공책과 펜을 꺼냈다. 출석에 대답했다. 옆의 사람들이 열심히 필기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고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필기는 하지 않았다. 수업이 계속되었지만 듣지 않았다. 좋은 내용들, 유익한 내용들이 많았겠지. ‘virtue ethics/epistemology, 인식 주체. 인간의 덕은 관측하기 전까지 있기도 없기도. 슈뢰딩거의 신유학’,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등학교 시절. 조금 관심이 있던 동아리 후배가, 비 오던 날의 등굣길이었는데, 동아리 내의 다른 남자 후배와 같은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던 것을 보고서 조금 충격을 받고, 조용히 지나쳐 가다가, 그 아이들과 마주쳤는데, 그 아이들이 인사를 하길래, 나도 안녕― 인사를 하고 원래 발걸음이 빨랐던 것인 양 서둘러...... 그 여자 후배는 나에게 조금 당황한 듯 인사를 건넸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 사건과 현재 내가 가족 행사나 동아리 등의 단체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니 기억나는 순간들이 신기할 정도로 드물었다.
중학생 시절, 다행히 꽤 있다. 국악 관현악 대회에 나갔던 것이라든지―난 아이러니하게도 심벌즈를 연주했다, 친구와 싸웠던 것이라든지―주먹으로 열 대는 넘게 얼굴을 맞다가 간신히 손바닥으로 뺨을 한 대 쳤다. 남중이었다, 남자들 사이에 있는 것은 정말 끔찍했지.
초등학교, 그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거지,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림일기 같은 걸 쓰거나 시골에 놀러 가곤 했던 즐거운 추억이 아니고, 친척 형에게 성폭력을...... ‘정이천, 이일이분수, 개별대상에 관한 탐구’, 지금까지 애써 외면하고,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산 채로 묻어버리고 망각의, 혹은 기만의 흙을 덮어버린 그 기억. 난 정말 심약한 아이였다. 귀신을 무서워하고, 피를 무서워하고, 어두운 것을 싫어하고―잘 때 불을 끄는 것조차, 괴물이니 뭐니,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두려워했다. 남에게 싫다는 말은 고사하고, 좋다는 의사 표현이나, 혹은 그냥 말을 거는 것도 못했다. 시키는 것에 대해 그저 알겠다고 하며, 그것이 나쁜 짓일 거라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친척 형은 잘하는 것이 참 많았다. 힘도 셌고. 모든 게임을 잘 하는 것 같았다. 게임을 시작한다고 하면, 그 형은 이미 그 게임의 최고 레벨의 캐릭터를 갖고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좋은 아이템들도 많이 받곤 했다. 힘이 세다는 것은 그냥 나이가 어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보고 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셌다. 태권도 선수를 준비했던 것 같았고, 인근 학교 사이에서는 이미 주먹으로 유명했다. 덩치도 몹시 컸다. 난 굉장히 왜소했지만, 그 자식은 저 나이 또래보다 덩치가 굉장했다. 그 자식의 부모님들은 싸움 때문에 학교에 몇 번 불려 나갔다던 것 같았다. 그 부모님은 비록 그 자식을 의적, 정의의 사도와 비슷한 것으로 포장을 했었다만. 그리고 만화책이 몹시 많았다. 우리 부모님은 아주 바빴다. 그때 막 개업을 해서 맞벌이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그 자식의 집에 자주 맡겨졌다. 친척 형은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 지역 학교들 사이에서 떠도는 풍문 등의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게임과 관련한 이야기나 웃긴 농담들,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들까지. 난 그중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잘 정도로 겁에 질렸었다. 그런데도 왜 무서운 이야기를 그렇게 들었냐 하면, 나도 모르겠다. 매운 것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그 맛에 매운 것을 다시 찾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어느 날 그 자식과 단둘이 방에 있었고, 불은 꺼져있었고, 저녁때쯤이었던 것 같고, 무서운 이야기를 두 어 개 정도 듣고 겁에 질려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고, 그 새끼도 침대로 왔고, 내 옆에 누웠고, 많이 무섭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답했고, 그 새끼는 또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고, 그 새끼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인간의 도덕성과 같은 가치 판단의 영역도 자연 세계로부터 도출 가능한가?’
