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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지귀설화앱에서 작성

명워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5.17 19:54:16
조회 1751 추천 37 댓글 17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마흔에 가까운 여왕이 고작 열일곱 소년일 적 한 여름날의 이야기다.


오늘도 어김없이 꼴등으로 들어와 말짱 흙주머니 신세인 덕만은, 제가 헉헉거리며 들어오자마자 물에 씻은 외(참외)를 내민 곡사흔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째려봤다.


“뭐야?”

“그러게나 말이다.”


퉁명스런 대답과는 달리 킥킥 웃고 있는 곡사흔의 등 뒤로 진작 들어와 땀을 식히고 있던 대풍이 마찬가지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저 꼬맹이가 너 주라고 가져왔더라.”

“뭐?”


덕만은 외를 받아들고 대풍이 턱으로 가리킨 산채 입구 쪽을 돌아봤다. 덕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문 뒤로 몸을 숨긴 그림자를 보며, 덕만은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름도,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익숙한 뒷태였다.


“쟤 또 왔네.”


지난 일년동안, 종종 먹을거리나 주전부리 등을 용화향도 산채에 놓고 도망가는, 이제 갓 열살이 될까말까한 어린 꼬맹이였다. 모두 덕만을 위한 선물이었다.


“이야, 우리 덕만이 인기 좋네.”


덕만보다 고작 열보 먼저 들어온 죽방이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빙글빙글 웃었다. 맵시 좋은 얼굴을 가진 낭도들에게 흠모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은 낭문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곱상한 얼굴을 가진 덕만에게는 유독 어린 남자아이들이 많이 따라다녔으나, 그러다 혹시 제 정체가 밝혀질까 두렵던 덕만은 그런 아이들을 쫓아보내기 일수였다. 문 뒤에 숨은 어린 꼬맹이도 덕만에게 뒷덜미를 잡혀 내쫓아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꼬맹이는 포기를 모르고 다시 찾아왔다. 그런 아이의 고집때문에, 덕만은 녀석을 내쫓는 것도 지쳐버려 방관하는 쪽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잊을만하면 용화향도 산채를 찾았다.


“저 녀석도 참 끈질기다. 이 더운 여름날, 너같은 녀석한테 외 하나 주려고 낭문 밖에서 여기까지 걸어온거 아니야.”


말 물을 갈아주려 물동이를 번쩍 든 시열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시열에게 종주먹을 들이댄 덕만은 고개를 돌려 꼬맹이를 돌아봤다. 정말 더운 여름이었다. 이 더운 여름에 외 하나를 들고 낭문 밖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꼬맹이를 상상해버렸다.


“에이씨.”


덕만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꼬맹이는 다시 몸을 돌려 고개를 내밀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용화향도 낭도들 틈 사이로 부지런히 덕만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꼬맹이는 당황했다. 그때, 꼬맹이 머리에 불똥튀는 소리와 함께 꿀밤이 날아왔다.


“너 이녀석, 다신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지?”


꼬맹이가 고개를 들어보니, 덕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힉, 소리를 내며 겁을 먹은 꼬맹이가 도망칠 차례였다. 그러나 꼬맹이가 발도 떼기 전에 덕만은 꼬맹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잠깐, 잠깐만”


덕만은 꼬맹이를 돌려세워 자신과 마주보도록 하고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처음 있는 일에 꼬맹이는 놀라 동그랗게 눈을 굴렸다.


“외 잘 먹었어. 달고 맛있더라.”


덕만은 처음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따로 줄 건 없고...”


덕만은 등 뒤에서 나무 항아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임금말린거야. 뭐, 맛은 없는데, 입이 심심할땐 나쁘지 않더라구.”


예기치 않은 선물에 아이는 얼떨떨하게 나무 항아리를 받아들었다. 차마 고맙단 말도 꺼내지 못하고 연신 허리를 숙이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덕만은 어쩔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이 지금은 가진게 없네. 형이 출세하면, 더 좋은 걸로 갖다줄게.”


덕만은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맹이는 아이다운 순박한 웃음으로 덕만을 올려다봤다. 산채를 떠나면서도 꼬맹이는 몇번이나 돌아보며 고개를 숙여댔다.





영묘사로 가는 행찻길이었다. 왕이 평소에 타던 널찍한 황제연을 놔두고 굳이 사방이 트인 어가를 이용한 것은, 이번 행차가 단순히 영묘사를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임금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밝은 햇살이 비치는 맑은 날씨에, 왕은 제 앞에 엎드리는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여왕 폐하 만세!”


