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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를 강탈당한 내 흙수저 스토리 (쫌 김)

ㅇㅇ(175.115) 2018.12.24 12:37:39
조회 344 추천 2 댓글 1

나는 6형제 중에 막내인 아빠라는 새끼 밑에 태어났는데 이 6형제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가 적당히 재산이 있는 편이었고


셋째 큰아배가 매우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 할아버지 돌아가시고도 할머니와 재산 늘려서 평범하게 살면 적당히 살 수 있었던 친가 가족임.


6형제 전부 집 사주거나 지어주고, 농사할 땅 사줘, 결혼 비용에 사업비용에 다 내주고 이랬으니 ㅍㅌㅊ 였겠지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서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제대로 말 못하는데 저거 다 해준거는 팩트)


거기다가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6형제가 유산을 현재 가치로 6~7억씩 받기도 했고 근데 문제는 이 6형제중에 지 견실한 사람이 2명 밖에 없었다는게 문제임.



한명은 다섯째 큰아배 최소한 자기 가족들에게 성실하고 자기 자식 두명(나한테는 사촌이지)에게


남들 하는 만큼 해주고 자식들 차나 결혼 같은거에 손 내밀어 도와줄 능력을 갖춘 사람. 그냥 간단히 말해서 매체에서 상상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느낌인 분.


현재 살아계심.



남은 한명은 내 어릴적의 기억에만 있는 셋째 큰아배(아까 언급했듯이 매우 수완 좋은 사람)인데


내 기억에도 다른 가족의 평가로도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능력있는 사람(ㅆㅅㅌㅊ)이고


6형제가의 기둥으로 할아버지 돌아가셨음에도 할머니의 재산을 증식시키면서 형제들 이거저거 다 지원한 분이었음.


근데 이 분이 가장 먼저 돌아가셨다. 폐암으로, 40대 초에.. 이게 비극이야. 날 엄청 아껴주고 학비다 지원해주시겠다고 하시던 분인데 내가 초딩때 돌아가셨다.



남은 네명? 1명은 애매한데 나머지는 걍 욕 쳐먹어도 마땅한 새끼들임.



첫째 큰아배 - 


집안이 돈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지 여자랑 놀러다니고 하다가 결혼하고도 그 버릇 못 고쳐서 바람피고 이혼하고


양도받은 재산도 유산도 다 쳐날려먹고 반지하방에서 자식들에게 제대로 대접 못 받고 사망.




둘째 큰아배 - 


흥청망청 놀고 부모 재산으로 도움받아 결혼했으나 낭비로 재산 많이 해먹음 나중에 정신은 차렸으나 


능력은 없는데 큰아배 큰어매 모두 돈에 미친인간이 되어 주변 가족들에게 기피됨 + 자식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안 시킴.


그러나 첫째 큰아배처럼 바람피지는 않았고 자식 세명중 막내딸 한명이 성실하고 똑똑해서 최소한 말년은 요양원도 병원도 갈 수 있었음.


그런데 좀 전에 썼듯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안 시킨 결과(막내 딸은 그래도 성실하고 똑똑해서 자기 앞가림함 결혼도 성실한 양반이랑 했고),


두 남자 자식들은 변변한 직업도 없고 한명만 늙은 나이에 국제결혼 어케 겨우 했고(이거도 썰 있는데 이건 딱히 재미 없을거 같고 길어지기만 할거 같네)


플러스 알파로 부모 닮아서 돈 욕심은 존나 많아가지고 둘째 큰아배 죽자마자 요양원비, 응급실비 등 다 해결한 막내딸에게 


어케든 유산 조금만 분배해줄려고 낑낑대다가 겨우 20% 가까이 되는거만 막내딸 넘기는 쓰레기들.


*둘째 큰아배는 자기한테 가장 많이 베푸는 막내딸에게 출가외인이 유산 똑같이 분배받으려 하지마라 ! 버럭하는 양반.


