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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엽편경연]한여름 밤의 꿈

비비비빅(222.237) 2008.01.24 02:04:40
조회 117 추천 0 댓글 7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난 그저 거리를 걷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간간이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섞이는 것으로 보아, 공연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에 방향을 틀었다.

과외비를 받자마자 사고 싶었던 옷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외출했건만, 그 옷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뒤였다. 다른 것이라도 골라 보라고, 점원은 이것 저것 보여주었지만, 굳이 그 옷이 아니면 안되었다. 날도 더운데 허탕이라니……. 쓸쓸한 마음을 무엇으로든 달래보기 위해,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주문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 표면에 물방울들이 꿈틀꿈틀 자라나더니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시원하고 진한 액체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 몸 안을 한 바퀴 도는 느낌은, 원하는 옷을 손에 넣지 못한 상실감을 달래는 데에 약간은 도움이 되었다.

‘별 수 없이 빈 손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군.’

옷 대신 뭐라도 사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공연을 잠깐 본 다음에 뭘 살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질구레한 화장품 종류도 괜찮을 것 같아. 아니면 액세서리?’

뭔가가 정말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허했다. 일단 사고 나면 어차피 아무 데서나 굴러다닐 것들이지만, 텅 빈 곳을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했다.

공원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악단은 몸을 흔들며 연주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의 입가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스윙 째즈 계열의 음악이 끝나자, 잔잔한 곡이 이어졌다. 아주 잘 한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어떤 느낌이 있었다. 곡이 끝나고 노래하던 사람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신나는 리듬이 시작되었다. 라틴 쪽의 음악일까? 조용히 지켜보던 관객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1소절이 막 끝났을 무렵, 관객들 틈에서 어떤 여자가 튀어 나왔다.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는데다가 격렬한 춤사위로 보아, 미친 여자가 틀림 없었다. 여자는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빙글빙글 돌았으며 바닥을 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가까이 오면 흠칫 하면서도 다들 즐거워하며 그녀의 춤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으르렁거리듯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가 다시 급히 몸을 틀어 악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난 안심했다. 그녀와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유난히 가늘고 긴 팔을 쭉 뻗어서 내 손목을 움켜 잡았다. 잠깐 방심했던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대 한가운데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힐이 벗겨져 내팽개쳐졌다.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주위를 춤추며 돌아다녔고, 내 손을 잡고 밀고 당기며 스텝을 밟기도 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주었다. 따라 해 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이상한 몸짓을 해 보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타고난 몸치였다. 곡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리듬도 점점 더 격해졌다. 연주에 몰입한 단원들은 이제 땀으로 옷이 다 젖어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해방되겠군.’

난 모든 걸 신께 맡기고 상황을 견디고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악단은 힘차게 주제선율의 유니즌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여자는 내 허리를 휘감아 안더니 뒤로 확 꺾었다. 여자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산발이 늘어져 뺨에 닿았다.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올렸다. 휘파람을 부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배경음악처럼 멀리서 울릴 뿐이었다. 뜨겁고 거친 숨이 느껴졌다. 그 아이의 윗입술 선이 오버랩 되었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 단짝 친구와 함께 뒹굴며 만화책을 보다가 장난으로 키스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곡은 공연의 마지막 순서였다. 아마 마지막이라서 모든 단원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주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단원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지만,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지 못한 옷 생각이며, 자질구레한 화장품이니 액세서리니 하는 생각은 이미 머리 속에서 싹 지워진 지 오래였다. 내 머리 속은 텅 비어서 새하얘져 있었다. 미친 여자는 관객들 중 몇 명, 그리고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멀쩡한 것 같았다. 미친 게 아니었나?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춤을 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집에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자는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아까는 고마웠어요. 사람들이랑 술 한 잔 하려고 그러는데, 같이 마실래요?”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는 히죽 웃었다. 말은 멀쩡히 하는데 웃음을 보니 역시 미친 여자다. 여자는 아까 벗겨진 채로 나뒹굴고 있는 내 힐을 주우며 말했다.

“같이 마셔요. 날도 더운데. 아까 그 쪽을 보고 왠지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끌어낸 거예요. 몰랐죠?”

솔직히 날 엿 먹이고 싶어서 끌어낸 것 아니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난 어정쩡하게 술자리에 끼게 되었다. 맨 바닥에 앉기를 주저하는 나를 위해 단원들 중 한 명이 종이박스를 구해다 주었고, 짧은 치마를 입은 나를 위해, 미친 여자는 자신의 거적때기 같은 외투를 빌려 주었다. 단원들과 미친 여자, 그리고 관객들 중 몇몇이 공원 구석에 동그랗게 앉았고,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타이밍도 좋으시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막걸리를 파는 행상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종소리가 그의 신호인 듯 했다. 아저씨는 호쾌한 목소리로 막걸리 몇 병을 팔고 다시 종소리를 울리며 사라졌다. 사람들은 종이컵을 높이 들어 건배했다. 나는 사람들의 유쾌한 수다를 들으면서 잔을 계속 비웠다. 달짝지근한 것이 평소 마시는 시럽 듬뿍 커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여자는 내 잔에 연거푸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이제 그녀는 눈까지 풀려 있었고 목소리는 더 커져 있었다.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우리 집 대문 앞에 웅크리고 있고, 그 미친 여자는 내 옆에 가로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있다. 여자를 깨웠다. 아무리 흔들어도 도무지 일어나질 않는다. 하지만 코를 고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칼 눈을 하고 노려본다.

“뭐 하느라 이제… 아유, 이게 뭔 냄새니?”

엄마는 코를 잡고 날 두들겨 팬다. 하지만 너무 취한 상태라 아프다는 감각도 없다. 비실거리며 침대로 가서 쓰러진다.

다음날 아침 대문밖에 나가 보니 미친 여자는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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