그 새끼는 나에게 똑바로 누우라고 했다. 이불을 덮어도 되냐고 하니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 새끼는 이불 속으로 들어와 옆에 나란히 붙어 누웠다. 그리고 곧 나에게 자기의 성기를 잡으라고 했다. 성기를 잡으라고는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고, 바지를 손으로 잡아 올리면서, 여기가 기가 나오는 곳이야, 라고. 기가 발하는 곳이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하하. 난 벌벌 떨며 그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구덩이 속은 뜨끈했고, 축축했다. 더 세게 잡으라고 해서 작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으로 기를 받는다고 상상을 하며 주무르라고 했다. 성기 아랫부분의 주머니에 기가 제일 많이 들어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자식도 내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렇게 불 꺼진 방에서 그 새끼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성기를 주무르며 아무 말도 없이 누워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방은 후텁지근했다. 땀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새끼의 육중한 덩치 때문에 푹 파인 침대로, 또래에 비해 가벼웠던 나는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살짝 닿은 서로의 살갗에 스미던 땀방울들이 모여서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옆을 살짝 봤을 때, 아아, 그 새끼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꺼서 어두웠으나, 그 소름 끼치게 번뜩이던 안광은...... 점점 날이 갈수록 그 의식은 길어졌다. 그 새끼는 늘 의식이 끝난 후, 나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언젠가 의식을 마친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그 집에 맡겨지면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부모님이 와서 날 데려가곤 했다. 그 새끼의 엄마는 무슨 휴지를 그렇게 많이 쓰냐고 타박을 했고, 그 새끼의 아빠는 여편네가 뭘 그런 걸 갖고 뭐라 하냐고 툴툴거린 후, 그 새끼한테 밥이나 맛있게 먹으라며 일갈했다.

지옥 같던 그 어둠이 어떻게 끝났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맞벌이하시던 부모님 덕에 자주 그 집에 맡겨지곤 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다음 날도 늘......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께 인사를 하며 가방을 챙겼다. 이렇게 대충 필기를 끄적거리던 공책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공책 하나를 일 년가량 붙잡고 있던 결과일까? 새로운 공책을 곧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끝난 뒤, 애인을 만났다. 저녁을 먹어야지. 배가 아주 고팠다. 속이 많이 허했다. 애인과 함께 있을 때는 좋은 기분이 들었다. 함께 밥을 먹던 중에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주말에 별일 있니. 별일 없다고 답을 하려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친척 형의 결혼식이 있어서 가려는데 시간을 내라고 했다. 사실 그 새끼가 곧 결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새끼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몹시 친했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했다. 그 새끼의 부모님은 나에게 몹시 잘해줬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새끼와 그 새끼의 부모님에게는 살갑게 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사만을 건네곤 했다. 그러면 그 새끼의 부모님은 내가 원래부터 조용한 성격이었다든지, 좀 더 남자다워지라든지 따위의 소리를 했다. 난 사실 그다지 조용하지도 않고, 웃음도 많다. 흔히들 말하는 남자다운 면도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한다―착한 사람과. 난 착한 사람이 좋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좋다. 남의 선의를 악용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좋다. 아, 난 어떻게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서로의 성기를 움켜쥐고 어두운 방에서 함께 조용히 누워 있는 역겨운 짓거리를 몇 번이나 했을까, 난 그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더 개 같은 것은, 그 새끼는 늘 웃으며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게 했었다는 것이었다. 씨발 것.

난 그 날 학교에서 중요한 일이 있다고 거짓말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뭐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그깟 학교 일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실소가 나왔다. 내가 학교를 위해, 학교에 다니기 위해, 학교를 오기 위해 희생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데. 인제 와서는 그깟 학교가 뭐냐는 소리나 듣게 된다니. 애인은 주말에 별일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데이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나더러 집안일에 참여 좀 하라고 했다.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의 표정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와 너의 표정이 모두 짐작이 가지 않았다.