**먼저 돌아가신 큰어매가 큰 지갑에 돈과 통장으로 따로 모아놓은 1억여원도 원래 막내딸이 유산 조금 받을거 같아서 따로 모아놓은건데 큰아배가 돌아가셔서


상속권 넘어가자마자 두 형제가 돈과 통장만 챙겨서 지갑은 내팽겨치고 탕진함.



넷째 큰아배 - 


첫째처럼 똑같이 날라리짓 하다가 바람피고 재산 탕진하고 이혼하고 딴 살림 차림.


넷째 큰어머니가 성실하신 분이라 오히려 외가인 넷째 큰어머니가 가족의 일원으로써 제사에 참여하고 같이 지내고 친가인 넷째 큰아배는 걍 절연임. 



대망의 여섯째.


서두에 말했듯이 내 '생물학적' 아버지임. 


이 새끼는 과거에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할머니가 뒷수습을 많이 하셨단다. 


우리 어머니랑 결혼하고나서 할머니와 셋째 큰아배한테 양도 받아서 경기도권에 집도 받고 기반금도 지원 받아서 그냥 일만 하면되는데도


게으르게 놀고 노름질해서 재산을 탕진했다. 


할머니와 셋째 큰아배가 다시한번 자산을 지원해줘서 충남 가족들이 모인 지방에 집도 받고 일할때 쓸 수 있는 차량도 받았다.


게으르게 놀고 노름질해서 재산을 탕진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유산으로 또 자기 땅과 일할 때 쓸 수 있는 차량을 샀다.  


게으르게 놀고 노름질해서 재산을 탕진했다.


내가 네살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서 가족 전체(큰아배들 포함)와 절연했다. 동네사람들에게 빚을 져놓은거는 갚지도 않은채로.


참고로 연락이 끊겨서 우리 어머니 이혼도 못했다 이 새끼 뒤질때까지.



이 6형제가 이랬다.


근데 그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이 씨발 하필 내 아배였던거다.


어머니 혼자 나와 누나를 키웠는데 아까 썼듯이 동네사람들에게 빚을 져놓은거 땜에 심심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머니한테 지랄했다.



내가 초딩이 되었다.


이때 유일한 희망이 나를 예뻐하신 셋째 큰아버지였는데 유치원비도 내주셨고 앞으로의 학비도 지원해주시겠다던 이분이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개씨발 애들 다가는 보이스카웃 활동도 가입만 하고 주요활동은 돈 없어서 못 갔다. 


미니카랑 물총 같은거 유행할때 강제로 다니던 성당에 낼 헌금 매주 천원씩 내는거 안내고 어머니 몰래 모아서 그 돈으로 샀다.


존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친구들이 하는거 너무 하고 싶어서 성당 헌금 모은거랑 추가로 헌금 3천원 훔친걸로 미니카 사고 물총 훔치다가 혼난적도 있다.

(지금 생각으로보면 존나 허술하게 대놓고 헌금함에서 돈을 집어올린거였는데 신부님은 분명 내가 훔치는걸 보고 있었을거지만 아무말 하지 않은 것이다. 난 분명히 신부님과 눈이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신은 믿지 않지만 이 경험으로 나는 카톨릭을 좋게 보고 있다. 좋은 신부님과 수녀님들이었다. 죄송할 뿐이다.


*그때는 내가 억지로 다니던 시기였으므로 성당과 신을 공공연히는 아니더라도 모욕하고 그랬는데, 

지금으로서는 내가 성전에 저지른 죗값을 만약에 받는다면 달게 받을 것이다.


이 초딩시기에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하도 많이 받았는지 나에게 억압과 폭력을 행사했다.


나는 초등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돌아와야했으며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어떤 놀이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이유없이 혼나기도 하고 글씨 연습장에, 일기에 글씨 하나 삐뚤어졌다고 맞기도 하고 했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집에서 내 친구는 책장에 있는 책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여기고 책을 더 구해왔다.


근데 난 책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혼나기 싫으면 학교 끝나고는 바로 집에 귀가해야만 했기에 책 읽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던 것 뿐이었다.


이때부터 슬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인식이 희미해진거 같다.


