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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 또 싸운다모바일에서 작성

뱁새콜라(118.235) 2024.05.02 18:31:40
조회 68 추천 1 댓글 0

호텔, 몽유도원도




오늘 아침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잇따라 울던 전화벨을 알람인 줄 알고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길 몇 차례. 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을 때 아내가 건넨 첫마디는 ‘깼어?’였다. 그리고 나는 ‘덕분에 깼지’하고 되받았다.


전화를 끊고도 이삼십 분 비비적거리다 마침내 침대 머리판에 벗은 등을 기댄 채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이 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난밤, 달걀의 내벽을 쪼는 병아리처럼 꿈에서 깨어나려고 거울을 향해 탁, 탁, 이마를 들이받던 일마저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거울은 저렇듯 분명히 깨어져 있지 않은가. 거울의 파편마다 내가 무수히 흩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부단히 깨부수던 꿈은 과연 누구의 꿈이었는가.


거울을 깨고 나온 내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곳이 영안실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때 협탁에 놓인 호텔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부활을 알리는 울음소리인지 부고를 알리는 울음소리인지 전화벨은 우렁차면서도 구슬펐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생사의 경계에 놓인 수화기를 덜컥 집어 들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 세요.”

“…….”

발신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그러나 이번엔 좀 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세요.”

“…….”

이번에도 침묵이 이어졌다. 문득 시계를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던 나는 괜히 꽉 조였던 눈동자를 풀고 호텔 지배인이라 짐작되는 수화기 너머 발신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커튼이 처져 있어서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몰랐습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나의 귓가를 스쳐 간 발신자의 말은 섬찟했다.


‘살인자!’


응당 나를 향한 응답이었을 그 단말마적 비명에 나는 심장에 찰과상을 입은 듯 도무지 달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더더욱 몸서리치게 만든 건 그 음성이 아내의 음성인 것 같다고, 아니, 아내의 음성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객실 바닥에 흩어진 무수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인자’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아내가 어떻게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을 살펴보았으나 나는 그 어느 파편에서도 나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내가 왜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걷지 않은 두꺼운 암막 커튼 탓에 객실에 묶인 어둠은 그 어떤 침묵보다 묵직했다. 이 장막을 젖히면 파종하듯 흩어진 무수한 파편들이 자오선을 지나는 태양의 광휘를 반기며 객실 가득 나를 무성케 하리라.

돌연 오한이 난 듯 무시무시한 잡념을 부르르 털어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덕지덕지 갈라진, 굳은 핏줄기로 범벅된 얼굴을 허겁지겁 훑은 뒤 다시 밖으로 나와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그렇게 한낮의 어둠을 주섬주섬 챙기고 가까스로 객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쿵!’


누군가 야멸치게 객실 문을 두드렸다. 그 충격파가 얼마나 컸던지 나의 눈과 귀가 급작스레 멀어버렸다. 뒤이어 제정신을 차리기까지 얼마큼의 세월이 흐른 걸까. 아니,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나는 마치 태초의 어둠을 목격하고 온 최초의 인류처럼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다시,


‘쿵!’


두 번째 심박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눈앞도 가슴도 아닌 저 소리는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가.


‘쿵쿵!’ ‘쿵!’ ‘쿵! 쿵! 쿵!’