어느쯤에서인가, 행렬의 뒤편으로 한 젊은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왕은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평복을 입은 젊은 사내는 행렬을 뒤따라오며 연신 소리를 외쳐댔다.


“여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신국의 무궁한 영광이시로다!”

“아름다운 여왕이시여!”


존귀한 신분에 젊고 아름다운 왕을 훔쳐본 백성들이, 왕을 흠모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탓에 종종 행렬을 따라오며 만세를 외치는 일도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왕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말을 타고 뒤따르던 시위부령 알천이 말고삐를 몰아 왕의 가마 옆으로 다가왔다.


“쫓아버릴까요.”

“되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백성이 고맙지 않더냐.”


왕의 대답에 시위부령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왕이시여! 만세! 만세! 만만세!”


화창한 초봄에 고마운 불청객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듯 솟았다.




왕이 절을 하는 동안, 대웅전에는 주지와 알천을 제외하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108배를 마치고 땀이 송글이 솟은 왕의 이마를 알천이 닦아주었다.


“환궁하시겠사옵니까.”

“그래, 돌아갈때는 황제연을 타고 가야겠다. 힘들구나.”


알천이 명을 전하기 위해 먼저 나서고, 주지에게 합장인사를 한 왕이 문을 나섰다. 왕이 문턱을 넘기도 전에 달려와 어혜를 잡은 시녀들이 왕에게 신을 신겨주었다.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면서, 왕은 계단 근처에 쓰러져 자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눈에 익다 했더니, 행렬 끝에서 자신의 무병장수를 외치던 사내였다. 왕의 시선 끝이 사내에게 닿자, 승려 하나가 당황해하며 그를 깨우려 했다.


“되었습니다. 놔두세요.”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 절에 사는 이입니까.”

“며칠 전부터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이곳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 하였습니다.”


며칠 전, 영묘사로 왕이 행차하겠다는 방을 부쳤었다. 필시 그것을 보고 온 것이리라. 왕은 저벅저벅 걸어 그를 앞에 섰다. 잠깐 그를 내려다보던 왕은 승려에게 물었다.


“이 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지귀라는 자입니다.”

“지귀라...”


자신을 흠모해주는 고마운 백성의 이름을 곱씹은 왕의 등 뒤로 죽방이 걸어왔다.


“폐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때, 왕의 어깨 너머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죽방이 뭔가를 알아차리고 놀랍고 반갑단 표정을 지었다.


“어, 이 자는...!”

“아는 자입니까?”

“기억 안나십니까?”


죽방의 물음에 덕만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녀석이요. 예전에 낭도시절, 폐하께 선물을 갖다바치던 꼬맹이 있잖습니까.”


덕만은 사내를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낯이 익은 것도 같다. 이십년이 지난 세월동안, 덕만의 추억 속에는 늘 꼬맹이였던 아이는 어느새 장성한 사내가 되어있었다.


“허허... 참,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기이합니다.”


죽방의 말에 덕만은 피식 웃었다. 낭도였던 덕만이 공주가 되고, 여왕이 되었단 소식은 용화향도 산채에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는 낭도를 흠모하던 꼬마아이에서, 여왕을 흠모하는 백성으로 바뀐 것이리라. 어린 날, 외를 받아먹고 말린 능금을 내밀었던 여름날이 생각났다.


‘이 형이 지금은 가진게 없네. 형이 출세하면, 더 좋은 걸로 갖다줄게.’


덕만은 팔에 찬 금팔찌를 빼들었다. 덕만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죽방은 이어지는 덕만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덕만은 팔찌를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폐하...! 어찌 그런...!”

“이전에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생각이 나, 다행입니다.”

“하오나, 이런 귀물을 내리시다니요.”

“고작해야, 금팔찌 뿐인 것을요. 천금의 재물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덕만의 올곧은 대답에 죽방은 더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덕만은 마지막으로 지귀를 돌아보더니, 열일곱 그때처럼 미소를 짓고는 자리를 떠났다.