씻기 위해 온수를 받으려면 한참 기다려야하고 씻는 장소는 바깥공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겨울의 아침에는 냉수로 닦았고 저녁에는 온수로 씻으면서도 추웠다. 이 경험 때문인지 나는 폭염의 여름날에도 온수가 아니면 샤워를 하지 못한다.


몇번 소풍에 못 갔지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소풍을 못 갔다. 



중딩이 되었다.


폭력적인 성향이 되어 이거저거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


편부모 조사할때 반에서 유일하게 손드는게 좆같았다. 우유값을 유일하게 지원받는 사람인게 좆같았다.


공부는 딱히 학원 같은거 안 다녀도 중딩 수준이어서 그랬는지 점수는 상위권이었다.


근데 반에서 1등을 해도 어머니가 나에게 억압하고 폭력을 하는건 똑같았다.


더더욱 인간관계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관계는 형성하지만 도무지 우정이나 그런 비슷한걸 느끼지 못했다.


옆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처음 접하고 감동했다. 즐거움을 나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이 게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우리집은 컴퓨터가 없어서 한동안 그 집에 놀러가서 그 집 애들과 놀아주면서 컴퓨터를 많이 했다.


다른 애들은 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난 중3때 처음 가지게 되었다. 그저그런 싼 유행도 아닌 옛 핸드폰.


매일 6시에 어머니에게 확인 전화를 받았다. 사는게 통제되는건 그대로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재산 일부를 내 아버지가 아닌 내 어머니에게 지원해주어서 아파트 작은 곳에 이사할 수 있었다.


수학여행이 제주도에서 경주로 바뀌어서 간신히 참여할 수 있었다.



고딩이 되었다.


표면적인 관계만 유지하던 내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모르는 사람은 없고 모두 적당히 놀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친하다고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과연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듣던 나였는지 어쩄는지 내게 떠오른 해결책은 폭력적이지 않은 적어도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난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지냈다. 여전히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해줄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관계 형성은 어렵지 않았고


이젠 어른스럽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겉돌았다. 인간관계에 어떤 감흥이 없으니 표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으므로.


MP3 유행이 왔다.


난 없었다.


PMP 유행이 왔다.


난 없었다.


패딩 유행이 왔다.


난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가 사고 싶었다. 이야기를 꺼낸 순간 체벌과 함께 아르바이트 절대 금지라는 소리를 들었다.


몇몇 짜가(가짜) 옷을 입은게 놀림당했던 기억이 난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셋째 큰아버지쪽 사촌형이 컴퓨터 한대를 얻어주었다.


이게 남은 시간에 아무것도 못하고 무료했던 나를 최소한 무엇인가 하고 있게 해줬다.


불량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들과도 표면적으로만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얘들과 다니면 재밌다.


내가 상상한적 없는 일들을 할때마다 너무 즐겁다. 담배를 처음 피웠는데 머리가 띵해서 두세시간 누워서 쉬었다. 근데 너무 재미있었다.


이때 내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병적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있고 술에 매우 약하다는걸 알게되었다. 근데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 되뇌어보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지만서도 그게 살아있다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인게 아닌가 싶다.


얘내랑 놀려면 평범한 학생의 범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직 고등학교 까지 통했던 적당한 교과서, 수업 공부는 야자를 안하겠다고 담당 선생과 담판했을때 도움이 되었다.


학원을 잠시 다니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그만두고 자습실(독서실)로 옮겼다. 자유감을 만끽하면서 놀았다.


어쨌든 알바는 여전히 감시망에 있기 때문에 하지 못해서 돈은 없었지만 매우 즐거웠다.


최소한 이전에는 학구열이라는게 조금은 있었지만, 나도 즐거울 수 있다는 걸 발견한 이상 학구열이 유지될리가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고등학교 학년이 오를수록 천재가 아닌 이상 직관력과 적당적당 마인드의 암기로는 순위를 유지할 수 없다.