이제는 뜸 들이지 않고 연거푸 귓전을 때리던 그 소리는 분명 등 뒤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암막 커튼 너머, 가려진 창문으로부터 전파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나는 눈앞에 있는 객실 문을 박차고 객실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지, 아니면 마음을 돌려 암막 커튼을 열어젖힌 채 소리의 동태를 살펴야 할지 번민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꿈속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만도 하다. 요 며칠 편집적으로 괴담을 듣보다 잠들기 일쑤였으니……. 이곳이 제아무리 질 낮은 호텔이라 하더라도 내가 출장을 오면 어김없이 묵는 곳이다. 하물며 로비를 제외한 모든 객실은 3층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그러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창밖에 서서 누군가 저렇듯 문을 두드리기는 만무하다……. 그렇다. 나는 분명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방금과는 다르게 약간의 도파민마저 분비되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암막 커튼을 향해 저벅, 저벅, 걸어갔다. 구두 굽에 밟혀 으스러지는 거울 파편들이 거듭 부스러지면서 발걸음을 더더욱 밝고 경쾌하게 거들었다. 온갖 번뇌망상과 삼라만상이 바스락바스락 으깨어지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마침내 나는 암막 커튼 앞에 다다랐다. 눈을 질끈 감고 커튼의 앞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고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거대한 알바트로스가 둔탁하게 활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지금이다. 지금 눈을 떠야만 한다. 나는 쏟아져 들어올 태양의 광휘에 하얗게 눈이 셀까보다, 힘껏 날아오른 알바트로스의 최후를 마주칠까 두려워 가만히, 그러나 거슴츠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객실 가득 들어찬 어둠은 끄떡없이 나의 온몸을 사방에서 짓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숨이 멎을 것 같던 나는 열어 젖혀진 암막 커튼이 선보인 가슴팍을 청진기 같은 손뼉으로 더듬었다. 그런데 아무리 더듬어도 창문은 만져지지 않았다. 앞선 그 박동 역시 짚어지지 않았다. 내게 다가오는 건 오직 벽과 벽, 막장과도 같은 정신의 감옥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두 빈손을 움켜쥐고 유인원처럼 연거푸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벽 너머에서 응답하듯 누군가가 아까처럼 벽을 두드렸다. 이 광경이 데자뷔처럼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말하기가 금지된 수감자들이 이웃 독방의 수감자와 통방하듯 벽을 사이에 두고 나와 벽 너머 누군가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맥박을 주고받았다. 아니, 두어 번 외마디 소리를 외쳐 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그저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웬일인지 아무리 비벼도 눈은 자꾸만 침침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명처럼 불그스름했던 객실 조명이 점차 검붉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조만간 완전한 어둠에 감싸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나는 객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더듬어봤으나 조명을 조절할 그 어떤 버튼이나 리모컨을 발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되는 대로 걷어차고 밀고 당겨 본 객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완벽한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때마침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나는 잠금을 풀기 위해 지문을 찍었다.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문을 찍었다.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문을 찍었다.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문 인식은 30초 후에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어둠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협탁 위에 놓인 호텔 전화기였다. 나는 처음과는 다르게 선뜻 전화를 받지 않고 머뭇거렸다. 양수처럼 터져버린 전화벨이 수화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더는 수화기를 들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그 누구의 목소리를 받아들이지도, 받아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과육 속 애벌레처럼 어둠을 야금야금 틈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뒤미처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누구세요!”

이번엔 발신자 역시 조금의 뜸은 들였지만 머지않아 응답했다. 그러나 물기 한 점 없는, 헛기침 한 번에도 가뭇없이 흩어져버릴 목소리였다.

“여보…… 세요.”

아내의 음성이 아니었다. 일흔 살쯤 됐을까 싶은 노파의 목소리였다. 나는 돌연 말문이 막혀 잠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노파가 다시 말을 건넸다.

“…….여보.”

숨이 끊어질 듯 가까스로 말을 뱉어낸 노파는 아내처럼 나를 불러 세웠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세요. 거긴, 어딥니까?”

그러자 객실 벽이 짧게 ‘쿵쿵!’ 울리고 잇따라 수화기 속에서 찰나의 시차를 두고 반향처럼 울려 퍼진 ‘쿵쿵!’ 소리가 나의 머리통을 세차게 두드렸다. 나는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당신 누구야!”

노파는 아무런 감응도 갈피도 없이 말을 건넸다.

“살려줘……. ……여보, 나 좀 죽여줘.”

그것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아니, 그녀가 문득 수화기를 떨어트린 것 같았다. 나의 찢어진 귀청을 용접하듯 지직거리던 마지막 전파. 객실 가득 한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끊어진 건 전화가 아니라 그녀의 목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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