지귀는 믿을 수 없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남몰래 연모해왔던 임금의 흔적이 제 손안에 남아있었다.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지만, 남색가로서 품은 연모지정보다는 백성으로서 품은 연군지정이 더 떳떳하고 자랑스러웠기에, 덕만이 왕이 된 후로 연모의 마음은 더욱더 커져만 갔고, 연모의 마음 하나만으로도 제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지귀에게, 임금이 남기고 간 팔찌는 제 전부였다.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스님의 말씀을 따라 불을 피우던 중, 가슴에 품은 팔찌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귀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누구도 제 팔찌를 훔쳐갈 수 없도록 부뚜막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구석에 쌓인 부지깽이를 옆으로 밀어넣은 채 품안에 둔 팔찌를 꺼내 보았다. 정갈한 왕의 성품처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은 금팔찌 장식이었으나, 지귀에게는 무엇보다 화려하고 빛이나는 장신구였다. 그 황홀함에 정신이 팔려, 밀어놓는 부지깽이들 중 하나에 불이 옮겨붙은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만은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영묘사의 행랑채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덕만이 창건하고, 덕만이 이 곳에서 개구리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의 복병을 알아차렸다 해서 유명해진 곳이었다. 덕만의 상징과도 같은 절이었기에, 비록 행랑채 뿐이었지만 이곳에서의 화재는 덕만에게 뼈아픈 것이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화재의 흔적을 살피던 덕만의 시야에 마당 한구석에 놓여진 시신이 들어왔다. 시신을 수습하던 승려가 덕만을 발견하고 합장하며 예를 취했다.


“...지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사상자는 지귀 한명 뿐이었다. 그러나 시신을 덮은 흰 천 위에 놓인 검게 그을린 금팔찌가, 그 어떤 죽음보다도 덕만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를 위해 건네준 팔찌가 그를 죽였다는 죄책감때문이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신국의 임금에게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임금은 과거를 속죄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자였다.


덕만은 지귀를 내려다보며 합장했다.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그의 영혼만은 화마에 짓밟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덕만은 고개를 돌려 승려를 봤다.


“부디... 예를 다해 장례를 치러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덕만은 다시 지귀를 돌아봤다. 화마에 엉겨붙은 진물이 흰 천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평민에 불과한 그의 신분에 비단수의는 가당치도 않을 것이었다. 덕만은 제가 입은 푸른 겉옷을 벗어 승려에게 내밀었다.


“그가 가는 길에 입혀주십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용포는 아니었으나, 임금이 한번이라도 걸친 옷이라면 거적떼기라도 용포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모두 기함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알천이 마침내 나서 낮게 말했다.


“폐하. 신국에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자입니다. 이는 법도에...”

“알천공.”


덕만은 알천을 돌아봤다.


“망자의 길입니다. 신국의 백성이 아닌 부처의 백성이 된 이에게 신국의 법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덕만의 위엄있고 단단한 대답에 알천은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알천이 할말을 잃은 사이 덕만은 몸을 돌려 마당을 빠져나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왕이 화마를 일으키고 죽은 백성을 위해 옷을 벗어주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소문이 신국 전역에 퍼졌다. 그탓에 여왕을 흠모하던 수 명의 백성들이 신국의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분신했다. 모두가 어설프게나마 왕의 동정을 얻기 위함이었다. 소식은 결국 편전회의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처음 말을 꺼낸 것은 상대등 용춘이었다.


“하여 지금까지 방화로 인해 범인 일곱이 죽고, 관련된 사망자가 다섯이라 하옵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듯 하옵니다.”


보고를 들은 왕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입술을 깨물고 열패감을 억눌렀다. 비록 의도치 않았으나,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그녀 본인이었다. 왕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은 사량부령 비담은 서둘러 말했다.


“무지한 백성들이 일으킨 어처구니 없는 범죄입니다. 어찌 나라가 백성들의 무지까지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방화를 막는 대책으로, 생포된 방화범들을 엄벌에 처하고 멸화군을 증원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허나, 그 일로 이 상황이 일단락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무지야말로, 가장 통솔키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방화를 막지 못한 것도, 멸화군이 멸화를 실패한 것도 각 관아와 관속들의 죄입니다. 어찌 관속들의 잘못을 편전에까지 올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입니까.”

“하.”


용춘과 비담의 설전사이로,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의 진원지는 예상치 못하게도 덕만의 것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소리에는 높낮이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덕만은 다만, 인형처럼 목과 입으로 짧은 웃음소리를 여러번 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비담은 더 불안했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예부령 미생의 조심스런 물음에 덕만은 웃음을 멈췄다. 덕만은 쓸쓸해보이기도 했고, 안타까워 보이기도,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짐의... 무책임한 연민이 백성을 죽이고 삶을 빼앗았구나.”


애처로운 자책에 비담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덕만은 어탁 위에 놓은 지필묵 중 붓을 들어 종이 위로 뭔가를 내려적었다.


“상대등 용춘은 받으라.”


덕만이 내민 종이는 내관을 거쳐 용춘에게로 향했다.