신나게 자유로운 느낌을 즐기는 반대로 성적이 하락한다. 수학은 미적분 귀찮아서 때려쳤다. 수시 점수가 낮다.


수능을 보았다. 대충 공부 안해도 대가리로 어느정도 카바가 되는 국어 영어가 3, 쩌리과목들 2~4를 나왔다.


근데 공부를 때려친 수학이 9등급이 나왔다. 이과인데 수학이 9등급 나오면 답이 없다.


그래도 수학여행은 제주도로 돈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다녀왔다. 잠깐이지만 비행기 타는 느낌이 오묘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적당한 지잡대딩이 되었다.


이혼되지 않은 상태인 부모님이기에 학자금 대출 승인 과정도 험난했다.


단련된 표면적 인간관계 만들기 기술로 과를 넘어서 알고 지내고 같이 노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아무도 그 실체는 모르니 사람들은 나에게 발이 넓다고, 같이 노는 여자애들 많다고 부럽다고 했다.


자주 술자리를 간다. 근데 위에 썼듯 나는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술을 마시면 괴롭기만하다가 탈진해서 잠들뿐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진심으로 사람들과 놀 수가 없었다. 술 못 마시는 체질을 유전한 부모님을 원망했다.


이 대학교에서의 표면적인 인간관계는 유지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심지어 가난해서 술자리 참여도 드문드문하고 신세를 지어서 겨우했다.


친구들에게 도움이 필요할때 열심히 도와줌으로써 눈치를 받는 것을 피했다.


어머니의 유전을 외모쪽으로 받아서 여성적인 얼굴을 받은 나는 연간 한둘의 여자가 접근하기도 했다. 


어느정도 외적인 매력은 조금 있긴 했나보다, 그리고 약간 비밀스러운 느낌의 묘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당연히 내 속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심층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비밀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표면적인 인간관계만 유지했던 인간이 적극적으로 연결되는게 쉬울리도 없고 상대방의 의도 파악도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맘에 들었던 사람에게는 너무 많이 나가서, 날 맘에 들어했던 사람에게는 제대로 대응을 못해서


(착각이 아니라 후에 그 사람의 친구들이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겉보기에는 넓은 발이었던 덕택에 들을 수 있었다.)


연결되지 못했다. 날 생각해줬던 사람들은 왜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사귀지 않냐고 한다.


날 생각해줬고 내 내면을 어느정도 파악한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으면 분명히 도움이 될건데 있는 여자들과 왜 안 사귀냐고 한다.


사실은 내가 연결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시도를 하고 실패하거나 방법이 있는데도 시도를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의식주와 가끔의 친구와의 행동에 들어가는 비용도 모자라서 아무도 모르게 공백으로 견디는 일이 있는 내가 무슨 데이트고 여행이겠나.


어느 겨울 친구집에 놀러와 자다가 잠깐 급히 나갔다와야할때 친구가 대충 건넨 패딩을 잠시 빌려입었다.


씨발 너무 따뜻했다. 내가 입던 겨울용처럼 보이는 야상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살돈은 없었다. 비싸니까. 


지금까지도 적당한 인터넷 쇼핑으로 적당한 가격대의 옷만 입던 내가 무슨수로 이걸 장만하나? 밥값도 친구와 만나서 음료수 하나 사먹는것도 빠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정도 되는 기간동안 정말 어렵게 모아서 컴퓨터를 샀다. 혼자 있어도 행복했다.



2학년, 군대에 입대했다. 


최악이었다. 이런 지옥이 있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학교에 와서 겨우 누리게된 자유의 대부분을 박탈당한다.


내 임무를 성실하게 달성해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욕먹고 구타당했다. 아마도 아첨을 하지 않았고 내리갈굼하라는 지시를 안 들은게 큰 것 같다. 


내가 왜 안 들었냐면 내가 씨발 루져여도 군대라는 썩은 집단의 허울뿐인 선임이란 위치를 이용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씹쌔끼는 될 수 없었으니까.