흐릿한 기억의 다발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당시의 난 결국 부모님께 이야기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내용 자체는 기억이 잘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언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분명히 기억이 났다. 그 의식은 날이 갈수록 길어지고 정교해졌다. 처음에는 단지 붙잡고만 있던 것이, 주물럭거리게 되었고,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며 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 새끼는 거역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더 세게, 빠르게 흔들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나의 성기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허리의 아래쪽이 두 동강 날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 가느다란 허벅지가 쥐라도 난 듯 수축하며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소변이 나올 것 같아 그만두라고 그 새끼를 때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새끼는 남아 있던 손으로 내 손과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결국, 내 손에는 알 수 없는, 미끄러우면서도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버렸다. 만약 촉감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떫은 감촉이었다. 그리고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어젖힌 그 새끼의 부모님, 서럽게 울고 있던 나, 장난을 치다가 울렸다고 애써 숨을 고르며 이야기를 하던 그 새끼, 바지를 급히 입으며 우리가 했던 걸 말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조용히 속삭이던 그 새끼의 목소리, 안광이 형형했던 그 눈빛, 밤늦게 왔던 나의 부모님, 거실에서 무언가 길게 이야기하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 구석에 방치된 채 울고 있던 나, 밤늦도록 무섭게 추궁하던 나의 부모님, 마지막에 속삭였던 그 새끼의 목소리가 무서워서 이야기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울며 떠듬떠듬 간신히 말했던 이야기, 그런 지옥의 조감도, 덥고 끈적였던 지옥.
아마 그때의 내 성격을 고려해보면, 정말 오래도록 참고, 어쩌면 이런 걸 싫다고 느끼는 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그 와중에도 사실을 말하면 그 새끼가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그러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겠지. 요즘에야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꽤 뻔뻔스럽게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요즈음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견딜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리고 눈물 몇 방울. 그 뒤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를 않았다. 다만 그 집에는 잘 안 가게 되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교류가 있는 것으로 봤을 때, 그 나이 때, 빌어먹을 사춘기, 사내아이면 그럴 수 있지―등의 헛소리로 대충 무마된 것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전부 부질없는 추측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무렵, 아버지가 새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서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는데 그 새끼의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건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짓된 화목함. 생존을 위한 처절한 망각.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혹은 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결혼식 날에는 결국 혼자 집에 있었다. 영 기분이 별로였기에. 데이트도 미뤘다. 다행히 가족 중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애인과 고깃집에 갔다. 소주를 세 병 정도 마시고 밖을 보니 어두워져 있었다.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어머니께서는 술을 좀 드신 것 같았다. 지금 뭐하니. 그냥 밥 먹고 있어요. 엄마는요? 너 어제 일이 그렇게 중요했던 거니.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가족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니. 엄마 술 드셨어요? 아니, 아무튼 그 일이 그렇게 중요했니? 애인에게 입 모양으로 ‘엄마’, 라고 말하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그냥 중요한 일이었어요. 너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잘 생각해봐.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났다. 짜증 났다. 친족 행사에 그리 목숨 걸고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구색을 갖출 정도로는 어울려줬었다. 그런 내가 끝까지 안 가려고 했으면 말 못 할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째서 하지 못하는 것일까? 당신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혹은 굳이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깊은 무덤에서 기어 나온 그 기억이 나를 잡아먹어 버렸다. 내가 그 새끼에게 느끼던 왠지 모를 거부감이란 것에 대해서, 난 이제야 답을 찾은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아니, 길고 긴 도망에 지친 것이다.

누구나 과거에 받은 상처들에 대하여, 그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도 못 하고,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 상처가 욱신거린다면, 그리고 인제 와서 상처를 준 사람을 탓하기도 뭐하여, 아마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혼자 아픈 곳을 움켜쥐고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데, 하필 그 날이 의무적으로 기쁨을 느껴야 하는 날이었던 지라, 특히나 그 가해자를 위해 기뻐해야 하는 날, 가해자를 위해 기뻐해 주고 있던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왜 이렇게 좋은 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물음에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까?