“志鬼心中火 -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燒身變火神 - 몸을 태워 화귀가 되었네.
流移滄海外 -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
不見不相親 -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


이 주문을 신국 전역에 붙이고 다음과 같이 공표하세요.

짐은, 더이상의 방화를 용서치 않겠노라. 향후 방화하여 분신하는 자는 능상의 죄를 물어 역률로 다스릴 것이다.”


“황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왕은 고개를 숙인 용춘에게 한줌의 시선조차 내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이 앞을 지나는 동안은 고개를 숙이고 용안을 보지 않는 것이 신국과 황실의 법도였기에, 비담 역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떠나가는 왕의 힘겨운 뒷모습을 염려하는 것 뿐이었다.



비담은 인강전을 짚고나서야 누각에 앉아있는 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왕이 고민이 깊은 순간에야 찾는 장소라서, 알천이 그녀에게 고하는 것을 기다리는 그 순간마저, 비담은 두려웠다.


“들이세요.”


왕의 허락이 떨어지고, 알천이 비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담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은 걸어 왕의 오른편에 섰다.


“폐하...”

“...무슨 일이냐.”

“괜찮으시옵니까.”


왕은 비담의 물음에 그를 돌아봤다. 늘상 선을 넘는 사량부령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어미를 걱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얼굴에 걱정이란 꽃을 가득 피운 비담의 눈동자를 보아버려, 왕은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덕만은 고개를 돌렸다.


피식.


웃었다. 비담은 덕만을 올려봤다.


“고작해야... 금팔찌였다.

고작해야... 짧은 기도였어.

그것은 어쩌면, 지귀 그 아이가 아니라... 열일곱 나를 위해한 기도였다.

헌데... 그 팔찌가, 그 기도가... 백성 열 둘을 죽였다.”

“그는... 폐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나의 잘못이다.”


덕만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살고자 했었다. 나 역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이었지만 끝내 살고자 했어. 삶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아무리 힘겹고 아픈 것이라도... 그 삶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런 것이야.


그 열 둘의 생명도 그렇겠지. 아프고, 아픈 삶이지만... 그들조차 살고자 했었겠지. 그 생명을... 내가 앗은 것이다. 내가, 내 미련이... 그리 한 것이다.”

“그저 기도였습니다. 그저 금팔찌였습니다. 일을 그르친 것은 백성의 무지였습니다.”


자꾸만 자책하는 덕만이 미워서, 어리석어 보여서 비담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 비담을 덕만이 돌아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품었지만, 아파보였다.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나의 백성이다.”

“폐하...”

“사람의 마음, 과거의 덕만... 내게는, 왕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코자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 소중한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겐 고작,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허락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덕만은 비담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우그러뜨렸다. 흘러나오는 눈물조차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조차 왕의 것이 아니기에, 그리 하였다. 그런 덕만의 시야에 담긴 하늘은 평온했고 담담했다. 얄밉게도 그러하였다.


“하늘은... 너의 어머니 미실보다도, 나를 버린 내 아버지, 진평제보다도... 잔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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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819 남은건 자수라인데 자수라 올 10증 각인가 하십니다 ㅇㅇ(79.110) 23.06.22 142 0
388818 실장석을 자수라로 치환하고만화는 실장석에 안대씌워주면 ㅇㅇ(79.110) 23.06.22 139 0
388809 늦덕인데 [5] ㅇㅇ(175.195) 23.06.14 287 3
388802 문노 존나 간지나게 그려줫네 [1] ㅇㅇ(175.223) 23.06.10 282 1
388779 전조탈리쓰는 가이아 ㅇㅇ(139.180) 23.05.21 128 0
388773 마실핀즈개전 셋다 입장명성으로 가면 머리깨졌는데 ㅇㅇ(195.146) 23.05.17 138 0
388724 선덕 여왕님 안녕하세요.. [1] ㅇ ㅇ(222.107) 23.05.09 242 0
388723 선덕여왕 좋아요 ..... [2] ㅇ ㅇ(222.107) 23.05.09 247 0
388721 33주후에 완화빔 쏘겟네 ㅇㅇ(37.120) 23.05.09 132 0
388720 뮤지아바타빨랑주고십구나 ㅇㅇ(212.129) 23.05.09 126 0
388541 화두창팟 이위야팬거 ㅇㅇ(185.195) 23.04.04 83 0
388540 야수스증 바칼2페.스카사.광룡포함인데 ㅇㅇ(194.39) 23.04.04 72 0
388539 퍼퓸 출혈 20이 상변스증한테 따였나 ㅇㅇ(45.128) 23.04.04 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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