부사관과 장교들이 성실한 놈으로 봐주었던 덕택에 아무도 안 죽이고 나도 안 죽고 제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 100일 휴가 나가기도 전에 내 휴가용 상의 훔쳐가고 1년 내내 나에게 폭행을 자행한 사수 씨발새끼는 완전범죄가 가능하다면 쳐죽여버릴것이다.


나와 입대월이 가까운 후임들의 신병시기에 나처럼 힘들지 않았으면하는 바람으로 친절하게 잘해주었기 때문인지 내 말년에는


내 선임 새끼들처럼 개지랄하지 않아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일부 한두명 제외하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말 안 듣는 애들은 


내가 잘해줬던 그리고 내게 지금 잘해주는 후임들이 실세가 되는 시기여서 알아서 고립되므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군대 선임이 남긴 기억은 인간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제대하고 복학했다.


표면적 인간관계가 군대의 영향인지 더 경직된거 제외하면 별 차이가 없었다. 이때부터 슬슬 게임이 재밌는게 많이 나왔다. 


군대의 자유 박탈에 대한 반동인지 게임도 많이하고


너무 재미없는는건 둘째치고 고압적이고 언어를 가리지 않는 교수에 대한 경험적 반감은 해당 과목에 매우 불성실하게 나를 만들었다.


높거나 아니면 아주 낮거나의 기형적 학점이 완성되었다.



졸업했다.


영문 게임을 하도 많이 한 덕분인지 별도의 공부 안했는데도 토익점수는 850이 나왔다.


학점 상태는 별로지만 토익 점수 덕택인지 그냥 적당한 사무 및 일부 현장업무하는 직장에 들어갔다.


술 못 먹는 체질으로 고생 많이했다. 표면적 관계의 한계상 대학교 들어가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게 된 것처럼,


직장을 다니게 되니 대학교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게되었다. 한가지 있다면 같은 학번의 연간 정기 모임에는 출석하기는 했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하고 집에서는 어떤 재정적 지원도 하지 않기 때문에 Bus Metro Walk를 애용했다.


월급을 받았다. 고정지출 비용을 제외하고 100만원이 남았다. 


아르바이트는 제한적으로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돈이 한번에 내 자유로 주어진건 처음이다. 


첫월급을 부모에게 바친다? 그전에 난 사치라는걸 해보고 싶었다.


컴퓨터 본체를 샀다. 그러나 돈이 남지 않아서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지만 해보고 싶었던 게임들을 해왔던것 처럼 불법으로 받아서 했다.


두번쨰 월급으로 모니터를 바꿨다. 그리고 한번에 스팀에서 게임을 40만원 어치를 샀다. 그 순간부터 정품 게임만 구매하는 게이머가 되었다.


남은 돈으로 주거지 근처에서 혼자 고기를 몇번 사먹었다. 혼밥이 꺼려지는게 무슨 말이냐 고기가 이렇게 맛있는데 먹어야지.


그 다음에는 브랜드 옷을 사입었다. 남들 입는 것처럼 입는게 너무 만족스러웠다. 


TOMS의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 이 신발을 주기적으로 구입했다. 너무 예뻤다.


지금까지의 기억의 영향인지 내적으로 꺼려졌던 패딩을 하나 샀다. 패딩은 예쁘지 않아서 안 입는다고 했지만, 이건 예쁘고 따뜻하다.


대학 친구들이 자랑했던 닥터마틴 매장을 발견하고 들뜬 마음으로 들어가서 맘에 드는걸 샀다. 이것도 예쁘다.


분명 나는 저금하고 미래를 준비해야하는데 내가 번돈으로 날 위해서 소비하는게 너무 행복하다.


나보다 연상이지만 예쁘고 동안이었던 동기가 내게 접근한다. 


친한 동료와 선배 직원들이 뒤에서 어떻게 되고 있냐며 궁금해한다. 근데 난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른다.


시간은 계속 지나고 그 예쁜 동기와 친했던 사람은 왜케 철벽이에요? 라고 장난을 던지지만 나는 모르는척한다. 


알량한 자존심이 어떻게 할줄 몰라서요라고 대답을 못하게한다.