나는 어머니께 알겠다고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애인은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미안, 전화가 조금 길었지? 아냐, 괜찮아. 그러게 어제 결혼식 다녀오라니까. 술이나 한잔할까? 잔을 들어 비웠다. 그리고 한 잔 더 주고받았다. 고기를 두 점을 먹고, 또 술을 마셨다. 애인은 내게 천천히 마시라고 하며, 어머니와 싸웠느냐 물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싸웠다면 싸운 건데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한 잔을 더 마시고 내게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표현이야말로 기억의 산파인 것일까, 막상 말을 뱉어 보니 방금까지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입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게 마음의 무덤을 관 아래까지 모두 헤집어 놓았다. 그래서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고 한 거야. 어제는 그 새끼가 결혼하는 날이었거든. 그래, 뭐, 그건 좋아, 앞으로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지금처럼 지내면 되니까. 근데 내가 참을 수가 없는 건, 엄마야. 어떻게 내게 그 새끼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고 그렇게 못 돼먹은 놈 취급을 할 수가 있냐고...... 어느새 나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어떻게 엄마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그렇게 분홍빛 삼겹살이 노릇하게 익어 가던 고깃집에서 한참을 울다가 일어났다. 점원이 불을 뺐다. 고기와 채소는 다 타버려 불판에 보기 싫게 그을음만을 남겼다. 집에 바래다줬다. 애인은 아마 어머니께서 내가 아파하는 줄 모르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까먹으셨겠지. 이 세상에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이란 것이 있을까? 까먹은 채로 그렇게 그대로 살았다면 난 더 행복해질까? 덜 아플 수 있을까? 스스로를 더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어머니께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떠나서, 인제 와서야 상기한 그 사실에 대해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감정이 중요한 것인가? 나의 감정을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는 공감작용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아, 난 어떻게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이렇게나 괴로운데.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성애랑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종류의 성애에서 중요한 것은 충분한 이해를 동반한 합의이다. 상대를 속이지 않는 합의이다. 이해를 동반한 합의라는 것은 공감작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이성작용 역시 필요로 한다. 난 폭력도 합의만 되어 있다면 납득할 수 있다. 합의가, 합의가 중요한 것이다. 뭐든, 합의가 중요한 것이다. 선행한 어떤 합의를, 다른 합의가 그것에 우연히 충돌했을 때, 일방적으로 망가뜨리는 것 역시 안 된다. 하지만 선행한 다른 합의를 망가뜨리는 것에 대한 합의가 되어 있다면 괜찮다. 성애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건들에서 중요한 것은 충분한 이해를 동반한 합의이다.
나의 성기를 움켜쥐고, 내가 성기를 움켜쥔 것도 합의인가? 아니지, 아니야. 그건 합의가 아니야. 합의가 아니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으로 그 새끼의 성기를 움켜쥔 것은 맞지만, 그 새끼가 힘으로 나에게 그것을 강제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제대로 된 합의 따위가 아니었어. 그것은 비겁한 속임수였고, 협박이었어. 결국은 상대의 두려움을 이용한, 해서는 안 될 짓거리였어. 충분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은 합의는 전부 폭력이야. 더러운 폭력이야. 반강제적인 폭력이야. 인격을 부정하는 짓거리야. 모든 사람이 느끼는 세상의 여러 사건의 무게는 각자 다르기 때문이지. 애초에 그것은 합의라고 할 수 없어. 지금의 나에게 귀신 이야기로 겁을 주며, 비단 귀신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납득하지 못할 이유를 들며 자신의 성기를 쥐라는 새끼가 있다면 난 그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건 동성애나 이성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런 좁은 틀의 문제 따위가 아니야. 오직 합의, 합의에 관한 이야기야. 충분한 이해를 동반한 합의에 관한 이야기야. 난 강제가 싫다. 너무나 싫어. 충분한 이해를 통해 합의된 강제는 괜찮아. 물론 영민한 사람들은 충분한 이해라는 것의 정의, 혹은 범위를 나에게 물을 거야. 난 사실 그 물음에는 답할 자신이 없어. 그 합의를 통해 나에게 발생할 일들을 어디까지를 내다볼 수 있는지가 충분한 이해의 기준일까? 도대체 충분한 이해라는 것이 뭘까? 그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각각의 개별자들이 지닌 공감 능력의 발현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어떠한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이성의 작용 역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없어. 다만,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겁에 질린 초등학생의 성기를 움켜쥔 행위는 충분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은 잘못된 합의였다는 것밖에 모르겠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밖에 모르겠어. 그리고 초등학생 때의 일이 인제 와서 나를 괴롭힐 줄도 당시의 나는 몰랐을 거야.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합의를 했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어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의 내가 충분히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으니 인제 와서 불평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될까? 사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땅값이 오를 줄 모르고, 땅을 싸게 팔았다가 나중에 그 땅값이 몹시 올랐을 때, 그때는 오를 줄 몰랐으니 계약을 무르자고 할 수는 없잖아.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문제야. 세상은 남을 속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꾀이고, 멋진 일이라 떠들어 대. 그리고 꾀를 써서 남을 속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를 보여줘. 그런데 그 꾀에 당한 사람들의 뒷이야기는 하나도 해주지를 않아. 전래동화는 말할 것도 없지. 세상에 속아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에 옳은 것이 과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부쩍 느끼게 되었어. 마치, 교묘한 속임수로 남의 성기를 움켜쥐고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게 하는 것처럼 말이야.