시간이 또 지나고 뒤에서 ㅁㅁ씨는 눈이 너무 높아라고 속닥이는게 들린다.


근데 씨발 내가 할줄 모르는걸 어떻게 해, 직장에서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다.


경험상 너무 솔직해도 안되고 너무 모르는척하는것도 안되고 때에 따라 바꾸어야 하는 이건 너무 힘들다. 


이렇게 여기서도 끝났다.


열심히 일했던 탓인지 내 담당 팀장이 내게 일을 다 떠넘기고 출장지에서 술만 마시러 다니거나 내게 거래처에 거짓을 고하도록하는 일이 반복되자.


직장을 옮겼다.



이제 나는 무려 전직장 월급보다 60만원이나 더 받는다. 거칠것이 없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소비해야한다.


역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배웠다. 현상유지는 해야하니까. 


꽤 재미가 붙었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이건 이렇게 하면 더 나을거 같긴 한데 어떤가요?


배운 것을 응용하고 머리를 짜내어 이 기업의 일부분에 기여하는게 성취감을 준다.


이제 나는 다른 신입사원들의 교육 일부도 수행하고 다른 팀에 지명받아 프로젝트 지원도 가게된다.


주말에 나와서 내 부분을 미리 마무리도 한다. 다른 사람의 내 평가에 느리다는건 있을 수 없다.


내 동기들이 하는 업무도 하면서 그 윗부분의 업무도 한다. 심지어 팀장과 둘이서 아이디어 협의도 한다. 난 꽤 괜찮은 놈인거 같다.


꽤 다른 팀장님들과도 친해지고 내게 관심이 붙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이 생겼다. 팀의 여자 과장과 대리가 나를 싫어한다.


분명히 나는 그들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고 어기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보고하고 대들지도 않았다.


온갖 모욕과 비아냥을 듣기 시작한다.


여성 비율이 50%였던 직장의 여자 직원들중 몇명에게 전염된거 같다.


다른 여자직원 몇명도 속닥거리며 짜증나게 군다.


여자 과장이 이유없이 내게 스트레스를 폭발시킨다.


여자 대리는 군대에서나 겪었던 부조리를 시도하거나 내게 저지른다.


견딜 수 없다.


난생처음으로 갈굼받다가 호흡이 곤란해져서 화장실에서 토했다.


사표를 낸다.


다른 팀장이 자기 팀으로 옮겨서 일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거절한다.


다른 이사가 자기 직속으로 일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거절한다.


이 좆같은 년들이 있는 곳에서 숨쉬는게 괴롭다. 



백수가 되었다. 일하기 싫다. 


그런 씨발년 부류를 만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 가는게 너무 싫다.


못된 큰아배 몇명이 죽었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장례식장 가는게 귀찮다.



얼마전에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ㅁㅁ경찰서 ㅁㅁㅁ ㅁㅁㅁㅁ 입니다. ㅁㅁㅁ씨 아드님 맞으시죠?"


"네"


"이번에 여기서 돌아가셔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지인이 연락이 닿지 않아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문과 창문을 테이프로 바르고 연탄을 피우셨더라구요."


"그래서 조사 결과 타살의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연고된 가족이 찾아와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서를 작성해주셔야합니다."


그렇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근데 감정이 어디 하나도 휘둘리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친구가 보여준 원피스 히루루크의 죽음 장면은 눈물이 찔끔 나올만큼 슬펐는데 하나도 흔들림이 없다.


귀찮다. 우리 가족에게 좆같은것만 싸질르고 간 새끼가 죽어서도 귀찮게 한다.



조서를 쓰고 사망진단서(사체 검안서)를 병원에서 받고 사망신고를 했다.


상속인이 되었으므로 재산 조사를 한다.


이 씨발놈은 재산이 있을거라고도 생각 않지만 있어도 모두 성당에 기부할 것이다.


상속인 금융 조회 서비스 결과 이 씨발새끼의 빚이 1억이 넘는다.