난 내일 아침 펼쳐질, 엊그제까지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동시에 오늘과 동일한 연장선에 있을, 역겹도록 찬란하게 빛날 세상이 너무나 두려워. 정신병이란 것도 그 상태를 병으로 인식하기 전에는 병이 아니었다며? 병은 인식해야 비로소 병인 것이라며? 그래, 좋아. 인식하기 전에는 병이 아니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인식한 다음에는? 어제까지의 정상인이 하루 만에 아픈 사람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는데도?
엄마, 저는 엄마에게 저의 마음을 제대로 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그 어떤 궁금증들에 대해서도 물은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저는 묻지 않아도 대답을 듣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묻지도 않고 대답을 듣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대답을 듣기를 바랐으면 제가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대답을 바라왔으면서 대체 뭐가 두려워서 묻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묻지도 못할 거면 제대로 파묻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한 주제에 이제 와서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나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눈을 뜬다. 조금 일찍 일어난 듯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몸이 그저 머리에 혈관으로만 연결되어, 단지 같은 피만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무엇처럼 느껴진다. 목이 있고, 가슴이 있고, 배가 있고, 등이 있고, 팔이 있고, 다리가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손가락이 있고, 발가락이 있고...... 성기가 있다. 손가락에 힘을 주면 손가락이 움직여질까? 성기에 힘을 주면 성기는 꿈틀거릴까?
곧 핸드폰의 알람이 울려야 한다. 그 시각은 오전 일곱 시 반이어야 한다. 눈을 떠서 기분 나쁜 부팅을 마친 뒤, 학교에 정말 가야 할지 두어 번 습관적으로 되뇌고 이불을 걷어차야 한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 핸드폰의 알람을 꺼야 한다. 보일러의 온수 버튼을 누르고 마른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가야 한다. 환기를 위해 밤 동안 열어 둔 작은 창을 닫아야 한다. 밤새 창을 열어 놨음에도 결국 마르지 않은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집에 도착할 때쯤 빨래가 완료되도록 세탁을 예약해야 한다. 볼일을 본 뒤 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 세면대에서 따뜻한 물을 튼 뒤 변기에 앉아 볼일을 봐야 한다. 엉덩이를 닦고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셔야 한다. 더는 청량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쿨링 샴푸로 머리를 감아야 한다. 바디워시로 몸을 닦고, 양치하고, 세수해야 한다. 씻고 나와 옷을 입고 어제 들었던 가방을 그대로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지나치게 빛나는 햇살 아래에서 눈을 찡그리며 학교로 향해야 한다. 가다가 더우면 가볍게 걸친 겉옷을 벗어들고 마저 가던 길을 가야 한다. 목이 마르면 자판기에서 500원 동전을 넣고 생수를 뽑아야 한다. 조금 서둘러 강의실에 들어가 친구가 앉은 곳을 확인한 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인사를 건네야 한다. 가방을 열고 공책과 펜을 꺼내야 한다. 출석에 대답해야 한다. 피타고라스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 모든 행위는 아마 충분한 이해를 동반한 합의의 결과물일 것이다. 일 년을 갖고 다니던 검은 공책은 이제 한 쪽밖에 남지 않았다.
책장에서 찾았던 일기장을 꺼냈다.

‘2. 모름지기 어두운 기억이란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혹은 빛나는 기억으로 덮으면 그만이라는 것은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명백하다지만, 사실 요즘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별들을 보고 빛나는 그 무엇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살펴봤으나, 언제 썼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피타고라스는 어째서 죽지 않는가? 마침 공책이 필요한 참이었다. 최대한 흔적을 안 남긴다고 조심스럽게 찢어냈지만, 자국이 남았다. 검은 일기장의 찢어진 자국은 여전히 보기 싫게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찢긴 흔적 너머로 펼쳐진 새로운 종이에 또다시 펜을 굴릴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찢긴 흔적은 거슬리겠지만, 공책을 들여다 볼 때마다 눈에 띄겠지만, 그 때문에 나의 공책을 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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