가족이 6형제에 상속은 최대 4촌까지 가므로 우리 가족이 상속포기를 하더라도 다른 사촌형들의 자식에게까지 상속권이 넘어간다.


개씨발 민폐가 따로 없다. 결국 내가 한정승인(신청자로 상속권자를 한정하고, 보유 재산만큼의 부채만 받음)을 실시한다. 


확인하고 제출해야할 문서가 너무 많다. 어쩄든 냈다.



이 씨발롬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 가보고 법원에 가봤다.

(고딩때 불량아들과 놀기는 했었다고 해도 일탈을 했지 범죄적인 일은 초딩때의 물총과 헌금 절도를 빼고 지금까지 해본적이 없으니.)


한정승인 과정은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심판이 나와서 차후 절차를 또 수행해야한다. 씨발.



한정승인 초기 서류작업중 문득 떠올랐다. 


분명 성인이 되고나서의 일들은 아무에게도 불평할 수 없다.


근데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왜 이런가. 원래부터 가난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아버지라는 놈이 노름질하고 집 나가고 행패부리지만 않았어도,


어머니라는 사람이 날 그렇게 억압하고 폭력으로 제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초딩때 미니카 한대 정도는 받아서 놀 수 있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소풍도, 보이스카웃 활동도 다 할수 있고


중딩때 수학여행 못갈까봐 불안해 하지 않고, 우유 지원 받는 반에서 유일한 사람, 반에서 유일하게 편모 가정이라고 손 드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딩때 옷 물려받고 얻어입고 싸구려, 짜가만 입지 않고 남들처럼 옷 입고 다니고 적어도 고딩때 패딩하나는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교때 최소한 데이트 한번 나갈 돈은 주기적으로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브랜드 옷이라도 한두벌은 갖추었던가.

(친구들이 데이트 1회 비용으로 쓰는 액수를 들었을 때 난 겉보기로는 그저그렇다는 표정이었지만 내면으로 나를 비참하게했다.)


아버지가 이딴 놈이란 이유로 내 인생 초반부가 개씨발이라니 초반부가 개씨발이 된게 이 새끼라는걸 인식하니


중반부는 어떤지 떠오른다. 내가 노력했다면 극복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박탈감은 크다.


내 친구들은 대학 학기중에 또는 졸업 시에 자동차나 주거비 지원을 받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결혼한 몇명도 있는데 당연히 부모님 없이 얘내들이 돈을 전부 마련하지 않았다.


나도 사치부리지만 않았어도 돈도 조금은 모았을거고 자동차 정도는 돈 모아서 샀긴 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내 탓인건 사실이지만, 처음으로 내가 번 돈으로 진정 내가 원하는 곳에 소비한 그 경험을 후회하진 않는다.


아마 사치부리지 않고 절제했으면 자살했을 것이다.



후반부?


결혼 같은건 신경쓰고 있지 않다. 결혼 상대는 둘째 치고 내 가족의 재산은 없는 수준에 불과한데 어떻게 결혼을 하나.


학자금대출 갚으면서 자동자도 구매해야하고, 집도 있어야하는데.


어떻게 빠듯하게 결혼한다고 해도 이러면 내 자식이 분명히 불행하다.


내가 군대에서 내 후임들이 나처럼 좆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고 노력했듯이


나도 적어도 하나의 생명이 괴로운 일생을 겪지 않도록 해야한다. 



걍 혼자 살다 뒤지자.


빚 남겨서 민폐만 부리지말자.


장례비용과 어느정도의 금액까지만 어떻게든 저금해서 남겨두자.


뭐 누나도 가난과 어머니의 억압 아래 뒤틀려서 고졸로 일해서 벌어먹고 있다.



*지금 지옥에 있는 아버지란 씨발련아 니가 스스로 끝낸 삶 좆나게 즐기고 좋았냐.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앗아간 좆같은 새끼야 널 언젠가 내가 지옥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영원히 좆같이 해줄게.



지금 이 글을 읽는 친구들아,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인 친구들도 있겠지. 조금만 더 발버둥쳐보자.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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